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기획> 3대 여름 가전 '대해부'

습기 잡고 더 시원하게 ‘뜨거운 전쟁’

[일요시사 = 경제2팀] 박효선 기자 = 일찍 찾아온 무더위로 여름 가전제품 시장이 벌써부터 후끈하다. 특히 제습기 업계 조짐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에는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에어컨과 선풍기 업계도 무더위의 영향으로 수요가 급증했다. 여름을 앞두고 가전업체들의 뜨거운 전쟁이 예고된다.

“비만 오면 집안 공기 ‘안습’. 매년 장마철이 ‘기습’. 내 얼굴은 언제나 보습보단 ‘우습’. 우리집 습기는 연습 없는 ‘실습’. 축축하게 살지 말고 ‘제습’”

한 제습기 업체의 광고 CM송이다. 올 여름 시장을 뜨겁게 달굴 제품은 제습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상 기후 영향으로 제습기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제습기 시장
1조 규모 예감

가전업계에 따르면 국내 제습기 판매량은 2009년 4만대, 2010년 8만대, 2011년 25만대, 2012년 40만대, 2013년 130만대로 4년만에 약 33배나 치솟았다.

2012년 1200억원(약 40만대 판매규모) 규모였던 국내 제습기 시장은 지난해 4000억원까지 올라섰고 올해에는 2배 수준인 8000억원까지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올해 최소 250만대가 팔릴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판매 금액으로 보면 연 1조원 규모 시장이 열릴 전망이다. 내년에는 냉장고, 김치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TV와 함께 1조원 가전제품 시장에 제습기가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제습기도 필수가전이 된다.


지난해 여름 고온 다습한 날씨로 제습기 시장이 주목받으면서 국내 제습기의 가구당 보급률은 12%까지 올라섰다. 업계에서는 올해 제습기 보급률이 23%까지 올라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제습기는 출시 당시만 해도 소비자들로부터 외면 받았다. 2000년대 초반 제습기는 전국적으로 연간 1만∼2만대가량만 팔리는 상품에 불과했다. 그런데 2010년 이후 판매량이 급증했다. 기후변화의 결과물이다. 한반도가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면서 지난해 여름부터 제습기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온난화 현상이 심해지면서 한반도 기온은 최근 10년간 연평균 0.18도씩 오르고, 강수량은 매년 21mm씩 늘어나고 있다.

제습기, 고온다습 기후에 필수가전
40개 업체 각축…위닉스 아성 도전

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장이 어느 날 갑자기 매년 2∼3배씩 성장하는 이유는 주부들 입소문의 힘이 크다. 위니아만도가 최초로 출시했던 김치냉장고 ‘딤채’와 비슷한 경우다. 위니아가 딤채를 출시했던 때만해도 소비자들에게 김치냉장고는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주부들의 입소문을 타고 점차 사랑받게 됐다. 제습기도 주부들의 입소문에 의해 급성장한 제품이다.

가전업계 한 관계자는 “아열대 기후로 인해 제습기 자체가 필수 가전이 되면서 지난해 폭발적인 수요를 보였다”며 “지난해에는 판매량 예측에 실패했지만 올해에는 물량 확보에 힘쓰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는 올해도 제습기 시장이 지난해에 비해 두 배 가량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벌써 지역에 따라 최고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등 때 이른 더위로 고온 다습한 날씨가 지속되면서 제습기 구매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춘추전국시대
40개 업체 경쟁


여름철이 다가오면서 전자업체들은 본격적으로 습기 잡기 경쟁에 나서고 있다. 제습기 업체들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대기업뿐 아니라 쿠쿠전자, 리홈쿠첸, 롯데 기공, 파세코 등 중견업체까지 제습기 시장에 가세했다. 약 40개 업체가 제품을 내놓으면서 제습기 시장 파이는 쪼개질 것으로 보인다. 파이가 커지면서 제습기 시장을 독점해왔던 위닉스와 LG전자는 바짝 긴장한 모습이다.

