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특집> ④재계 서열재편 시나리오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12.30 13:4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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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탐탐' 승천 꿈꾸는 무서운 이무기들

[일요시사=경제1팀] '뜨는 기업이 있으면 지는 기업이 있기 마련'이다. 소위 '잘나가던' 대기업이 물러나면 그 자리를 새로운 기업이 채운다. 올 한 해도 마찬가지다. STX, 웅진, 동양이 무너져 내렸고 신흥그룹들이 재계에 깜짝 등장했다. '무명'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한 이들의 몸부림을 조명해봤다.




기업 입장에서 올 계사년은 바람 잘날 없는 한 해였다. 웅진그룹과 STX, 동양그룹이 차례로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현대, 한진, 두산, 동부, 한국가스공사, 이랜드, 부영, 효성, 한국지엠 등 9개 기업은 연결부채비율 300%를 돌파했다. 연결부채비율은 재무상황이 안 좋은 회사일수록 차이가 큰 경향이 있으며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하는 단순합산 부채비율보다 그룹 재무상황을 좀 더 현실적으로 반영하는 지표다.

웅진→STX→동양
법정관리 잔혹사

첫 시작은 작년 9월 웅진그룹의 좌초였다. 그룹 지주사인 웅진홀딩스는 작년 10월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개시 결정을 받고 현재 1년이 넘도록 절차를 진행 중이다. 그룹 주력 계열사였던 웅진코웨이와 웅진패스원, 웅진케미칼, 웅진식품은 매각됐고 웅진에너지와 플레이도시는 2015년까지 매각할 예정이며 웅진폴리실리콘은 청산 추진 중이다. 빠르면 내년 초 법정관리에서 졸업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남는 것은 웅진씽크빅과 북센 등 출판 사업뿐이다.

웅진그룹의 뒤는 STX가 이었다. 과감한 인수합병(M&A)으로 10여년 만에 재계 13위까지 초고속 성장했던 STX는 무리한 M&A와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조선·해운 업황 악화에 사실상 해체됐다.

올 초 23곳이던 계열사는 11월 말 기준 15개사로 8곳이나 줄었다. STX중공업(1월), STX에너지·전력·쏠라·영양풍력발전(8월), STX조선해양·고성조선해양(11월) 등이다. STX팬오션은 10년 만에 사명이 '팬오션'으로 변경되어 사업이 운영되고 있다. 강덕수 회장에게 남은 것은 ㈜STX 대표이사와 STX엔진 이사회 의장직이 전부다.


지난 10월에는 자금난에 시달리던 동양그룹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다. 만기를 앞둔 기업어음과 회사채를 상환하기 위해 동서인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에게 지원을 부탁했지만 끝내 거절당하면서 우려했던 위기가 몰아닥쳤다. 유동성 위기를 막지 못하고 9월30일과 10월1일 ㈜동양과 동양레저, 동양인터내셔널, 동양네트웍스, 동양시멘트 등 동양 계열사 다섯 곳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수많은 개인투자자들의 피눈물이 뿌려졌으며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은 '사기성 기업어음' 발행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그룹 공중분해는 시간문제다.

웅진그룹과 STX, 동양그룹 등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지난 4월 발표한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에 포함되어 있다. 공기업을 제외하고 STX는 13위, 동양은 36위, 웅진은 46위였다. 2014년도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지정에서 제외는 확실해 보인다.

이들 3곳을 제외하고도 순위 하락이 예상되는 기업은 또 있다. 경제개혁연구소는 2011과 2012회계연도의 연결재무제표 기준 부채비율과 연결이자보상배율을 중심으로 그룹의 재무현황을 분석해 발표했다. 연구소는 투자자들이나 정책입안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2007년부터 보고서를 내놓고 있다.

