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남아공월드컵 기획특집2>대기업, 도 넘은 월드컵 마케팅 대해부



한국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월드컵 개막과 함께 붉은 악마들이 거리로 나서면서 붉은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장관이 연출되고 있는 것. 특히 지난 12일 그리스 전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그 열기가 한층 뜨거워졌다. 이와 함께 기업들은 앞 다퉈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월드컵과 맞물린 광고효과가 어마어마한 것이 그 이유다. 이 과정에서 ‘깜짝 행사’나 ‘이색 이벤트’ 등 유쾌한 홍보행사도 눈에 띈다. 하지만 지나치면 아니한 만 못한 법. 기업 간 마케팅 경쟁이 과열되면서 월드컵의 주인이어야 할 시민들은 뒷전에 밀려나는 일도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불법 광고까지 공공연하게 등장하면서 세계인의 축제인 월드컵이 ‘기업들의 축제’로 변질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광고경쟁 과열에 시민들 발끈…“응원단 뿔났다”
불법옥외 광고도 버젓이…“벌금내면 되지 뭐!”

롯데백화점·롯데마트는 1등 당첨자에게 대표팀 한 골당 2000만원에 해당하는 상품권을 주는 경품 행사를 열었다. 1등 당첨자가 받을 수 있는 상품권은 4000만원. 12일 경기에서 대표팀이 두 골을 넣었기 때문이다.
현대백화점은 방문 고객 중 3명을 추첨해 ‘싼타페’ ‘YF쏘나타’ ‘아반떼 스페셜 에디션’ 한 대씩을 경품으로 제공한다.

롯데슈퍼는 4억원이 넘는 현금을 경품으로 내놨다. 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하면 100명에게 현금 120만원씩을, 8강에 진출하면 추가로 30명에게 240만원씩을 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처럼 4강에 진출할 경우 10명에게 2400만원씩을 추가로 증정할 계획이다.

‘남아공’ ‘심육강’ ‘한국승’
응원 이름 가진 사람에 경품

패션속옷 전문업체 ‘좋은사람들’은 보디가드, 예스 등 전국 300여개 전문점에서 구매고객들을 대상으로 대표팀이 1승할 때마다 구매금액의 10%를 포인트로 돌려주는 행사를 열고 있다.

‘깜짝행사’도 있었다. AK플라자 구로본점은 그리스전 승리에 따라 13일 하루 동안 아디다스,컨버스,피에르가르뎅,파코라반 등의 브랜드를 50% 할인된 가격에 판매했다. 갤러리아백화점 대전 동백점도 이날 오후 2시부터 커플 티셔츠와 축구화, 축구 유니폼을 추첨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지급했다.


‘16강 기원 이벤트’도 속출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한국이 16강에 진출할 경우 이달 말까지 파브 3D TV를 구매한 고객 중 총 333명에게 100만원과 월드컵 공인구 ‘자블라니’를 증정하는 이벤트를 펼치고 있다. 이 회사는 월드컵 특수를 겨냥해 보상판매 및 24시간 바로배송 서비스도 진행 중이다.

금융권은 대표팀 성적에 따라 우대 금리를 지급하는 행사를 마련했다. 외환은행은 1승 때마다 0.1%포인트씩 최대 0.3%포인트의 이자를 높여주는 ‘월드컵 특판예금’을 내놨다. 신한은행은 16강에 진출할 때 300달러 이상 환전 고객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금 상품 ‘골드리슈’ 50g을 지급하는 행사를 30일까지 열 예정이다.

이색 이벤트도 눈에 띈다. GS샵은 월드컵을 맞아 독특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는 이벤트를 벌였다. 이름에 ‘남아공’ ‘심육강’ ‘한국승’ 등 한국팀을 응원하는 메시지가 담긴 사람이 기업 블로그인 ‘리얼쇼핑스토리(blog.gsshop.com)’에 응원 메시지를 남기면 된다. 응모자 가운데 10명을 추첨해 응모자의 이름을 새긴 붉은 색 티셔츠와 16강을 기원하는 찰떡 선물 세트를 준다. JW메리어트 호텔도 ‘남아공’이란 이름을 가진 손님에게 20만1000원짜리 패키지 상품 객실을 하루 숙박료 436만원짜리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으로 바꿔준다. 260㎡(약 80평) 규모의 이 방은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회장과 성악가 안드리아 보첼리가 묵었던 방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월드컵 특수를 맞아 기업들의 마케팅이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가장 큰 수혜를 거둔 것은 다름 아닌 현대·기아차다. 월드컵 공식후원을 하면서 광고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것. 업계에 따르면 현대·기아차가 이번 월드컵을 통해 얻을 광고효과는 10조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매 경기당 A보드를 통해 기업로고가 노출됨에 따라 현대·기아차의 로고는 평균 13분가량 경기장에 등장하게 되며, 이 로고는 전세계 앞에 노출된다.

이번 월드컵을 TV로 시청하는 사람은 연인원 약 400억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히 재방송이나 하이라이트방송을 통해서도 현대·기아차의 기업로고는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그 광고효과가 막대하다는 분석이다.

현대차는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2006년 독일월드컵에 이어 3회 연속 FIFA를 공식후원하고 있다. 한·일 월드컵 때의 홍보효과는 6조원에 달했으며, 독일월드컵에서의 브랜드 노출효과는 7조원을 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메시, 호날두, 루니 등 스타들이 총출동해 초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이번 월드컵에서 현대·기아차는 홍보효과를 톡톡히 누릴 것이라는 관측이다.


