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불거져 나오는 연예계 비리는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다. PD와 제작자, 연예인들간 뇌물수수 및 성상납에 관한 논의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불문율처럼 여겨지고 있는 이 검은 커넥션은 좀처럼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연예계에 보이지 않는 권력과 황금만능주의의 술수가 건재하고 있기에 그렇다. 신참내기 연예인들은 뇌물을 통해서라도, 성상납을 해서라도 스타로 발돋움하기를 바란다. 방송계에서의 생명은 바로 인기로 점철되기 때문이다. 뇌물과 성상납, 사회 전반에 독버섯처럼 팽배해있는 그 검은 고리를 좇아봤다.
연예계 보이지 않는 권력과 황금만능주의 술수 건재…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아
지난 95년 방송계 뇌물 수수파동은 연예계가 얼마나 곪아 있었나 보여준 사건
방송가엔 “함부로 돈을 먹었다가는 체한다”는 웃지 못할 은어 나돌기도
매니지먼트사 관계자는 “‘연예비리’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지난 1995년 1월12일 경찰청은 연예계 비리를 수사하면서 PD, 매니저 등 13명을 출국 조치했다. 방송계의 뇌물수수 파동은 연예계 종사자들 및 연예인들에게 자성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던 사건. 당시 경찰은 금품수수와 매춘 등 상당한 물증을 확보해 뇌물수수 사건이 얼마나 곪아 있었나를 여실히 알려주었다.
4~5년 주기로 뇌물수수 사건 발생
‘월드컵 주기’ ‘올림픽 주기’ 표현도
당시 섹스스캔들로 성상납을 한 탤런트는 총 9명. 9명은 대부분 방송사의 톱 탤런트들이었다. 지금도 검찰 측 파일엔 이들의 명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경찰 수사과는 연예계 비리와 관련, 매니저 K씨를 입건, 수사의 초점을 맞췄다. 당시 경찰이 K씨를 풀어주는 대가로 대다수 많은 탤런트들의 성상납 사실을 알게 됐다는 신빙성 있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 사건은 섹스스캔들과 맞물려 은행거래내역을 추적하는 등 상당한 진척을 보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수사당국은 붙잡힌 매니저에게 일부 PD들에게 승용차가 오간 사실, 금품을 전해주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진술 받았다. 이에 따라 성상납을 한 9명의 섹스리스트가 비밀리에 공개되기도 했다.
1995년 이후 PD들의 자성이 있었던지 한 건의 뇌물사건도 접수되지 않았다. 그러나 1999년 11월26일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 연출가인 김재형 PD가 뇌물 혐의로 구속됐다. 조연급 탤런트 2명에게 1612만원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기소 된 것. 이에 서울지법 형사 9단독 이석웅 판사는 김재형 PD에 대해 징역2년,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612만원을 선고했다.
이후에도 연예인의 방송 출연과 관련해 방송사 PD와 매니저들이 금품을 주고받는 ‘검은 유착’ 사건은 4~5년을 주기로 터졌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월드컵 주기’ 또는 ‘올림픽 주기’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다.
방송계 역시 비리가 있을 때마다 ‘검은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고개를 숙이고 성명서 발표와 함께 윤리강령발표, 자정선언 등을 반복하고 있지만 사실상 달라진 것은 없다. PD들의 이름만 달라질 뿐 고위층을 향한 로비 형태는 여전하다.
