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딜쿠샤요? 그게 뭡니까?” 행촌동에서 40년을 살았다는 중년 남자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지도를 보여주며 재차 물었다. “일제강점기에 미국인 기자가 살았던 집이에요. 국가문화재로 지정된다고 하던데요”. 남자는 지도를 들여다보더니 “근처에 홍난파 가옥은 있는데…”라며 기자를 안내했다. 1930년 건립된 홍난파 가옥까지 오자 길게 뻗은 외길을 따라 언덕 위로 붉은색 2층 벽돌집이 보였다.
40년을 한 동네에서 산 주민도 잘 모르는 ‘귀신 나오는 집’ 딜쿠샤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옆엔 권율 장군 집터 자리에 460살 먹은 은행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서 있었다. 1920년 이 곳을 처음 찾은 테일러 부부도 이 나무를 보고 바로 옆에 집을 짓고 싶어 했다. 100여년 사이 풍경은 급격히 변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은행나무와 근처 홍난파 가옥, 서울성곽, 테일러가 수감됐던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은 그대로다.
40년 거주민도
“몰라요∼”
경고 안내문이 붙은 딜쿠샤 외벽은 아직도 붉은색 프랑스식 벽돌이 선명했다. 아치형의 높은 창문과 널따란 포치도 인상적이었다. 지난해 초 안전진단에서 재난위험시설에 해당하는 D등급을 받아 임시 보강작업을 했다고 하지만 한눈에도 긴 세월을 견뎌온 온 것이 느껴졌다.
원형 복원이 가능할지 첫눈에 의구심이 들었다. 외부인 출입 자제를 당부하는 문구와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는 문구가 동시에 눈에 띄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목조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
내부는 6·25 전후로 시작된 오랜 무단 점거로 원형을 잃고 쪽방으로 잘게 나눠져 있었다. 앨버트의 부인 메리가 서 있던 넓고 화려한 거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삐거덕거리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르자 전면의 넓은 유리창에서 한줌 빛이 새어 들어왔다. 2층으로 올라가는 코너에 공용화장실이 보였다.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니 합판에 비가 새 얼룩진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2층은 1층보다 더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2층 입구의 격자문은 언제 설치된 것일까. 좁은 복도를 따라 방들이 나란히 나눠져 있다. 달력도 있고 공연 포스터도 붙어 있다. ‘CCTV 작동 중’이라는 붉은색 경고문도 눈에 띈다. 방송에서 여러 차례 다큐 등으로 소개되면서 사람들이 몰린 후로 맘 편히 집 밖을 나서본 적이 없다는 입주민의 하소연이 떠올랐다.
서둘러 나오면서 발바닥을 들어보니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집에 빠듯한 살림살이일지언정 나름대로 깨끗이 쓸고 닦는 부지런함이 느껴졌다. 한때는 2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9가구만 남았다. 젊은이 둘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70대 노인이다.
일제강점기 미국인 기자 부부 거주
경고문 붙은 외벽 붉은벽돌이 선명
서울시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3월1일 개관을 목표로 딜쿠샤를 복원할 예정이다. 이 집에 3·1운동을 외부 세계에 알리고 그 해 4월 일어난 제암리 학살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아마추어 기자 겸 금광업자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와 가족이 살았다.
아내 메리는 1920년 초, 성벽 산책길에서 은행나무가 있는 평평하고 높은 언덕을 발견하고 남편을 졸랐다. 첫 소유주인 미국인 엘리어트가 얼마 후 사망하자, 서양인들의 토지매매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어느 날 밤 서양인 클럽에서 포커를 치며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 테일러는 4752평의 대형 필지를 10만엔(현재 가치 20억원)에 매입했다.
딜쿠샤의 건축가는 밝혀지지 않았다. 메리(1889∼1982)의 자서전 <호박 목걸이>(Chain of Amber, 1992)에서 집을 설계하기 위해 필지를 방문할 때 건축가와 동행했다고만 나와 있을 뿐 건축가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딜쿠샤는 배우 출신인 메리가 세계 순회공연을 할 당시 방문했던 인도 러크나우 지역에 있던 궁전의 이름이다. 메리는 이때 집을 갖게 되면 딜쿠샤로 이름 붙이겠다고 마음먹었다.