현대·기아차가 이번 월드컵에 얼마를 투자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약 3000억∼5000억원 선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대·기아차로서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 투자금의 20배에 달하는 광고효과를 누리게 되는 셈.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월드컵 열기가 고조되고 있어서 고무적”이라며 “이번 월드컵을 통해 현대·기아차의 브랜드인지도가 크게 높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SBS 역시 최대수혜주 중에 하나다. 독점중계 논란으로 뭇매를 맞고 있음에도 입가엔 미소가 번져있다. 과거 월드컵에 비해 광고료가 많이 뛴 것이 그 이유다.

현대차 광고효과 10조
SBS 광고매출 1200억

한 증권사의 미디어 담당 애널리스트는 “방송 3사가 중계했던 2002년 월드컵과 비교하면 한국 경기의 광고료가 세 배 정도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SBS가 이번 월드컵 중계를 위해 쓴 돈은 1086억원 정도로 추산된다. 반면 광고 판매 등 매출액은 한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하더라도 최소 1200여 억원에 이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그럼에도 대기업들 대부분은 “과거보다 비싸긴 하지만 광고 효과를 생각하면 못 낼 액수는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그만큼 광고효과가 뛰어나단 소리다.

강명수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연구원은 “기업마다 차이가 있지만 월드컵 마케팅 효과는 투자비의 3배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월드컵 응원 특수를 노리는 기업체들의 ‘샅바싸움’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자사 브랜드를 부각시키기 위해 신사협정을 위배하는가 하면 경쟁업체의 광고효과를 반감시키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경우도 허다하다. 기업체들의 경쟁 속에 정작 월드컵 축제의 주인이어야 할 시민들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월드컵 응원의 메카인 서울광장을 둘러싼 기업들의 각축전이 대표적이다. 서울광장 행사는 당초 서울시가 조례에 따라 ‘기업 브랜드와 슬로건을 노출시키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진행될 예정이었다.

응원행사의 주관사인 현대자동차와 후원사인 SKT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장 응원가 지정 문제부터 불협화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 응원가가 경쟁 통신업체를 연상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 것. 결국 특정 기업을 연상시키는 대표곡들을 응원가에서 배제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뒤늦게 접한 붉은악마는 “마음 놓고 불러야 할 응원가조차 기업이 통제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마케팅이 중심에 있는 서울광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며 응원장소를 강남 코엑스와 봉은사 근처로 변경하는 등 웃지 못 할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불법광고물이 공공연히 등장하기도 했다. SK텔레콤은 중구 을지로2가 본사 외벽 유리창에 박지성 선수를 모델로 한 대형 광고물을 부착했다. 건물을 감쌀 정도로 커서 이른바 ‘래핑(Wrapping)’이라 불리는 광고물이다.


이는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과 시행령에 저촉된다. 옥외광고물법 등에 따르면 광고 현수막은 구청에서 지정한 게시대에만 걸어야 한다. 백화점, 대형마트 건물 등은 유통산업법에 따라 외벽에 광고현수막을 걸 수 있으나 그 외 건물에 광고현수막을 걸면 옥외광고물법 위반이다.

이 밖에도 교보생명은 광화문 본사 사옥에 가로 90m, 세로 20m 크기의 래핑광고를 부착하고 ‘한국 대표팀의 승리를 기원하는 초대형 래핑을 설치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불법이었다.

불법광고물 단속권한은 각 구청에 있다. 그러나 구청의 능력으로는 소형 현수막이나 불법 전단 정도를 단속할 수 있을 뿐 기업의 래핑광고나 초대형 광고현수막은 사실상 단속이 불가능하다.

서초구청 관계자는 “래핑이나 대형 현수막을 철거하려면 사다리차를 이용하거나 건물 옥상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야 한다”며 “그런 장비도 없거니와 있다 한들 공무원이 줄을 타고 내려오는 등의 전문 기술을 어떻게 익히겠냐”며 단속 상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결국 구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과태료 또는 이행강제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최대 500만원까지 밖에 부과할 수 없다.

이에 최근 서울 중구청은 해당 기업에 “이 광고물을 철거하지 않으면 최대 500만원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하겠다”며 계고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콧방귀만 뀔 따름이다. 래핑광고의 엄청난 효과에 비하면 벌금은 무시해도 될 만한 액수이기 때문이다.

종로구청 관계자는 “광고효과에 비해 과태료나 이행강제금이 터무니없이 적은 점을 기업이 악용하고 있다”며 “이를 막으려면 법을 개정해 광고효과에 버금가는 금액을 부담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업 응원가로 아웅다웅
‘시민들 뿔났다’

반면 기업 관계자들은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국가적 축제가 있을 때 설치하는 대형 광고물은 비록 불법이라도 공익적 효과가 적지 않다고 항변하고 나섰다.

구청에서 래핑광고를 철거하라는 통보를 받은 한 기업의 담당자는 “월드컵 분위기를 띄우고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특정 상품을 홍보하는 것도 아닌 만큼 대승적 차원에서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종로구청 담당자는 “건물에 래핑을 하거나 현수막을 걸어도 광고물이 아니라면 단속대상이 아니다. 공익을 강조하고 싶다면 로고나 상호, 기업을 연상하게 하는 문구를 빼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기업은 한 곳도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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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