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이 끝났지만 아직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들이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경찰의 오락가락한 태도 탓이다. 경찰은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하며 뒤엉킨 실타래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다. 그저 증언에 기대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이 틈새로 인터넷 등 세간에선 터무니없는 각종 ‘설’들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실정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를 둘러싼 의혹들을 다시금 조목조목 짚어봤다.
정확한 사고 경위 등 풀리지 않은 의문들 여전히 ‘미궁’
경찰 수사 ‘오락가락’ 사이 터무니없는 ‘설’ 모락모락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두고 말들이 많다. 서거 경위에 대한 경찰의 수사에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은 당초 수사 내용을 모두 뒤집은 상태. 하지만 여러 의문점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의문1>‘이랬다 저랬다…’
경호원 진술 번복 왜?
경찰은 노 전 대통령이 산행에 동행한 이모 경호원에게 심부름을 시킨 뒤 투신한 것으로 잠정 결론 내렸다. 노 전 대통령이 경호원에게 “정토원에 선 법사(선진규 원장)가 계신지 보고 오라”고 지시한 뒤, 경호원이 정토원에 다녀온 3분 사이 봉화산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1차 조사 때 “부엉이바위에 도착해 투신할 때까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있었다”는 경호원의 진술이 거짓으로 밝혀진 셈이다. 3차에 걸친 경찰의 수사 발표도 모두 제각각이다.
경찰은 “경호에 실패했다는 충격과 자책감, 흥분, 불안, 신분상 불이익 등 심리적 압박으로 허위 진술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지만, 언제 또 번복할지 모르는 경호원의 진술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상황에 따라 경호원의 진술이 바뀔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경찰이 전면 재조사를 통해 확보한 객관적인 자료가 뒷받침돼야 경호원의 진술이 신빙성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전직 대통령이 서거한 사건인 만큼 철저하게 경위를 밝히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의문이 풀릴 때까지 보강수사를 계속할 방침이다.
<의문2>‘30분간 무슨 일이…’
경호 기본원칙 무시 왜?
경호원의 아마추어 같은 행동에도 의문이 생긴다. 이 경호원은 1991년 경호원 공채로 채용돼 노 전 대통령을 취임 당시부터 경호했고, 2008년 퇴임과 함께 봉하마을에서 계속 경호 업무를 수행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경호원은 노 전 대통령을 줄곧 모신 베테랑 경호원답지 않게 경호수칙을 무시했다.
경찰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의 산행에 동행한 경호원은 단 한 명이다. 보통 VIP가 외부 활동시 최소 ‘2인1조’경호를 원칙으로 하는 점을 감안하면 허술한 경호가 아닐 수 없다.
경호 전문가들도 “전직 대통령이 산행을 하는데 경호관이 한 명밖에 수행하지 않은 건 이해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벼랑 끝에서 몸을 던질 당시 경호원은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 아무리 심부름을 갔다 해도 경호 상대를 혼자 남겨뒀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경호원이 노 전 대통령의 지시로 자리를 뜬 시각이 오전 6시14분께, 그리고 산 밑에서 노 전 대통령을 발견해 동료에게 차를 대라고 전화한 시간이 오전 6시45분이므로 약 31분간 ‘경호 공백’상태였다.
‘경호 대상에서 눈을 떼지 말라’는 조항은 경호원의 기본수칙으로, 만약 불가피하게 자리를 떠야 하는 용건이 발생하면 무전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게 원칙이다. 경찰은 경호 공백 31분 동안 경호관들의 행적에 수사를 집중하고 있다.
<의문3>‘119 코앞에 두고서…’
베테랑 어설픈 행동 왜?
경호원이 노 전 대통령을 발견하기까지 과정과 발견한 이후 수습도 논란거리다.
이 경호관은 노 전 대통령이 실종된 상황에서 휴대전화로 동료에게 연락했다고 진술했다. 항시 무전기를 차고 귀에 리시버를 꽂은 채 본부(노 전 대통령 자택)에 수시로 보고하는 경호원이 무슨 이유로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는지 의문이다.
또 노 전 대통령을 발견한 경호원의 초기 대처도 어설펐다. 경호원이 부엉이 바위 밑에서 누워 있는 노 전 대통령을 찾은 것은 6시45분, 노 전 대통령을 가장 먼저 살펴본 세영병원에 도착한 시각이 7시다. 병원 이송이 15분 걸렸다는 얘기다.
세영병원 측은 “병원에 도착 당시 의식불명 상태”란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다. 현재로선 노 전 대통령이 현장에서 즉사했는지, 이송 과정에서 숨을 거뒀는지 사망 시점이 명확치 않지만, 경호원이 빨리 발견해 응급 처치만 제대로 했으면 노 전 대통령이 회생할 수 있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응급의학계에 따르면 응급환자 발생시 초기 대응 5분이 생명을 좌우한다. 심폐소생술, 인공호흡 등 적절한 조치가 5분 안에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최초 목격자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뇌가 치명적으로 손상되거나 사망할 확률이 높아진다.
