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금이 몰려오고 있다. 정부는 금융위기 타개를 위해 일본의 적극적인 국내 투자 확대를 독려하고 있다. 벼랑 끝에 몰린 국내 기업도 일본 자금을 언제라도 받아들일 태세다. 일본 역시 ‘엔고 현상’을 발판 삼아 현해탄을 건널 채비를 끝낸 모양새다. 한편에선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운 일본계 자본의 시장 장악 우려도 나온다. 3·1절을 맞아 현재 일본 자금이 유입되거나 앞으로 가능성이 있는 국내 기업 현황을 분석해 봤다.
엔화 강세가 지속되고 있다. 일본계 자금들이 강력한 엔화를 무기삼아 국내 기업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 가운데 MB정부까지 나서 “지금이야 말로 일본이 한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시점”이라며 일본 자금 유치를 부추기고 있다. ‘3월 위기설’의 단초를 제공했던 일본계 자금의 한국 철수설이 무색할 정도다.
검찰에 구속된 인터넷 경제논객 ‘미네르바’는 반대로 “엔화의 초강세로 일본의 투기자본이 한국경제를 공격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일본계 자금의 동향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국내 기업들은 이미 일본 자금의 막대한 영향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돈’하면 가장 먼저 롯데그룹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한국롯데는 유통, 식품, 호텔, 금융, 중화학 부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하고 있지만 일본롯데는 롯데제과나 롯데리아 등 식품부문에 주력하고 있다. 신격호 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부사장이 일본롯데를, 차남 신동빈 부회장이 한국롯데를 맡는 구도다.
외관상 한국롯데와 일본롯데가 별도의 법인으로 보이지만 지분구조를 들여다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롯데그룹의 사실상 지주회사 격인 호텔롯데의 지분을 대부분 일본롯데 계열사들이 소유하고 있다.
호텔롯데 최대주주는 한국롯데를 책임지고 있는 신동빈 부회장이 아닌 일본롯데 경영자인 신동주 부사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일본롯데다. 호텔롯데는 일본롯데(19.21%), 일본롯데물류(15.75%), 일본롯데데이터센터(10.48%), 일본롯데애드(9.47%), 롯데전자공업(8.66%), 일본광윤사(5.49%) 등 일본롯데 계열사들이 장악하고 있다.
호텔롯데는 롯데쇼핑(9.29%)을 비롯해 롯데제과(3.21%), 롯데캐피탈(27.33%), 롯데산업(36.82%), 롯데물산(29.62%), 롯데건설(47.5%), 롯데상사(30.5%), 롯데리아(20.2%), 롯데기공(17.38%), 호남석유화학(13.64%)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롯데그룹 순환출자 정점에 일본계 회사인 호텔롯데가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롯데그룹 계열사에 대한 일본 자금의 투자도 끊이지 않고 있다. 롯데그룹은 이를 바탕으로 기업 인수 등 사업영역 확대에 적극 나서고 있다. 지난해 10월 일본 아이오이손해보험은 롯데손해보험에 28억엔(약 430억원·지분율 9.9%)을 투자했다. 최근 OB맥주 인수전에도 아사히맥주가 동참한 것으로 전해진다.
가스보일러 업계의 대명사 린나이코리아도 롯데그룹과 사정이 같다. 린나이재팬과 합작사인 린나이코리아는 강성모 회장 등 특수관계인이 49%를 나머지 51%는 린나이재팬이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린나이코리아가 IMF 외환위기 직후 린나이재팬으로부터 들여온 차입금 55억엔(한화 864억원)을 변제하지 못해 린나이재팬에 지분 97%까지 넘기는 방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린나이는 경영권뿐만 아니라 일본 회사와 다름없는 브랜드가 된다.
생활용품 전문기업인 CJ라이온도 일본 자금이 투입된 회사다. CJ그룹은 2004년 8월 일본 라이온사에 1990년부터 꾸려온 생활용품부문을 매각했다. 일본 라이온사가 81%를, CJ개발이 19%를 갖고 있다. 라이온은 매출 3조원대로 일본 점유율 2위를 기록한 세계적인 생활용품 전문기업이다.
