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기업의 비윤리적 행태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구설에 오를 때만 바짝 몸을 낮출 뿐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이전의 그릇된 행동을 반복하는 게 예사. 제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진심을 담은 사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몇몇 기업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단순 해프닝으로 포장하기까지 한다. 갑질에 연루된 기업들의 대응 방식이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 쯤으로 비춰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양유업 사태’가 촉발된 이후 기업의 ‘갑질’은 사회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대리점주에게 폭언과 함께 제품을 강매했던 이 사건은 ‘갑의 횡포’에 경종을 울린 사례로 손꼽힌다. 그러나 남양유업은 작은 조각에 불과했다. 관행처럼 이어져 온 갑질 행태가 곳곳에 만연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곳곳 만연한
갑질 행태
흥미로운 점은 갑질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시작과 끝은 항상 같은 패턴이라는 점이다. 을에 대한 갑의 횡포가 들춰지고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 성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진심을 담은 듯한 표정으로 사과를 반복한다.
국내 대표 장수기업인 몽고식품은 지난해 12월 2세 경영인인 김만식 전 명예회장의 직원 폭행 사건으로 위기를 맞았다. 김 전 회장이 운전기사를 상습적으로 폭행해왔다는 사실이 폭로되자 분노한 소비자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김 전 회장의 경솔한 행동은 111년 역사의 몽고식품에 오점을 남겼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몽고식품 불매 운동이 시작됐고 사건의 전후 관계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급속히 펴졌다. 몽고식품은 곧바로 사태 진화에 나섰지만 불붙은 반기업 정서는 생각만큼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미스터피자의 모기업인 MPK(미스터피자코리아)의 정우현 회장 역시 갑질 논란을 키운 장본인이다. 정 회장은 지난 4월, 한 건물 식당에서 자신이 안에 있는데도 현관문을 잠갔다며 경비원의 뺨을 두 차례 때린 혐의를 받고 있다. 피해자는 감금과 상해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폭행 혐의만 적용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정 회장의 경비원 폭행 논란에 앞서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은 운전기사에게 갑질을 했던 정황이 포착돼 고개를 숙였다. 지난 3월 이해욱 부회장의 운전기사를 지냈다고 밝힌 피해자는 “주행을 하다 사이드 미러를 접으라고 했다. 룸미러도 접으라고 했는데 자기와 눈이 마주치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라며 이 부회장의 이해할 수 없는 행실을 폭로했다. 뒤늦게나마 이 부회장은 거듭 사과했지만 냉소적인 시선은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일단 사과만 하고…부실한 예방책
‘또 다시’ 거듭되는 비윤리적 행태
통념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회사 차원에서 갑질을 종용했던 사례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대구·경북지역의 향토 주류업체인 금복주는 지난 1월 ‘결혼을 이유로’ 여직원에게 퇴사를 종용했다가 구설에 휘말렸다. 해당 여직원은 지난해 회사 역사상 최초 여성 주임으로 승진하는 등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결혼 소식을 알리자 퇴사를 강요당했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18일, 홈플러스·이마트·롯데마트 등 대형마트 3사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사상 최대 규모인 238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공정위는 대형마트 3사가 종업원을 불법 파견 받고, 팔리지 않는 물건을 부당 반품하는 등 납품업자에게 횡포를 부렸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부당한 납품대금 감액, 부당한 인건비 전가, 서면계약서 지연 교부 등을 통해 납품업체에 피해를 줬다고 전했다.
납품 업체에 판촉사원 인건비를 전가하고도 시정 조치를 취하지 않은 홈플러스는 검찰에 고발당했다. 공정위의 제재 조치는 대규모유통업법 시행 이후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큰 규모이자 대형마트의 기본장려금 금지와 부당 반품 위반 행위를 적발·제재한 첫 사례로 남았다.
공정위의 결정이 내려지자 이마트 측은 “공정위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과거 지적받은 사항들에 대해 이미 시정조치를 완료한 상황으로 향후로도 이와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시스템 정비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했다.
매번 같은 패턴
진정성은 글쎄
갑질을 자행한 정황이 드러나면 기업은 이미지 추락을 피할 수 없다. 다만 탄탄한 실적과 확고한 사업 영역을 갖춘 기업에게는 비윤리적 행태가 별다른 흠집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합법적으로 죄를 감면받기도 한다.
공정위 제1소회의는 최근 남양유업에 대한 과징금을 재산정해 5억원으로 줄였다. 이는 기존에 부과한 과징금의 1/25 수준에 불과하다. 서울고법은 지난해 1월 남양유업이 대리점에 유통기한 임박제품 등을 강제 할당한 시기, 수량 등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전체 매출을 기준으로 부과한 과징금 119억원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그해 6월 대법원에선 확정됐다.
앞서 공정위는 2007년부터 2013년 5월까지 전국 1849개 대리점에 유통기한이 끝나가는 제품이나 대리점이 주문하지 않은 제품을 강제로 공급하는 이른바 ‘밀어내기’ 혐의로 남양유업에 124억64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한 바 있다. ‘구입 강제 행위’로 부과된 단일 과징금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공정위는 남양유업이 제기한 과징금 취소소송에서 결국 패소했고 과징금 액수는 약 3년 만에 큰 폭으로 축소됐다.
