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 지금> 상장 앞둔 기업들 중간점검

오너 때문에 엎어지고 실적 때문에 자빠지고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기업이 상장을 추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상장기업은 주식 자체가 자기 자본에 해당하는 만큼 효율적인 자금을 조달을 통해 안정적인 재무 환경을 갖추는 데 용이하다. 하지만 자금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 정보를 낱낱이 공개해야 한다는 점은 기업들이 상장을 주저하게끔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올해 초 한국거래소는 유가증권시장 상장수요 조사 결과 상반기에 15곳, 하반기에 5곳이 상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예상대로 상장이 이뤄진다면 2011년(21건) 이후 가장 많은 상장건수를 기록하게 된다. 지난해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은 16곳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단지 예상일뿐이다. 상당수 기업들이 상장을 보류하거나 미온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줄줄이 상장계획
제대로 이뤄지나

당초 계획대로 연내 상장의 꿈을 이룬 기업은 지금까지 총 5곳이다. 해태제과식품은 지난 11일부로 유가증권시장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상장 첫날 상한가(29.82%)로 거래를 마쳤다. 해태제과식품의 이날 종가는 2만4600원으로 공모가(1만5100원)를 63%가량 웃돌았다. 2001년 상장 폐지된 해태제과는 2007년과 2012년에 재상장을 추진했지만 당시엔 실적 악화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이번엔 연 매출 1000억원대 돌파를 눈앞에 둔 허니버터칩의 인기에 힘입어 상장이 가능해졌다. 지난해 7884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해태제과는 영업이익(471억원)이 전년 대비 2배 가까이 증가했고 당기순이익(170억원)은 4배 규모로 확대됐다.

대림산업의 자회사인 대림C&S는 지난 3월30일부로 코스피에 이름을 올렸다. 이날 2만4950원으로 출발한 대림C&S 주가는 1700원(6.81%)하락한 2만3250원에 장을 마쳤다. 공모가 2만7700원보다 16%가량 밑도는 수준이다.


대림C&S는 지난해 매출 2955억원, 영업이익 542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매출은 14.6%, 영업이익은 60.8% 증가한 수치다. 대림C&S 지분은 대림산업 50.8%, 이준용 회장 2.3%, 이부용 전 대림산업 부회장이 7.8%씩 보유하고 있다. 대림C&S는 국내 콘크리트파일 시장에서 시장점유율 19%를 차지하고 있는 1위 업체다.
 

화장품과 의약외품 제조업체인 인터코스는 지난달 18일 중소기업전용 증권시장인 ‘코넥스(KONEX, Korea New Exchange)’에 상장됐다. 주당 평가가격은 1830원이었다. 인터코스의 지난해 매출액은 61억500만원, 순이익은 11억3600만원이다.

2014년 설립된 인터코스는 화장품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과 제조사개발생산(ODM) 사업을 한다. 특히 ODM 사업을 통해서 위탁받은 제품의 개발을 완료한 뒤 생산·공급에 나서면서 독자적인 기술력도 갖췄다는 평가다. 경쟁력을 인정받은 인터코스는 올해 초 원익투자파트너스로부터 총 20억원 규모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원익투자파트너스 확보한 인터코스 지분은 8.54%(4357주)다.

연내 상장 계획 20개 회사 ‘갈림길’
각종 걸림돌 걸려…이곳저곳 백지화

핸드백 제조자개발생산(ODM) 업체인 제이에스코퍼레이션은 지난 2월 상장을 완료했다. 1987년 설립된 제이에스코퍼레이션은 버버리와 헨리 벤델, 마이클 코어스, 랄프로렌, 케이트 스페이드 등 고가에서 중저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10개의 브랜드군을 갖추고 있다. 2014년 핸드백 제조 업체인 ‘씨에치오리미티드’를 흡수하는 등 몸집도 불렸다.

용평리조트는 오는 27일 코스피 상장이 사실상 확정된 분위기다. 정창주 용평리조트 대표이사는 지난 11일 “코스피 상장을 통해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해 리조트 운영뿐만 아니라 프리미엄 콘도 분양사업에서도 리딩 컴퍼니임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용평리조트의 공모 주식 수는 1672만주이며 공모 예정가는 8100∼9200원이다. 공모 금액은 밴드 상단 기준으로 보면 1538억원이다. 용평리조트는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 1763억원에 영업이익 264억원, 당기순이익 116억원의 실적을 올렸다.


