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희망의 궁전 ‘딜쿠샤’를 아십니까

주민도 모르는 ‘귀신 나오는 집’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딜쿠샤요? 그게 뭡니까?” 행촌동에서 40년을 살았다는 중년 남자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지도를 보여주며 재차 물었다. “일제강점기에 미국인 기자가 살았던 집이에요. 국가문화재로 지정된다고 하던데요”. 남자는 지도를 들여다보더니 “근처에 홍난파 가옥은 있는데…”라며 기자를 안내했다. 1930년 건립된 홍난파 가옥까지 오자 길게 뻗은 외길을 따라 언덕 위로 붉은색 2층 벽돌집이 보였다.

40년을 한 동네에서 산 주민도 잘 모르는 ‘귀신 나오는 집’ 딜쿠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옆엔 권율 장군 집터 자리에 460살 먹은 은행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서 있었다. 1920년 이 곳을 처음 찾은 테일러 부부도 이 나무를 보고 바로 옆에 집을 짓고 싶어 했다. 100여년 사이 풍경은 급격히 변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은행나무와 근처 홍난파 가옥, 서울성곽, 테일러가 수감됐던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은 그대로다.

40년 거주민도
“몰라요∼”

경고 안내문이 붙은 딜쿠샤 외벽은 아직도 붉은색 프랑스식 벽돌이 선명했다. 아치형의 높은 창문과 널따란 포치도 인상적이었다. 지난해 초 안전진단에서 재난위험시설에 해당하는 D등급을 받아 임시 보강작업을 했다고 하지만 한눈에도 긴 세월을 견뎌온 온 것이 느껴졌다.

원형 복원이 가능할지 첫눈에 의구심이 들었다. 외부인 출입 자제를 당부하는 문구와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는 문구가 동시에 눈에 띄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목조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

내부는 6·25 전후로 시작된 오랜 무단 점거로 원형을 잃고 쪽방으로 잘게 나눠져 있었다. 앨버트의 부인 메리가 서 있던 넓고 화려한 거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자 전면의 넓은 유리창에서 한줌 빛이 새어 들어왔다. 2층으로 올라가는 코너에 공용화장실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니 합판에 비가 새 얼룩진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2층은 1층보다 더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2층 입구의 격자문은 언제 설치된 것일까. 좁은 복도를 따라 방들이 나란히 나눠져 있다. 달력도 있고 공연 포스터도 붙어 있다. ‘CCTV 작동 중’이라는 붉은색 경고문도 눈에 띈다. 방송에서 여러 차례 다큐 등으로 소개되면서 사람들이 몰린 후로 맘 편히 집 밖을 나서본 적이 없다는 입주민의 하소연이 떠올랐다.

서둘러 나오면서 발바닥을 들어보니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집에 빠듯한 살림살이일지언정 나름대로 깨끗이 쓸고 닦는 부지런함이 느껴졌다. 한때는 2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9가구만 남았다. 젊은이 둘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70대 노인이다.

일제강점기 미국인 기자 부부 거주
경고문 붙은 외벽 붉은벽돌이 선명

서울시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3월1일 개관을 목표로 딜쿠샤를 복원할 예정이다. 이 집에 3·1운동을 외부 세계에 알리고 그 해 4월 일어난 제암리 학살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아마추어 기자 겸 금광업자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와 가족이 살았다.

아내 메리는 1920년 초, 성벽 산책길에서 은행나무가 있는 평평하고 높은 언덕을 발견하고 남편을 졸랐다. 첫 소유주인 미국인 엘리어트가 얼마 후 사망하자, 서양인들의 토지매매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어느 날 밤 서양인 클럽에서 포커를 치며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 테일러는 4752평의 대형 필지를 10만엔(현재 가치 20억원)에 매입했다.

딜쿠샤의 건축가는 밝혀지지 않았다. 메리(1889∼1982)의 자서전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 1992)에서 집을 설계하기 위해 필지를 방문할 때 건축가와 동행했다고만 나와 있을 뿐 건축가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딜쿠샤는 배우 출신인 메리가 세계 순회공연을 할 당시 방문했던 인도 러크나우 지역에 있던 궁전의 이름이다. 메리는 이때 집을 갖게 되면 딜쿠샤로 이름 붙이겠다고 마음먹었다.


