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마약상으로 몰린 소금상 풀스토리

선뜻 화물 받았다가 징역 10년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섣부른 선의가 한순간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사업을 도와줬던 지인의 짐을 맡아주겠다고 했다가 마약 밀수업자로 몰려 감옥에 가게 된 것이다. 마약 대금을 결제한 정황도, 마약인 점을 인지하지 못한 정황도 있지만 재판부의 판결은 바뀌지 않았다.

평범하게 살던 A씨가 한순간에 마약 밀수업자가 됐다. 호형호제하던 지인들은 A씨의 진술을 모두 부인하거나 위증했고 수사기관과 재판부도 A씨가 거짓 진술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일요시사>는 A씨의 재판 과정서 이상한 점을 짚어봤다.

파키스탄
다녀온 후

지난 2023년 7월 인천지방검찰청은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상 향정이나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A씨를 구속 기소했다.

A씨는 지난 2023년 1월19일 멕시코서 미국을 거쳐 국내로 들어오던 중 필로폰 2827.34㎏을 몰래 반입하려 한 혐의를 받는다. 구체적으로 그는 풍선 속에 숨긴 필로폰을 국제 특송 화물로 인천공항에 들여오려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A씨는 검거 당시부터 지금까지 지인의 물건을 맡아줬을 뿐이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사건은 A씨가 소금 사업을 위해 파키스탄에 간 일부터 시작된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A씨는 지난 2021년 2월경 지인인 B씨로부터 암염(핑크솔트) 사업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이 말을 들은 A씨는 B씨와 그의 지인인 C씨와 함께 파키스탄을 방문하게 된다.

A씨는 파키스탄서 싸쿠라는 가이드를 만나게 된다. 싸쿠는 A씨 일행에게 암염 사업지를 비롯한 현지 사정 등을 친절하게 안내했으며 A씨는 이에 큰 고마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와 별개로 암염 사업은 실패했다.

이후 한국으로 귀국한 뒤 한 무역업체 취업 후 평범하게 살던 A씨는 B씨로부터 수원서 만나자는 제안을 받고 지난 2022년 9월3일 B씨와 C씨와 만났다. 이 자리서 C씨는 갑자기 “싸쿠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며 싸쿠가 10월에 한국에 가려고 하는데 짐이 많아 받아줄 수 있냐고 물으며 아이들이 먹을 사탕과 초콜릿을 주겠다고 했지만 자신(C씨)은 그때 한국에 있지 않고 아이들도 없어서 거절했다.

이틀 후 A씨는 한 통의 영어로된 이메일을 받게 된다. 해당 이메일을 번역한 결과 싸쿠가 짐을 미리 보내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만남서 C씨가 말한 바와 일치한 것이다. A씨는 싸쿠의 친절에 보답하는 차원서, 이틀 전 수원 회동 때 전해 들은 내용과 일치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안부와 함께 주소를 알려 주는 답신을 보냈다.

집으로 온 사탕과 초콜릿
그 안에 필로폰 넣어 발송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A씨가 받은 이메일은 싸쿠로부터 온 것이 아닌 신원 불명자로부터 온 것인데, B씨가 번역해준 대로 싸쿠가 보낸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신원 불명자가 A씨 주소를 수신처로 사탕과 초콜릿과 함께 풍선 안에 필로폰을 넣어 발송했다.

멕시코서 출발한 화물은 미국을 경유하는 과정서 발각돼 압수됐으며, 이 사실이 한국 당국에 통보됐다. 한국 당국은 함정수사를 위해 압수 물품을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DHL코리아를 통해 수신인인 A씨에게 화물이 온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지난 2023년 1월10일 DHL코리아는 A씨에게 물품 설명과 용도를 기재해 개인통관 고유부호와 운송장 번호를 제목으로 회신해줄 것을 요청했다. 같은 날 A씨는 물품이 초코릿과 사탕이라고 회신했다.

이틀 후인 2023년 1월12일 A씨는 앞서의 신원 불명자로부터 두 번째 이메일을 받아 B씨에게 번역을 의뢰했다. B씨는 “자기(싸쿠)의 한국행이 연기되니 물품만 수령해 보관해달라”는 내용이라고 번역해 주면서 “그냥 내버려 둬”라고 해서 답신은 하지 않았다.

