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지금까지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왔다. 역사의 중요성,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또 미래를 올바르게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에서 ‘팩션’이란 장르를 만들어냈다. 팩트와 픽션, 즉 사실과 소설을 혼합하여 교육과 흥미의 일거양득을 노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은 사건을 들추어냈다. 필자는 그 사건을 현대사 최고의 미스터리라 칭함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바로 1974년 광복절 행사 중 발생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다.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이리 쉽게 파출소에서 권총을 한 자루도 아닌 두 자루씩이나 훔쳐낼 수 있습니까?”
동일이 손에 들려 있는 권총을 미리 준비해간 가방에 넣으면서 미소를 건넸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일도 아닙니다.”
“하긴, 그러니까 백주에 도쿄 한복판에서 윤대중도 그렇게 감쪽같이 납치할 수 있었겠지요.”
“허허, 차 사장께서 너무 비약하십니다.”
“그러면 아닙니까? 윤대중을 납치한 일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의 작품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특히 정 팀장께서…”
주선이 은근히 목소리를 높이자 동일이 방금 나온 파출소를 주시했다.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니라고도 말씀 못 드립니다.”
동일이 말을 마치고 야릇한 미소를 짓자 주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번 잡아보게.”
이호룡이 문석원을 이끌고 조총련 오사카 지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 건물의 지하실로 들어가 품에서 권총을 꺼내 건넸다.
권총을 바라보는 석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어 호룡의 손에서 낚아채듯이 권총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좋은가?”
석원이 답하지 않고 권총의 이모저모를 살피다 제대로 잡고 정면을 응시하며 권총을 들었다.
곧바로 방아쇠를 당겨보았다. 철컥 하는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석원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호룡이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기분이 어떤가?”
“촉감도 좋고 또…”
“말해보게.”
“느낌이 좋습니다.”
“무슨 느낌?”
“일에 대한 성공 여부 말입니다.”
힘주어 답하는 석원은 일전에 나약한 모습을 보였던 문석원이 아니었다.
아니 권총의 존재가 한 어설픈 젊은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듯 했다.
호룡이 다시 석원으로부터 권총을 건네받았다.
“권총 쏴본 적 없지.”
“물론 없습니다만, 그냥 장전하고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야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룰이 있는 거야.”
이어 호룡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권총을 들어 전방을 주시했다.
잠시지만 온 세상의 시간이 정지되는 듯했다. 그 순간 호룡이 방아쇠를 당겼다.
다시 쇠가 부딪는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어떤가. 자네가 방아쇠를 당기던 것과 구분되지 않는가?”
석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아쇠는 잔잔한 호수에 달이 비치듯이, 혹은 한밤중에 서리가 내리듯이 아주 조용히 당겨야 하는 거야.”
석원이 호룡의 말의 의미를 살피겠다는 듯 표정을 진지하게 했다.
이어 호룡이 다시 권총을 석원에게 건네고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쳤다.
동그란 표적이었다.
표적과 테이프를 들고 호룡이 앞으로 나아갔다.
벽에 도착하자 표적을 테이프로 부착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표적 한가운데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겨보게.”
석원이 가볍게 심호흡하고 진중하게 권총을 들어 표적을 겨냥했다.
이어 호흡을 멈추고 한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잠시 전보다 부드러운 소리가 일어났다.
석원이 그를 느꼈는지 고개를 슬그머니 끄덕거렸다.
“어때?”
“한결 부드럽습니다.”
“바로 보았어. 총이란 사랑하는 여인을 감싸듯이 부드럽게 쓰다듬어야 하는 거야.”
정말로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하는 모양으로 석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면 이제 실전 연습 하러 가세.”
호룡이 앞서자 석원이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금방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 권총은 자네 애인 다루듯 해야 한다고.”
그 말의 의미를 새기던 석원이 미소를 보이며 자신의 바지춤에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허허, 애인은 그렇게 다루어야 하는구먼.”
