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최순실 게이트’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주말에 있었던 민중총궐기서 박 대통령 퇴진론은 절정에 달했다. 시위대는 청와대 진입을 시도했다. 자칫 청와대 앞까지 갈 기세였다. 이 때문에 최악의 경우 박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다는 말까지 돌고 있다. 허무맹랑한 얘기 같다. 하지만 최순실 게이트로 불거진 현 상황을 보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얘기도 아니다.
서울 광화문 청계광장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를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 현수막에는 ‘박근혜 대통령님 힘내세요. 계엄령을 선포해서 북한과 내통하는 자들을 법대로 처리해 주십시오. 이 나라는 북한이 아닙니다. 한국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 현수막은 모 극우 정당이 설치한 현수막이다.
박정희 4차례 선포
박 대통령 지지율이 헌정 사상 최저치(5%)로 폭락하고 보수 진영도 등을 돌렸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 매주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들 집회 참가자 수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광화문에 모인 집회 참가자 수는 4만여명으로 추산된다. 지난 5일에는 20만여명이 광화문에 모인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들은 시위대가 청와대 앞까지 가는 걸 막기 위해 종로 일대에 차벽을 설치했다. 하지만 이런 차벽도 수십만 명에 달하는 시위대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시위대가 청와대 앞까지 가서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면 어떻게 될까. 박 대통령으로서는 국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며, 국제적 망신도 사게 된다. 현재도 외신들은 최순실 게이트를 비중 있게 보도하면서 박 대통령은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마냥 우스갯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현 시국이 엄중한 게 사실이다. 한때 우리나라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이다라는 말 역시 우스갯소리로 치부됐었다. 그런데 최순실 게이트로 최씨가 실제 우리나라 권력서열 1위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계엄령 선포 권한은 전적으로 대통령에게 있다. 계엄령은 국가 비상 시 국가 안녕과 공공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헌법 일부 효력을 일시 중지하고 군사권을 발동해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긴급권의 하나로 대통령(최고 통치권자)의 고유 권한이다.
최순실 게이트 이후 매주 수십만 명의 시민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들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청와대 앞에 가기 위해 때로는 과격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이런 시위는 집회 참가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극에 달하는 경향이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군중 심리가 무서운 거다. 누가 불씨만 당기면 불길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며 “아무리 차벽으로 청와대 가는 길목을 막는다고 한들 수십만명이나 되는 집회 참가자들은 경찰들도 통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정치적 혼란을 이유로 7 차례 계엄령을 선포한 흑역사가 있다.
광화문 광장에 탱크 출몰설 돌아
반감을 품은 극우파도 세력 집결
4·19혁명(1960.4.19)은 제1공화국 이승만정권 시대에 부정부패, 부정선거에 의한 장기집권 시도가 진행되자,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서울의 치안이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자 이승만 대통령은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출동시켜 학생 시위를 저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이승만정권의 부도덕성을 인정하고 학생에게 발포하지 않았다. 결국 학생들이 계엄군 탱크를 장악했다. 그 결과 계엄령은 효력을 잃고, 정권은 곧 붕괴되고 말았다.
5·16군사정변(1961.5.16)은 4·19혁명 이후 장면정권이 들어섰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자,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새벽 군부는 서울과 언론기관을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오전 9시 정각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장면정권을 인수했다. 당시 내각책임제 하의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 내각이 이미 무기력해졌음을 감지하고 군사쿠데타를 인정했다. 결국 군사정변은 성공하고 모든 국내 치안이 계엄군에 의해 유지됐다.
6·3사태(1964.6.3)는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과의 국교 재개를 위한 ‘한일회담’이 진행 중일 때 학생과 시민들의 반대 시위로 발생했다. 6월3일 대규모 학생시위가 이루어지자, 오후 8시를 기해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4개 사단 병력이 투입되어 학생 시위을 진압했다.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언론 검열, 집회금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 등이 이루어졌다.
10월 유신(1972.10.17)은 박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한국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날 저녁 정각 7시를 기해 계엄령이 선포됐다. 4개항의 비상조치를 포함한 특별선언을 발표해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헌법 일부 중지, 비상국무회의 작동을 선포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1979.10.26)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을 시해하면서 발생했다. 이 때도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 체제로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고 있을 때,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1979.12.12)일으켰다.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해 하극상의 도전으로 순식간에 군권과 정권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12월13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최규하 정부를 접수해 새로운 군사독재 시대를 열었다.
5·18 민주화운동(1980.5.18)으로도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했다. 유신독재체제에 이은 신군부 세력의 탄압정치는 국민의 불만을 고조시키고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학생 시위가 이어졌다. 1980년 5월15일 서울역 시민 집회가 대규모로 진행된 이후, 신군부는 더 이상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5월 17일 드디어 계엄령을 선포했다.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5월18일 광주 전남대학 학생들이 등교가 저지되자 계엄령과 휴교령 해제를 외치며 시위를 했다. 그러나 계엄군은 공수특전단과 탱크 등을 동원, 잔인하게 진압했다.
역대 정권의 계엄령은 국가적 환란 때문에 발령되기보다는 내부 정치적 혼란으로 야기된 국민의 저항을 제압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발동되는 경우가 많았다.
딸도 아버지처럼?
역사학자들은 “이 같은 역사를 돌이켜볼 때 계엄령의 잦은 발동은 명예롭지 못한 역사이며 민주주의에 상처를 주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만 보더라도 그가 재임하는 기간 동안에 무려 4차례나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박 대통령 역시도 계엄령 선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