그후 A씨는 DHL코리아 직원과 관세에 관한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A씨는 이에 이메일로 싸쿠에게 세금을 대납하고 나중에 청구해야 하므로 금액부터 알려달라고 했다. 이후 A씨는 14일 동안 물건이 배달되지 않았고, B씨를 통해 싸쿠에게 물건 도착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상황을 공유했다.

그러던 중 지난 2023년 2월6일 A씨는 배송 기사로 위장한 인천지검 수사관으로부터 화물을 전달받다가 긴급 체포된 후 구속 기소됐다.

“이용만
당했는데…”

1심 재판부는 A씨가 계획적으로 마약을 수입하려 했다며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향정) 혐의를 인정하고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마약류 수입 범행은 마약의 확산 및 그로 인한 추가 범죄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아서 엄정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며 “A씨가 수입하려고 했던 필로폰은 그 무게가 약 2.8kg에 달하는 대량으로서, 이는 1회 투약분 약 0.05g 기준 5만6000명이 투약할 수 있는 분량에 해당하므로 만약 위 필로폰이 계획대로 국내에 반입돼 유통됐다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해악은 대단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이어 “한편 A씨는 이 사건 필로폰 수입 범행을 계획하면서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할 목적으로 공범과 짜고 이메일을 주고 받는 등 자신에게 유리하게 증거를 조작했고, 범행이 발각된 이후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이 사건 화물의 배송 조회를 한 이유, 이 사건 화물의 내용물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던 이유 등에 대한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회피하면서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일관했다”고 지적했다. 

또 “법원으로부터 A씨의 주장에는 여러 군데에 불일치, 모순이 있다는 지적을 받은 이후에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허위 내용이 담긴 사실확인서를 제출하는 등 이 사건 수사 및 재판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사건 범행의 중대성 및 이 사건 범행을 전후한 A씨의 태도 등에 비춰볼 때, 비록 피고인에게 이 사건 이전에 형사 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는 점, 이 사건 범행이 미수에 그치고 필로폰은 모두 압수돼 시중에 유통되지 않은 점 등 유리한 정상을 참작하더라도 피고인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함이 마땅하다”고 설명했다.

1심 재판부는 A씨의 진술과 주장이 모두 허위라고 판단하고 마약 밀수범의 최대 형량을 넘어서는 형량을 선고한 것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따르면, 마약류 수출입·제조 사범의 기본 형량은 최소 10월에서 최대 7년이다. 여기에 영리 목적 등의 의도가 더해진다면 최대 형량은 11년까지 늘어난다.


이에 A씨는 ▲화물이 필로폰인 사실을 몰랐던 점 ▲싸쿠를 사칭한 인물로부터 기망을 당해 필로폰이 담긴 화물의 수령인으로 이용당했을 가능성 ▲화물에 담긴 필로폰의 가액이 5000만원이 넘는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충분한 증명 없이 가중처벌된 점 등을 들어 사실오인 및 법리오해가 있으며 범죄 전력도 없고 경제적 이익도 없고 이용만 당한 상황에 징역 10년은 지나치게 과중하다며 항소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 역시 A씨의 주장이 허위라고 봤다.

2심 재판부는 ▲필로폰 밀수 범행은 그 성질상 밀행성을 수반하고, 이 사건의 경우 허위 이메일의 외관을 작출하면서 적발 시 빠져나갈 방법까지 마련하는 등 범행을 적극적으로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점 ▲A씨가 두 번째 이메일을 수령하기 이전에 이미 화물의 내용물을 알고 있었던 것을 보아, A씨가 실제 마약 상선과 따로 연락하면서 소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점 ▲중한 처벌을 감수하면서도 마약 밀수 범행을 감행한 이유로 필로폰의 가액이 5000만원 이상이라는 것을 A씨가 미리 알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 등을 들며 A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지난해 3월 A씨는 상고를 제기했지만 대법원서도 상고가 기각돼 결국 징역 10년형이 확정됐다.