한국야쿠르트도 외국인투자사로 분류된다. 한국야쿠르트는 1969년 일본의 기술과 자본으로 설립됐는데 당시 일본에서 유산균 종균을 공급받는 대가로 지분을 넘기는 합작 계약을 맺었다. 최대주주는 일본법인인 야쿠루토혼샤로 38.3%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해태음료는 아예 일본 업체다. 해태음료는 2000년 6월 해태그룹에서 분리돼 일본업체 5개사가 참여한 아사히컨소시엄에 매각됐다. 지분은 아사히맥주 41%, 마루베니 32.5%, 호텔롯데 19%, 미쓰이물산 5%, 덴쯔 2.5% 등 100% 일본 업체가 장악하고 있다.
국내 철강업계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 기업들의 지분 투자가 두드러진다. 포스코는 신일본제철이 지분 5.04%를 보유하고 있다. 신일본제철은 지난 1월 포스코 베트남 법인의 지분 15%를 사들이기도 했다. 현대하이스코와 동국제강은 JFE스틸이 각각 12.98%, 14.88%를 갖고 있다.
KTF의 2대주주는 일본 최대 이동통신업체인 NTT도코모로 10.72%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KT는 지분 54.25%로 KTF의 최대주주다.
KT는 5월 중 KTF와 합병을 추진하면서 NTT도코모가 보유한 KTF 주식의 60%를 양도하는 방법으로 2억5000만달러(약 3700억원) 규모의 교환사채(5년 만기)를 발행키로 했다.
NTT도코모가 최대주주로 올라서는 문제를 우려해서다. KT의 1대주주는 지분 6.59%를 보유한 국민연금. 교환사채를 발행하면 KT-KTF 합병 시 NTT도코모의 지분은 2.1%로 낮아진다.
일본 자금은 국내 은행의 담까지 허물고 있다. 일본 금융기관들의 국내 금융기관에 대한 출자가 줄을 잇고 있는 것.
KB금융지주는 지난해 말 일본의 3대 은행인 미쓰이스미토모은행에 자사주 0.5%를 매각했다. KB금융지주는 지난해 10월 지분 2%를 미쓰이스미토모은행에 매각하기로 한 계약에 따라 오는 6월까지 나머지 1.5%도 차례로 매각할 계획이다.
앞서 2006년 10월 미즈호은행도 신한금융지주에 출자해 1.5%의 지분을 보유 중이다. 신한금융지주의 재일교포 지분은 20%에 달한다. 참고로 은행권 외국인 지분 현황은 지난해 말 현재 SC제일은행 100%, 외환은행 75.4%, 하나은행 67.8%, 국민은행 58.3%, 신한은행 54.1% 등이다.
‘엔고’ 일본계 자본 현해탄 건너 국내 투자 본격화
MB정부 베팅 독려…미네르바 ‘노란토끼’공격 경고
일본계 자금은 대기업은 물론 코스닥업체와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사냥’에 나서고 있다. 국내 일부 업체들은 일본계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전환사채(CB)나 신주인수권부사채(BW) 발행까지 서두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무역업체인 마루베니는 지난해 9월부터 자동차조립라인 제조업체인 우신시스템의 지분을 꾸준히 확대해 지난달 6.8%로 지분을 늘렸다. 업계에선 마루베니가 10%대까지 지분을 늘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일본 도쿄 디즈니랜드를 운영하는 오리엔탈 랜드그룹의 계열사인 K&K쇼난매니지먼트 대표는 지난해 12월 코스닥 IT업체인 펜타마이크로의 지분 10.53%를 사들였다. 경영 참여가 지분 취득 목적이다.