호룡이 어이없다는 듯 한마디하고 앞서나가자 석원이 급하게 뒤를 따랐다.
“어디로 가시게요?”
승용차가 출발하자 석원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오사카항서 암살 실전 훈련
영란과 재회…의문의 남성은?
“일전에 갔던 곳, 만경봉호로 가는 중이야.”
“만경봉호요!”
순간적으로 석원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곳에서 실전에 대비한 훈련을 해야지.”
“왜 하필이면 그곳에서…”
“방금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실전대비 훈련이라고.”
석원이 그저 실전이라는 소리만 되뇌었다. 호룡이 석원의 표정을 무시하고 급히 차를 몰기 시작했다.
석원은 자신의 바지춤에 있는 권총과 스쳐지나가는 창밖의 전경을 번갈아 훑어보았다.
“북조선에서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대단하네.”
오사카 항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리며 호룡이 석원의 어깨를 가볍게 만졌다.
“그런데 부장님, 왜 하필 이곳에서 실전 훈련하는지요?”
“그러면 달리 할 곳이 있다는 말인가?”
“산속이나 이런 데 있잖아요.”
호룡이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보이며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석원이 마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한다는 듯 마지못해 뒤를 따랐다.
이어 일전에 만경봉호에 승선했던 것처럼 약식 절차를 거치고 배에 올랐다.
배에 오르자 낯익은 사내가 앞장섰다.
그의 안내로 전에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이르자 별로 달갑지 않은 기억 때문인지 석원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전에 머물렀던 방을 지나 구석에 위치한 곳에 이르렀다.
안내원이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다 철문을 열었다.
순간 석원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영란이 무표정한 얼굴로 맞이했던 터였다.
“어서 들어와!”
영란의 음성이 낮으면서도 날카로웠다. 석원이 급히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이어 고개 들어 영란의 시선과 마주치자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다리가 자동적으로 움직였다.
“동무는 바로 준비하도록 하시오.”
영란이 안내했던 사내에게 짤막하게 지시하고 석원에게 다가섰다.
잠시 얼굴을 살피더니 손을 아래로 뻗어 석원의 가운데를 슬그머니 만지작거렸다.
석원의 다리가 절로 꼬여갔다.
그를 살피며 가볍게 미소 짓고는 이내 손을 위로 올려 바지춤에 꽂혀 있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이 총이 석원 군을 영웅으로 만들어줄 바로 그 권총인가요?”
“석원 군이 실전에 사용할 권총과 동일종입니다.”
호룡이 담담하게 말을 받자 영란이 총을 들어 석원의 얼굴을 향해 겨누었다.
석원이 기겁하며 얼굴을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를 살피며 영란이 슬그머니 미소를 보내고 권총을 호룡에게 건넸다.
“이 총이 그 총만큼만 하면 좋으련만.”
영란의 시선이 석원의 가운데로 향하자 석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호룡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석원 군이 확실하게 일처리 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리 해야지요. 암, 그렇고말고요.”
호룡의 말에 영란이 맞장구를 치는 순간 저만치서 심한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석원이 온 신경을 그곳에 집중하자 마치 살려달라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와 그를 다그치는 소리가 혼재하고 있었다.
이어 가까이 다가오면서 그 일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현실이 석원의 면전에 도착했다.
두 남자에 의해 한 남자가 그야말로 개 끌리듯 끌려왔는데 남자의 표정이 막 불에 끄슬리기 전 개 모습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을 정도였다.
눈에서 나왔는지, 혹은 코와 입에서 나왔는지 모를 이물질이 얼굴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 바탕색 역시 핏기하나 없이 파리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얼굴 곳곳이 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찢어진 옷 사이로 선혈이 낭자했다.
“지도원 동무, 제발…”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 남자가 영란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조국과 당을 배신한 놈이 목숨까지 구걸한다는 말이냐, 더러운 놈!”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