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기획> 재계 총수들 진짜 피서법

아무때나 가면 되지…피크 시즌엔 ‘방콕’

[일요시사=경제1팀] 한종해 기자 = 본격적인 여름휴가 시즌이 시작됐다. 이맘때면 궁금해지는 게 '돈 많은' 재벌총수들의 휴가 계획이다. 재벌그룹의 대답은 한결같다. "휴가가 뭐냐?"는 것. 총수들의 잇단 구속으로 인한 경영 공백, 건강 악화, 유동성 위기, 실적 부진 등 각종 악재로 뒤숭숭한 재계의 휴가 풍경을 들여다봤다.

"특별한 계획이 없다" "하반기 경영구상에 몰두한다"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다" 총수들의 여름휴가를 묻는 질문에 각 그룹 홍보실들은 비슷비슷한 공식 답변을 내놨다. "휴가가 뭐냐?"고 반문하는 기업도 있었다.

재벌 총수들의 잇단 구속으로 인한 경영공백, 건강 악화, 경쟁력 약화에 따른 유동성 위기, 유례없는 글로벌 업황 악화로 인한 실적 부진 등 각종 악재가 덮친 대기업의 총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별다른 휴가 계획을 잡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차이는 존재한다. 자진해서 '안 가는' 회장님이 있는 반면, 어쩔 수 없이 '못 가는' 회장님도 있다.

할일 태산인데
휴가는 무슨…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여름휴가 기간 자택에 머물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은 그간 현대·기아차 공장이 휴무에 돌입하는 때에 맞춰 공식적인 휴가 일정을 잡아왔다. 현대·기아차는 오는 8월4일부터 5일 동안 울산 등 전국의 공장·연구소 등 모든 사업장이 휴무한다. 정 회장은 이 기간 동안 회사로 출근해 업무를 볼 가능성도 있다.

현대차는 미국 시장과는 다르게 유럽 시장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자료를 보면 현대차는 지난 5월 유럽연합(EU)과 유럽자유무역연합(EFTA) 국가에서 3만5636대를 판매, 전년 동기보다 3.1% 감소한 수치를 기록했다. 정 회장이 지난해 10월과 지난 3월 유럽 현지를 찾는 등 유럽 시장에 대한 큰 관심을 보이는 것과 대립되는 구도다.


현대차는 유럽에서 2분기 신형 제네시스를 선보이고 있으며 하반기 신형 i20 출시로 실적 부진을 이겨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정 회장은 현대차의 하반기 사업목표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점검활동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7월 말부터 8월 초 사이 휴가 기간을 잡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서울 용산구 한남동 자택에서 하반기 경영구상을 한다는 계획이다. 외부 일정은 지양한다.
 

LG그룹은 하반기 큰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다. 그룹 연구개발(R&D)센터로 '마곡 LG 사이언스 파크'가 착공에 들어간다. 이를 기반으로 LG그룹은 올 하반기 본격적인 성과 창출을 위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 방침이다. 먼저 LG전자는 스마트TV, UHD(초고해상도) TV,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TV 등 전략 제품을 앞세워 세계 TV시장을 공략한다는 방침이다.

스마트폰사업에서는 G3 출시를 통해 프리미엄 시장을 공략하고 LG디스플레이는 TV와 스마트폰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역량 강화에 집중할 예정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허창수 GS그룹 회장과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휴가와 회사 일정을 맞물리게 잡았다.

허 회장은 7월23∼26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리조트에서 열리는 전경련 '최고경영자(CEO) 하계포럼'에 참석한 뒤 짧은 휴식을 취하며 하반기 경영 구상을 할 계획이다. 박 회장은 7월23일부터 3박4일간 제주 롯데호텔에서 열리는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에 참석했다가 남은 기간은 자택에서 휴식을 취할 예정이다.

"별다른 일정 없다"는 대외용 홍보성 멘트
개인별장·출장 핑계로 해외서 '유유자적'


이재성 회장을 포함한 현대중공업 경영진은 아직 일정과 장소 등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올해도 마찬가지로 중동과 유럽 등 해외 공사현장과 현지법인을 방문해 현장 경영활동을 펼칠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중공업 경영진은 매년 해외를 찾아 현지 직원들을 격려하는 것으로 휴가를 대체해 왔다. 매년 명절 연휴에도 해외 사업장을 방문해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직원들을 격려해왔다.

"휴가를 논하는 것조차 사치"라는 기업도 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이 대표적이다. 박 회장은 올해 휴가를 반납했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이다. 지난해에는 아시아나항공 여객기 사고 수습에 전념하느라 휴가 갈 엄두를 못 냈다. 

올해 여름휴가 기간 박 회장은 금호타이어와 금호산업의 워크아웃 졸업을 목표로 휴가기간 회사 경영을 진두지휘할 것으로 보인다.

박 회장은 올해 초 금호건설 전략경영세미나에 참석해 "기필코 올해 워크아웃을 졸업하자"고 강조한 뒤 새로운 도약을 이뤄내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금호타이어와 금호산업은 2010년부터 5년째 워크아웃을 진행 중이다. 지난해에는 금호산업 구조 조정안을 놓고 진통을 겪기도 했다.

박 회장은 지주사인 금호산업의 대표이사를 직접 맡아 경영 정상화를 지휘해 왔다. 주말을 반납하고 그룹 임직원들과 산행을 하고 세미나 등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등 현장경영을 이어 왔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도 특별한 여름휴가 계획이 없다. 주력 계열사인 대한항공이 여름철 성수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순항 길에 접어든 한진해운 정상화도 현안이다. 휴가철에도 평상시처럼 정상 출근해 업무를 챙길 예정이다.

