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경제1팀]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재벌가 추석 풍경은 그렇지 못했다. 친지들 얼굴을 보기는커녕 송편도 못 먹은 집안이 많았다. 제각각 나름의 사연이 있다. 우울했던 재벌가 추석나기를 들여다봤다.
'민족 대명절' 추석 때 재벌들은 뭘 하며 지냈을까. 전체적으로 이번 추석만큼 우울할 때가 없었다. 투옥 중인 회장이 있는가 하면 병석에 누운 회장도 있었다. 가족 간에 등 돌리고 사는 바람에 반쪽짜리 차례를 지낸 집안이 있는가 하면 회사 문제로 냉기만 가득했던 집안도 있었다.
편치 않았던 명절
서울지역 구치소엔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재벌 회장들이 수감돼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구자원 LIG그룹 회장,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 등은 '영어의 몸'이 된 상태다. 이런저런 비리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들의 집안사람들이 제대로 명절을 보냈을 리 없다.
병석에 누워있는 김승연·이재현·이호진 회장의 경우 더욱 그렇다. 특히 CJ가는 신장이식 수술을 받은 이 회장뿐만 아니라 가장 큰 어른인 이맹희씨도 일본에서 우측 폐를 3분의 1 가량 절제하는 폐암 수술을 받고 요양 중이라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추석을 보냈다.
명절 내내 회사 문제로 머리를 싸맨 오너들도 한둘이 아니다.
한 집안인 동양그룹과 오리온그룹은 답답한 연휴를 보냈다.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은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추석 직전 동서인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에게 'SOS'를 쳤다. 둘은 추석 연휴에 지원 여부를 논의했지만 끝내 결론을 내지 못했다. 담 회장이 외면했고, 현 회장은 좌절했다. 보다 못한 장모 이관희 서남재단 이사장이 나섰지만 역부족인 모습이다.
강덕수 STX그룹 회장은 경영부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채권단의 뜻에 따라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칩거 중이다. 추석 때도 집에서 뒷목을 잡고 있었다는 후문이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이미 '지휘봉'을 놓은 윤 회장은 지난 8월 사기성 기업어음(CP)을 발행해 회사에 1500억원대 손해를 끼친 혐의로 불구속 기소, 재판을 받고 있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역시 편치 않은 명절을 보냈다. 경영에 빨간불이 켜져서다. 김 회장은 일부 계열사의 '돈맥경화'를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동부그룹은 채무가 불어나고 있어 재무구조 개선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나 주력사들의 실적이 저조한 상황이다.
투옥 중인 회장댁 '우울'
병석 누운 회장댁 '침통'
크게 싸우고 반쪽 차례
회사 문제로 냉기 가득
구자열 LS그룹 회장은 요즘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다. 주요 계열사인 LS전선이 원전 부품 성적서 위조 및 부품 가격 담합 등 잇따른 원전비리 사건에 연루되면서 난관에 부딪혀 있다.
이수영 OCI그룹 회장은 세금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OCI그룹은 지난달 30일 서울지방국세청으로부터 3084억원의 추징금을 부과받았다. 지난해 인천시로부터 부과받은 지방세 1700억원을 포함해 OCI가 납부할 세금은 총 4800억원에 이른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도 밤잠을 설칠 만하다. 조만간 진행될 국회 국정감사 때문이다. 아모레퍼시픽은 불공정거래를 둘러싸고 대리점주들과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민주당 을지로위원회의 진상조사 수용안도 사실상 거부했다. 이에 따라 서 회장의 국감 출석 여부가 업계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금호가는 슬픔 속에서 추석을 보내야 했다. 집안 맏며느리 마거릿 클라크 박 여사(고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명예회장 부인)가 추석 당일인 지난 19일 미국에서 숙환으로 별세했기 때문이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박 여사의 빈소를 국내에 마련해 그룹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당시 박 명예회장의 동생 박삼구·박찬구 회장 등이 형수의 빈소를 지켰다. 박삼구-박찬구 형제는 경영권 다툼을 벌이고 있어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이번 추석 때 친지들이 모두 모이지 못한 재벌가도 있다. '골육상쟁'으로 가족 간 등 돌리고 사는 바람에 반쪽짜리 차례를 지낸 집안은 한진가, 대림가, 두산가, 대성가, 한라가 등이다.
한진가 2세들은 고 조중훈 창업주가 2002년 세상을 뜨자 유산배분 등을 두고 싸움을 시작했다. 이후 형제들은 편을 나눠 갈등을 겪었고, 급기야 법정다툼으로 번져 소송을 반복해 왔다. 대림가는 대림통상 경영권을 놓고 '배다른' 삼촌과 조카 등이 맞붙은 '숙질간 전쟁'을 벌여 그 뒤로 서로 모른 척하고 있다.
두산가는 2005년 '형제의 난'으로 집안에서 퇴출당해 '왕따'로 외롭게 지내다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박용오 전 회장의 가족들이 본가에 가지 못하고 있다. 대성가는 고 김수근 창업주의 아들들이 김 창업주가 작고한 2001년 지분 다툼 이후 등을 돌려 아직까지 발길을 끊고 있다. 한라가도 고 정인영 명예회장의 장·차남간 재산분쟁으로 벽을 쌓고 지내고 있다.
효성가는 이래저래 뒤숭숭하다. 우선 조석래 회장의 아들 3형제간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가 전개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차남 조현문 전 사장이 그룹을 떠나기도 했다.
밤잠 설치기도
게다가 최근 지난 5월부터 시작된 국세청 세무조사의 결과가 나왔다. 국세청은 효성그룹의 수천억∼수조원에 이르는 분식회계와 세금탈루, 차명재산 등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세무조사가 조세범칙조사로 전환되면서 출국금지를 당한 조 회장은 검찰에 고발 조치될 전망이다.
이석채 KT 회장, 정준양 포스코 회장, 최원병 농협 회장 등 재벌급 CEO들도 좌불안석이었다. 박근혜정부 출범 전후부터 교체설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상황. 재계뿐만 아니라 정치권도 이들의 거취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김성수 기자<kimss@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