대국민 사과에 이어 600억원의 상생 기금을 마련해 대리점주를 지원하고 피해대리점 협의회에 40억원의 위로금 지급을 약속했던 남양유업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MPK 정우현 회장의 ‘안하무인’ 행동은 분명 개인의 윤리 문제였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미스터피자 점주들이었다.
대책마련 미비
시간이 해결?
미스터피자 불매운동으로 가맹점주들이 생계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가맹점주들은 MPK 본사 앞에서 회장을 대신해 사과에 나서기도 했다. 회장의 갑질로 인한 불매운동이 정작 똑같은 ‘을’ 입장인 가맹점주들에게 피해를 양산한 셈이다.
갑질 논란에 휩싸인 기업 혹은 해당 회사의 오너일가는 당장의 비난을 피하고자 미봉책을 꺼내들길 주저하지 않는다. 구설에 휘말려도 조금만 기다리면 잠잠해진다는 생각이 은연 중에 깔려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갑질을 자행한 상당수 고위층 인사들은 피해자를 직접 만나 사과의 뜻을 전하지 않거나 공식석상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주저했다. 심지어 노동부가 실태조사에 들어가자 폭행을 부인하기까지 했다.
수행기사 폭행으로 구설수에 오른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은 주주총회에서 간단한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했지만 구체적인 대책에 대해선 함구했다. 정일선 현대비엔지스틸 사장은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문을 올렸을 뿐이었다. MPK 정우현 회장은 맨 처음에는 폭행을 당한 피해자에게 회사 직원들을 보내 사과를 했으나 피해자는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다고 했다.
몽고식품의 김 전 회장은 대국민 사과까지 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하고자 했지만 진정성 문제가 불거졌다. 조사가 시작되고 이 사건이 크게 부각되자 김 전 회장에게서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는 다른 직원들까지 나타나 회장님 폭행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물론 갑질 논란에 휘말린 상당수 기업은 남양유업과 미스터피자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단기적인 악영향을 피하기 힘들다. 남양유업의 영업이익은 2012년 474억3000만원에서 갑질 파문 후인 2013년 -220억원, 2014년 -261억2000만원으로 적자 전환됐다. 이른바 ‘남양유업 방지법’으로 알려진 ‘대리점 거래 공정화법’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금방 잠잠해지는 논란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
정우현 회장이 최대 주주로 있는 MPK의 주가는 3000원 근방에서 등락을 거듭했지만 사건 발생 후 계속 하락해 52주만에 신저가 경신을 눈앞에 두기도 했다. 대형마트 3사의 최근 5년 간 갑질 적발 과징금은 230억원에 달한다.
다만 갑질 논란이 매번 기업의 막대한 피해로 연결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해당기업들이 입는 피해는 생각만큼 크지 않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기업의 윤리 경영 여부는 투자자들이 평가하는 기업 가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탓이다. 오너일가에 바라는 윤리적 기대치가 극히 낮기 때문에 갑질 파문이 불거져도 회사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 않는다는 자조적인 해석과 비슷한 맥락이다.
실제로 미스터피자 갑질 사건 역시 사건 발생 사흘이 지난 시점부터 주가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통상적인 투자자들의 매매 가능성까지 감안하면 일시적인 주가 하락을 무작정 갑질 논란과 연결 짓기에도 무리가 따른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투자자들은 재무 실적이나 사업 확장을 투자 판단에 기준점으로 잡는다”며 “오너의 개인적인 행태가 주가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미미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소비자들의 갑질 기업에 대한 거부감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다는 점도 해당 기업들에게는 일종의 호재다. 갑질 사건이 터지면 초반에 들끓는 여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2013년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던 남양유업의 실적은 최근 업계 최고치까지 회복했다. 지난해 연결기준 영업이익은 201억3000만원으로 흑자 전환했으며 매출액은 전년에 비해 5.5% 증가한 1조2150억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사실상 갑질 파문에서 벗어난 셈이다.
결국 계속되는 갑질 논란과 별다른 해결책을 기대하기 힘든 작금의 상황은 기업의 윤리의식 개선의 필요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일단 갑질의 주체들에게 가해지는 형벌이 지나치게 약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운전기사 폭행으로 논란이 있었던 몽고식품 김만식 전 회장에게 700만원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을 비롯해 ‘면벽근무’로 사회적 물의를 빚었던 두산모트롤, ‘초특급 갑질 매뉴얼’로 유명세를 달리한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사장은 아직 처벌되지 않았다. 2014년 ‘땅콩 회항’ 사건을 일으킨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도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윤리의식 부재
반복되는 논란
서민민생대책위원회 관계자는 “끊이지 않는 갑질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제도적 형벌 강화와 함께 시민과 소비자의 연대적 감시가 뒷받침돼야 한다”며 “갑질이 만연하지 않도록 사회적 장치 마련에 관심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