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문화’ 독인가 약인가(2) 재계 쥐락펴락 개미들의 힘

재계에도 안티는 존재한다. 파면된 임직원이나 피해자들이 주류다. 당연히 상대는 기업. 잘나가는 회사라면 안티모임 하나쯤은 기본이다. 특히 굵직한 ‘사건’엔 항상 안티세력이 따라붙는다. 소비자 입장에선 신문고 역할이지만, 기업으로선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기업과 안티의 관계가 ‘공생이냐 기생이냐’하는 고민이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기업 안티문화는 갈수록 힘과 빛을 잃어가는 모습이다. 왜일까.

S사는 자사를 비방하는 안티모임으로 수년째 몸살을 앓고 있다. 한때 다음, 네이버 등 인터넷포털에 안티사이트와 카페가 속속 개설, 10여개가 넘기도 했다. 현재는 전직 임직원들이 운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한 모임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안티모임은 S사와 관련한 소비자 피해 및 불만 사례를 수집해 허위·과장 광고, 직원 채용 부작용 등을 비판하고 있다. ‘안티 S’운영자는 “카페는 어떤 이윤을 챙기고자 하는 모임이 아니다”라며 “S사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교류하자는 취지일 뿐”이라고 말했다.

“같이 싸워봅시다”
곳곳 집단행동 감지


S사 측은 안티모임 카페를 수시로 모니터링 하는 등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다. 회사 이미지의 치명적인 손상을 우려해서다. 일부 직원들은 자체적으로 ‘안티 S’를 반대하는 또 다른 안티카페를 개설하는 맞불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S사 관계자는 “안티회원은 목적자체가 회사의 나쁜 면만을 드러내는 데 있다”며 “소수의 의견을 전체로 확대하면 안 된다”고 경계했다.

D사도 사정은 마찬가지. 최근 안티로부터 ‘집단 린치’를 당할 위기에 처했다. D사로 인해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집단행동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각 언론사 제보와 소송까지 불사할 태세다.

이들이 개설한 카페엔 “악덕 업체를 고발합시다”, “같이 뭉쳐 싸워봅시다”등 D사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가득하다. D사 관계자는 “일부의 사례를 전체인양 확대해서 떠들고 있다”며 “그렇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업들이 안티모임의 잇단 공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회사의 제품 불매운동은 물론 일부 안티사이트의 경우 회사 내부문제도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는 이유에서다. 소비자 입장에선 안티 모임이 ‘신문고’역할과 같지만, 해당 업체는 ‘벙어리 냉가슴’앓는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각 포털사이트엔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만명에 이르는 ‘개미 군단’이 커뮤니티를 비롯한 모임들을 만들어 활동 중이다. 타깃은 다종다양하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부터 중견그룹, 중소기업 등 가리지 않는다. 이들은 경제 분야에서 ‘소비자 권리 찾기’를 표방하고 있다. 한 안티모임 운영자는 “대부분의 기업 안티 모임은 영업방해의 목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특정업체에서 피해를 보거나 부적절한 인사로 퇴직한 사람들의 호소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기업 안티는 더 이상 온라인에 국한된 활동이 아닌 오프라인 활성화로 대형화되는 추세다. 피해자들이 해당 기업에 보상을 요구하는 집단·단체소송이 그것이다.

지난해 3월부터 시행된 집단분쟁조정제는 50명 이상의 소비자가 같은 제품이나 서비스로 피해를 입었을 때 이를 접수한 소비자단체나 지방자치단체, 정부 부처, 한국소비자원 등이 분쟁조정위에 피해 구제를 신청하는 제도다. 아파트 건설 관련 하자, 자동차·가전제품 품질 불량, 휴대폰 요금 과다 청구, 인터넷서비스 약관 피해, 종자 불량, 항공기 연착, 건강기능식품 과대 선전 등이 대상이다.

최근 벌어진 GS칼텍스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17일 김모씨 등 2천30여명은 “개인정보가 담긴 CD가 유출돼 피해를 입었다”며 GS칼텍스와 GS넥스테이션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김씨 등은 각각 1백만원씩 총 20억3천여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했다. 지난 10일에도 인터넷 카페를 통해 모인 임모씨 등 5백명이 1인당 1백만원씩 5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일각에선 이번 소송 보상 금액이 최대 4조원 이상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개인정보 유출로 확정판결을 받았던 리니지의 피해배상은 1인당 10만원이었고, 국민은행은 20만원, LG는 70만원에 달했다. 앞서 지난 13일 해상 유조선 충돌 사고로 기름 유출 피해를 본 충남 태안군 주민 6천8백64명은 15개월간 매달 20만원씩(총 2백5억원)의 생계비를 지급하라며 삼성중공업을 상대로 법원에 가처분신청을 내기도 했다.

지난 1월부터 시행된 단체소송제는 피해 소비자들을 대신해 소비자단체가 사업자를 대상으로 위법행위를 금지 또는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소송을 말한다. 소액의 피해를 입은 소비자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 도입됐다. 소비자 안전과 직결되는 식품이나 완구제품들이 주된 피소 대상이다. 다만 금전적 손해배상은 배제된다.

그러나 눈에 띄는 점은 ‘안티 전성시대’가 갈수록 저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 안티 문화의 최고 전성기였던 2000년 전후에 비해 이들의 카페나 모임, 사이트 등은 현격히 줄어들었다.