대금 결제
유통 없어

A씨의 형량은 확정됐지만 아직 증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A씨가 마약을 샀다면 마약 대금은 어떻게 결제했는지 ▲마약 대금의 자금 출처는 어디인지 ▲어떻게 유통하려 했는지 ▲A씨가 마약 상선과 계속 연락했다는 근거는 무엇인지 ▲공범과 증거를 만들기 위해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면 공범은 누구인지 등이다.


필로폰 2827g은 A씨가 검거됐을 당시 도매 가격으로 2억원에 달하며 소매 가격으로는 7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검찰 조사 과정서도, 재판 과정서도 마약 대금 결제를 어떻게 했는지는 전혀 확인하지 않았다. 마약 대금을 결제한 방법을 조사하지 않았으니 마약 대금의 자금 출처 역시 전혀 밝혀진 바가 없다.

검찰과 재판부가 집중한 쟁점은 ▲화물에 무엇이 올지(사탕과 초콜릿) A씨가 먼저 알고 있었다는 점 ▲A씨가 화물이 언제 오는지 계속 확인했다는 점 ▲사쿠가 A씨한테 보낸 이메일이 영어 문법과 맞지 않아 한국인이 번역기를 통해 보냈다고 볼 수 없다는 점 ▲수사 과정과 재판 과정서 A씨의 진술이 계속 바뀌었다는 점 등이다.

멕시코 출발, 미국 경유 과정서 발각
압수 사실 한국에 통보…바로 체포

A씨처럼 마약을 택배로 받았다가 징역형 선고를 받은 사례는 많다. 하지만 다른 사례에서는 택배 수취인들이 마약을 유통하는 것이 드러나거나 마약을 투약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앞서 부산지법 형사5부(장기석 부장판사)는 지난해 11월1일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향정),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 위반(향정) 혐의로 기소된 베트남 국적 유학생 D씨에 대해 징역 9년을 선고했다.

법원이 인정한 범죄 사실에 따르면, 대전 모 대학교에 재학 중인 그는 지난 4월 초 베트남에 있는 E씨와 공모해 1330여만원 상당의 케타민 205g을 국내로 밀수입한 혐의를 받는다.

E씨는 케타민을 비닐팩 20개로 소분해 라면 봉지 속에 넣어 과자, 국수 등과 종이상자에 담아 식품 배송인 것처럼 꾸민 국제 택배를 D씨에게 보냈고, D씨는 이 국제택배가 베트남서부터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운송 경로를 추적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D씨는 같은 달 4일에는 대전 동구 거주지 옥상서 F씨에게 15만원을 받고 신종 마약 9ml를 판매한 혐의도 받는다.

경찰은 다른 신종마약 판매 사건을 조사하던 중 한 피의자의 수사 협조를 받아 판매자 D씨와 현금 거래를 성사했고, 거래를 하기 위해 옥상에 나타난 D씨를 긴급체포한 뒤 현금 15만원과 D씨의 휴대폰을 압수했다.

또 광주지법 제13형사부(재판장 정영하 부장판사)는 지난해 10월29일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위반(향정) 등 혐의로 기소된 G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하고 약물중독 재활교육 프로그램 40시간 이수를 명했다.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위반(향정)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태국인 노동자 H씨에게는 징역 1년을 선고했다.

G씨는 올해 초 태국에 사는 공범과 동남아서 유통되는 합성 마약류인 ‘야바’를 팔기로 공모, 태국서 시가 1억1769만원 상당의 야바 5898정을 건강보조제 용기에 숨겨 국제 우편물로 밀수입한 혐의로 기소됐다.

또 김 양식장서 일하던 태국인 노동자 H씨에게 2차례에 걸쳐 들여온 야바 중 일부인 20정을 60만원에 팔고, 판매 목적으로 1235만원 상당의 야바 247정을 소지한 혐의로도 기소됐다. H씨는 다른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G씨를 통해 야바를 구입하거나 여러 차례 투약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G씨는 한국에 체류하다가 강제 출국된 태국인 공범과 공모해 현지산 야바를 국제우편으로 자신이 머물렀던 전남의 한 숙박업소까지 배송되게끔 수취지로 기재하고, 직접 받았다.

해당 사건과 A씨 사건의 차이점은 마약을 유통하고 마약을 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A씨의 사건에서 명확한 것은 화물에 A씨의 주소지와 전화번호가 적혀있다는 것뿐이다.