딜쿠샤는 ‘이상향’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의 힌두어다. 1924년 집이 완공되자 대리석 주춧돌에 ‘DILKUSHA 1923’이라고 새겼다. 영국과 미국 주택 양식이 혼합된 형태로 지하 1층∼지상 2층, 총면적 624㎡(189평) 규모다. 최초엔 지상 3층으로 건립됐으나 1926년 벼락에 의한 화재로 중건하면서 2층에 그쳤다.

테일러는 광산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조선에 들어와 평안도의 운산 금광 감독관을 지내고 충청도의 직산 금광을 직접 운영했다. 1919년 2월28일 외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태어난 경성 세브란스 병원에서 침대 밑에 숨겨진 3·1 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 이것을 남동생 편에 몰래 일본 도쿄 AP통신사에 보내 전 세계에 알렸다.

그 공로로 AP통신 임시특파원이 돼 민족지도자의 재판과정을 취재, 보도했다. 그는 태평양전쟁 개전으로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기 전까지 딜쿠샤에서 20여년을 살았다. 1948년 심장마비로 숨지면서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부친과 함께 마포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됐다.

기본 원형 잃고
쪽방으로 잘려

2006년 외아들 브루스(1919∼2015)가 이곳을 찾기까지 사람들은 집에 얽힌 사연을 전혀 몰랐다. 그저 행촌동민들 사이에서 미국인 기자가 살던 곳이라고만 전해 내려왔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양기탁과 어니스트 베델이 발행한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 잘못 추정되기도 했다.

브루스가 찾아오면서 아버지 앨버트의 행적과 가옥의 내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가 지난 2월28일, 아버지의 생일에 맞춰 딜쿠샤를 방문하기도 했다. 현재 서울시는 원형 복원 후 부근 경교장과 서대문형무소, 서울성곽 등을 아우르는 도보관광 벨트, 행촌권역 성곽마을 조성을 계획 중이다.

1963년 국유화 되기 전부터 이곳은 무주택 서민들의 공동주택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건축주의 역사적 행적과 근대 서양식 주택이라는 건축사적 가치를 동시에 갖고 있음에도 딜쿠샤는 복원은 물론 보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가옥은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기획재정부로부터 위탁받아 관리 중이다. 지난해 초, 거주자들의 안전을 우려해 임시 보강 공사를 하고 지붕에 두꺼운 비닐막도 씌웠다.

 

현 거주자들을 무단 침입 내지는 무단 거주라고 규정하기도 쉽지 않다. 거주자들이 다음 입주자들에게 돈을 받고 ‘거주권’을 넘기는 관행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지난 21일 만난 한 입주자는 1977년 들어와 현재까지 40년을 살았다고 했다.

그는 “무단거주라고 언론에 보도되면서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지 걱정된다”라며 “아버지께서 당시에 돈을 주고 들어왔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요즘은 주말이면 사람들이 몰려서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1980년대 말 신문기자와 함께 딜쿠샤를 처음 찾았다는 한 건축사학자는 “붉은 벽돌집으로 자세히 보면 근사하고 흔한 건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면서 “누가 설계했는지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최초에 조사하고 신문에도 나니까, 언론학, 건축학을 하는 학생과 연구자들이 가끔 찾아갔다”고 설명했다.

국유화 전부터 서민들 공동주택 사용
3·1운동 100주년 2019년 목표로 복원

이어 그는 “처음 방문했을 때 동네사람들이 미국인 언론인이 살았던 곳이라고 말했었다”며 “그 덕분에 살아난 거다. 일본인 집이었다고 하면 벌써 없어졌을 거다. 살려보자고 계속 어필했다. 이번에 복원계획을 발표한 후에 지난 회의 때도 현장조사를 해서 역사성을 담기로 결정했다. 테일러 일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테일러의 자료들이 일부 드러났다”고 덧붙였다.


그는 “원형 복원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가능하다. 잘 고칠 수 있다”며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현재 딜쿠샤 가옥은 종로구(재난위험시설지정 및 관리), 서울시(복원 및 운영주체), 기획재정부(현 관리청), 문화재청(국가문화재 등록권자) 등 관여 주체가 여러 곳으로 나눠져 있다. 딜쿠샤는 외관은 벽돌집이나 구조는 목조다. 늘 화재 위험과 붕괴 위험이 있기에 이주대책이 시급하다.