삼영전자공업은 케미콘사와 스팍스인터내셔널이 각각 1, 2대주주로 일본계 지분만 무려 50%에 육박한다. 이외에도 애리아파이낸스, JAFCO인베스트먼트 등 일본계 펀드가 몇몇 코스닥 회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게임,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 사업에도 일본업체들의 투자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일본계 자본들은 일본도 불경기이지만 엔화 강세 등 지금과 같은 한국 투자 시기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경기가 호전된 이후 요사이 취득한 지분만 팔아도 수익이 엄청날 것”이라고 말했다.
눈에 띄는 점은 일본 자본이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에 나온 매머드급 매물에도 군침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지난 1월 한화그룹의 포기로 결국 수포로 돌아간 대우조선해양 매각이 최대 관심사다. 정부가 대우조선해양의 지분을 최대 20%까지 외국인에게 파는 방안을 추진하는 탓이다. 일본 업체들의 시원한 베팅이 예상되지만 노조 반발 등 비판 여론이 불 보듯 뻔하다.
하루하루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는 C&그룹도 일부 계열사의 해외매각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C&중공업은 최근 그룹 계열사 지급보증 문제로 법원에 파산 신청이 들어가 회생의 불씨에 찬물을 끼얹은 상황이다.
쌍용건설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동국제강이 인수를 포기하면서 다시 처음부터 M&A작업을 시작해야 하는 처지다. 쌍용건설의 재매각은 경기침체로 당분간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보여 역시 해외매각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진로의 경우 한때 일본 자금설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진로 측은 ‘진로에 일본 자금이 유입됐다’는 소문이 확대되자 즉각 진화작업에 나섰고 급기야 신문 지면에 ‘일본 자본이 없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민기업’이란 문구와 함께 주주 현황과 보유지분을 공개하는 해명성 광고까지 실어야 했다. 그만큼 국민들이 ‘일본’에 민감하다는 반증이다.M&A 한 관계자는 “지난해 외국인들의 M&A형 투자는 44억2600만 달러(약 6조7000억원)로 전년보다 78.2%나 늘었는데 상당수가 일본 자금으로 추정된다”며 “앞으로도 경기가 풀릴 때까지 M&A시장에 매물로 나온 기업들이 모조리 일본의 재물이 될 공산이 크다”고 전했다.
사채시장 일본계 장악 실태
실적 ‘짱’서비스 ‘꽝’
‘말 많고 탈 많은’ 국내 사채시장은 이미 일본계 자본이 장악한 지 오래다. 대부업계에 따르면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일본계가 소규모 영세업체 위주인 토종계를 압도, 사채시장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에 따르면 최근 2년(2006∼2007년)간 국내에 진출한 일본계 대부업체들 중 외감대상(자산 70억원 이상)인 14개 업체들이 2년간 평균 636억원의 자본금을 바탕으로 총 4036억원의 이익을 챙겼다.
일본계 대부업체는 2006년 591억원의 자본금을 바탕으로 7113억원을 대출, 151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2007년에도 681억원의 자본금으로 1조4127억원을 대출, 2526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챙겼다. 이 같은 이익은 평균 자본금의 6.3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국내 은행들의 자본금 대비 이익 배율이 0.9배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높은 수치다.
이중 러시앤캐시, 산와머니 등 2개 업체가 대표적인 일본계 업체다. 러시앤캐시는 2006년 111억원의 자본금으로 323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지난해에는 154억원의 자본금으로 1300억원의 당기순익을 챙겼다. 2년 동안 총 133억원의 자본금만으로 12.2배에 달하는 1623억원의 이익을 낸 셈이다.
산와머니도 지난 2년 동안 평균 200억원의 자본금을 바탕으로 1781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해 8.9배의 이익률을 세웠다. 반면 최근 금융감독원 조사 결과 지난해 대부업 불편·피해신고가 가장 많이 접수된 대부업체는 산와머니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어 웰컴, KJI, 러시앤캐시 등의 순이었다.
한편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08년 6월말 현재 각 시·도에 등록하고 있는 등록 대부업체수는 1만8384개다. 무등록 대부업체 등을 합쳐 총 대부시장 규모는 16조5000억원으로 파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