한 마약 전문 변호사는 A씨의 사건에 대해 “해당 사건서의 주요 쟁점은 필로폰 밀수를 계획했는지 여부가 가장 중요해 보인다”며 “A씨가 수사기관과 재판서 말이 달라지는 것과 증인 진술과 A씨의 진술이 맞지 않는 부분은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워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필로폰 2.8kg을 혼자서 유통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공범에 대한 조사가 전혀 없다는 것이 의아하다”며 “조사 과정서 A씨의 집, 차량, 회사 근처 숙식을 하던 친척집 등을 전방위로 압수수색하는 반면, 진술 초기부터 등장한 B씨와 C씨는 참고인 신분으로 대질심문만 진행한 것도 이상하다”고 지적했다.

재심 신청
결과는?

A씨도 이상한 점을 느끼고 현재 재판부에 재심을 신청할 예정이다. 재심이란 형사소송법과 민사소송법에 의해 확정 판결이 있은 사건에 대해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 등 중대한 하자가 있음을 이유로, 확정 판결이나 이에 준하는 결정적 증거로 다시 재판해 재판의 취소나 변경 등을 요구하는 신청으로서 비상의 불복신청을 말한다.

A씨는 재심 사유로 민사소송법 제451조 7항에 나와있는 ‘증인·감정인·통역인의 거짓 진술 또는 당사자 신문에 따른 당사자나 법정대리인의 거짓 진술이 판결의 증거가 된 때’를 꼽는다. A씨는 A씨의 진술을 허위로 판단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인 B씨의 진술이 위증이라고 말한다. A씨는 B씨를 위증죄로 고발하기도 했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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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주범’ 김용현·여인형 증거인멸 교사 적용 내막