딜쿠샤는 ‘이상향’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의 힌두어다. 1924년 집이 완공되자 대리석 주춧돌에 ‘DILKUSHA 1923’이라고 새겼다. 영국과 미국 주택 양식이 혼합된 형태로 지하 1층∼지상 2층, 총면적 624㎡(189평) 규모다. 최초엔 지상 3층으로 건립됐으나 1926년 벼락에 의한 화재로 중건하면서 2층에 그쳤다.
테일러는 광산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조선에 들어와 평안도의 운산 금광 감독관을 지내고 충청도의 직산 금광을 직접 운영했다. 1919년 2월28일 외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태어난 경성 세브란스 병원에서 침대 밑에 숨겨진 3·1 독립선언서를 발견하고 이것을 남동생 편에 몰래 일본 도쿄 AP통신사에 보내 전 세계에 알렸다.
그 공로로 AP통신 임시특파원이 돼 민족지도자의 재판과정을 취재, 보도했다. 그는 태평양전쟁 개전으로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되기 전까지 딜쿠샤에서 20여년을 살았다. 1948년 심장마비로 숨지면서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부친과 함께 마포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안장됐다.
기본 원형 잃고
쪽방으로 잘려
2006년 외아들 브루스(1919∼2015)가 이곳을 찾기까지 사람들은 집에 얽힌 사연을 전혀 몰랐다. 그저 행촌동민들 사이에서 미국인 기자가 살던 곳이라고만 전해 내려왔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양기탁과 어니스트 베델이 발행한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 잘못 추정되기도 했다.
브루스가 찾아오면서 아버지 앨버트의 행적과 가옥의 내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손녀인 제니퍼 테일러가 지난 2월28일, 아버지의 생일에 맞춰 딜쿠샤를 방문하기도 했다. 현재 서울시는 원형 복원 후 부근 경교장과 서대문형무소, 서울성곽 등을 아우르는 도보관광 벨트, 행촌권역 성곽마을 조성을 계획 중이다.
1963년 국유화 되기 전부터 이곳은 무주택 서민들의 공동주택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건축주의 역사적 행적과 근대 서양식 주택이라는 건축사적 가치를 동시에 갖고 있음에도 딜쿠샤는 복원은 물론 보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현재 가옥은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기획재정부로부터 위탁받아 관리 중이다. 지난해 초, 거주자들의 안전을 우려해 임시 보강 공사를 하고 지붕에 두꺼운 비닐막도 씌웠다.
현 거주자들을 무단 침입 내지는 무단 거주라고 규정하기도 쉽지 않다. 거주자들이 다음 입주자들에게 돈을 받고 ‘거주권’을 넘기는 관행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지난 21일 만난 한 입주자는 1977년 들어와 현재까지 40년을 살았다고 했다.
그는 “무단거주라고 언론에 보도되면서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지 걱정된다”라며 “아버지께서 당시에 돈을 주고 들어왔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요즘은 주말이면 사람들이 몰려서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다”고 조심스럽게 밝혔다.
1980년대 말 신문기자와 함께 딜쿠샤를 처음 찾았다는 한 건축사학자는 “붉은 벽돌집으로 자세히 보면 근사하고 흔한 건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면서 “누가 설계했는지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 최초에 조사하고 신문에도 나니까, 언론학, 건축학을 하는 학생과 연구자들이 가끔 찾아갔다”고 설명했다.
국유화 전부터 서민들 공동주택 사용
3·1운동 100주년 2019년 목표로 복원
이어 그는 “처음 방문했을 때 동네사람들이 미국인 언론인이 살았던 곳이라고 말했었다”며 “그 덕분에 살아난 거다. 일본인 집이었다고 하면 벌써 없어졌을 거다. 살려보자고 계속 어필했다. 이번에 복원계획을 발표한 후에 지난 회의 때도 현장조사를 해서 역사성을 담기로 결정했다. 테일러 일가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거다. 테일러의 자료들이 일부 드러났다”고 덧붙였다.
