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사회2팀] 박창민 기자 = <일요시사>가 연속기획으로 ‘신문고’ 지면을 신설합니다. 매주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좋습니다. <일요시사>는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겁니다. 열여덟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임대차 계약 기간이 남았고, 아직 보상에 관한 협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건설사의 강제철거 추진에 고통 받고 있는 빵집주인 박경배씨입니다.
지난 17일 오후 3시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병원 앞.
길 가던 행인들이 한 상가 건물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라는 표정이다. 상가는 폭격을 당했는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같다. 차양막과 아크릴 간판은 박박 찢겨 너저분하게 매달려있고, 그 위에는 새빨간 락카로 덧칠해 ‘철거’라고 쓰인 이상모를 낙서가 있다.
전기계량기 떼가
반쯤 닫힌 샷도어와 입구를 막아 놓은 그물 천 틈 사이로 보이는 빈 상가의 모습은 바로 옆 파리바게트와 대조를 이룬다. 파리바게트를 운영하고 있는 박경배씨는 “경동건설산업이 신축 때문에 철거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아직 계약기간이 남은 상가 임차인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며 “상가 일대를 흉가처럼 만들어놔 영업하는 데 지장이 아주 크다”고 말했다.
최근 사회적으로 임차인을 보호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다 이렇게까지 한 것일까. 박씨는 “경동건설산업이 임차인들과 협상이 잘되지 않자, 보복한 것이다”고 성토했다. 박씨는 애초 경동건설산업이 신축할 건물에 평당 2900만원으로 약 21평을 분양받기로 했다.
박씨는 “계약기간이 남아 보상의 일환으로 경동건설산업에서 일반 분양가보다 임차인들에게 싸게 분양해주겠다고 했다”며 “평당 3900만원으로 분양해주겠다고 하다가 얼마 후 3100만원, 또 다시 2900만원으로 낮춰서 제시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 변호사에게 계약이 문제가 없는지 자문했다. 그런데 변호사는 이 계약서가 박씨에게 한참 불리한 계약이라고 알렸다. 애초에 전용면적 21평을 분양 받기로 했는데, 공용면적이 무려 23평이나 됐던 것. 이 공용면적 화장실과 복도 등을 제외하더라도 박씨가 한 발짝도 안 쓰는 공용면적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이 계약에서는 박씨가 공용면적까지 모두 제 값에 분양 받기로 돼 있다.
임차인 상대 사기 의혹도
승인 받지 않고 사전분양
이 계약은 박씨에게 철저히 불리했다. 박씨는 “공용면적을 어느 정도 분양 받아야 되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쓰지 않은 공용면적까지 똑같은 가격으로 산다는 게 큰 손실이다”라고 주장했다. 만일 박씨가 계약서대로 공용면적을 분양 받는다면 관리비와 취득세, 등기비 등을 기존 상가보다 배로 지출하게 된다.
이런 탓에 박씨는 경동건설산업과 계약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자 경동건설산업의 행동이 돌변했다.
영업하는 상가 폐허 만들어 지난달 말 몇몇 임차인들이 상가를 떠나자마자, 용역 업체 직원들이 철거한다며, 빈 상가를 때려 부수기 시작한 것. 박씨가 바로 옆에서 영업 중인데도 불구하고 용역 업체 직원들은 망치로 벽을 두드렸다.
당시 가게를 보고 있던 박씨의 아내는 “건물이 흔들려 깜짝 놀랐다. 손님들도 놀라서 나가버렸다”고 말했다. 당시 박씨 아내는 용역 업체 직원들과 심한 말다툼을 했다. 박씨는 이때 놀란 가슴에 그날 밤 응급실까지 다녀왔다.
같은 상가에서 안경점을 운영하는 윤응순씨도 경동건설산업과 계약서에 사인까지 했다가 박씨와 똑같은 문제로 계약을 취소했다. 그러자 지난 6일 오전, 경동건설산업은 윤씨 상가의 전기계량기를 떼갔다. 윤씨는 즉각 경찰과 한국전력에 신고했다.
경동건설산업은 “앞서 윤씨와 계약하면서 작성한 합의서에 10월30일까지 나가지 않으면 단수 및 전력 차단을 한다고 밝힌 바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윤씨와 경동건설산업의 계약은 파기됐으며, 그 합의서도 효력이 없다는 게 법조인들 설명이다.
한 변호사는 “임차인에게 사용권이 있는 전기계량기를 떼간 행위는 명백한 업무방해죄와 재물손괴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며 “그 강제성은 명도소송을 통해 법 집행으로만 가능하다. 임대인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씨가 운영하는 안경점은 갑작스러운 단전으로 인해 기계가 고장났을 뿐만 아니라 일주일간 영업도 제대로 못했다.
박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차례에 걸쳐 용역 업체들이 빈 상가에 들어가 상가 유리를 깨부수거나, 해머로 벽 곳곳을 때려댔다. 상가일대는 흉물스럽게 변했고, 이런 탓에 손님들이 가게로 들어오는 발걸음은 뚝 끊겼다. 박씨는 “미관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부수기만 했다”며 “셔터만 내리면 될 것을 상가 자체를 공사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명백한 영업방해다”고 말했다.
불리한 계약 들통나자 돌변
영업하는 상가 폐허 만들어
박씨는 지난 5년 동안 이 가게를 위해 모든 재산을 쏟았다. 박씨는 파리바게트를 열기 위해 3억2000만원을 대출받았으며, 전세로 살던 아파트도 가게 근처로 이사 오기 위해 월세로 전환했다. 박씨에게는 이 가게가 전 재산이나 다름없다.
박씨는 “경동건설산업은 인심 쓰듯이 분양받으면 보상금으로 1억4500만원을 준다고 했는데, 설사 그 돈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가 그 상가를 분양 받으면 무조건 손실”이라며 “제대로 된 보상을 하지 않은 채 소상공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동건설산업은 임차인들을 상대로 분양사기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먼저 분양 승인이 아직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임차인을 상대로 분양가를 고무줄처럼 늘렸다는 점이다. 실제로 경동건설산업은 처음 협상할 당시 임차인들에게 3900만원을 제시했다.
하지만 박씨와 윤씨가 “말도 안 된다”며 손사래 치자 이들은 평당 2900만원까지 낮췄다. 박씨는 “그래 놓고 경동건설산업은 ‘안경집 사장님(윤씨)한테는 이 가격에 했다고 말하지 마세요’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밝혔다. 윤씨 역시도 계약 직전 당시 경동건설산업으로부터 비슷한 말을 들었다.
영등포 일대 인근 부동산중개소 관계자는 “보통 분양업자들이 많이 쓰는 수법”이라며 “초반부터 분양가를 높게 불러 일부러 깍게 만들어 생색내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동포구청에 확인한 결과 경동건설산업은 아직 분양승인을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담당 주무관은 “분양승인을 받지 않고 사전 분양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잘라말했다. 주택법상 ‘입주자공개모집 및 분양승인’ 절차 요건에 따라 사전 분양은 ‘등록말소’ 혹은 ‘6개월 이상의 영업정지’ 등 행정처분을 받을 수 있다.
“곧 단수” 으름장
한편 경동건설산업은 이번 일에 대해 “임차인들을 최대한 배려해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에 분양하려고 했다. 이미 더 비싼 가격에 분양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줄섰다”며 “임차인들이 계약하려고 했던 당시, 그 금액이 맞다고 판단해서 사인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결국은 임차인들이 돈을 더 받으려고 그렇게 오기를 부리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