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팔자 센 정윤희 기구한 인생사

전설의 미인 “아~ 옛날이여”

[일요시사 사회팀] 김성수 기자 = 1970∼80년대 주름 잡던 여배우 정윤희씨. 몇 년 전 아들이 사망한 데 이어 최근 살던 집마저 경매에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은막 최고의 스타로 활약하다 간통 사건이 얽힌 재벌과의 결혼 그리고 돌연 잠적, 이후 평범한 주부로 지내다 갑작스럽게 불운이 닥친 정씨의 기구한 삶을 되돌아봤다.

 
1954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정윤희씨는 부산 당감초등학교와 혜화여중·고를 졸업하고 1975년 영화 <욕망>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탤런트 노주현씨가 상대역이었다. 정씨는 한 영화사가 공모한 연기자 모집에서 떨어졌으나 우연히 영화인들의 눈에 띄어 이경태 감독에게 소개되면서 <욕망>에 출연하게 됐다.

21세 때 데뷔
미모·연기 퀸
 
당시 정씨는 모델 에이전시의 소개로 먼저 영화계 거장 신상옥 감독을 만났고, 신 감독이 이 감독에게 정씨를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신 감독은 이 감독에게 “(정씨 같이) 가능성 있는 얼굴을 대담하게 쓰라”고 조언했다는 후문이다.
 
정씨는 영화 출연 후 처음엔 별로 빛을 못 보다가 같은해 해태제과 CF모델을 맡으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TBC-TV(현 KBS-2TV)의 <쇼쇼쇼> MC로 박탈돼 인기가 급상승했다. 이후 TV드라마와 영화에서 주연 연기자로 절정의 인기를 누리면서 총 36편의 영화와 4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유명 남자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충무로와 방송가에서 ‘캐스팅 영순위’여배우로 꼽혔다.
 

영화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로 1980년과 1981년 2년 연속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미모뿐만 아니라 연기파 배우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82년엔 영화 <사랑하는 사람아>로 백상예술대상 여자최우수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정씨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장미희, 유지인씨와 함께 ‘3대 트로이카 여배우 시대’를 이끌며 당대 최고의 톱스타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짙은 눈썹과 큰 눈망울,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고전미와 청순미, 현대적 미색을 겸비한 절세미녀로 평가받았다.
 
 
해외에서도 정씨를 주목했었다. 전 세계에 불고 있는 한류의 원조 격인 셈이다. 정씨의 뛰어난 미모는 일본과 대만 등 해외에도 알려져 외국 감독들의 러브콜이 잇달았다.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톱스타들만 참석했던 일본 <동경가요제>에 한국인 최초로 초청받아 영화 <러브스토리>의 여주인공 알리 맥그로우와 시상을 했다. 대만에선 정씨의 영화가 개봉됐었는데, 정씨가 대만을 방문했을 당시 공항에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세계적 액션배우 성룡이 첫눈에 반한 정씨 때문에 한국을 자주 방문했고 한국을 너무 사랑하게 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인기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치솟던 정씨는 1984년 심재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영화배우 이영하씨와 출연한 <사랑의 찬가>를 끝으로,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이브날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났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장미희·유지인과 ‘80년대 트로이카’
‘간통 회장님’과 결혼후 연예계 은퇴
 

상대남은 조규영 중앙건설 회장. 재벌가로 시집간 것이다. 당시 정씨의 나이는 30세. 조 회장은 38세였다.
친지의 소개로 정씨를 우연히 만난 것으로 알려진 조 회장은 남산초등학교와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국 사립명문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 회계학과를 나와 1980년 중앙건설을 설립, 현재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기준 중앙건설의 최대주주는 조 회장으로, 지분 12.95%(85만3510주)를 보유하고 있다. 정씨도 4.29%(28만2525주)의 지분이 있다.
 
‘하이츠’브랜드로 알려진 중앙건설의 모태는 조 회장의 부친 조성철 창업주(1981년 별세)가 1946년 설립한 중앙산업이다. 조 회장이 선친의 뒤를 이어 회사를 이끌고 있는 것. 중앙산업은 1950년 6·25전쟁 이후 복구사업 바람을 타고 각종 건설공사를 수주해 1952∼54년 3년 연속 건설업체 도급순위 1위를 차지하는 등 국내 굴지의 건설사로 성장했다. 1958년엔 서울 종암동에 한국 최초의 아파트 ‘종암아파트’를 건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부도로 회사는 공중분해됐다. 조 창업주의 4남1녀 중 차남인 조 회장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LA에서 개인사업(폴함사)을 하다 중앙산업이 파산 위기에 처하자 1977년 귀국해 계열사를 인수한 후 재건했다.
 
정윤희-조규영 부부의 결혼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문제는 조 회장이 법적으로 유부남인 상태에서 사랑을 키웠다는 사실이다. 전 부인과 이혼절차를 밟고 있는 상황에서 교제가 시작된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1984년 8월 간통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정씨와 조 회장은 잠을 자다가 급습한 조 회장의 전 부인에게 발각돼 경찰에 연행됐다. 줄곧 간통 사실을 부인한 이들은 유치장에 들어간 지 4일 만에 풀려났다. 전 부인은 조 회장과 이혼 조건으로 거액의 위자료를 받고 고소를 취하했다.
 
