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적장이 유신의 칼날이 목에 닿기 바로 전에 그 경황 중에도 위급을 알아차렸는지, 아니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어 유신의 칼이 적장의 목을 비껴 어깨에서 겨드랑이를 깊게 베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적장이 그 일격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를 살피며 곁에서 알몸으로 심하게 떨고 있는 여인을 살펴보았다.
완전히 혼이 빠져나간 듯 보였다.
여인을 무시하고 유신이 고꾸라진 적장의 목에 칼을 휘둘렀다.
이어 재차에 거친 칼질로 적장의 수급을 베어 한손으로 들고 바로 밖으로 나섰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신속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시선에 들어오자 수급을 높이 치켜들었다.
“고구려 장수의 수급이 이 손에 있다. 신라 병사들이여,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죽이도록 하라!”
고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라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사에 불을 지르고 술에 취해 비몽사몽에 빠져있는 고구려 군사들을 무 자르듯 베어 나갔다.
동시에 한 병사가 신라 진영을 향해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유신을 위시한 신라 병사들의 기습공격에 대비할 겨를이 없었던 고구려 진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게다가 신라 본진이 돌진해오자 전의마저 상실한 고구려 군사들이 퇴로도 없는 진영 안에서 갈팡질팡했다.
신라군은 기세를 몰아 바로 성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미 모든 정황을 감지한 고구려 군은 싸울 기력도 없는 듯 칼도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선선히 항복하였다.
신라군은 첫 패전을 완전히 설욕하였음은 물론 고구려 군사 오천여 명을 죽이고 일천여 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 전투를 계기로 확고한 위상을 확립해나가던 중에 아버지 김서현과 최대 후원 세력이었던 김용춘이 이어 이승을 떠났다.
그러자 희한한 일이, 유신의 역할이 급격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변해버린 자신의 처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늘 뒤에서 힘이 되어주던 아버지와 김용춘이 이승을 떠났을 뿐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빈자리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더욱 더 자신과 나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으나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막상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나 결국에는 슬그머니 따돌림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니 자연 겉돌게 되고 그저 들러리서는 역할에 만족해야했다.
특히 선덕여왕이 보위에 앉자 더욱 심화되었다.
선덕여왕은 즉위 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국가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매사 종교의식과 외세 특히 당나라에 의존하는 경향이 매우 심했다.
그러다보니 번번이 당나라에 조공을 바쳐야 했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신하국으로 전락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게다가 백성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고 불사에만 전념했다.
그를 마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 작심하고 선덕여왕을 알현했다.
그 자리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군사력을 강화해야 함을 역설했다.
아울러 국경 근방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해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선덕여왕은 김유신의 간곡한 요구를 거절하였고, 그런 연유로 시름에 겨워 홀로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집 가까이 이르자 대문 앞에서 유신의 아내 유모가 서성이고 있었다.
그를 확인하고 취한 몸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움직이자 유모 역시 황급히 다가와 유신의 한쪽 팔을 잡았다.
성장하는 고구려·백제…선덕여왕 알현
당나라 신하국으로 전락…신라 미래는?
“어인 일로 이리 취하셨어요?”
유모의 음성이 살짝 떨렸다.
“왜 아직도 자지 않고 나와 있소?”
“왜라니요. 귀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오시지 않으니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랬구려.”
부인을 바라보는 유신의 얼굴로 공허한 미소가 흘렀다.
“무슨 일 있었나요?”“일은 무슨 일이 있겠소. 그저 부인에게 면목 없구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느닷없이 면목이 없다니요. 여하튼 어서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아니오, 부인. 우리 정원에서 저 달 구경 좀 하다 들어갑시다.”
“달구경이오!”
“달이 얼마나 밝고 환한지 모른다오.”
유모가 정자로 향하는 유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없이 따랐다.
“뭐 좀 내올까요?”
정자에 자리 잡자 유신의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럴 필요 없소. 그냥 이대로 달구경이나 합시다.”
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부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순간 잠시 주춤하던 유모가 유신의 무릎 위로 자연스럽게 넘어졌다.
자세를 바로하려는 부인을 제지하고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왜 이러세요, 서방님!”
“부인이 너무 좋소. 그리고 미안하고.”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 한참 물이 올라 농익은 아내의 체취를 맡으려는 듯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부인이 자세를 바루고는 유신을 사랑스러운 듯 감쌌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 장군 마음이 온전하시겠어요.”
한동안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그대로 있던 유모가 자세를 바로 했다.
“부인, 저 달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내 자신 처량하다는 생각이 듭디다.”
술기운 혹은 달빛 탓인지 유신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내 나이 벌써 마흔 여덟인데 아직도 반달은커녕 초승달만도 못하니.”
유모가 아무 말 없이 유신의 손을 어루만졌다.
“휴우!”
유신이 술기운을 쫓아내기라도 하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서방님, 제가 민망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이 나이 되도록 아직 아들 하나 없으니.”
제 11대 풍월주(화랑도의 수장)를 지낸 진골 하종공의 딸로 언니인 영모가 김유신과의 사이에 딸 넷을 낳고 사망하자 바로 유신의 아내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 때까지 아들은커녕 자식 하나 낳지 못하고 있었다.
“아들을 안겨드렸어야 하는데.”
유신이 가만히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요?”“부인, 아시오?”
“무엇을 말인가요?”
“기분이 언짢을 때 그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말이오.”
아내가 그 방법을 가르쳐달라는 듯 유신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달빛에 비친 아내의 얼굴이 창백하리만치 곱게 느껴졌다. 순간 유신이 범처럼 아내를 덮쳤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아니오, 부인. 저 달에게 간절히 기원하며 여기서 일을 벌입시다.”
잠시 말을 되새긴 부인이 유신의 목을 휘감았다. 하늘에서는 보름달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충과 효
순행을 마치고 돌아온 바로 그 날 잠자리에 들었던 무왕이 생을 마감하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마냥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은 아버지의 모습을 살핀 효가 국상을 서둘렀다.
급히 국상을 준비하는 중에 성충을 비롯한 몇몇 대신들이 효를 찾아 급히 보위에 오를 것을 주청했다.
그러나 아버지 상중인데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상을 마치고 보위에 오르겠노라 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