경호원은 이런 응급조치와 절차를 숙지하고 있다. 그러나 경호원은 노 전 대통령의 얼굴을 흔들고 목 부위 경동맥의 맥박만 확인한 뒤 우측 어깨에 메고 산을 내려와 공터에서 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때서야 인공호흡을 실시했고, 곧바로 도착한 경호차에 노 전 대통령을 태우고 세영병원으로 후송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추락하면서 충격을 심하게 받은 노 전 대통령을 경호원이 무리하게 어깨에 메고 이동한 점, 응급차가 아닌 승용차로 이송한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도리어 부상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경호원들이 119에 구조 연락을 하지 않는 점도 의혹을 더한다. 진영 119센터는 봉하마을 사저에서 불과 4.19㎞ 정도로 응급차로 5분 거리에 있었지만, 경호원들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경찰은 “경호원이 다급한 상황에서 경황이 없어 일단 병원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에 우선 메고 갔다”고 전했다.
<의문4>‘일부러 벗기도 힘든데…’
등산화·상의 탈의 왜?
노 전 대통령의 양복 상의와 등산화가 엉뚱한 곳에 떨어진 이유에 대해서도 경찰의 과학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노 전 대통령의 상의는 낙하지점에서 11m 떨어진 곳에서, 등산화 한 쪽은 벗겨진 상태로 시신 주변에서 발견됐다. 상의도 그렇지만 특히 등산화의 경우 보통 신발과 달리 신고 벗기가 쉽지 않다. 네티즌 사이에서 ‘타살설’등이 퍼지는 배경이다.
경찰은 노 전 대통령의 상의와 등산화가 각각 추락하는 도중과 옮기는 과정에서 벗겨졌다고 일축했다.
경찰은 “등산화는 노 전 대통령이 아래로 추락해 굴러 떨어지면서 (목이 없는) 등산화가 벗겨진 것 같다”며 “상의는 혈흔이 많이 묻은 점으로 미뤄 경호관이 투신한 노 전 대통령을 업고 옮기는 과정에서 떨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사건 현장에 혈흔이 없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서거 당일 경찰이 수거한 상의와 등산화에 노 전 대통령의 피가 묻어있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수그러들었다.
<의문5>‘누군가 봤을 만한데…’
사건 목격자 전무 왜?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순간을 지켜본 목격자의 존재 여부에도 시선이 쏠리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경호를 받지 않았던 31분 동안 행적을 판단할 만한 목격자는 공식적으로 아직 없다.
경찰은 “사건 당일 목격자를 상대로 재조사에 들어가는 등 탐문수사를 확대하고 있다”며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떨어지는 장면을 본 사람 등 또 다른 목격자를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5시47분께 사저를 나와 등산로 입구 마늘밭에서 일하는 동네주민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이 만난 사람이나 노 전 대통령을 본 사람이 없다.
하지만 최근 노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 목격 진술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일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종합하면 마을 주민과 사저 경비 초소 대원 등이 노 전 대통령이 추락할 당시 소리를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을 한 주민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의 사저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고추밭에서 일하던 중 제법 큰 물체가 땅바닥에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며 “새벽이라 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렸지만 비명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또 경호관이 투신한 노 전 대통령을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했다. 이들 증언은 등산객 유무와 수색작업 여부 등 경찰의 발표와 조금씩 차이를 보여 앞으로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의문6>‘평소 글과 다른데…’
단문식 메모 유서 왜?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엔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많은 이들을 힘들게 했다… 원망하지 마라… 삶과 죽음은 하나… 화장해 달라… 동네에 작은 비석 하나 세워 달라’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경찰은 “유서는 사저 박아무개 비서관이 발견했고, 유족 측 정재성 변호사를 통해 경찰에서 입수했다”며 “유서 파일을 유족 측의 동의 하에 디지털 증거분석한 결과 작성 시간과 저장시간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사망 당일 오전 5시21분에 서재 겸 거실에 있는 컴퓨터로 유서 작성을 시작해 5시26분 1차 저장을 했다가 5시44분 최종 저장한 뒤 5시47분께 사저를 나왔다.
하지만 이 유서를 놓고 진위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우선 유서는 노 전 대통령의 육필이 아니다. 서명이나 사인도 없다. 따라서 유서를 다른 사람이 작성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경찰은 노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가 14줄이라고 밝혔으나 실제론 더 많은 분량이 있지 않겠냐는 추측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의 평소 집필 습관을 감안하면 극히 평범하고 단문 형태의 짧은 유서가 미심쩍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직설적인 화법과 과감한 성격상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또 다른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노 전 대통령은 빙빙 돌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내뱉고 보는 스타일로 말솜씨가 좋은 달변가로 유명했다. 핵심이 명확하고 과격한 글로도 정평이 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