눈앞서 날린
‘상장의 꿈’

상장의 기회를 눈앞에서 날려버린 기업들도 제법 보인다. 네이처리퍼블릭은 오너리스크가 장애물처럼 인식되는 양상이다. 정운호 대표가 연일 집중포화를 맞는 사이에 기업공개(IPO) 준비를 전담해 왔던 재무담당 임직원들의 동향도 심상치 않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네이처리퍼블릭 최고재무책임자(CFO)였던 이승훈 상무가 지난해말 퇴사했다. 이 전 상무는 하나금융투자(옛 하나대투증권) 출신으로 정 대표가 상장을 준비하며 직접 영입한 인사다.
 

이 전 상무와 함께 네이처리퍼블릭에 합류했던 회계법인 출신 회계사들도 회사를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 정 대표가 자리를 비우면서 ‘더페이스샵’ 창업 때부터 함께 회사를 키워온 영업부문 인사들이 회사를 이끌고 있는데 이들과 의견 마찰을 빚은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는 네이처리퍼블릭 창업 초기 멤버인 강창구 이사가 재무업무를 맡고 있다.

상장 기대감으로 지난해 장외시장에서 17만원대까지 치솟았던 네이처리퍼블릭 주가는 정 대표 구속 이후 IPO 일정이 지연되면서 4만원대로 주저앉았다. 10개월 만에 주가는 1/4분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상장을 기대하고 장외에서 주식을 매입했던 투자자들의 항의가 빗발친 건 당연했다. 네이처리퍼블릭은 아직까지 상장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듯한 인상이지만 증권업계에서는 연내 상장이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상반기 상장이 예상되던 티브로드는 IPO를 연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티브로드는 지난해 12월 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로부터 ‘상장적격’ 판정을 받은 후 곧바로 공모절차에 돌입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상장적격 만료기간이 임박한 시점까지도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기업가치 산정을 두고 재무적 투자자와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게 주된 원인으로 파악된다. 상장 예비심사 승인 유효기간인 오는 6월까지 상장 절차를 완료하긴 사실상 힘들어진 상태다. 티브로드 측은 일단 상반기 상장 계획을 접고 하반기에 다시 상장을 추진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거래소 상장 예비심사 청구부터 모든 공식 절차를 새로 밟아야 한다.

이마저도 녹록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많다. 반등의 여지를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업황 자체가 가라앉은 분위기다. 경쟁회사들의 주가흐름 역시 긍정적이지 않다. 티브로드와 투자자 사이의 시각차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답보상태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업계 관계자는 “상반기에 티브로드가 상장하려면 극적인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며 “하반기에 IPO를 하고 상장을 위한 준비과정을 착실히 밟는다 해도 쉽사리 속단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울바이오시스(옛 서울옵토디바이스)는 예비심사 통과 후 6개월 안에 상장을 완료하지 못했다. 지난해 9월 한국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에서 상장 예비심사를 통과한 서울바이오시스는 12월에 기관투자가들을 대상으로 수요예측을 실시했다.
 

하지만 당시 공모주 시장 분위기가 얼어붙으면서 수요예측 흥행에 실패했고 서울바이오시스는 상장을 철회했다. 상장을 철회하더라도 예심 통과 후 6개월 안에만 상장을 마무리하면 규정상 문제가 없었으나 서울바이오시스는 지난 3월16일까지 상장을 완료하지 못했고 IPO는 물건너 갔다. 실적 부진이 악재로 작용한데다 업황이 긍정적이지 않아 연내 상장은 어렵다는 중론이다.

유력 후보들
정작 안개국면


이외에도 두산밥캣, 넷마블게임즈, 롯데정보통신, KIS정보통신, 태진인터내셔날, LS전선아시아, 호텔롯데, 코리아세븐, JS코퍼레이션, 코엔스 등이 연내 유가증권 상장 유력후보로 꼽힌다. 그러나 이들이 무작정 상장을 추진할거란 보장은 아직 없다. 유가증권시장에 섣불리 뛰어들길 주저하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기업이 상장을 추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상장기업은 주식 자체가 자기 자본에 해당된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지 않아도 투자자들의 투자금으로 자금조달이 용이해진다. 인식 제고 과정을 거쳐 자산 증대마저 기대할 수 있다.

