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아이슬란드 총리의 사임을 시작으로 각국 정상들이 연이은 퇴진 압박을 받고 있다. OECD 산하 국제탈세정보교환센터의 회원국 대표들은 대책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 이 모든 게 ‘파나마 페이퍼스’로 명명된 비밀문서의 공개 후 벌어진 일들이다. 물론, 국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다. 벌써부터 거물급 인사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더 큰 파장이 몰려올 수 있다는 뜻이다.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 문건은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의 탐사보도 기자들이 익명의 취재원에게서 파나마 로펌 ‘모색 폰세카(Mossack Fonseca)’의 내부자료를 입수하면서 시작됐다. 유출된 자료는 2.6TB에 달한다. 자료의 방대한 규모와 공적 가치를 고려한 <쥐트도이체차이퉁>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에 협업을 요청하면서 대형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드디어 공개
커지는 의혹
모색 폰세카는 해외법무법인으로서는 세계 4번째 규모의 대형 법인으로 홍콩, 마이애미, 취리히 등 전 세계 35개 이상에 지사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주요 금융기관과 거래를 하고 있으며, 고객에게 조세당국이 자금 흐름을 추적하기 어렵도록 도움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
파나마 페이퍼스가 알려지자 세계 각국은 사상 최대 규모의 조세 회피 의혹에 대한 관련 조사에 나섰다. 국내에서도 파나마 페이퍼스의 파급력은 무시하기 힘든 수준이다. 유출 데이터에 ‘Korea’로 검색되는 1만5000여건의 파일 중 한국 주소를 기재한 195명의 한국인 이름이 포함된 까닭이다.
시작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인 노재헌씨였다. 파나마 페이퍼스를 분석하던 조사단은 노씨가 노 전 대통령의 장남과 같은 이름이라는 점을 기반으로 생년월일과 사진을 검토한 결과 동일인물임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2012년 5월18일 버진아일랜드에서 3개의 회사를 설립해 주주 겸 이사에 취임했던 노씨는 2013년 5월 이사직에서 사퇴했다. 3개 회사 모두 1달러짜리 주식 1주만을 발행한 전형적인 페이퍼컴퍼니에 가까웠다.
현재 노씨는 의혹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다. 노씨는 즉각 반박자료를 내고 “중국사업을 목적으로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으나 사업진행이 안돼 계좌개설도 하지 않았다”며 “관계당국에서 필요하다면 해명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조세회피처나 비자금 등과는 일절 무관하다”고 말했다.
노씨는 첫 단추에 불과했다. 노씨와 관련된 의혹을 제기하면서 <뉴스타파>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으로 추측되는 나머지 인물들에 대한 추가 공개를 공언했고 조금씩 해당 인물들의 정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아모레퍼시픽 창업주인 고 서성환 회장의 자녀인 서영배·서미숙씨, 박병룡 파라다이스 대표, 김광호 전 모나리자 회장, 조태권 광주요 회장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상황이다.
곳곳 드러난
페이퍼 흔적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은 2004년 9월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워터마크 캐피털’이라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워터마크 캐피털은 1달러짜리 주식 1주를 발행한 전형적인 페이퍼컴퍼니다. 주주는 서 회장 1명이었고 이사 역시 서 회장 혼자였다. 주소지로 명시된 버진아일랜드의 아카라빌딩은 모색 폰세카 버진아일랜드 지점이 있는 곳이다. 노재헌씨의 유령회사가 등록된 곳이기도 하다.
이후 서 회장은 2013년 6월 이 페이퍼컴퍼니의 실소유주 명단에서 사라졌고, 대신 ‘얼라이언스 코퍼레이트 서비시즈’라는 회사가 주주 겸 이사로 등장했다. 그러나 이 회사 역시 실제 주인을 감춰주는 차명 서비스용 회사인 것으로 확인됐다.
고 서 회장의 다섯째인 서미숙씨도 2006년 4월 버진아일랜드에 ‘웨이즈 인터내셔널’이라는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것으로 파악됐다. 보통의 페이퍼컴퍼니가 1달러짜리 주식 1주만을 발행하는 것과는 달리 이 회사는 주식을 4주 발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서씨를 제외한 나머지 세명의 주주는 그녀의 세 아들이었다. 불법 증여 혹은 상속을 위해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었다고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파마나 페이퍼스’ 만든 인사들 공개
속속 드러나는 의혹들…검찰 수사는?
국내 최대 카지노 기업인 파라다이스 그룹의 페이퍼컴퍼니와 스위스 계좌도 확인됐다. 해당 페이퍼컴퍼니 이름은 ‘엔젤 캐피털 리미티드’(Angel Capital Limited)고 박병룡 파라다이스 대표이사는 회사가 만들어진 20여일 후에 단독 이사로 등재됐다.