‘계엄 주범’ 김용현·여인형 증거인멸 교사 적용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검찰이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에 대한 증거인멸 교사 혐의 적용을 검토 중이다. 이미 방첩사와 국방부 관계자들로부터 관련 진술을 확보한 상태다. 검찰은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 대통령과 핵심 인물들의 증거인멸 지시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들여다볼 방침이다. 12·3 비상계엄은 절차부터 논란이 많았다. 계엄에 가담해선 안 되는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부터 군의 국회 난입, 부실한 회의 등 하자 투성이다. 내란이자 불법 계엄이라는 지적이 거센 이유다. 핵심 인물들은 사실상 불법성을 인식했다. 이들은 관련 문서 파쇄와 핸드폰 교체 등 수사기관의 압수수색에 철저하게 대비했다. 은폐 지시 누가? 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은 지난해 12월6일 자신의 수행 장교 A씨에게 계엄 당시 같이 탔던 카니발 차량의 블랙박스 기록을 들여다보라고 지시했다.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본부장 박세현 서울고검장)는 A씨를 조사하면서 “이진우는 블랙박스를 확인해 보라고만 지시를 내렸나, 아니면 블랙박스를 정리했으면 좋겠다고 지시를 했나?”라고 묻자 그는 “받아들이기에 (블랙박스를)없애야 한다고 느꼈다”고 진술했다. 실제 A씨는 블랙박스 기록을 삭제했다. 이 전 사령관은 검찰 조사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차량서)A도 다 들었다는 생각에 (블랙박스에)그 내용이 남아 있게 되면 나중에 엉뚱하게 오해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블랙박스에도 대통령 목소리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A에게 확인해 보라고 했고, 블랙박스를 지우라고 하지는 않았다”고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확보한 다수의 방첩사 관계자의 진술에 따르면,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은 지난해 12월4일 새벽 1시3분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주요 인사 체포를 위해 국회로 출동했던 요원의 복귀를 지시한 방첩사 간부를 크게 질책했다. 3시간 뒤 그는 방첩사 간부들을 소집해 회의를 진행했다. 이 자리서 여 전 사령관은 정치인 체포조와 관련해 “체포 얘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목적 없이 나갔다고 해라”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 전 사령관이 초기부터 비상계엄의 불법성을 알고 있었던 정황이다. 검찰은 여 전 사령관이 같은 날 아침 8시30분에도 방첩사 주요 간부를 모아놓고 “‘이송·구금 지시 없이 맹목적으로 출동했다’고 진술할 수 있는 부대원이 있다면, 그렇게 내용을 정리해서 메모하게 해 달라”라고 말했다는 방첩사 관계자들의 진술도 확보했다. 비상계엄 핵심 인물들 문서 파쇄 핸드폰 교체 비화폰 서버 확보? 수사기관 압수수색 하세월 특히 여 전 사령관은 방첩사 간부들에게 체포조 운용 관련 증거를 없애라고 강조했다. 간부들은 하급자들에게 여 전 사령관의 지시를 하달했으나 “못 없앤다”며 대부분이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급자들은 검찰이 방첩사를 압수수색할 때 여 전 사령관의 지시와 관련된 물증들을 보존해 왔다. 검찰이 확보한 증거엔 여 전 사령관이 체포를 지시한 14명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별정직 공무원이자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집사’로 알려진 양호열씨는 김 전 장관의 지시로 3시간에 걸쳐 파기한 자료가 세절기(파쇄기)통 세 번을 비울 정도였다고 검찰 조사에서 진술했다. 양씨는 김 전 장관이 대통령 경호처장일 때 별정직 5급 공무원으로 경호처에 채용됐다. 김 전 장관이 국방부 장관으로 옮긴 뒤에도 경호처에 적을 두고 비공식적으로 김 전 장관 운전사 등의 역할을 담당했다. 김 전 장관은 자료 폐기 후에도 양씨에게 ‘(김 전 장관의)휴대전화를 파기하고 다른 것으로 교체하라’는 취지로 지시했고, 양씨는 공관 뒤로 이동해 망치로 휴대전화를 부순 다음 쓰레기통에 넣었다고 한다. 또 김 전 장관은 공관 서재 서랍 속에 있던 노트북을 주면서 함께 폐기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 노트북은 김 전 장관이 포고령을 작성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양씨가 “그냥 버리면 될까요”라고 묻자 김 전 장관이 “모두 파쇄하라”고 지시해 망치로 부쉈다는 것이다. 양씨는 파쇄 과정서 손가락을 다쳤다고도 진술했다. 양씨가 증거를 인멸하는 동안 김 전 장관은 하루 종일 누군가와 통화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양씨는 문서 등을 파쇄한 날 오전에도 김 전 장관 부부와 생선구이 식사를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당시 김 전 장관 부인은 김 전 장관을 향해 ‘왜 그랬냐’ ‘혼자 다 뒤집어쓰겠네’라고 걱정했다고 양씨가 진술한 것으로 파악됐다. 김 전 장관은 다음날인 같은 해 12월6일 변호사를 만났고, 이틀 뒤 새벽 1시 검찰에 자진 출석했다. 같은 달 27일 구속 기소된 김 전 장관 측은 검찰서 “계엄 상황이 끝났기 때문에 자료를 파쇄한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파쇄기통 세 번 비워” 검찰은 양씨의 진술들이 김 전 장관의 증거인멸 교사 혐의를 뒷받침하는 동시에 계엄의 위법성을 스스로 인정한 정황 증거로 보고, 향후 재판서 김 전 장관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경호처 비화폰 관리 실무 담당자인 송모 경호관은 지난 25일 국회 ‘윤석열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를 통한 내란 혐의 진상규명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내란 국조특위)’ 5차 청문회에 출석해 “김 전 장관이 비화폰을 반납한 게 12월13일 또는 12일이 맞느냐”는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윤건영 의원의 질문에 “맞다”고 답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5일 김 전 장관의 사의를 수리했는데, 비화폰 반납은 그로부터 약 일주일 뒤 이뤄졌다는 것이다. 