분석대상은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중 공기업 집단과 금융그룹, 워크아웃 또는 법정관리 등이 진행 중인 그룹을 제외한 46개 그룹이다. 분석 결과 연결부채비율이 300%를 초과하는 그룹은 9개로 나타났다. 현대(895.46%), 한진(678.44%), 동부(397.57%), 한국가스공사(389.61%), 이랜드(369.91%), 부영(326.56%), 효성(311.51%), 한국지엠(307.40%)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무너진 웅진·STX·동양 자리 채울 신흥그룹은?
눈 깜빡할 새 사세 확장 "재계 판도 뒤흔든다"

200%를 초과하는 그룹은 11개다. 한라(271.47%), 하이트진로(260.53%), 한진중공업(256.13%), 대우조선해양(255.71%), 홈플러스(255.24%), 한솔(250.50%), 코오롱(245.64%), 한화(227.46%), 동국제강(227.27%), 대성(220.15%), LS(209.54%) 등이다.

연결부채비율 200%를 넘는 그룹 중 절반에 해당하는 10개 그룹은 연결이자보상배율이 1미만이다. 연결이자보상배율은 이자비용 대비 영업이익으로 계산하며 연결이자보상배율이 1배 미만일 경우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을 감당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해당 그룹은 현대(-1.06), 한진(0.04), 동부(0.30), 효성(0.82), 한국지엠(-6.99), 한라(0.33), 한진중공업(0.26), 동국제강(-0.30), 대성(0.57) 등이다.

이들 그룹의 부실징후 원인을 살펴보면 주력 계열사의 부진이 대부분이다.

먼저 현대그룹의 경우 2012년 말 기준 자산순위 28위로 단순합산 자산총액이 11조7000억원, 부채총액 9조4000억원이다. 단순부채비율은 404%이지만 연결부채비율은 895%로 가장 재무구조가 안 좋은 그룹이다. 2009년 이후 급속도로 부채비율이 악화되고 있으며 2년 연속 영업적자다. 이는 해운업의 업황경색으로 인해 현대상선이 급격히 재무구조가 나빠지면서라는 분석에 힘이 실린다. 현대엘리베이터도 그룹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해 재무적 투자자들과 체결한 파생상품계약에서 큰 손실을 봤다.

한진그룹의 경우 단순부채비율은 432%지만 연결부채비율이 678%로 두 번째로 재무구조가 안 좋은 그룹이다. 가장 규모가 큰 계열사인 대한항공은 화물수요 감소, 유가 및 환율 상승으로 2008, 2009, 2011년 적자를 기록했다. 한진해운도 현대상선과 마찬가지로 해운업의 업황경색으로 인해 급격히 재무구조가 나빠졌다.

두산그룹은 2012년 말 기준 자산순위 17위로 단순합산 자산총액이 29조원, 부채총액 10조원이다. 단순부채비율은 190%이나 연결부채비율은 405%로 2007년부터 계속 400%대의 연결부채비율이 유지되고 있다.

현대·한진·두산·동부
재무구조 악화

두산그룹의 최대 규모 계열사 두산중공업의 자회사인 두산인프라코어가 2007년 밥캣 등을 인수하면서 대규모의 차입금을 조달했고 실적이 좋지 않아 최근까지 자금을 투입했다. 두산건설은 건설경기 불황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보고 있다.

동부그룹은 2012년 말 기준 자산순위 24위로 단순합산 자산총액이 13조6000억원, 부채총액 9조8000억원이다. 단순부채비율은 259%이나 연결부채비율은 389%로 네 번째로 재무구조가 안 좋은 그룹이다. 동부제철은 2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동부건설도 건설경기 불황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소위 '잘나가던' 기업이 ‘죽을 쑤고' 있는 가운데 재계에 깜짝 등장한 신흥그룹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거침없이 몸집을 불리고 있는 아주그룹, 삼탄그룹, SM그룹, 삼천리그룹, 에스피씨(SPC)그룹, NHN그룹, 파라다이스그룹, 넥센그룹 등이 대표적이다. 일반에게 다소 생소하지만 수십년 역사를 자랑하는 그룹사들이다. 공통점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세를 불려 재계 서열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옛 영광 재현나선
에스피씨그룹

