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조종사 ‘귀족노조’ 논란

회사 사정 뻔히 알면서도 돈타령만…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연초부터 항공사들이 뒤숭숭하다. 아시아나가 희망퇴직과 인력재배치를 통해 500명의 인력을 구조조정하기로 한 데 이어 대한항공 조종사노조마저 37%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비난 여론이 일고 있다.

지난해 말 대한항공 일반노조는 사측과의 임금협상에서 1.9% 임금인상에 합의한 반면, 그 직후 이뤄진 조종사노조와의 임금협상에선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지난 19일 최종 결렬됐다. 이에 조종사노조는 단체행동권 행사 여부를 놓고 지난 12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하고 있다.

노사 힘겨루기
파업투표 결과는?

노조 홈페이지에 따르면 27일 현재, 조합원 1085명 중 960명이 투표에 참여해 88.48%의 높은 참여율을 보이고 있다. 조종사새노조(소수노조) 소속 조합원 65명도 투표에 참여해 힘을 보태고 있다.

일부 언론에선 해당 투표에 대해 파업 여부를 결정하는 ‘파업 찬반투표’라고 보도하고 있으나 쟁의행위엔 파업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기에 꼭 노조가 파업을 염두에 두고 투표를 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찬성 결과가 나올 경우 노조는 태업, 보이콧, 피케팅 등을 비롯해 ‘합법적인’ 파업이 가능해진다.

19일 조정이 최종 결렬되자, 다음날인 20일 승무원 및 사무직 등 20여개 직종 일반직들로 구성된 일반노조에서 조종사노조를 비판하는 성명을 내 눈길을 모았다. 일반노조는 성명서에서 “조종사노조의 주장은 절박한 생존권 요구가 아니다”라고 강조한 후 “조종사노조의 쟁의 관련 찬반투표는 자신들의 명분만을 내세운 것으로, 파업에 따른 피해를 동료에게 강요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일반노조는 또 “2005년 조종사노조 파업으로 200편 이상 항공기 운항이 취소됐다”며 “조종사노조는 국민적 호응을 얻어내지 못한 '귀족노조'가 됐다. 당시 일반직들이 승객들의 항의를 받으며 직종 간 이질감이 커졌는데 이번에도 조종사노조가 객실, 정비, 운송, 예약, 판매 등 20여개 직종에 대한 배려 없이 파업을 준비한다”고 지적했다.

10여년 전인 2005년 당시 조종사노조가 파업하면서 나머지 직종들이 고객들의 거센 항의를 받는 등 피해와 부담을 떠안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200편 이상의 항공기 운항이 취소되면서 조종사노조의 파업은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비난 여론만 들끓었다. 

일반노조 관계자는 <일요시사>에 “2005년 당시에 발권·운송직원들이 승객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뺨을 맞는 등 불편을 많이 겪었다”며 “(성명 발표는) 당시 여파로 인해 단체행동권을 신중히 검토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다음날인 21일엔 조종사노조가 일반노조의 성명에 답했다. 조종사노조는 성명서를 내고 “외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대한항공 직원들의 글을 보면 회사가 써준 글(성명서)에 도장만 찍은 것 아니냐는 등 일반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 다수 있다”며 “일반노조가 사측에 위임해 결정한 임금인상률 1.9%를 조종사노조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조종사 예년 10배 넘는 연봉인상 요구
논란 일자 다른 노조와 분배 의사 밝혀

지난 25일엔 대한항공 내 소수 노조인 조종사새노조가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집회를 열어 “회사는 조종사를 무시하는 협상안을 즉각 철회하고 온당한 대우를 제시하라”며 임협에 성실히 임할 것을 촉구했다. 교섭대표 노조인 조종사노조가 진행하고 있는 임금협상에 힘을 실어 준 것으로 보였으나, 지난 26일 오후 새노조는 “찬반투표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선을 그었다.
 

대신 “다수노조(조종사노조)와 사측이 적극적으로 교섭에 임해 좋은 안건이 나올 수 있도록 중재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새노조 관계자는 “임금협상에 참여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종사노조가) 쟁의에 참여하자고 하니까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찬반투표에 참여하는 과정도 마음이 아팠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현 노동법에선 복수노조의 경우 교섭창구단일화를 강제하고 있기 때문에 760여명의 조합원이 소속된 새노조는 소수 노조로서 임협에 참여할 수 없다.