“이주대책에 대해 정부에서 들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앞서의 입주자는 “들은 것은 딱히 없다. 3년 전에 주민센터에서 전세자금 대출을 제안한 적은 있지만 여기 사람들은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이 없다”고 답했다. “대책위를 구성한다던지 논의를 한 적은 없느냐”는 질문엔 “논의한 적은 아직 없다. 다들 법도 잘 모르고 귀도 어둡고 몸도 불편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이어 “시에서 낮에 몇 번 방문한 것 같다. 우리가 먼저 함부로 말하긴 어렵다. (서울시에서) 먼저 얘길 해야지 우리가 어떻게 해달라고 말 못한다. 이왕 할 거면 조속히 말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또 “우리도 언론보도를 보고 안다. 우리에게 직접 얘기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손녀가 온다는 것도, 국가문화재로 지정된다는 것도, 관광코스로 개발이 된다는 것도 모두 신문을 보고 알 뿐”이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또 다른 주민은 “빠듯한 사람들이 막상 나가라면 나갈 수 없다. (관계 부처에서) 서로 미루는 것만 같다. 서울 집값이 한두 푼도 아니고 갑자기 아무 연고도 없는 지방에 가서 살 수도 없지 않나”라며 근심을 드러냈다. 


무작정 퇴거?
이주대책 논의

서울시 관계자는 “무작정 퇴거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주대책을 마련해 설득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며 “강제적으로 진행할 계획은 전혀 없다.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환경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인근에 임대주택을 알아보고 있다. 시에서 전문상담인력을 따로 구성해 면담을 조심스럽게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 7차례 면담을 하고 의견을 취합하고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shi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딜쿠샤는?

테일러가의 안주인 메리 린리 테일러는 영국 첼트넘의 부유한 가정 출신이다. 연극배우로 동양 각지를 순회하던 중 일본에서 앨버트를 만나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1917년 9월, 경성에 왔다.

부부는 처음엔 서대문 근처에 신혼집을 짓고 살았다. 메리는 자서전에서 최초의 집을 ‘서대문의 작은 회색집(The little grey home at West Gate)’이라고 불렀다. 1920년대 초, 늘어나는 살림과 새로 장만한 가구를 수용할 만한 공간이 없어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당시 경성에 거주하던 서양인들 사이엔 ‘가구 세트’를 맞추는 것에 대한 경쟁의식이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먼저 거주하기 시작한 서양인들의 가구 세트가 다른 소유주에게 넘어가면서 각기 흩어지게 됐다. 1920년대엔 각 가정에서 다시 가구 세트를 모으는 일에 열중했다. 테일러 부부는 1919년 죽첨정 1정목 18번지에 위치한 벨기에 영사관이 문을 닫으면서 남긴 다이닝룸 테이블을 구입했다. 이 테이블은 짙은 자코비언 스타일 가구였는데 같은 스타일의 가구 세트를 완성하기 위해 경매에 나온 사이드 보드를 샀다. 하지만 신혼집엔 이 가구들을 놓을 자리가 없었고, 이것을 계기로 새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집을 짓는다는 소문이 나자, 인근 조선인들이 이것을 막기 위해 우차를 뒤집고 무당을 동원해 저주를 했다. 부부가 사들인 부지엔 권율 장군의 신성한 은행나무와 두 개의 공용 우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딜쿠샤는 일본 경찰의 보호 아래 완공됐다. 현재 그들의 손녀 제니퍼는 조부모의 생애와 집에 얽힌 역사를 영화화하기 위해 딜쿠샤 프로덕션을 설립해 한국인 제작자를 물색 중이다. <신>     
 

※ 참고문헌
유제연, <행촌동 알버트 테일러 가옥의 건축과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 : 현황실측과 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2014
허유진, <20세기 초 서울의 서양식 저택 연구 : 현존하는 7채를 중심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2013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계엄 비선’ 노상원·명태균 오버랩