조 회장은 당시 경찰 조사에서 “정씨와의 관계 때문에 가정불화가 생긴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 이혼 얘기가 나오는 등 가정문제가 복잡하던 중 정씨를 만나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이라며 “부인이 원하는 대로 위자료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고소한 것”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혼 전 만나
큰 파문 일어
 
정씨는 풀려난 직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복잡한 심경을 털어놨다. 그는 “몸둘 바를 모르겠다. 연기생활 10년 만에 공인이란 사실을 새삼 느꼈다. 무조건 죄송하다. 깊이 사죄한다”고 머리를 숙였다. 이어 조 회장에 대해 “그를 좋아한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그 사람의 무엇이 나를 끌어 잡아당긴다. 모든 것에 대해 나를 리드한다”고 밝혔다.
 
이 인터뷰에서 “당분간 쉬고 싶다”던 정씨는 4개월 뒤 조 회장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이후 연예계를 완전히 떠났다. 영화와 TV 출연은 물론 일체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영화·방송 제작진들은 수없이 정씨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1993년 조 회장이 대주주로 있었던 가구업체 모델로 브라운관에 잠깐 등장했고, 1995년 한 토크쇼에서 전화 인터뷰를 한 것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공개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정윤희 영화주간’에 여전히 고운 모습으로 나타나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정씨가 외부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자 베일에 싸여있는 그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증폭됐다. 항간엔 하도 소식이 없자 정씨를 둘러싼 악성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왕년의 스타’로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진 정씨가 다시 회자된 것은 2011년 추석 때다. 그해 9월 한 세대를 풍미한 정씨의 인생과 필모그래피, 현재까지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터넷 팬클럽 회원 4000여명) 등을 전한 MBC 한가위특집 <우리가 사랑한 여배우-카페 정윤희>가 전파를 타면서 은퇴 27년 만에 그의 삻이 재조명됐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최불암, 노주현씨 등은 “정말 예뻤다”고 극찬했고, 한 성형외과 전문의는 “완벽한 황금비율”이라고 평했다. 특히 정씨의 과거 사진들이 공개되자 네티즌들은 “자연 미인” “진정한 여신” “올킬 미모” 등의 찬사를 보냈다.
 
정씨는 이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지 않았다. 제작진의 끈질긴 섭외 요청에도 불구하고 방송에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화환과 자필로 쓴 편지를 방송국으로 보냈다. 정씨는 “여러분 곁을 떠난 지 벌써 27년이 흘렀습니다. 아직까지 저를 기억해주는 분들이 계시다는 말씀에 놀랍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직접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저를 기억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행운이 가득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란 메시지를 전했다.
 
영화·방송사 러브콜 거절 ‘칩거’
갑자기 자녀 사망·집 경매 ‘불운’
 
그로부터 불과 2개월 뒤인 11월 정씨의 이름이 다시 언론에 오르내렸다.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들을 뒷바라지하면서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던 정씨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갑자기 아들이 사망한 것. 정씨와 결혼하기 전 조 회장은 전처와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었다. 정씨는 이들 남매를 키우다 결혼 5년 만인 1989년 뒤늦게 막내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사망한 아들이다. 
 

당시 정씨 아들은 국내에서 영재학교를 졸업한 뒤 조 회장과 같은 서던캘리포니아대학에서 유학 중이었다. 그러던 중 친구들과 술을 마신 후 급성폐렴증세를 일으켜 한인타운 인근 할리우드장로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끝내 숨을 거뒀다.
 
의문사인 만큼 부검이 실시됐다. 이 결과 사인이 어느 정도 드러났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시소는 “약물 복용으로 심장마비 증세를 일으킨 것 같다”며 “타살이나 자살의 흔적은 없었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정씨 아들의 사인을 두고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았다.
 
아들을 가슴에 묻은 정씨의 마음고생은 말로 헤아릴 수 없었다. 한동안 아들 얘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흘렸다는 후문이다. 이런 와중에 최근 살던 집마저 경매에 넘어가는 일까지 생겼다.
 
 
지난 8일 부동산경매 전문 법무법인 열린에 따르면 조 회장 소유의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9동 전용면적 196㎡에 대해 지난 6월 경매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이 아파트에 걸린 등기부상 채무액은 53억원에 이른다. 국민은행은 빌려준 돈과 이자 20억원을 받기 위해 경매에 넘겼다. 
 
열린은 “연말이나 연초에 첫 번째 입찰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며 “같은 아파트 동일 면적은 최근 25억원에 거래된 바 있다”고 밝혔다. 조 회장은 1988년 이 아파트를 매입해 가족이 20년 넘게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등기부등본에도 조 회장의 주소지가 여전히 이곳으로 등재돼 있다.
 
경매는 조 회장이 경영 중인 중앙건설 사정과 무관치 않다. 중앙건설은 벼랑 끝에 서있다. 지난해 매출 583억원을 올렸지만 영업손실 657억원, 순손실 2142억원을 냈다. 총 자산은 1427억원이지만, 2009년부터 적자를 기록하면서 부채가 무려 3968억원으로 불었다. 결국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태다.

아들 가슴에 묻고
남편 회사도 휘청 
 
올해 60세인 정씨는 아직까지도 아들을 잃은 슬픔과 충격에 빠져있을 게다. 여기에 집까지 잃을 판이니 패닉 상태가 아닐까 싶다. 은막 최고의 스타로 활약하다 간통 사건이 얽힌 재벌과의 결혼 그리고 돌연 잠적, 이후 평범한 주부로 지내다 갑작스럽게 불운이 닥친 정씨의 기구한 삶을 지켜보는 팬들은 안타깝기만 하다.
 
<kimss@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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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