그는 “원형 복원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가능하다. 잘 고칠 수 있다”며 “최선을 다할 수 있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현재 딜쿠샤 가옥은 종로구(재난위험시설지정 및 관리), 서울시(복원 및 운영주체), 기획재정부(현 관리청), 문화재청(국가문화재 등록권자) 등 관여 주체가 여러 곳으로 나눠져 있다. 딜쿠샤는 외관은 벽돌집이나 구조는 목조다. 늘 화재 위험과 붕괴 위험이 있기에 이주대책이 시급하다.
“이주대책에 대해 정부에서 들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앞서의 입주자는 “들은 것은 딱히 없다. 3년 전에 주민센터에서 전세자금 대출을 제안한 적은 있지만 여기 사람들은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이 없다”고 답했다. “대책위를 구성한다던지 논의를 한 적은 없느냐”는 질문엔 “논의한 적은 아직 없다. 다들 법도 잘 모르고 귀도 어둡고 몸도 불편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이어 “시에서 낮에 몇 번 방문한 것 같다. 우리가 먼저 함부로 말하긴 어렵다. (서울시에서) 먼저 얘길 해야지 우리가 어떻게 해달라고 말 못한다. 이왕 할 거면 조속히 말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또 “우리도 언론보도를 보고 안다. 우리에게 직접 얘기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손녀가 온다는 것도, 국가문화재로 지정된다는 것도, 관광코스로 개발이 된다는 것도 모두 신문을 보고 알 뿐”이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또 다른 주민은 “빠듯한 사람들이 막상 나가라면 나갈 수 없다. (관계 부처에서) 서로 미루는 것만 같다. 서울 집값이 한두 푼도 아니고 갑자기 아무 연고도 없는 지방에 가서 살 수도 없지 않나”라며 근심을 드러냈다.
무작정 퇴거?
이주대책 논의
서울시 관계자는 “무작정 퇴거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주대책을 마련해 설득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며 “강제적으로 진행할 계획은 전혀 없다.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환경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인근에 임대주택을 알아보고 있다. 시에서 전문상담인력을 따로 구성해 면담을 조심스럽게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 7차례 면담을 하고 의견을 취합하고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shi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딜쿠샤는?
테일러가의 안주인 메리 린리 테일러는 영국 첼트넘의 부유한 가정 출신이다. 연극배우로 동양 각지를 순회하던 중 일본에서 앨버트를 만나 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1917년 9월, 경성에 왔다.
부부는 처음엔 서대문 근처에 신혼집을 짓고 살았다. 메리는 자서전에서 최초의 집을 ‘서대문의 작은 회색집(The little grey home at West Gate)’이라고 불렀다. 1920년대 초, 늘어나는 살림과 새로 장만한 가구를 수용할 만한 공간이 없어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당시 경성에 거주하던 서양인들 사이엔 ‘가구 세트’를 맞추는 것에 대한 경쟁의식이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먼저 거주하기 시작한 서양인들의 가구 세트가 다른 소유주에게 넘어가면서 각기 흩어지게 됐다. 1920년대엔 각 가정에서 다시 가구 세트를 모으는 일에 열중했다. 테일러 부부는 1919년 죽첨정 1정목 18번지에 위치한 벨기에 영사관이 문을 닫으면서 남긴 다이닝룸 테이블을 구입했다. 이 테이블은 짙은 자코비언 스타일 가구였는데 같은 스타일의 가구 세트를 완성하기 위해 경매에 나온 사이드 보드를 샀다. 하지만 신혼집엔 이 가구들을 놓을 자리가 없었고, 이것을 계기로 새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집을 짓는다는 소문이 나자, 인근 조선인들이 이것을 막기 위해 우차를 뒤집고 무당을 동원해 저주를 했다. 부부가 사들인 부지엔 권율 장군의 신성한 은행나무와 두 개의 공용 우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딜쿠샤는 일본 경찰의 보호 아래 완공됐다. 현재 그들의 손녀 제니퍼는 조부모의 생애와 집에 얽힌 역사를 영화화하기 위해 딜쿠샤 프로덕션을 설립해 한국인 제작자를 물색 중이다. <신>
※ 참고문헌
유제연, <행촌동 알버트 테일러 가옥의 건축과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 : 현황실측과 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2014
허유진, <20세기 초 서울의 서양식 저택 연구 : 현존하는 7채를 중심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