다만 박 대표를 실소유주로 단정 짓기는 힘들다. 해당 회사는 설립 당시 무기명 주식 1주를 발행해 주주를 익명으로 감춰놨다. 이후 2003년 6월 익명 주주를 차명주주로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크레디트 스위스가 개입했다. 크레디트 스위스는 모섹 폰세카에 차명주주 변경 서비스를 의뢰했고 연간 1500달러의 수수료를 지급했다.
김광호 전 모나리자 회장은 지난 2008년 5월20일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트랜스 인터컨티넨탈(Trans Intercontinental)’이라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으로 의혹을 받고 있다. 설립 서류엔 김 회장의 여권 사본과 서명 등 그가 이 페이퍼컴퍼니의 실소유주임을 증명하는 다양한 자료가 들어있었다. 이 회사에는 김 회장이 유일한 이사와 주주로 등재돼 있다. 트랜스 인터컨티넨탈은 2008년 5월 설립돼 2012년 11월 폐쇄된 것으로 나온다.
전통 도자기 제조업체인 광주요그룹의 조태권 회장도 모색 폰세카를 통해 조세도피처인 바하마에 1998년 8월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8년 부친으로부터 가업을 물려받은 조 회장은 바하마에 설립된 ‘와 련 엔터프라이즈 리미티드(Wha Ryun Enterprise Limited)’라는 페이퍼컴퍼니의 이사로 등재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회사의 1998년 9월7일자 회의록에는 조 회장뿐 아니라 부인인 성복화씨를 이사에 임명한다고 기록돼 있다. 두 사람은 페이퍼컴퍼니 설립 당시 일본의 주소를 거주지로 기재했다. 이 회사는 1달러 짜리 주식을발행했다. 조 회장 부부가 이사로 등재돼 있고, 계좌 서명권자도 조 회장 부부로 해놨다. ‘와 련 엔터프라이즈’는 설립 후 약 9년 뒤인 2007년 6월 폐쇄됐다.
그룹 차원에서 페이퍼컴퍼니를 개설했다는 의혹을 받는 곳도 눈에 띈다. 지난달 8일 <뉴스타파>는 포스코가 수백억원을 들여 영국 소재 페이퍼컴퍼니를 인수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포스코의 주력 계열사인 포스코건설과 포스코엔지니어링이 2011년 S&K홀딩이라는 파나마법인으로부터 ‘이피시에쿼티즈’(EPC Equities LLP)라는 회사의 지분을 각각 50%(394억원), 20%(157억원)씩 인수한 사실을 확인했다. 문제는 이피시에쿼티즈가 영국 법인이지만 2008년 설립 이후 현재까지 영국 공시자료에 자산이나 현금흐름이 완전 ‘0’인 휴면법인으로 돼 있다는 사실이다.
모색 폰세카는 이피시에쿼티즈 쪽 법률대리인 자격으로 이 인수계약에 참여했다. 유출 자료엔 지분 인수 계약서 등 포스코 관련 문서가 수백 건 확인되는데 이 중엔 인수 당시 포스코건설 대표이사이던 정동화씨의 여권 사본도 포함돼 있다.
삼성테크윈(현 한화테크윈)은 지난 2001년 터키에 K-9 자주포를 수출하는 과정에서, 현대로템은 2009년 터키에 K-2 흑표전차를 수출하는 과정에서 각각 조세회피처의 유령회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모색 폰세카의 유출 자료에 따르면 삼성테크윈과 계약을 체결한 회사는 지난 2001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설립된 ‘코오롱리미티드’, 현대로템이 계약을 체결한 회사는 2003년 버진아일랜드에 설립된 ‘KTR리미티드’다. 이 유령회사들은 사실 한 회사나 마찬가지다.
삼성테크윈과 현대로템이 계약을 맺은 유령회사들은 모두 스위스 UBS은행에 계좌를 개설한 것으로 드러났다. 회사 주주는 무기명으로 돼 있고, 회사 이사는 차명 서비스에 전문으로 이름을 빌려주는 인물들이었다고 <뉴스타파>는 전했다.
하이닉스 자회사였던 하이디스의 매각 과정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유령회사도 발견됐다. 버진아일랜드에 설립된 ‘C&H 트레이딩(C&H Trading ltd.)’라는 회사의 설립 일자는 2003년 4월16일이다. 회사는 1달러짜리 주식 2주를 발행했으며 당시 하이디스 사장이었던 최병두씨와 중국인 한궈진씨가 각각 1주씩을 소유했다. 한씨는 당시 하이디스를 인수했던 중국 BOE 그룹의 임원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C&H 트레이딩'이 설립된 2003년 4월은 하이디스가 중국 BOE 그룹에 매각된 지 5개월 뒤다. 그로부터 10개월 뒤인 2004년 2월 28일에는 한씨가 자신의 주식 한 주를 최 전 사장에게 양도했다.