국내 제습기 시장 점유율 1위(지난해 점유율 33%)를 차지하고 있는 위닉스는 2014년 제습기 ‘위닉스뽀송’을 출시하면서 톱스타 조인성을 모델로 내세워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위닉스는 2014년 제습기 전 제품의 전력소비등급을 1등급에 맞췄다. 전력소모와 소음 등을 최소화한 인버터 제습기를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가격은 지난해 수준에 맞췄다.

이에 질세라 LG전자도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LG전자는 위닉스와 시장 점유율 1위를 다투고 있다. 1986년 제습기 사업을 최초로 시작한 LG전자가 28년 만에 처음으로 TV광고를 시작한 것이다. 점유율 1위를 선점하겠다는 의도다.

LG전자는 TV광고에서 ‘인버터 컴프레서’ 기술을 전면에 내세웠다. ‘인버터 컨프레서’ 기술로 기존 제습기보다 제습 속도가 빨라졌고, 소음도 낮아졌다고 LG전자는 강조했다.

삼성전자도 LG전자와 함께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도 전 지난 3월부터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삼성전자는 인버터 제습기를 내놓았다.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를 모델로 내세워 광고하고 있다.

중견 가전업체들의 쟁탈전도 치열하다. 위니아만도는 작년 대비 생산 물량을 늘릴 계획이다. 위니아만도는 신형 제습기를 16종이나 새로 내놨다. 올해 제습기 판매량 증가가 확실한 만큼, 다양한 제품군 공급으로 시장 수요에 대비한다는 판단이다.

최근에는 밥솥 시장에서 점유율 1, 2위를 다투고 있는 쿠쿠전자와 리홈쿠첸까지 제습기 전쟁에 뛰어들었다. 국내 포화상태인 밥솥 시장에서 벗어나 제습기를 통해 성장 모델을 찾겠다는 의도다.

작년 제습기를 출시한 쿠쿠전자는 4월부터 5월까지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5배 증가했다. 제습과 공기청정 기능이 함께 들어있는 ‘하이브리드 365’ 제품을 내세워 렌탈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렌탈 서비스 이용 고객은 전체 실적 중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습기도 정수기처럼 필터와 내부 청소 등 정기적인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제습기 렌탈 이용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쿠쿠전자는 예상하고 있다.

리홈쿠첸도 최근 2014년형 제습기 2종을 새롭게 출시했다. 신제품 ‘CCD-CD10 시리즈’와 ‘CCD-CD15 시리즈’는 각각 일일 제습량 10ℓ, 15ℓ의 넉넉한 양으로 오랜 시간동안 습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리홈쿠첸은 자부했다. 지난달에는 롯데기공이 제습기를 출시하며 소비자 가전시장에 재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렇게 되면서 약 40개의 전자업체가 제습기 시장에 뛰어든 셈이다. 업체들이 시장 파이를 나누면서 위닉스와 LG전자의 아성은 조만간 깨질 것으로 보인다. 제습기 업체가 급증한 이유에 대해 업계 한 관계자는 “아무래도 제습기를 만드는 기술이 어렵지 않다보니 시장에 도전하는 업체들이 많이 생겨났다”며 “제습기는 6∼7월에 가장 많이 팔리기 때문에 다들 물량 확보에 신경 쓰고 있다”고 전했다.

다재다능 에어컨
삼성 vs LG


에어컨은 최근 제습기의 놀라운 성장에 묻혀 부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여름 필수 가전제품이다. 재작년 시장의 불황으로 주춤한 때도 있었지만 지난해부터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사실상 에어컨 경쟁의 승자가 진정한 여름가전 1위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최근 에어컨 시장의 주요 테마는 ‘힐링’이다. 기본적인 기능을 넘어 소리와 향을 부각시키면서 업체들이 ‘힐링’ 마케팅으로 시장몰이에 나서고 있다.

에어컨 시장의 강자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벌써부터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예약판매를 진행하면서 지난달부터 ‘힐링’을 내세워 점유율 1위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마케팅 전쟁을 벌이고 있다.

에어컨 시장의 키워드 ‘힐링’
삼성 vs LG…자존심 건 승부

삼성전자는 ‘휴(休)바람’, LG전자는 ‘내추럴 아로마향’을 특징으로 내세웠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2014년형 삼성 스마트에어컨 Q9000에 채택된 휴바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상쾌하게 느낀다는 한계령 기류패턴을 분석해 적용했다. 특징은 새·파도 등 자연 음향을 함께 들려준다. 한계령의 바람과 소리로 힐링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다.

