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삼성경영' 25주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11.26 1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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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이끈 초일류 혁신과 도전

[일요시사=사회팀]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
삼성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25년 전 이건희 회장의 약속과 만나게 된다. 당시만 해도 그의 원대한 포부가 실현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오늘날 삼성은 전 세계 9위 기업으로 우뚝 솟았다. 반도체·TV·휴대폰 부문은 명실상부 세계 정상에 올랐다. 이것을 일군 이 회장 경영은 혁신과 도전 그 자체였다. 이건희 회장의 취임 25주년을 맞아 한국경제 발전을 이끈 이 회장의 발자취를 집중 조명해봤다.

"책임경영과 공존공영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경영이념을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1987년 11월19일 삼성은 긴급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다. 향년 78세를 일기로 삼성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회장이 별세하자 사장단들은 이건희 부회장을 제2대 삼성그룹 회장으로 추대했다.

1987년 12월1일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신임 회장 취임식에서 이 회장은 삼성에 가장 먼저 입사한 최관식 삼성중공업 사장으로부터 사기를 넘겨받아 힘차게 흔들었다.

브랜드 가치
전 세계 9위

이 회장은 취임한 지 3개월, 삼성 창립 50주년을 맞은 자리에서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그는 자율경영, 기술 중시, 인간존중 등을 창업정신으로 내세웠다. 그로부터 25년, 위기를 정면 돌파하는 혁신과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도전정신이 내수기업에 불과했던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삼성은 혁신에 혁신을 거듭해 브랜드 가치 전 세계 9위 기업으로 우뚝 솟았다. 매출 규모만 놓고 봐도 25년 전과 비교해 39배 성장했다. 2100억원 수준이었던 순이익도 20조3000억원으로 늘었다. 또 해외 직수출 규모는 1987년 63억달러에서 25배나 성장한 1567억달러에 이른다. 이 모두 25년 만의 변화다. 이렇듯 수치만 봐도 이 회장을 '경영의 신'이라 일컬을 만하다. 특히 삼성의 '반도체 도전'은 우리나라 정보기술 산업을 일으킨 원동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계일류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은 전자·IT 산업을 주도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1992년 이후 반도체 D램 부문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휴대폰 시장에서는 갤럭시 시리즈를 내세워 노키아, 모토로라, 소니 등을 따돌렸고 이젠 애플의 아성도 뛰어넘고 있다. TV와 LCD 산업 역시 삼성이 꽉 쥐고 있다. 명실상부 삼성은 한국의 대기업을 넘어서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이 회장이 삼성을 이끌어가기 시작한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은 새로운 글로벌 환경이 도래하던 때였다.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방으로 기업의 활동 무대가 전 세계로 확장됐고,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전환되고 있었다. 과거의 방법과 시스템으로는 새로운 글로벌 시대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 이 회장의 생각이었다.

삼성이 근본적인 수술에 나서게 된 사건은 삼성전자의 일본 현지법인 기술고문이 기술개발 수준부터 경영자의 자세, 직원들의 근무태도에 관한 것까지 삼성의 문제점을 뼈아프게 지적하면서부터다. 특히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에서 근무하던 산업디자인 고문 후쿠다의 보고서를 사업본부장이 묵살한 것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혁신은 시작됐다.

'세계 초일류기업' 25년 전 약속 지켜
"처자식 빼고 다 바꿔라" 혁신의 리더십

이 회장은 1993년 6월 프랑크푸르트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이 보고서를 읽고 격노했다. 여기에 1981년 이후 자신이 각사로 별도 지시한 284쪽 분량의 지시문이 대부분 실행되지 않은 것을 알고 통탄했다. 이 회장의 "이대로는 안 된다. 처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 선언이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이 회장은 즉시 사장단과 핵심간부를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불러 호통 쳤다. 그는 "삼성전자는 진행성 암에 걸려 있고, 삼성중공업은 영양실조, 삼성건설은 당뇨병, 삼성종합화학은 애초부터 설립해서는 안 되는 회사, 삼성물산은 삼성전자와 삼성종합화학의 중간쯤 되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계열사 사장단에게 충격을 줘 대대적 혁신을 일구기 위함이었다.