이름 오르내리는
거물급만 40명
파나마 페이퍼스의 후폭풍은 어느새 재계 유력인사들을 벌벌 떨게 만들만큼 확대되고 있다. 일전에 조세도피처 개설 의혹을 받던 인물들의 이름이 다시금 오르내리는 양상이다. 이들 상당수는 지난 2013년 조세회피지역에 유령회사를 세웠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정·재계 거물들이다.
당시 언급된 인물들은 ▲김석기 전 중앙종금 대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전재국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삼남 김선용씨 ▲이수영 OCI 회장과 부인 김경자 OCI 미술관 관장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부인 이영학씨 ▲조욱래 DSDL 회장과 그 장남 조현강씨 ▲최은영 한진해운 홀딩스 회장 ▲조용민 전 한진해운 홀딩스 대표 ▲한화그룹 계열사인 한화역사 황용득 사장 ▲조민호 전 SK증권 대표 부회장과 그 부인 김영혜씨 ▲이덕규 전 대우인터내셔널 이사 ▲유춘식 전 대우 폴란드 차 사장 등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재 조세회피 의혹을 받는 유력 인사들만 해도 40명이 넘는다. 수년 전부터 페이퍼컴퍼니 설립 의혹을 받았던 김석기 전 중앙종금 대표는 다시금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지난 2013년 8월 <뉴스타파>는 김씨가 자신이 대주주로 있던 ‘RNTS MEDIA N.Y’(이하 RNTS 미디어)라는 해외법인을 통해 국내 어린이용 교육 콘텐츠업체인 빅스타글로벌을 972만 유로(당시 140억원)에 인수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씨는 자신이 만든 페이퍼 컴퍼니 ‘멀티럭 인베스트먼트’를 통해 RNTS 미디어의 지분 33%를 보유한 1대 주주였으며 한국 관련 사업을 직접 총괄했다고도 전했다.
RNTS 미디어는 지주회사로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회사다. 이 법인은 조세 리조트(Tax Resort)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에 설립돼 있어 직접세와 간접세를 내지 않는다. 이 법인의 2015년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RNTS 미디어 2대 주주는 지분 10.26%를 보유한 ‘SYSK Limited’인데, 여기에 배우 윤석화씨의 이름도 함께 게재돼 있다. 김씨의 부인인 배우 윤씨는 수백억원대 주식자산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안절부절’ 거론되는 사람만 40명
‘흐지부지’ 검은돈 추적 이번엔?
파나마 페이퍼스에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이름이 다수 발견되자 당국의 발걸음도 한층 빨라지고 있다. 국세청은 한국인 명단을 확보한 뒤 탈세 혐의와 관련 세원이 포착되는 경우 즉각 세무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명단을 입수하는대로 정상적인 기업활동인지 거주자인지 등의 여부를 분석해 역외탈세인지 확인한 뒤 엄정하게 처리할 방침이다. 그러나 한국인 명단을 찾아 분석하고 조사하는 데까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외탈세 혐의자에 대한 신병확보다. 탈세 혐의를 확인한 뒤 세무조사에 착수하게 되면 출국금지 등 신병확보를 할 수 있지만 탈세 혐의자들이 세무조사 이전에 해외로 나가버리면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세회피처를 통한 역외탈세 의혹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지난 2013년에도 국세청이 압수수색을 하러 현장에 나가보면 자료가 다 삭제되고 당사자는 해외로 도주해버린 경우가 상당수였다.
당시 유령회사를 설립했다고 여겨지던 한국인 182명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들 전재국씨,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삼남 김선용씨,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 등 유력인사의 이름이 다수 포함됐다. 그러나 182명 중 실제 세무조사를 받은 경우는 48명에 그쳤고 고발조치가 취해진 인물은 3명에 불과했다. 이들에게 추징한 금액은 총 1324억원이었다.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당장 국세청이 세무조사나 고발조치를 하기도 어렵다. 유출된 명단과 해당 인물들의 계좌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페이퍼컴퍼니 설립 자체는 불법이 아니라는 점도 수사를 늦추는 장애가 될 수 있다.
솜방망이 처벌
이번에는 과연
통상 페이퍼컴퍼니는 서류상 법인자격을 갖추었으니 자회사를 두고 영업활동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탈세 목적의 자금세탁창구로 이용되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받는다. 유령회사라는 이름이 뒤따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단순히 몇명만 고발조치했다는 수치만 갖고 판단하는 건 부적절하다“며 ”혐의내용이 법위반으로 드러났을 경우에만 고발조치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