LG전자는 업계 최초로 천연 아로마향을 전달하는 ‘내추럴 아로마’ 기능을 2014년형 휘센 에어컨에 담았다. 올 신제품 30종에 적용하며 LG전자는 ‘스마트에 힐링을 더한 휘센 에어컨’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다. 에어컨 하단부 토출구 안쪽에 레몬·라벤더향 키트를 내장해 원하는 향을 선택할 수 있다. 숲·정원·언덕 3가지 모드로 제공하며 아로마향과 함께 감성적 음악, 은은한 조명까지 설정해 청각·후각·시각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도록 했다.


캐리어에어컨과 위니아만도, 동부대우전자 등은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점유율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들 업체는 에어컨 본연의 기능인 냉방성능에 충실하면서도 가격을 낮춘 ‘실속형’ 제품을 선보였다. 캐리어에어컨과 위니아만도의 2014년형 에어컨은 살균 및 공기청정 기능을 강화한 것이 돋보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지난해 에어컨 판매량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올해에는 작년만큼의 호황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실제 에어컨 시장은 2011년 좋았고 2012년에 부진했다. 에어컨 시장은 통상 한 해 호황을 누리면 이듬해 불황을 겪는다. 무엇보다 전세 계약이 2년 단위로 이뤄져 이사할 때 새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이 늘기 때문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날개 없는 선풍기
조용한 전쟁

그동안 잠잠했던 선풍기 시장도 은근히 치열하다. 정부가 2010년부터 전력난을 덜기 위해 전국 2만여 개 공공기관의 여름철 실내온도를 28도 이상으로 유지하도록 지도하면서부터다. 더운 사무실에서 일해야 하는 직원들은 전력소비를 줄이기 위해 선풍기를 애용하고 있다.

가정에서도 선뜻 에어컨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다. 무턱대고 에어컨을 켰다가는 전기료 폭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뜰한 주부에게는 선풍기가 단연 인기 제품이다. 롯데하이마트에 따르면 무더위 관련 제품의 판매 현황을 집계한 결과 선풍기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0% 증가했다. 전기료 부담이 적고 여름철을 맞아 성능이 대폭 개선된 중소업체들의 선풍기가 눈길을 끌고 있다.

선풍기 시장 강자로 불리는 한일전기, 신일산업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유통망 확대에 나서고 있다.

특히 한일전기의 ‘초초미풍 아기바람’ 선풍기는 아기를 위한 '약한 바람'을 내세운 역발상으로 엄마들의 큰 지지를 얻고 있다. 4월 이후 1개월여의 기간에만 5만대를 판매했다.

최근 가전제품업체 파세코는 공업용 선풍기 신제품을 출시했다. 파세코는 주력사업인 석유난로 사업의 안전성을 바탕으로 여름 가전제품 라인업을 강화해 이를 개선해 나갈 방침이다.

선풍기, 전력난에 되찾은 인기
날개 없는 제품들 선풍적 반응

최근 선풍기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제품은 '날개 없는 선풍기'다. 지난 2010년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혁신적인 선풍기’라고 소개하면서 화제가 됐다.

날개 없는 선풍기의 원리는 이렇다. 공기가 고리모양의 링을 따라 흐르면 이동속도가 빨라진다. 속도가 높아진 공기의 흐름이 에어포일 모양의 경사를 따라 이동하며 공기를 한 방향으로 보내면서 제트 기류를 형성한다. 이때 주변 공기가 제트 기류에 빨려 들어가면서 바람이 만들어진다.

날개 없는 선풍기는 2009년 영국의 생활가전 기업 다이슨이 최초로 개발했다. 다이슨은 이달 더 조용해진 날개 없는 선풍기 ‘다이슨 쿨’ 3종을 국내에 출시했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다이슨 쿨은 이전 모델보다 소음을 최대 75% 줄여 음향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날개 없는 선풍기는 시장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 저질 제품이 범람하고 있다. 특히 중국산 불량 모조품이 쏟아지고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dklo217@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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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