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올해는 광복 69주년이 되는 해다. 내년이면 벌써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지만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는 요원하기만 하다. 게다가 ‘고노담화’를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는 등 일본의 역사인식은 과거보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어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의 자랑인 ‘사무라이 정신’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내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 있다. 일요시사가 화제의 책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를 연재한다.
그는 1862년에 태어나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미국과 독일에서 유학한 사람이다. 당시 일본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사회 규범이나 윤리 의식의 바탕은 두말할 것 없이 불교와 유교였다. 거의 모든 일본인들은 불교 신자였으며 도시 곳곳에는 사찰이 있었다. 그리고 일상적인 사회생활에 나타나는 예의범절과 윤리는 유교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특히 ‘삼강오륜’은 그 당시에도 중요한 윤리적, 도덕적 사회 규범이었다. ‘삼강오륜’은 오랜 세월 동안 일본 사회에 크게 영향을 주어 사무라이들의 ‘충효사상’도 바로 이 ‘삼강오륜’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무용담 과대포장
그도 어린 시절을 당연히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알게 모르게 부처님의 가르침과 ‘공자 왈, 맹자 왈’을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당시의 일본 사회 구조상 그가 어려서 배웠던 도덕과 윤리는 집안에서, 그중에서도 어머니의 가르침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옛 사무라이들의 행동을 예로 들어가면서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학교에서도 사무라이들의 행태를 예를 들어가면서 교육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에서 사무라이는 존경받는 대상이 아닌 비난받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려서 이순신 장군과 관우, 장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듯이, 그도 전국시대 사무라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므로, 그 대부분이 그저 무사들의 무용담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고, 거기에 얽힌 무사들의 인간적인 이야기도 다소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그의 성장 과정에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고 옛 무사들의 무용담과 전투에서 간간이 나오는 인간적인 이야기가 불교나 유교의 가르침보다 더 도덕적 규범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그래서 그의 의식 속에 들어 있던 도덕적 규범이 ‘무사도’였다고 말하는 것은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는 책에서, 이 책을 쓴 동기 중 하나가 바로 미국인 아내와 살면서, 일본인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나 습관이 그의 아내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어서 “그건 왜 그런가요?”라는 질문을 자주 들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런 질문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결혼 생활 내내 들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름대로 설명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불교나 유교의 논리만으로 서양인들을 이해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서구인들에게는 불교나 유교가 생소한 것이어서 일본인들의 도덕적 관념이나 윤리 의식을 불교나 유교 교리로 설명해서는 그들을 이해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을 이해시키려면 무엇인가 그들에게 익숙한 것으로 비교하면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무사도는 서양에 자랑하려 만든 거짓정신
서양에서 무사도가 유명해지자 역수입
그가 책에서 일본의 문화와 습관을 설명하면서, 서양의 문화와 습관을 예로 들어 비교,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이었을 것이다. 한편 그가 이 책을 영어로 썼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쓴 것이 아니었다. 서구인을 대상으로 쓴 책이었다. 서구인들에게, 그리고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던 유럽의 교수에게, 비록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지 않아도 일본에는 일본인 나름대로의 높은 도덕적 규범과 윤리 의식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쓴 책이었다.
불교나 유교를 가지고는 서양인을 이해시키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으로서의 자긍심 또한 보여줄 것이 없었을 것이다. 불교나 유교는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전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 문화에 익숙해 있던 그는 여기서 기사도를 생각했던 것 같다.
옛날 서양의 기사들에게 있었던 ‘기사도’라고 하는 규범이, 오늘날 서구인들에게 신사도라고 하는 도덕적 규범의 모태가 되었듯이, 옛날 일본의 무사들에게도 나름대로 어떤 규범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규범을 인용해 오늘날 일본인의 도덕적 규범을 설명하면 서구인들에게 보다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일본인으로서의 자긍심도 내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병상에 누워 하는 일 없이 나날을 보내던 그는 심심함도 달랠 겸 이 책을 쓰기 시작하게 된다. 책 쓰기를 끝냈을 때가 미국 여행을 시작한 지 일 년도 안 된 1899년이었고, 그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가 미국에 있을 때, 그것도 계획이나 준비도 없이 1년도 안 되는 요양 기간 중에 책 쓰기를 끝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역사적으로 사실을 조사해 가면서 사실을 바탕으로 기술한 책이 아니다.
그동안 부인에게 설명하여 주었던 기억과 어릴 때 어렴풋이 들었던 사무라이들의 얘기에 불교와 유교적 덕목, 그리고 서양의 문화와 기사도를 버무려 쓴 책이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일본 역사를 잘 알지 못했던 저자 ‘니토베’가 상상을 해 가며 멋대로 쓴 책이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은 전혀 역사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사의 이미지를 제멋대로 부풀려 만들어 낸 하나의 엉터리 창작품에 지나지 않았다. 이 책은 출판되자, 그때만 해도 동양문화를 잘 몰랐던 서양인들의 관심을 크게 끌면서 베스트셀러가 된다. 일본인들은 모두 ‘BUSHIDO(무사도 : 武士道)’에 따라 생활하는 줄로 착각하는 서양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 책이 서양에서 유명해지자,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으로 역수입하게 된다.
단순무식 무사도
작가 ‘니토베 이나조(新渡戶稻造)’는 이 책에서, 무사도는 충(忠)·의(義)·용(勇)·인(仁)·예(禮)·성(誠)을 기본으로 하며, 이 무사도가 바로 일본 민족의 아름다운 이상이자 도덕적 규범이라고 주장하였다. 복부는 영혼과 애정이 깃드는 곳으로 이곳을 자르는 할복 의식은 일본 민족의 가장 고귀한 행위라고 주장하고, 칼은 무사의 힘과 용기의 상징이므로 그것을 허리에 차고 다니는 것은 단순히 칼을 허리에 차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차는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한마디로 무식하고 싸움밖에 모르던 옛 무사들의 행태에 근거도 없이 고상한 유교의 덕목을 끌어다 붙여 이것이 일본 민족의 아름다운 이상이자 도덕적 규범이라고 주장하며 미덕거리로, 자랑거리로 둔갑시킨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