아주그룹은 문규영 회장의 부친 문태식 창업주가 1961년 세운 레미콘회사 아주산업으로 출발했다. 2005년 인수한 대우캐피탈(현 아주캐피탈)과 2007년 아주프론티어를 설립하면서 성장가도를 달렸다. 현재 사업영역은 레미콘, 아스팔트 콘크리트, 금융, 관광레저, 부동산개발 등으로 나뉘며 모기업 아주산업을 중심으로 총 21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아주캐피탈만이 유가증권 상장사로 있으며 기업집단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관계사인 AJ렌터카가 지난해 7월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했다.


지난해 그룹 전체 매출액은 1조6000억원대, 자산총액은 2조7892억원대를 나타냈다.

SM그룹은 1988년 우오현 회장이 설립한 삼라건설을 모태로 한다. SM이란 명칭은 삼라건설 아파트 브랜드인 '삼라마이다스'에서 따왔다. SM그룹은 건설업을 기반으로 2004년 섬유업체 티케이케미칼, 건전지 전문업체 벡셀, 건설사 우방 등을 잇따라 인수해 정상화시키면서 자산 4조원대 그룹으로 성장했다.

올해 9월 말 기준으로 35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앞으로는 내실을 다질 예정이다. 그룹의 중심축인 건설은 신창건설, 진덕산업을 우방산업에 흡수 합병시키고 삼라건설은 우방건설로 이름을 바꿔 '우방' 브랜드로 건설 부문을 통합한다. 2~3년 뒤에는 우방산업과 우방건설까지 하나로 합칠 계획이다.

내년 경영목표는 '무차입경영'이다. 이를 위해 당분간 은행 차입금을 갚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산업, 두성, 극동정밀, 레데코 등 계열사 15개를 두고 있는 파라다이스그룹은 외국인전용 카지노를 서울과 인천, 제주도에 각각 1개소, 총 3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고 전락원 창업주가 1972년 설립한 파라다이스투자개발(주)을 모태로 하며 97년 사명을 현재의 파라다이스로 변경했다. 2002년 코스닥시장에 상장, 매매가 개시됐다. 2004년 창업자의 사망 이후 2세인 전필립 회장이 그룹을 이끌고 있으며 일본 세가사미그룹과 합작을 통해 인천 영종도지역에 카지노 복합리조트 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 파라다이스그룹의 지난해 3분기 누적 매출액은 3991억원이며 올해 같은 기간 누적 매출액은 4627억원이다. 카지노 운영이 주요사업이지만 호텔, 여행, 레저, 제조, 건설, 부동산 사업도 영위한다.


자동차 타이어 생산업체인 넥센타이어로 유명한 넥센그룹은 1968년 자동차 타이어용 튜브 생산업체로 출발했다. 77년 흥아타이어로 이름을 바꾸고 99년 우성타이어 경영권 인수를 통해 '넥센'이라는 브랜드를 가진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넥센, 넥센타이어, 넥센테크, 넥센산기 등 총 19개의 계열사를 가지고 있으며 최대주주는 강병중 창업주의 아들 강호찬 넥센타이어 사장이다.

지주사인 넥센은 타이어 튜브, 솔리드 타이어, CMB 등 고무 제품과 골프공 빅야드 등의 사업을 하고 있으며 주력 계열사인 넥센타이어는 한국타이어, 금호타이어와 함께 국내 3대 타이어 업체다. 세계 시장에서는 10∼20위권에 해당한다. 넥센타이어는 지난해 총매출액 1조7006억원을 기록하며 전년대비 18.9% 증가한 사상 최대의 실적을 기록했다. 영업이익 또한 전년대비 58% 늘어난 1769억원을 기록해 최대 수익을 달성했다.

