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스러진 달 (최종회) 저격

  • 황천우 작가 shs@ilyosisa.co.kr
  • 등록 2016.09.09 18:05:47
  • 호수 10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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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 가슴에 총을 쏘다

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네 놈이 어떤 행동을 하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네가 살고 조국과 가족을 살릴지 아니면 네놈도 죽고 네 주변 모두를 몰살시킬지는 전적으로 네놈이 판단할 일이다. 알겠는가!”

“저도 살고 모두 살릴 겁니다. 그러니 제발‥‥‥.”

석원의 애걸하는 모습을 살피자 갑자기 한숨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권총을 석원에게 내밀었다.

“이 총 받을 수 있겠나!”


순간 석원이 고개 들어 권총과 무표정한 동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한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반드시, 반드시 거사를 성공시키겠습니다.”

“이따위 정신 상태로 네놈이 무슨 수로 거사를 성공시키겠다는 이야기냐. 그저 계집 구멍이나 밝히는 놈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동일의 강경한 반응에 석원이 다시 고개 숙여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나는 이쯤에서 내일 거사를 취소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물론 네놈은 물론이거니와 네놈의 처자식 그리고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이 계획에 참여했던 기미코 등 모든 사람들까지 몰살을 면치 못하겠지만.”

“지도원 동무, 아니 나카소네 상. 정말입니다. 정말로 이 목숨 바쳐서라도 거사를 성공할 터이니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석원이 급기야 이마를 바닥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네 놈이 이 거사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게냐? 또 너를 위해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북조선에서 들인 공이 어느 정도인지 아느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나카소네 상. 그러니 제발.”

“아는 놈이 이따위로밖에 못해! 북조선이 네 놈 장난감인 줄 아는 게냐!”

“아닙니다, 나카소네 상. 하라시는 대로 모두 하겠습니다.”

“정녕 그렇다면 각서를 쓰도록 해라.”

동일이 목소리를 낮추자 석원이 다시 고개 들었다.

“네 뭐든지 다하겠습니다.”

동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석원을 테이블 앞에 앉도록 했다.

이어 자신이 주었던 노트와 펜을 가지고 오게 하여 각서를 쓰도록 했다.

물론 거사를 성공시키지 못할 시 기미코를 포함하여 가족 등 모두의 목숨을 북조선의 처사에 기꺼이 일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오라 지시했다.

가져온 물을 병째로 마신 동일이 석원에게 건넸다.


“마셔!”

석원이 강압적인 분위기에 밀려 마지못해 한다는 듯이 물을 마셨다.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듣도록 해!”

동일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석원에게 지금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그에게 주입시켰던 이야기를 깊게 각인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도 불안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TV를 켰다.


막상 TV를 켰으나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이 머리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순간 그 현상을 느끼고는 그 사유를 생각해보았다.

물론 크든 작든 어떤 일을 시도하게 되면 알게 모르게 불안감은 발생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일의 예측 가능성을 타진하며 불안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은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결의에 찬 저격 계획…음모에 빠져
울려 퍼진 총성…붉게 물든 국립극장

전혀 불안해 할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미 완벽하게 시나리오를 작성하였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그리 진행되게 되어 있는데 솟구치는 불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오히려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오늘 벌어질 일을 그려보았다.

석원이 다섯 발의 실탄을 장착한 권총을 바지 주머니 속에 넣고 택시를 이용하여 행사장에 도착한다.

그의 도착과 맞추어 이강철이 나서서 초청장을 확인하고 비표를 교환해주어 자연스럽게 행사장 입장을 유도한다.

아울러 문석원의 조바심을 자극하면서 행사장 내 가장 먼 거리에 좌석을 배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어 행사가 진행되는 순간 발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권총의 공이치기를 뒤로 후퇴하도록 했다.

그리고 강철이 문석원의 지근거리에 앉아 있다 문석원이 첫 발을 발사하는 낌새가 일어나면 그 순간보다 먼저 천장으로 실탄을 발사해서 혹시나 모를 일에 대해 사전에 조처 취하도록 했다.

아울러 김경수는 문석원의 시선에서 벗어나 박정희 대통령 바로 뒤에 위치하여 강철과 보조를 맞추기로 하였다.

사전 각본에 의하면 여하한 경우라도 박정희 대통령이 위해를 입는 일은 불가능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의 안위도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전례에서 벗어나 박 대통령의 연설대를 연단 정면 한복판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쳐 설치하도록 했다.

하여 문석원이 사전 지침에 따라 행동한다면 행사장에 참석한 그 누구도 위해를 입을 수 없었다.

내친 김에 일이 끝난 후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점검해보았다.

문석원은 죽이지 않고 산채로 생포하기로 되어 있다.

만약 실패할 경우 문석원은 지침 받은 대로 일본인으로, 또 단독작품으로 몰아갈 일이었다.

권총 역시 일본의 한 파출소에서 탈취하여 입국 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숨겨 들어왔다 고백할 것이다.

그리고 이외의 사항에는 강력하게 묵비권을 행사할 것이다.

그러나 이내 그의 정체가 우리 측 조사에 의해 밝혀지고 아베 고타로와 그의 연인 기미코 또 조총련 정치부장인 이호룡의 행적까지 드러나고 그 이외의 일은 영원히 미제로 남을 터다.

모든 과정을 꼼꼼하게 살펴보았으나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행사가 거행되는 국립극장 쪽을 바라보았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바로 가까이 있는 듯했다.

잠시 그곳을 주시하다 시계를 바라보았다.

막 열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TV에 주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애국가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심호흡했다.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마음을 다잡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상태에서 하늘을 바라보기를 잠시,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대통령이 연설대로 자리를 옮겨 연설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소리를 들으며 화면에 집중했다. 흐릿한 화면에 행사장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만족하리만큼 행사장 배치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의 목소리는 그저 귓가에서 윙윙대고 있었다.

방금 전처럼 머리로 입력되지 않았다.

잠시 후 갑자기 화면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장 모습이 잡혔다.

박 대통령이 연설대 뒤로 몸을 숨기고 연단에 있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엉덩이를 천장을 향해 들고 있었다.

순간 연단 뒤에 있던 경호실장이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나섰다.

그 옆을 바라보았다.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육영수 여사께서 초연한 자세를 유지하며 고개를 약간 돌려 앞을 주시했다.

마치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확인하겠다는 듯이.

바로 그때 동일의 입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안 돼!”

<끝>

<지금까지 ‘스러진 달’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호부터 ‘삼국비사’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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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