당시 LA에서 도쿄, 다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거치며 장시간 회의를 가진 이 회장은 품질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시대에는 무엇보다 신용과 이미지, 다시 말해 브랜드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 회장은 이미 그때 알아차린 것이다. 당시 이 회장은 "단 한 개의 불량 제품을 만드는 것은 회사를 좀먹는 암적 존재이자 경영의 범죄행위"라고 역설했다. 이것은 '품질은 곧 삼성의 얼굴'이라는 선언으로 이어졌다. 이는 '삼성 신경영' 체제의 밑바탕이 됐다.

신경영 선언 이후 삼성은 개혁의 고삐를 단단히 잡았지만 초창기 개혁의 속도는 이 회장의 기대에는 다소 못 미쳤다. 이 회장은 1995년 <알게마이네 자이퉁지>에 기고한 '21세기를 향한 아젠더'라는 글에서 이 같은 위기의식을 한 번 더 전달했다.

이 회장은 "품질 위주의 경영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지만 경영관행은 여전히 양적 기조를 벗어나지 못했다"며 "대단히 위험한 타성이 그룹을 지배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삼성 임직원들을 향해 일침을 가했다. 이처럼 항상 한발 앞서가는 삼성의 혁신은 철저한 현실 인식과 절박한 위기의식으로부터 시작됐다.

개혁과 혁신으로
위기 정면돌파

이 회장의 위기론은 계속 이어졌다. 1993년 처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자', 1998년 IMF를 맞아 위기 극복을 위해 구조조정에 나선다는 '버리자', 그리고 2002년 5년 후 10년 후 무엇이 삼성을 먹여 살릴 것인지 '찾아라'까지 항상 위기의식을 강조했다.

2011년 1월 신년하례식에서도 이 회장은 "10년 내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새로운 위기론을 꺼냈다. 한마디로 안주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임직원들에게 보낸 것이다. 위기 그리고 혁신은 이 회장이 항시 강조하는 단골 메뉴다.

신경영과 함께 삼성이 초일류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저력은 품질경영으로부터 나왔다. 특히 반도체, TV, 휴대폰, 냉장고 등 삼성의 20여 개 주력제품은 당시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미국, 일본 등의 시장선도 업체들의 제품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격 경쟁력 면에서 앞섰고 세계인들로부터 신뢰를 쌓아갔다.

이제는 '삼성'이라는 한글 발음 그대로 부르는 사람들보다 '쌤송'이라는 영어 발음으로 부르는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 삼성은 그만큼 한국의 대기업을 넘어선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것이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올라서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은 반도체와 휴대폰 등 IT 사업부문의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내수산업과 경공업 중심의 사업구조로 성장해왔던 삼성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이 회장은 사운을 건 결단을 수차례나 내려야했다.

그 시작은 반도체다. 이 회장은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 전자사업을 하려면 반도체를 자체 개발해야 한다"며 한국반도체 인수를 통한 반도체 산업 진출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반도체 사업 진출은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막대한 자금이 드는 것은 물론이고 반도체 기술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팔 수 있는 시장이 개척될지도 미지수였다. 당시 경공업에 머물러 있었던 우리나라 현실에서 반도체 사업 진출은 실패가 불 보듯 뻔했다.

당시 주위에서도 이 회장의 한국반도체 인수를 부정적으로 봤다. 전 세계가 오일 파동 중인데다가, 삼성전기와 삼성전관은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은 "오히려 고전을 거듭하는 전자부문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반도체 자급에 달려있다"며 반도체 사업을 밀어붙였다.


이 회장의 이런 집념이 결실을 맺은 것은 1981년 초였다. 삼성이 컬러TV용 색신호 집적회로(IC)를 개발했고 64K D램도 6개월 만에 개발했다. 이어 1984년 10월에는 256K D램을 개발하며 반도체 기술과 노하우를 쌓아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삼성에서 쌤송으로

1987년은 반도체 역사에 전환점을 맞는 중요한 시기였다. 당시로서는 대용량이었던 4Mb D램 개발과 관련 '스택' 방식과 '트렌치' 방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시점이었다. 두 기술은 서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어 양산 단계 전 누구도 어떤 방식이 유리한지 알기 어려웠다. 이때 이 회장이 "단순하게 생각하자. 안으로 파는 것보다 위로 쌓는 게 쉽지 않겠느냐"고 단숨에 결정한 것은 유명하다. 