"우리가 무명이라고?" 
알짜기업의 화려한 질주

넥센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은 전반적으로 원활한 현금 흐름과 함께 안정적인 재무 상태를 보이고 있다. 특히 넥센과 넥센타이어는 지난 5년(2007~2011년) 동안 평균 부채비율이 50∼60%대며 부산·경남지역 방송사인 KNN도 지난 2011년 말 13%로 나타났다.

99년 설립한 포털 인터넷 사이트 네이버를 모기업으로 하는 NHN그룹은 올해 8월 포털 부문 네이버와 게임 부문 NHN엔터테인먼트로 인적분할했다.

네이버는 2002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하면서 기업을 공개했다가 2008년 유가증권시장으로 이전해 재상장하는 등 성장가도를 달렸다. 2003년 솔루션홀딩스, 아이브이엔테크놀로지 등을 인수했고 특히 두산 세계대백과사전과 지식 DB 공동 구축에 관한 제휴를 체결하면서 검색 콘텐츠를 대폭 강화했다.

2008년 NHN게임스를 통해 웹전을, 2009년 미투데이와 윙버스를 인수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다.

NHN그룹은 네이버와 NHN엔터를 중심으로 총 25개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다. 2012회계연도 기준 자산 총액은 3조5877억원, 매출 총액은 2조3721억원대다. 이 중 네이버가 1조5114억원대로 그룹 매출액의 64%를 차지한다. 뒤는 온라인 마케팅 및 인프라 사업을 영위하는 NHN비즈니스플랫폼(6306억원)이 이었다.

삼탄은 삼천리그룹과 함께 '한 지붕 두 가족'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55년 고 이장균·유성연 창업자가 공동 설립한 회사로 삼천리연탄기업사(현 삼천리)를 전신으로 한다. 창업자들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2세들이 삼천리와 삼탄을 분리경영하고 있다.

이장균 창업자 아들 이만득 회장은 삼천리그룹을, 유성연 창업자 아들 유상덕 회장은 삼탄을 경영한다.

최근에는 삼천리보다는 삼탄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인도네시아 파시르 광산 덕분이다. 지난해 매출 2조7918억원에 영업이익은 8696억원을 올렸다. 현금성 자산만 1조원이 넘고 인도네시아 석탄광 가치는 수조원에 달한다. 지금 추세로 보면 파시르 탄광 상업 생산은 적어도 2053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자그마치 40년이다.

상대적으로 재계에 이름이 퍼졌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그룹사들도 있다. 식품업계의 '다크호스' SPC그룹이다.

SPC그룹은 고 허창성 명예회장이 45년 황해도 옹진에서 세운 빵집 상미당에서 출발했다. 48년 상미당은 서울 을지로 방산시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59년 삼립제과공사로 바뀌었다.

현재 SPC그룹을 이끌고 있는 허영인 회장은 허 명예회장의 차남이다. 그는 86년 법인 파리크라상을 세워 88년부터 파리바게뜨라는 브랜드로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고 90년대 말 파리바게뜨를 프랜차이즈 빵집 1위에 올려 놓았다.

이름 생소한 '삼탄'
현금 자산만 1조원

SPC그룹은 현재 12개 계열사와 22개 브랜드를 갖고 있다. 지난해 그룹 매출은 3조4500억원으로 2006년 매출 1조원을 돌파한 이래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해외 매출은 2000억원 정도로 예상되며 2020년 해외 매출 목표는 2조3000억원이다.

이외에 ▲초저온 보냉재 전문생산 부산 소재 화학기업 동성그룹 ▲헬스케어 전문 기업으로서 인수합병으로 그룹화에 나선 웰크론그룹 ▲반도체 장비 제조회사에서 건설, 금융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 원익그룹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은 KG그룹 ▲글로벌 자동차 부품기업인 화신그룹 등도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그룹다운 모습을 보이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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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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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