인터넷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포털사이트에서 활동하는 제대로 된 안티 카페는 50여개에 불과하다. 기업 안티사이트는 10여개. 기업 안티 집단은 2000년만해도 1백개가 넘었다. 당시엔 안티 언론과 안티 통합사이트까지 등장했었다. 한 포털 관계자는 “소비자들의 피해와 불만을 토로하는 공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며 “그나마 상당수는 방문자가 거의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무분별·일방적 비방
안티활동 퇴조 초래


그렇다면 기업 안티모임이 사라지는 이유가 뭘까. 우선 전문가들은 안티 스스로 제 무덤을 팠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소비자 권리 찾기’의 취지와는 달리 욕설과 협박 등 무분별하고 일방적인 비방이 기업 안티활동의 퇴조를 부르고 있다는 진단이다.

실제 2004년 2월 모 기업체의 안티사이트를 운영하다가 사이트 폐쇄를 조건으로 돈을 뜯으려한 한 남성이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이 남성은 기업 안티사이트를 개설한 뒤 비방하는 글을 올리다 사이트를 폐쇄할 테니 3천만원을 달라고 협박했다. 또 안티사이트를 등록한 뒤 비싼 값에 되팔려고 시도한 운영자들이 줄줄이 철창행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한 중견기업 민원 담당자는 “특정인에 의해 악용되고 있는 일부 안티 모임이 심심찮게 발견된다”며 “이들은 어떤 목적을 갖고 특정 기업을 무작정 비방하거나 특정 제품에 흠집을 내고 있다”고 귀띔했다.

결국 안티에 시달린 기업들은 소송이란 카드를 꺼내들었다. 일방적으로 당했던 기업들이 비방·폭로행위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한 것.

 


안티세력의 영업 방해를 참다못한 W사는 2003년 안티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W사는 안티사이트가 범람하자 카페 운영자를 ‘허위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한편 사이트 폐쇄를 요청하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회사 관계자는 “불매운동도 명확한 명분과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무조건 회사와 경영진을 비난하고 있다”며 “이 과정에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해 회사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어 법적 소송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법원은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허위이거나 과장된 글의 삭제를 넘어 아예 사이트 자체를 폐쇄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회사 측의 계속되는 삭제 요구에도 사적 목적으로 위해 회사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는 글들을 삭제하지 않고 있다”며 “즉시 해당 사이트를 폐쇄하지 않으면 회사의 명예와 신용 등이 추가로 훼손될 염려가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이트 등록 말소를 강제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나아가 기업들은 2000년 이후 안티 원천봉쇄 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안티 공간을 없애기 위해 자사의 안티 도메인을 무더기로 선점하는 꼼수를 동원한 것. 소비자 불만과 비판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다.

국내 주요 재벌그룹들은 이미 사명에 ‘anti’나 ‘no’ 또는 ‘안티’ ‘반대’등이 들어간 도메인의 소유권을 쥐고 있다. 재계 서열 1위인 삼성그룹은 ‘antisamsung.com’, ‘antisamsung.net’, ‘antisamsung.org’, ‘antisamsung.name’, ‘antisamsung.biz’, ‘antisamsung.info’, ‘antisamsung.cn’등 대표적인 영문 안티사이트를 싹쓸이한 상태다.

이들 도메인은 모두 삼성 계열사인 삼성네트웍스로 등록돼 있다. 삼성은 또 ‘samsunganti.com’,‘outsamsung.com’, ‘nosamsung.org’,‘stopsamsung.com’ 등 나머지 안티 도메인 수십개도 사들였으며 ‘안티삼성.com’, ‘삼성반대.com’같은 한글 도메인도 갖고 있다.
LG그룹도 ‘안티엘지.kr’, ‘안티엘지카드.kr’, ‘안티엘지전자.kr’등 한글로 된 안티 사이트를 확보했으며 ‘안티구본무.kr’와 같은 오너 반대 사이트도 관리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역시 ‘안티 정몽구.kr’, ‘안티 정주영.kr’, ‘안티 현대.kr’, ‘안티 현대차.kr’등의 한글 주소를 선점했다. SK, 롯데, 한화그룹 등도 ‘안티’, ‘반대’ 등이 들어간 한글 안티 사이트를 1∼2개씩 갖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정부까지 ‘안티 몰이’에 가세했다. 2001년 4월과 2005년 6월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기업 등을 비방하거나 인신공격하는 안티사이트에 대해 일제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인터넷상의 명예훼손이 위험 수위에 도달했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다.

‘안티와의 전쟁’ 선포
도메인 무더기 선점


윤리위는 명예훼손 혐의가 명백한 사이트는 내용의 삭제를 명령하거나 일정기간 이용을 정지시키고 형사처벌 대상이 되는 불건전한 내용을 담고 있는 사이트를 경찰에 고발했다. 이를 두고 “표현의 자유를 말살하는 사실상 ‘검열행위’”란 지적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쯤 되자 안티문화의 위축으로 건전한 기업 감시 활동마저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높다. 소비자단체 관계자는 “안티문화는 부정적인 역기능도 있지만 분명 긍정적인 순기능도 있다”며 “기업 발전의 꾀하는 올바른 안티문화 정립을 위해선 맹목적 비난보다는 건전한 비판이 확립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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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