물론 단점도 존재한다. 상장 조건 중에서 주식 보유자가 50명 이상이라는 조건이 붙는 만큼 개인회사라는 개념은 희석된다. 제3자가 회사의 주식을 가장 많이 보유하면 그 회사를 넘겨야 한다. 정보를 공개해야 하고 실적이든 부채든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한다. 이런 점들은 상장을 주저하는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상장해봐야…” 자진 폐지 증가
공시 등 실익만큼 부담도 크다

최근에는 주식시장을 박차고 나가는 상장 기업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주주 지분율이 높고 안정적인 실적을 내고 있지만 증시에서 자금조달 필요성이 거의 없어 비상장사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공시 부담과 전략노출 등 불이익에 대한 우려도 섞여 있다.

1994년 상장한 경남에너지는 오는 19일 상장폐지를 앞두고 있다. 경남에너지는 최대주주인 경남테크의 요청으로 자진 상장폐지 추진을 결정했고 한국거래소 승인까지 얻었다. 코스피 상장사의 자진 상장폐지는 지난해 1월 SBI모기지 이후 1년4개월여 만이다. 경남에너지 측은 “현재는 상장을 유지하는 데 따른 실익이 적기 때문”이라고 상장폐지 추진 이유를 설명했다.


코스닥 상장사인 아트라스BX도 현재 자진 상장폐지를 위해 공개매수를 진행 중이다. 아트라스BX는 지난 3월 공개매수를 진행했으나 최대주주인 한국타이어월드와이드의 보유지분(31.13%)까지 합쳐도 적정 지분 기준을 밑도는 87.68%에 그쳤다. 자진 상장폐지를 위해선 대주주 측(회사·특수관계인 포함)이 95% 이상의 지분 확보가 필수다. 아트라스BX는 다시 공개매수를 진행 중이다.
 

상장폐지를 진행중인 경남에너지와 아트라스BX는 현금자산이 풍부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들은 상장을 폐지한 후 100% 지분을 확보해 국내 시장 상황과 소액 투자자, 감독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기업을 경영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유동성도 풍부해 상장을 통한 직접자금 조달에도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않고 있다. 또 소액주주들의 항의나 경영간섭, 경영사항 공시, 분기 결산보고 등의 부담도 덜 수 있다.

최근 상장설이 떠돌던 현대오일뱅크의 경우 계획이 없음을 재차 강조하고 나선 상황이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11일 공시를 통해 “현대오일뱅크 IPO 검토를 한 바 없다”며 “시장 여건이 우호적으로 형성되면 국내증시에 상장을 검토할 수 있으나 현재까지 결정된 바는 없다”고 밝혔다.

현대중공업의 현대오일뱅크 기업공개는 지난 2011년에도 추진됐다가 무산됐고, 이후에도 그 가능성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현대오일뱅크는 상장시 약 6조 이상의 시가총액을 기록할 것으로 관측되는 현대중공업그룹의 알짜 계열사이다. 현대오일뱅크 지분 91.13%를 보유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으로서는 상장 후 지분매각만으로도 상당한 자금 확보가 가능하다.

한국 증시에서 자본을 끌어 쓴 외국 기업들의 탈 상장 행보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자진상장폐지가 무산된 도레이케미칼은 다시 한 번 자진상폐를 진행 중이다. 앞서 중국 기업인 3노드디지탈과 중국식품포장, 국제엘렉트릭, 일본계 SBI모기지 등은 한국 증시에서 발을 뗐다.

증시 전문가들은 외국계 자본이 투입된 상장사는 언제든 ‘먹튀’로 돌변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헐값에 지분을 인수한 뒤 구조조정으로 실적을 단기간에 호전시키고 비싼 가격에 되팔수 있다는 것이다. 노조의 반발이 심하면 알짜 자산들을 매각한 뒤 법인 청산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외국 기업들은
탈 상장 행보

IB업계 관계자는 “실적이나 자산에 비해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해 증시를 떠난다는 기업들도 더러 보인다”며 “상장을 하고 싶어도 절차를 밟지 못해 무산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상장폐지를 시도한 후 기업 가치를 높여 해외에 재상장하거나 유상감자, 고배당 등으로 투자자금을 회수하는 경향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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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