‘계엄 비선’ 노상원·명태균 오버랩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이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을 통해 윤석열 대통령의 안보 공약과 정치적 스탠스 등에 조언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와 직접적으로 연락하면서 국정 전반에 개입한 의혹을 받는 명태균씨의 모습과 맞닿아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군 인사뿐만 아니라 국방정책과 사업에까지 손을 댔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통상 비선 실세는 외부서 활동한다. 대통령으로부터 보직을 받지 않았음에도 최측근으로 꼽히는 인사들과 정부의 정책과 정치적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윤석열정부서 이 같은 행위를 한 이들은 주로 ‘무속 관련자’들이었다. 정치 브로커 명태균씨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등도 정부 정책 및 인사에 개입한 의혹의 당사자들이다. 안보 분야 대책 조언 노 전 사령관은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을 통해 안보 공약이나 지지율 상승 방안 등을 조언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5일 <한겨레> 단독 보도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11일 경찰 조사에서 “(2022년)윤 대통령이 대선 캠프를 구성했을 때, 김 전 장관이 제게 일을 도와달라 부탁했는데 성 관련 범죄 경력 때문에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며 “(그 대신에)대선 토론 때 안보 관련 분야 질문 및 답변 내용에 대해 초안을 잡아주면, (상대 후보의)역공 대비 등 세밀히 검토해서 수정하는 작업을 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윤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김 전 장관이)‘대통령 지지도를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냐’고 묻길래 ‘검사 출신이라 말이 친화적이지 않다. 국민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줘라’고 했다”며 “(시장에 가서)생선 같은 것도 만지면서 친근하게 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광주 5·18(행사)에 참석해라. 그들도 같은 국민”이라며 “일단 내려가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라 건의해라. 이왕 대통령이 됐으면 전라도도 품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실제 윤 대통령은 지난 2023년 7월엔 부산엑스포 유치 홍보를 위해 부산을 찾은 뒤 자갈치시장서 붕장어를 맨손으로 만졌다. 또 2022년 5월 취임 이후 지난해까지 3년 연속 광주를 찾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노 전 사령관은 “나중에 티브이(TV)를 보니까 제 말대로 다 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 같은 상황을 볼 때 윤 대통령은 노 전 사령관의 존재를 수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적지 않은 도움을 받은 김 전 장관은 노 전 사령관을 윤 대통령에게 인사시키려 했으나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이 몇 번 (윤 대통령에게 자신을) 인사시키려 했는데, 저 스스로 성 관련 범행에 대한 멍에가 있어서 안 본다고 했다”며 “(김 전 장관이)군인공제회 산하단체 비상근 사외이사 자리를 주겠다고 했는데 (국회)국방위원회서 다 밝혀질 거라 사양했다. 공기업 임원 얘기도 했지만 같은 이유로 사양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의 의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노 전 사령관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국방사업에도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지난 1월16일 “12·3 내란 핵심 주동자인 김용현(전 국방부 장관), 노상원(전 정보사령관), 여인형(방첩사령관), 김용군(예비역 대령)은 방위산업을 고리로 한 경제공동체”라고 주장했다. 추 의원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 2022년 김 전 장관이 경호처장 시절 그의 영향력으로 국가정보원 예산 500억원이 육군 전자전 무인 정찰기(UAV) 사업 예산으로 편성 추진했다. 