그렇다면 연예비리가 반복되는 이유는 뭘까. 일부 방송PD와 탤런트, 매니저간엔 보이지 않는 먹이사슬이 공존하고 있다. 매니저는 자신의 소속연예인들을 PD들에게 선보임으로써 스타로 만드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성상납과 뇌물 및 촌지는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방송사 자사 직원 솜방망이 처벌
반복되는 사건의 또 다른 이유
이러한 공식은 PD들이 스타를 발굴해내는 직업이고 매니저는 경제적, 명예적인 면을 고려하려는 밸류가 생성되기에 그렇다. 방송사 연예담당 PD는 일을 통해 어차피 매니저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한 매니저가 PD와 친하게 지내기까지는 수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만큼 인적자원을 쌓아서 유대감을 돈독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송가에는 “함부로 돈을 먹었다가는 체한다”는 웃지 못할 은어가 나돌기도 한다. 그만큼 PD와 친밀해지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방송사는 수백명의 연예인들이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에 선택되는 연예인은 극소수. 그러다 보니 인맥과 검은 돈의 유착이 가능할 수밖에 없다.
연예비리가 반복되는 또 다른 이유는 방송사의 자사 직원 감싸기와 솜방망이 처벌 때문이다. 방송계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해선 무엇보다 방송사의 의지가 중요하다. 방송사는 매년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개인비리로 치부하면서 자정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해왔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건은 반복되고 있다.
비리를 차단하고 방송사가 본연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선 해당 비리 연예기획사의 퇴출과 함께 PD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 비리에 연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 뒤 소리소문 없이 다시 업무에 복귀하는 구태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검찰 조사에서만 별 문제가 없다면 OK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방송사 자체 조사 등을 통해 문제가 있는 PD를 퇴출시켜야 한다.
동시에 비리에 연루된 기획사에 대해 방송사 차원에서 제재가 있어야 한다. 일부이긴 하지만 기획사들은 PD가 바뀔 때마다 이들에게 접근해 자신들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로비를 벌이고 PD를 길들여왔다. 연예기획사의 단맛에 빠진 PD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에게 유리하게 프로그램을 만들고 캐스팅을 해왔다.
수사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에
뒷거래는 당연한 행태로 인식
사실 일선 PD들을 비롯한 방송관계자들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원칙에 대체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이런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매번 공식처럼 검찰 수사가 흐지부지 되고 일선 제작진들은 ‘일부의 문제를 전체의 문제로 확대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다.
‘방송비리’ 사건이 몇 년 주기로 반복되다 보면 진위 여부를 떠나 마치 PD집단 전체가 부도덕적으로 매도당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PD들이 말뿐이 아닌 실천을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스타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도 있지만 PD들이 이런 것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연예비리가 되풀이되면서 드러나는 문제점도 있다. 수사가 있을 때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 같은 뒷거래가 업계의 당연한 행태로 인식되는 등 도덕불감증이 만연해지고 오히려 뒷거래 없이 일을 하려는 사람들이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국내에는 많은 연예기획사가 있지만 이름만 대면 PD들이 경쟁적으로 출연을 시키고 싶어하는 스타급 연예인은 한정돼 있으며 신인급 연예인만 소속된 곳도 적지 않다.
신인을 방송에 출연시키기는 ‘하늘의 별 따기’이지만 모든 연예기획사가 금품로비를 하지는 않는다. 그저 부지런히 방송사를 돌아다니며 PD들을 만나 친분을 다지고 소속된 연예인을 홍보할 뿐이다.
하지만 로비를 통해 스타가 된 연예인의 이름까지 거론되는 상황에서 뒷거래 없이 일을 해온 매니지먼트사들의 박탈감은 상대적으로 크다. 열심히 발품을 팔아도 어려운 일을 자금력이 뒷받침된다는 이유로 쉽게 해결하는 업체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결국 돈이다’라는 생각에 자신을 위해 발품을 팔아준 매니저를 등지고 자금력이 풍부한 대형 기획사로 옮기려는 연예인들이 생기는 것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유망한 신인들이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회사로 옮기면서 업계의 ‘상도의’가 깨지고 질서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특히 신인 발굴과 육성에 집중해온 회사들은 이들이 떠나면 존립기반마저 흔들게 되고 결국 업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는 것도 막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한 매니지먼트사 관계자는 “‘연예비리’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결국 ‘유전무죄, 무전유죄’일 뿐이다”라며 씁쓸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