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헌법으로 명시된 납세의 의무는 자유주의에 입각한 법치국가에서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세금을 낸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차별 없는 대우를 약속받는 과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모두가 세금을 내더라도 납부액에 따라 차별이 자행된다. 세금을 성실히 낸다고 해서 무작정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세금 납부액이 ‘1등 시민’과 ‘2등 시민’을 구분 짓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지난달 2일 서울시는 모범납세자 28만1032명을 선정했다. 새해 첫날을 기준으로 세금 체납액이 없으면서 최근 3년간 3건 이상 지방세를 납기 안에 납부한 서울시민이 선정 대상이었다. 이번에 선정된 모범납세자 규모는 지난해보다 9174명(3.4%) 증가한 역대 최대 수준이다. 5년 이상 모범납세자는 18만1852명, 10년 이상은 4만3573명에 이른다. 시민들의 납세의식이 한층 높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형평성 문제
투명한 납세 환경을 조성코자 노력해온 서울시의 의중은 ‘유공납세자’ 선정에서도 어렴풋이 드러난다. 유공납세자는 모범납세자 가운데 서울시를 구성하는 25개 자치구에서 추천 받아 선정한 사람들이다. 올해는 납세 규모, 지역사회 기여 등을 고려해 뽑힌 181명의 개인 및 법인이 유공납세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30만명에 육박하는 모범납세자 가운데 간추린 극소수의 유공납세자에게는 많은 혜택이 제공된다. ▲3년간 세무조사 면제 ▲2년 간 1회에 한하는 징수유예에 따른 납세담보 면제 ▲공용주차장 1년 간 면제가 바로 그것이다.
▲시금고에서 대출 시 최대 0.5%의 금리인하 ▲22종의 각종 수수료 면제 ▲신용평가 5% 가산점 등 모범납세자가 누리는 혜택은 덤이다. 다만 보는 시각에 따라 유공납세자를 뽑는 과정과 이들이 받는 혜택은 보통의 시민들이 순순히 납득하기 힘든 사안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서울시는 표면적인 유공납세자 선정 기준을 ‘조례상 공적이 현저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조금 다르다. 차라리 '세금을 현저히 많이 낸 공적'이 유공납세자 선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조례상 공적 현저한 자? 선정기준 모호
과도한 혜택들…서민들 상대적 박탈감
지난해 서울시의 시민 1인당 평균 지방세 부담액은 약 175만원. 모범납세자의 부담액은 이보다 4배가량 많은 1인당 715만원이었다. 모범납세자 사이에서 유공납세자의 납세액이 최상위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유공납세자와 평범한 서울시민의 납세액 차이는 한층 극명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서울시는 해당 관할 25개 자치구에 8명씩 유공납세자 후보 추천을 요청하면서 반드시 납세액 3000만원 미만의 사람을 3명 이상 명단에 포함시키라고 권고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달리 해석하자면 자치구에서 서울시에 올린 추천인 8명 가운데 5명 이상은 납세액이 3000만원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유공납세자의 연간 납세액을 최소 3000만원으로 책정하더라도 일반 시민 1인당 납세액보다 15배 이상 많은 셈이다.
물론 유공납세자 상당수는 법인명의라는 점에서 해석의 차이는 존재한다. 서울시 홈페이지에 등재된 올해 유공납세자 명단을 분석한 결과 181명의 유공납세자 가운데 개인은 121명, 법인은 60곳이었다. 결국 121명의 유공납세자가 낸 납세액이 기준이 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개인 유공납세자 대다수가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 즉 금전적으로 풍족한 사람이라는 대명제는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유공납세자에게 주어진 혜택이 나쁜 용도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간혹 벌어지는 세금 탈루 사례가 대표적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공납세자에게는 3년간 세무조사 면제라는 혜택이 주어지는데 이 제도는 해석에 따라 악용의 여지를 남긴다.
2009년부터 5년 동안 모범납세자로 선정된 2760명 가운데 105명이 탈세 혐의로 세무조사를 받았다는 국세청의 조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지난 2014년 유명 배우 송혜교씨는 모범납세자로 선정된 지 5년 만에 탈세 혐의로 38억원을 추징당한 전례를 남기기도 했다.
자치구에서 뽑은 유공납세자 후보들의 검증이 제대로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서울시는 결격사유가 없는 사람에 한해 자치구에 8명씩 추천을 받아 유공납세자를 뽑았다. 추천 후보는 총 185명이었고 선정위원회를 거쳐 181명이 최종 확정됐다. 추천만 하면 거의 유공납세자로 뽑혔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중구에서 유공납세자로 선정된 한 법인의 경우 지난해 5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상품을 광고하면서 중요 정보를 충분히 알리지 않아 과태료를 물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유공납세자에 이름을 올리는 데 결격 사유로 작용한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25개 자치구 가운데 16곳은 서울시가 요구한 후보자 8명 추천마저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유공납세자를 200명까지 뽑고자 했던 서울시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서민들이 체감하는 박탈감이다. 세금이라는 건 소득에 비례한 만큼 내는 게 상식인데 납세액이 많다고 유공납세자로 우대하는 건 또 다른 차별 요소로 비춰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형차를 운전하는 서민이 제값 주고 이용하는 공용주차장을 정작 값비싼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유공납세자가 공짜로 이용하는 광경이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대다수 지방자치단체들이 공정성과 투명성 제고 차원에서 유공납세자 선정 시 무작위 전자추첨 방식을 따른다는 점을 복기해봐야 한다.
한 서울 시민은 “비록 금액의 차등은 있겠지만 보통의 사람이라면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는데 액수가 적다고 차별대우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며 “이런 식으로 행정을 처리하면서 납세를 독려하는 태도는 모순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서울시 역시 유공납세자 선발 과정에서 불거지는 논란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현행 유공납세자 선정 기준이 세금 많이 내는 순서쯤으로 비춰지지 않도록 제도 보완을 고려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다만 서울시 재정에 일조하는 거액 납세자들에게도 일종의 혜택이 필요하다는 뜻은 변함이 없다.
허탈한 서민들
주성호 서울시 세무과 주무관은 “성실한 납세의 의무 이행이 유공납세자 선정에서 가장 우선되는 기준이라는 점은 부연설명이 필요 없다”며 “상대적인 박탈감 최소화를 위해서라도 제도 보완의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다만 납세 금액에 따른 형평성 여부는 단순히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