이렇듯 대한항공 내 타 노조들은 조종사노조의 단체행동권 행사에 찬성하지 않는 모양새다. 대한항공 조종사의 최근 3년간의 임금인상률은 2012년 4.0%, 2013년 동결, 2014년 3.2%다. 다수노조인 조종사노조는 예년의 10배가 넘는 인상률을 요구하고 있다. 대한항공 소속 조종사의 평균연봉은 1억4000만원대로 이는 근로소득자 상위 1%에 속한다. 전체 조종사 2500명(비조합원 포함) 1인당 평균 5200만원씩을 올려 달라는 요구다.

이런 가운데 조종사노조는 임금이 인상되면 인상분을 일반노조와 나누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사업장 내 타 노조와의 갈등을 없애고 사업장 밖에서도 귀족노조 지탄을 피하기 위해 ‘임금인상분 나누기’ 카드를 내놓은 것.

조종사노조 관계자는 “회사와 조정회의에서 만났을 때 조정관한테 그렇게 말했다”며 “만약 10%를 올려준다면 일반노조와도 다 같이 나누자, 다 같이 합쳐서 동일 조종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상분 나눈다
시큰둥한 직원들

그러나 일반노조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일반노조의 한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터무니없는 얘기”라며 “노조 수뇌부에서 그런 말을 했다고 들었다. 맞지 않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애초에 조종사노조의 ‘37%’ 임금인상안은 한 경제지의 오보로부터 시작했다. 지난해 대한항공 등 한진그룹 계열사들의 3분기 실적이 발표되자, 모 경제지가 조양호 회장의 급여인상률을 37%로 잘못 계산해 보도한 것. 이에 노조 측도 조 회장과 같은 수준의 급여인상을 요구하고 나섰으나 곧 오보임이 밝혀졌음에도 요구를 철회하지 않았다. 실제 조 회장의 임금인상률은 1.6%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조종사노조 관계자는 “죽을 만큼 어려운데 올려달라고 하는 건 아니다. 그 정도 상식은 있다. 회사가 하는 인사, 노무관리에 대한 신뢰가 많이 떨어져 있다. 회사는 노력을 한다고만 하고 보여주는 것이 없다”면서 “그동안 교섭에선 10% 안팎에서 요구하지만 실제 결과에선 2∼4%대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늘 갭이 있다. 조종사들뿐 아니라 일반직 처우에 대한 불만도 있고 저유가시대에 구조적 문제만 아니면 회사가 상당 부분 이윤을 돌려줄 수 있었다. 조종사 시세 형성도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오너들이 행하고 있는 부도덕상은 직원에게 돌리고 자기들은 가져가고 있다. 회사가 제시한 대로 안 받아도 된다. 처우나 인식에 대해 분개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사측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을까. 사측은 언론과의 접촉에서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사측 관계자는 “19일 결렬 이후에도 창구는 늘 열어 놓고 있지만 별다른 접촉은 없다”면서 “열린 자세로 대화를 계속하고 싶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기본급과 비행수당을 합해서 1.9% 이상은 어렵다는 것이 회사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파업 가능성에 대해선 “정상적인 운항에서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면 미미하다고 할 수 없다”며 “부분파업을 해도 항상 피해가 발생한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앞서의 조종사노조 관계자 역시 “필수 공익사업장이기 때문에 파업은 금방 할 수 있는 사항은 아니다. 근무를 하면서 회사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지난 2005년 대한항공 조종사 파업 이후 정부는 항공사를 필수 공익사업장으로 지정하고 국제선은 80% 이상, 국내선 중 제주는 70%, 나머지 지역은 50% 운항률을 유지하도록 법으로 정했다. 조종사노조가 파업을 결행하더라도 그 효과가 크지 않을 것으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균연봉 1억4000만원…근로자 상위 1%
“1인당 5200만원씩 올려달라” 주장 빈축

노사가 각자 입장만 내세우고 힘겨루기하면서 정작 그 틈바구니에서 피해는 고스란히 고객의 몫으로 돌려지게 된다. 오랫동안 사업장 내외부에서 줄곧 지적돼왔던 ‘조종사 수급 문제’도 점점 악화돼왔다. 이로 인해 단체협약에 위배되는 비행스케줄이 상시적으로 짜지면서 ‘안전문제’도 불거졌다.

