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회의에 한·미·일·중·러 등 주요국 외교 장관들이 참석해 북한의 미사일 시험 발사에 깊은 우려를 표하며,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대화 재개를 촉구하는 의장 성명을 채택했다.
이번 의장 성명에선 지난 3년간 반복됐던 북핵 문제의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표현이 빠지고, ‘CD(완전한 비핵화)’로 대체됐다.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는 2003년 미국과 리비아 간 협상 때 조지 부시 행정부에서 처음 사용된 이후 북핵 문제의 최종 목표를 상징하는 미국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용어가 됐다. 당시 북한은 CVID가 패전국에게 받는 항복 문서이자 일방적인 무장 해제의 의미라며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그후 2018년 6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마친 후 발표한 공동성명에 CVID 대신 ‘CD(Complete Dismantlement)’라는 용어를 썼다. 당시 북한은 CVID에서 검증(V)과 되돌릴 수 없는(I) 비핵화를 뺀 CD에 대해 만족하며 큰 기대감을 보였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반발을 고려해 다소 완화된 표현으로 합의해 준 것이다. 이번 ARF 외교장관회의에서도 북한의 반발을 의식한 수위 조절로, 한반도 정세의 실질적 진전을 위한 이재명정부의 정책 방향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CVID보다 낮은 수준의 CD를 표현하긴 했지만,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다만 북한 비핵화 기조에 변화를 주고 대화 재개를 강조했다는 점에선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조현 외교부 장관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등 임명 절차를 남겨둔 상황에서 장관을 대신해 박윤주 외교부 제1차관이 참석했고, 북한은 ARF 출범 이래 25년 만에 처음으로 김정남 암살 사건에 의한 말레이시아와의 외교 관계 단절 등의 이유로 불참했다.
한편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11일 오후 2시부터 군사분계선(DMZ) 일대 모든 전선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지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이는 이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공약했던 대북 확성기 방송 중지, 남북관계 신뢰 회복, 접경지역 주민 고통 완화를 위한 실질적인 조치였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14일엔 강화도에서 한 민간단체가 북한 지역으로 전단을 살포한 것이 확인되자,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불법적인 대북 전단 살포는 중단돼야 한다며, 대북 전단과 관련 모든 부처에 예방 및 사후 처벌 대책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이 대통령의 선제적 유화 조치에 북한은 아직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강대강 대북정책으로 남북관계 악화를 불러왔던 반면,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우호적인 대북정책으로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남북관계 복원을 내걸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남북 연락 채널을 복구하고 사실상 폐기된 9·19 남북군사합의 복원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대선 이튿날 북한은 “한국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 리재명이 21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고 보도했다. ‘남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국’이라고 명시한 것 자체가 북한으로선 이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낸 셈이다.
특히 이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에 대해 단계적이고 실용적인 접근을 통한 중장기 전략을 가지고 있어, 이번 ARF 외교장관회의에서 CVID 보다 낮은 수준의 CD를 언급하게 된 게 이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거라는 걸 북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인선에서도 북한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북핵, 북미 전문가이자 주 러시아 대사와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역임한 위성락 의원을 국가안보실장으로 임명했고, 지난 김대중정부에서 남북정상회담 수행원으로 참여한 바 있는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을 국정원장에 임명했다.
필자는 북한이 이 대통령의 우호적인 대북 전략과 대북 확성기 방송 중지 조치, 대북 전단 살포 중단 조치에 이어 국가안보실장과 국정원장에 친북 성향의 인사를 임명하고, ARF 외교장관회의에서 이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돼 CVID보다 낮은 수준의 CD를 명시한 점 등에 대해 향후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생각해 봤다.
북한이 당장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쉽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필자가 얻은 결론이다.
다만 민간 차원에서 미세한 변화가 있긴 했는데, 지난달 <자유아시아방송>이 중국 주재 북한의 무역 간부가 “이재명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인터넷 보도로 지켜보며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나 하나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북한의 지인들도 이 대통령의 당선 소식에 남북 경제교류 재개를 기대하고 있다“고 전한 게 전부다.
그러나 필자는 이미 남북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규정하고 러시아와 밀착하고 있는 북한이 이 대통령의 우호적인 대북 전략 행보에 쉽게 호응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너무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전문가인 모 교수도 “북한이 남북관계를 단절한 이유가 남북관계의 대체제로써 러시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연결고리를 차단했다고 평가한다”며 “더군다나 현재 군사 협력 중심으로 북·러 간의 밀착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관계 복원은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ARF 외교장관회의에 불참한 북한의 최선희 외무상은 ARF 직후 13일, 원산에서 러시아 라브로프 외무 장관을 만나 북·러 협력을 이어갔다. 라브로프 외무 장관은 이번 방북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일정과 북한군 3차 파병 등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라브로프 외무 장관이 ARF 외교장관회의 직후 북한으로 직행해 최선희 외무상을 만났다는 자체는 남북 복원을 원하는 이 대통령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북·러의 사인이 아닐 수 없다.
이 대통령이 비밀리에 대북 특사라도 보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