당시 이 예산은 ‘김용현 처장 꼬리표 예산’으로 불렸다는 게 추 의원의 주장이다. 노, 윤 대선후보 시절부터 감 놔라 배 놔라 실제 김 통해 일부 이행…윤 직접 접촉 시도 추 의원은 “2023년 이 사업에 도입될 기종은 노상원이 (당시)재직 중이던 일광공영이 국내 총판인 이스라엘 항공우주산업(IAI)의 헤론으로 결정됐다. 일광공영은 무기 중개상 1세대로 불리며, 2000년 러시아 무기 도입 사업인 불곰사업으로 유명한 이규태가 운영하는 방산업체다. 노 전 사령관은 최근 3년간 일광공영에 근무했다”고 말했다. 통상 무기체계 등 전력사업은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가 관리한다. 그러나 해당 사업은 당시 육군 정보작전참모부장이던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 사업은 예산이 편성되지 않아 중단됐다. 추 의원은 노 전 사령관과 윤 대통령 일가와의 연결고리 의혹도 제기했다. 그는 “노상원은 이미 2015∼2016년 박근혜정부 때부터 김충식과 후원을 주고받는 관계였다”며 “김충식은 윤석열의 장인 행세를 하는 분이고, 장모 최은순 여사와 사적인 관계 또는 경제공동체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노 전 사령관은 국방·안보 분야 조언에 그쳤다. 명씨는 정부 사업과 정치 권력 전반에 영향을 끼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굳이 둘을 놓고 비교하자면 노 전 사령관보다 명씨의 비선 실세 서열이 한 수 위인 셈이다. <시사IN>이 공개한 윤 대통령 일가와 명씨의 카카오톡·텔레그램 대화 원본을 보면 명씨는 사실상 국회의원 후보 선정과 경제 사업 추진에 판을 짜는 플래너였다. 실제 명씨는 지난 2021년 7월 윤 대통령이 국민의힘에 입당하기 전 이뤄진 국민의힘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 당시 국민의힘 대표였던 개혁신당 이준석 의원과 가진 비공개 회동부터, 그 이후 진행된 윤 대통령의 정치인 접촉을 주도했다. 이 의원과 윤 대통령의 회동 당시 김 여사는 JTBC가 보도한 ‘윤석열·이준석 비공개 회동’ 기사 링크를 보냈다. 김 여사는 명씨에게 “큰일이네요. 왜 준석씨가 이렇게까지 발설했을까요. 남편에게는 완전 악재인데요ㅠ”라며 “선생님(명태균씨)께서 단단히 말씀하셨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닮은 듯 다른 듯 이들은 대선후보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를 각각 여러 차례 주고받았다. 명씨가 윤 대통령 부부에게 여론조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그 대가로 2022년 6월 보궐선거서 국민의힘 김영선 전 의원 공천을 받았다는 의혹이 ‘명태균 게이트’의 핵심이다. 명씨는 윤 대통령의 일정과 행보에 대한 사후 보고, 평가, 조언도 김 여사에게 더 자주 했다. 예시로 2021년 7월29일, 명씨가 김 여사에게 윤 대통령의 부산 방문 당시 실언한 점을 포착한 영상 보도 링크를 보냈다. 당시 윤 대통령은 이한열 열사가 새겨진 1987년 6월 항쟁 기념 조형물을 보고 ‘1979년 부마항쟁이냐’라고 물어 논란이 된 상황이었다. 명씨는 말실수를 한 윤 대통령이 아닌 김 여사에게 메시지를 보내 “미리 방문하는 곳 학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2021년 9월17일과 18일, 20일에는 명씨가 김 여사에게 윤 대통령의 경북·경남지역 방문 관련 반응이 담긴 언론 기사와 여론조사 결과를 보냈다. 명씨는 이와 관련해 윤 대통령의 일정을 자신이 기획했다고 검찰에 진술하기도 했다. 명씨는 자신의 ‘기획물(지역 방문 일정)’ 결과를 김 여사에게 보고했다. 특히 윤 대통령의 경남 일정 이후 ‘창원 전·현직 도·시의원 33명이 윤석열 지지를 선언했다’는 내용의 기사 링크도 김 여사에게 먼저 보냈다. 대선 캠프에 소속되지 않은 명씨가 후보 일정에 개입한 것이다. 특히 명씨는 검찰서 자신이 기획한 경남 일정 가운데 창녕 방문을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당시 창녕 방문이 윤석열 후보자에게 가장 중요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창녕은 국민의힘 대선 경선 경쟁자인 홍준표 당시 예비후보의 고향이다. 홍 후보를 견제하기 위해 창녕 방문 일정을 넣었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입 열면 쑥대밭 명씨는 윤석열 캠프 인사 개입 의혹도 받는다. 명씨와 김 여사의 대화를 보면, 이 의혹 역시 두 사람으로부터 시작됐다. 명씨가 김 여사와 캠프 인사 문제를 상의했고, 그 결과가 일부 실현된 사실이 확인된다. 2021년 7월16일 김 여사는 명씨에게 황준국 전 주영국 대사 프로필을 공유했다. 그러면서 “후원회장으로 어떤가요? 이권과 연결도 안 돼있다”고 했다. 김 여사가 명씨에게 이 메시지를 받은 다음날인 7월17일, 황 전 대사는 윤석열의 후원회장으로 위촉됐다. 