실제로 대한항공의 한 직원은 “조종사 노조나 회사나 성실한 교섭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면서 “수차례 교섭을 해서 조율안이 나와야 하는데 서로 뜬구름만 잡고 있다. 그 사이에서 반사된 손해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대한항공의 조종사 퇴직자는 2013년 26명에서 2014년 27명, 지난해 140명으로 큰 폭으로 늘어났다. 46명이 중국계 항공사로 이직했고 94명이 저가항공사로 자리를 옮겼다. 아시아나항공 조종사 퇴직자도 2013년 48명에서 2014년 60명으로 늘었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김성태 의원이 국토교통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 국내에서 발생한 항공기 사고 48건 중 조사 중인 7건을 제외, 27건(65.9%)이 조종사 과실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적 항공기사고 원인의 3건 중 2건이 조종사 과실인 셈이다. 

국내 항공사는 한 해 평균 30여명의 조종사를 채용해왔으나 지난해 들어 대한항공은 105명을 채용했다. 늘어나는 이직자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조종사를 새로 뽑았다고 해서 당장 현업에 투입되는 것은 아니다.   

대한항공노조 관계자는 “채용 후에 제주훈련원에서 교육시킨 후 기종을 정해서 재훈련을 한다”며 “입사 후 1년 3개월은 지나야 현업에 투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안전문제 뒷전
피해는 승객 몫

결국 조종사가 이직하는 속도만큼 원활한 수급이 어려운 구조가 반복된다. 빠져나간 자리를 남은 조종사들이 메우면서 비행스케줄이 악화되면 이러한 피해는 고스란히 승객의 안전문제로 직결되고 안전문화가 자리 잡기 어렵다. 앞서 관계자는 “회사는 수급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단협을 위반한 비행 스케줄이 자주 발생한다”면서 “조종사 수급에 문제가 많다. 해결이 요원하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사측 관계자는 "이직 조종사 인원 이상으로 고경력 베테랑 조종사들을 신규 채용하고 있어 일부 우려와 같은 조종사 부족에 따른 우려는 없는 상황"이며 "전세계적인 조종사 이직 트렌드를 사전에 인지하여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채용채널을 다양화하는 등 오래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해 왔다"고 밝혔다.


<shin@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외국인 조종사 연봉은?

현재 대한항공 내에는 객실·정비·운송·예약·판매 등 20여개 직종에 종사하는 일반노조(1만600여명)와 조종사노조(1085명), 조종사새노조(760명) 등 3개의 노조가 있다. 조종사 중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인원이 200명가량으로 파악되고, 이외에 약 500명 안팎의 외국인 조종사도 노조에 가입하지 않았다.

새노조는 2013년 설립돼 올해로 4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90% 이상이 군 출신자로 공군사관학교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다. 다수노조인 조종사노조는 대부분 외국에서 훈련을 받은 뒤 자격증을 따고 경력을 쌓은 이들이다. 입사 후 제주비행훈련원에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군 출신자와 대비해 훈련원 출신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문제는 대한항공 측에서 군 출신 혹은 민간 출신 여부에 따라 인사와 승급체계에 차별을 둔다는 점이다. 군 출신자는 연봉이 더 높고, 기장 승급도 더 빠르다는 것. 전언에 따르면 이러한 차별로 인해 조종사 노조가 지난 2003년 2개의 노조로 분리됐다고 한다.

대한항공 내에선 입사 후 부기장을 거쳐서 기장이 될 때까지 평균 10∼14년 정도 걸린다. 요즘 조종사들의 이직률이 높은 것은 연봉 때문이기도 하지만 빨리 기장이 되고자 저가 항공사로 옮기는 조종사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기장으로 승급한 조종사들은 좀 더 높은 연봉을 바라고 중국계 항공사로 이직하지만 부기장들은 저가항공사로 이직해 기장승급을 노린다. 임금은 약 85%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약 500명 정도로 파악되는 외국인 조종사들은 비행시간은 한국인 조종사와 비슷한 반면, 임금 수준은 더 높다. 구체적인 각각의 연봉계약은 공개돼 있지 않으나 최근 한국인 조종사들이 불만을 품은 것도 같은 일을 하는데도 외국인에게 더 후한 연봉을 주는 회사의 차별이 한 몫 했다는 전언이다.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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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