방에 콕 박혀
하반기 경영구상

조 회장은 지난 4월 한진해운을 품에 안으며 '부활'을 자신했다. 계열분리를 통해 독립경영을 꿈꾸던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은 해운업 불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한진해운의 핵심 사업을 시아주버니인 조 회장에게 완전히 넘겨줬다. 최 회장은 한진해운 일부 사업만 떼어내 독립했고, 핵심 사업은 한진그룹으로 편입됐다.

지난 5월 한진해운 대표로 선임된 조 회장은 흑자 전환까지는 월급도 받지 않겠다며 한진해운 정상화를 목전 과제로 내건 상황이다.
 

수감된 최태원 SK회장을 대신해 SK그룹을 이끌고 있는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은 아예 휴가를 고려하지 않는다.

SK그룹은 매월 한차례씩 계열사 CEO들이 모이는 수펙스추구협의회를 통해 집단 경영을 하고 있다. 최 회장이 지난 2월 말 대법원 유죄 판결을 받으며 경영 일선에서 떠났고 그룹 경영에서 수펙스추구협의회의 비중이 커진 상태다. 지난달 27∼28일에는 경기 용인의 'SK아카데미'에서 비공개 워크숍을 열고 '끝장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CEO들이 대거 참여해 이틀간 합숙토론 행사를 벌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룹 전체를 휩쓸고 있는 위기감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지금 상황에 그룹 CEO의 휴가 거론은 어불성설이다.


뒤숭숭한 재계
"휴가가 뭐냐?"

2008년 이후 휴가 없는 여름을 보내고 있는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올해 역시 별다른 휴가 계획이 없다. 현 회장은 해마다 8월4일 고 정몽헌 회장 기일 때마다 강원도 금강산에서 열리는 추모식을 휴가를 겸해 다녀왔다. 하지만 2008년 이후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어 그룹이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여름휴가를 떠나지 않았다.

구자열 LS그룹 회장도 2012년 11월 취임한 이후 한 번도 휴가를 간 적이 없다. 올해도 구 회장은 여름휴가를 미뤘다. 지난해 원전 케이블 품질 문제로 바닥을 치는 회사 이미지를 살리기 위한 경영에 몰입하고 있다. 사실상 휴가 계획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올해 초 경주 마우나 리조트 붕괴 사고로 풍파를 겪고 있는 이웅렬 코오롱 그룹 회장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통상 2∼3일 정도 휴가를 보냈지만 올해는 휴가를 안 갈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회사 사정과는 무관하게 순전히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못 가는' 총수들도 있다. 와병 중인 총수들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올 여름 자택에 머물며 치료에 전념할 계획이다. 2012년 8월 배임·횡령 혐의로 구속된 김 회장은 지난 2월 파기환송심을 통해 징역 3년에 집행유례 5년, 벌금 51억원, 사회봉사 300시간을 선고받으면서 족쇄가 풀렸다. 하지만 구속기간 동안 건강은 악화됐다. 김 회장은 만성 폐질환으로 인한 호흡공란, 당뇨, 우울증, 섬망 등의 증세가 겹쳐 서울대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김 회장은 지난 3월과 5월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향하기도 했다.


회사 어려워 못가고
몸이 아파서 못가고
구속 처지라 못가고

재계 1위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패션사업부문 사장 등 오너 일가 모두는 이건희 회장이 한 달 넘게 입원해 있는 상황이라 자리를 비우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지난 5월10일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상을 호소, 자택 인근 순천향대학병원 응급실로 긴급 이송돼 심폐소생술(CPR) 등 응급조치를 받았다.

이후 삼성서울병원 심장외과 중환자실로 옮겨진 이 회장은 혈관 확장술인 ‘스텐트 삽입 시술’을 받고 같은 달 13일부터 뇌와 간 등 장기의 손상을 막기 위해 진정치료를 받았다. 입원 9일 만인 5월19일에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최근에는 8∼9시간 정도 눈을 뜨고 손발을 움직이는 것은 물론 상대와 눈을 맞추는 등 외부자극에 대해 점차 강한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은 간 이식 수술을 받기 위해 대기 중이다. 2011년 간암 3기 판정을 받은 이 전 회장은 서울아산병원에 입원 중이다.

'쇠고랑'을 차고 있는 총수들도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의정부교도소에서 징역살이를 하고 있다. 최 회장은 회삿돈 수백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4년형을 확정 판결 받고 1년6개월째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최 회장은 독방을 쓰며 하루 1시간 정도 바깥 운동을 하며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면회 온 임원을 통해 '옥중메모'를 전달하고 "위기를 잘 극복해달라"고 임직원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지난달 27일 열린 SK그룹 연례 워크숍에서 공개된 최 회장의 옥중메모에는 "경영 환경이 매우 어려운 가운데 열심히 뛰어 준 경영진과 구성원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며 "SK의 역사가 위기 극복을 통해 성장해온 만큼 이번 위기도 잘 극복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 "수펙스추구협의회와 김창근 의장을 중심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단결해 현 어려움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가고 싶어도
못가는 이유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은 6500억대 분식회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효성은 박근혜 정부의 타깃이었다. 새정부 출범 직후 국세청에서 효성그룹에 대해 대규모 특별세무조사를 벌였고 검찰은 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전개했다. 검찰은 98년 외환위기 직후 종합상사의 부실을 10여년 이상 분식회계 했다면서 조 회장에 대해 배임·횡령·탈세혐의로 기소했다. 현재 세 번째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1657억원의 탈세·횡령·배임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에 벌금 260억원을 선고받은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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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