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정녕 자네로 결정되었는가?”
유신이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문제라기보다 조카사위가 성주 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 걱정되어 그런다.”
“왜요?”
“대야성은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역으로 백제군이 신라를 침공한다면 가장 먼저 선택할 지점이다.”
“네!”
순간 문희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갔다.
“장모님, 그리고 외숙부. 아무 심려 마십시오. 아무려면 제가 백제의 오합지졸들에게 당하겠습니까.”
유신이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품석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네, 성주 직이 처음 아닌가?”
“그렇습니다만.”
“성주라는 직위가 얼마나 막중한 자리인지 알고 있는가?”
품석이 대답 대신 고타소를 바라보았다.
“이런!”
김유신이 대답 대신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오라버니, 그러면 사위의 직을 변경해야 할까요?”
“왕의 명이니 변경되기는 힘들게다. 여하튼 사위는 성주란 직책이 무얼 의미하는지 세세하게 새기고 일거수일투족 오로지 성을 지키는 일에 만전을 기해야 하네.”
“명심하고 또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외숙부.”
명심하겠다는 품석의 얼굴을 바라보는 유신의 마음에 왠지 불안감이 솟구쳤다.
“전하,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깊은 밤 의자왕이 술상을 앞에 놓고 사택비와 마주했다.
“가까이 오시오, 부인.”“부인이라 하지도 마시어요!”
사택비의 목소리가 앙칼졌다.
“나의 진정을 정녕 모른다는 말이오?”
“진정이라니요. 은혜를 저버리고 원수로 대하는 일이 진정이란 말인가요?”
“그러면 부인은 교기를 죽이자는 말이오!”
의자왕의 목소리 역시 올라갔다.
“교기를 죽이다니요!”
답에 앞서 의자왕이 잔을 채우고 단숨에 들이켰다.
“지금 조정 상황을 모른다는 말이오?”
순간 사택비가 움찔거렸다.
“중신들이 교기를 앞세워 선왕 시절 짐을 태자 직에서 내려앉히려 했던 사람들에 대해 목숨을 취해야 한다고 성화부리고 있소. 그를 모른다 하지는 않겠지요.”
“하오면.”
“부인이 있는데 어찌 목숨을 취하겠소.”
“그래서 그들을 섬으로 추방하라 말씀하셨나요?”
“달리 방도가 없지 않소.”
사택비가 잠시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면 저와 제 아비는 어찌 처리하시렵니까?”
“내 어찌 부인을 해하겠소. 그리고 대좌평은 내게 실질적으로 장인어른 아닙니까.”
의자왕이 장인어른이란 부분에 힘을 주었다.“이리 오시오, 부인.”
의자왕이 손을 뻗어 간절히 요구하자 사택비가 못이기는 체하며 다가앉았다.
“따라주구려.”
잠시 머뭇거리던 사택비가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의자왕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사택비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부인도 한잔하구려, 마음도 편치 않을 터인데.”
사택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의자왕이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부인, 일단 쭉 듭시다.”
의자왕이 한손으로는 잔을 들어 사택비의 잔에 부딪치고 다른 한손으로는 어깨를 감쌌다.
잠시 의자왕을 살피던 사택비 역시 한 번에 잔을 비워냈다.
김유신 사위, 직책 변경…하얗게 질린 문희
대좌평 일본 추방…사택비의 좌절
“제 아비는 어찌 처리하시렵니까?”“왜국(일본)에 사신으로 보낼 참이오.”
“왜국에, 사신으로요!”
사택비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의자왕을 밀쳐냈다.
“왜 그러는 게요?”“결국 추방 아닌지요.”
“허허, 이 사람이. 왜 아이처럼 이러요.”
“아이처럼이라니요?”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지 않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보시오, 부인. 이제 백제는 곧 신라와 큰 전쟁을 벌일 참이오. 그렇게 되면 사택지적 대좌평은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에 참여해야 하오. 그런 경우라면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고. 여하튼 어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소.”
사택비가 그 말을 헤아리는 듯 동그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꼭 그런 의도는 아니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할 수 없으니 새옹지마라 하지 않았소.”
“하오면 저는?”
의자왕이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사택비를 바라보았다.
“결국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로군요.”
“그저 부인에게 미안할 따름이오. 그러나 부인과 나 사이에 변한 것은 하나도 없소. 하여 이미 궁 가까이에 부인의 거처를 마련하라 일러두었소. 지금처럼 언제라도 부인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말이오. 그러니 가까이 오시오.”
“여하한 일이 있어도 저를 버리시면 아니 되옵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소. 여하튼 부인이 내 곁에 있는 동안 왕비의 자리는 비워두고 부인에게 오로지할 터요.”
사택비가 바짝 다가앉자 형용하기 힘든 냄새가 의자왕의 가슴을 헤집었다.
“부인, 인생사 어찌 변할지 모르는 일이니 우리 길게 봅시다.”
의자왕이 다가앉은 사택비의 머리카락에 잠시 코를 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부인, 부인의 매력은 무엇이오?”
사택비가 답은 하지 않고 마치 의자왕의 가슴속으로 들어가겠다는 듯 더욱 밀착했다.
“거참, 이상한 일이오.”“뭐가요?”
사택비의 손이 의자왕의 볼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부인을 만난 이후로 다른 여인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말이오.”“정말이옵니까?”
“그걸 몰라서 묻소.”
사택비와 처음 관계를 가진 이후 여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그 전까지 여자는 순간적 쾌락과 배설과 종족번식에 필요한 존재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사택비는 단순히 그런 차원의 여인이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으로 여겨졌다.
물론 그리된 데는 육체적인 부분이 크게 작용했다. 육체적 관계를 가지고 나면 마치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자신의 반쪽을 찾은 듯한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그런 연유로 시도 때도 없이 갈구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격정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온몸에서 활력이 솟았다.
한순간 의자왕의 손이 사택비의 옷을 제치고 가슴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갔다.
흡사 의자왕의 행동에 보조를 맞춘다는 듯 볼에서 놀던 사택비의 손도 의자왕의 옷을 파고들어 가슴으로 향했다.
그를 살피던 의자왕이 손에 힘을 주자 반사적으로 사택비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부인, 내 떠나면 어찌 지낼 참이오?”
“언제 떠나시려는지요?”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