정통 외교관 출신 인사가 대선후보 후원회장을 맡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2021년 7월19일에는 명씨가 김 여사에게 임태희 경기도교육감 프로필을 보냈다. 그러면서 ‘총장님께서 물어보신 임태희 실장’이라며 장문의 설명을 덧붙였다. 윤 대통령이 먼저 명씨에게 임 교육감 세평을 물었는데, 명씨는 그 답을 윤 대통령이 아닌 김 여사에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 교육감은 2021년 12월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총괄상황본부장을 맡았다. 한 달여 뒤에는 명씨가 김 여사에게 자신이 국민의힘 의원이었던 박완수 경남도지사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캡처해 보냈다. 박 지사는 “명 대표 나도 많이 도와주세요”라고 말했고, 8월1일 “윤 총장 전화 왔습니다. 열심히 할게요”라고 말했다. 7월31일, 명씨는 윤 대통령에게 박 지사 연락처를 전달하면서 “전화하면 총장님을 돕겠다고 할 것”이라고 했다. 이후 8월6일 박완수 당시 의원은 명씨와 윤 대통령 자택인 서울 아크로비스타에 방문했고 윤 대통령과 사진도 찍었다. 이 같은 명씨의 영향력이 정치권서 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한 이후에도 두 사람은 연락을 주고받았다. 2023년(연도 추정) 4월6일 김 여사가 명씨에게 ‘김건희 여사, 명태균과 국사를 논의한다는 소문’이라는 제목의 정보지 글을 공유했다. 김 여사가 천공 스승과 거리를 두고 명씨와 국사를 논의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노·명 전부 무속 의혹 제기 “여사 연결고리?” 명, 침묵하는 노와 대조적 “30명 죽일 수 있다” 윤 대통령이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명씨의 조언 때문이었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명씨는 웃으며 “세상에 천벌 받을 사람들이 많네요”라고 했다. 4월15일에는 명씨가 김 여사에게 네잎클로버 사진을 보냈다. 명씨는 “여사님 행운의 징표인 네잎클로버를 발견하고 여사님께 보내드린다”며 “윤석열정부 꼭 성공한 정부가 될 겁니다”고 했다. 김 여사는 V자 손가락 이모티콘으로 화답했다. 노 전 사령관은 가장 논란이 된 이른바 ‘노상원 수첩’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검찰 조사에서까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국지전 유도와 북풍 공작 등의 음모론 같은 의혹은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명씨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검찰 조사에 임하면서 국민의힘과 윤 대통령 일가의 ‘뇌관’을 자처하고 있다. 창원구치소에 수감 중인 명씨는 최근 노영희 변호사와의 접견서 “국민의힘 주요 정치인 30명을 죽일 수 있는 카드가 있다”며 “내가 한 말은 전부 증거가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명씨와 연루 의혹이 있는 인사들이 정치권 내에서 이른바 ‘명태균 리스트’로 분류되긴 했지만, 명씨가 직접 숫자를 밝힌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명씨 관련 의혹을 폭로한 강혜경씨는 지난해 10월 명씨와 연관됐다고 주장하며 여야 정치인 27명 명단을 공개하기도 했다. 명씨의 정치권 인맥은 ‘황금폰’이라고 불리는 명씨 휴대전화서 일부 포착된 적이 있다. 검찰은 지난해 12월 명씨의 휴대전화를 넘겨받아 포렌식을 진행했다. 당시 검찰은 명씨의 휴대전화에 연락처가 저장된 전·현직 정치인 140명을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명씨 측 남상권 변호사는 지난달 13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서 “명씨 황금폰 포렌식 과정서 너무 많은 정치인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며 “명씨 휴대전화에 저장된 전·현직 국회의원이 140명이 넘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황금폰 포렌식 명씨는 “내가 최재형 전 감사원장을 국무총리로, 이준석 의원을 미국 대북특사로 추천을 했었다”면서 “당시 국민의힘 관련 윤한홍, 박완수, 김영선, 김종인 등에 대한 자료가 많다”고 유력 정치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특히 명씨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홍준표 대구시장에 대해 “(이들에 대해)얘기할 것이 아주 많다”며 “민낯을, 껍질을 벗겨 놓겠다”고 거친 언사를 쓴 것으로도 파악됐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