이 회장의 판단은 결국 옳았다. 트렌치 방식을 채택했던 당시 반도체 부문 세계 1위 도시바는 양산 저하 문제를 일으키며 D램 선두자리를 삼성에 내줬다. 반면 삼성은 과감한 투자로 64메가 D램 개발로 세계 반도체 산업에서의 기술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후 생산량을 지속적으로 늘려 시장 점유율도 1위로 올라섰다.

1993년 이 회장의 8인치 웨이퍼의 채택은 삼성 반도체가 세계 1위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실패하면 당시 1조원의 손실이 예상됐지만 이 회장은 세계 1위 반도체 업체가 올라서기 위한 도전을 시도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삼성은 일본에 늘 한 단계 앞서가며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업체로 부상했다.

특히 이 회장은 지난 2001년 당시 플래시메모리 원천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도시바가 합작을 제안해 왔을 때도 흔들림 없이 독자적인 길을 고수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삼성의 플래시메모리 사업은 거짓말처럼 세계 1위 도시바의 시장 점유율을 역전했다.


사운을 건 반도체·휴대폰 '역전드라마'
프랑크푸르트 선언 20돌…대변화 예고

이후 삼성은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LSI) 사업도 진출했다. 삼성은 1996년 미국 디지털이큅먼트와 손잡고 64비트 알파칩 개발에 나서면서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현재 삼성은 스마트폰의 바람을 타고 모바일 분야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인텔과 동등한 지위로 올라서고 있다.

반도체에 이어 '애니콜 신화'가 뒤를 이었다. 현재의 글로벌 스마트폰 판매 1위 역시 이 회장의 집념에서 비롯됐다. 이 회장은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갖는 시대가 온다"며 삼성의 신수종 사업으로 휴대폰 사업을 예견했다. 1994년 10월 애니콜 첫 모델인 SH-770을 출시했고, 1년도 안 돼 전 세계 휴대폰 시장 1위인 모토로라를 제치고 시장 점유율 51.5%를 차지하며 국내 정상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통화가 원활하지 않는 등 품질 문제가 지적되자 이 회장은 500억원 상당의 완제품을 태워버리는 결단을 했다. 19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2000여 명의 직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수 만대의 휴대폰이 불태워진 것. 당시 이 회장은 "고객을 두려워하라. 돈을 받고 불량품을 파는 것은 고객을 속이는 짓"이라고 질책했다. 삼성은 이런 경험이 있었기에 15년 후 갤럭시 신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회장은 2000년을 기점으로 삼성의 글로벌 경영을 본격화했다. 2006년 출시된 TV '파브'는 삼성TV를 글로벌 1위로 만들었고, 2007년 삼성중공업은 수주액 200억달러를 돌파하며 세계 최고의 조선소로 성장했다. 삼성물산 건설부문도 2010년 1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두바이의 '부르즈칼리파'를 완공했다.

글로벌 삼성은 질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냈다. 삼성전자는 미국의 소비자전문지 <컨슈머리포트>가 선정한 '올해 10대 전자제품'에 갤럭시S3, 갤럭시노트10.1, HT-E6730W(홈시어터) 등 3개 제품이 이름을 올렸다.

삼성의 브랜드 가치도 올해 인터브랜드 조사결과 벤츠와 토요타, 디즈니, HP, 시스코 등을 제치고 당당히 세계 9위에 진입하는 기염을 토했다.

신사업 없이
미래도 없다

삼성의 혁신과 도전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이 회장은 2010년 3월 경영에 복귀한 후 두 달 만에 태양전지와 자동차용 전지, LED, 바이오제약, 의료기기 등 삼성의 미래를 책임질 5대 신수종 사업을 발표했다. 특히 내년 6월은 이 회장의 신경영 포부를 담은 프랑크푸르트 선언 20주년을 맞는 해다. 이에 삼성 안팎에서는 내년에 대대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벌써부터 미래 전략과 비전이 동시에 담길 내년 이 회장의 '제2의 신경영' 선언이 기대된다.

김민석 기자 <ideaed@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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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