김 전 장관이 검찰에 자진 출석했을 당시에도 비화폰을 갖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비상계엄 기획자로 지목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역시 12월7일까지 경호처 비화폰을 갖고 있다가 반납해, 증거인멸에도 이를 활용했을 것이란 지적이 제기돼왔다. 송 경호관은 이날 ‘김 전 장관 비화폰 뒷번호가 9400번 맞느냐’는 윤 의원의 질문에 “번호는 모른다”고 했지만, 이 비화폰이 경호처에 “봉인돼 보관 중”이라고 밝혔다. 특히 전원을 켜면 통화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윤 의원은 “봉인된 비화폰을 확보해야 된다. 내란 주요 종사자의 휴대폰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이면 누구보다도 (검찰이)먼저 나서서 확보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이진동 대검찰청 차장검사를 다그쳤다. 같은 당 추미애 의원도 “비화폰 압수로 수사 의지를 보이라”고 촉구했다. 이 차장은 “알겠다”고 답했다. 비상계엄 핵심 인물들은 변호인을 통해 물밑 접촉을 시도 중이다. 김 전 장관의 법률대리인인 고영일 변호사는 이 전 사령관과 여 전 사령관이 윤 대통령의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증인으로 출석하기 전 이들을 수차례 접견했고,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과도 접견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고 변호사는 이 전 사령관이 국회 국정조사 특위 증인 출석을 하루 앞둔 지난달 13일과 20일, 두 차례 접견했다. 여 전 사령관은 지난달 3일·9일·17일, 그리고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증인 출석 하루 전날인 이달 3일까지 총 4차례 고 변호사를 만났다. 물적 증거 확보 난항 이들은 증거인멸 우려로 인해 변호인 외 접견이 금지됐었으나 군형집행법 등은 ‘변호인이 되려는 자’ 역시 변호인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접견 중 교도관 참여나 청취·녹취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조계에서는 계엄 핵심 인물들이 이 같은 규정을 허위 증언·진술에 활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 검사 출신 변호사는 “피의자 신분인 자의 적극적 방어권 행사지만 관련자를 도우려 말을 맞추거나 진술을 오염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악용될 여지가 충분하다”며 “변호인으로 선임되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당국 관계자들의 녹취가 허용되는 등의 개정이 필요해 보인다”고 우려했다. 검찰은 비상계엄 핵심 인물들의 증거인멸 행위를 여러 차례 파악했지만 통상 교사가 아닌 직접적 행위는 처벌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 대법원 판례상 증거인멸죄 입증을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증거인멸죄는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서 인적·물적 증거를 인멸·위조, 위조한 증거를 사용하는 등 재판의 실체적 진실 발견을 저해하는 범죄 행위를 말한다. 대법원은 ‘인멸한 증거 가운데 공범의 것이 있더라도 처벌할 수 없다’는 판례를 수십년째 유지하고 있다. 지난 1976년 6월 “피고인은 자신이 직접 형사 처분이나 징계처분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증거가 될 자료를 인멸한 경우, 이 행위가 비록 동시에 다른 공범자의 형사사건이나 징계 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한 결과가 되더라도 피고인을 증거인멸죄로 다스릴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결과적으로 증거인멸이 발생했더라도 ‘증거인멸의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가 있어야 처벌할 수 있다고 판시한 것이다. 변호인 통해 접촉 시도 “진술 오염” 우려 내란 수괴 혐의, 윤 보호용 증거 없애기? 우선 검찰은 재판에 넘겨진 인물들에 대한 공소 유지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중앙지검 관계자는 “법과 원칙에 따라 성역 없이 수사했고 재판에 넘겨진 인물들 외에도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라며 “추가 기소할 정황과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어 언제 누구에 대해 추가 기소할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검찰 내부에서는 김 전 장관을 포함한 계엄 핵심 인물들의 증거인멸 지시 행위가 윤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실제 김 전 장관과 이 전 사령관, 여 전 사령관 등은 윤 대통령과 수차례 통화하거나 직접적인 지시를 받았다. 검찰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윤 대통령에게 내란 우두머리(수괴) 혐의를 적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변론 절차가 마무리되면서 비상계엄에 연루된 관계자들에 대한 형사 재판도 지난 27일부터 시작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25부(부장판사 지귀연)는 이날 ▲오전 11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오후 2시 조지호 경찰청장·김봉식 전 서울경찰청장 ▲오후 3시 김용군 전 정보사 대령 ▲오후 4시 김용현 전 장관에 대한 공판준비기일을 진행했다. 공판준비기일은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쟁점을 정리하고 증거 조사 절차 등을 논의하는 자리다. 재판부는 이날로 준비기일을 끝내고 다음 기일부터 본격적인 공판 절차에 들어간다. 또 개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사건을 병합해 심리 여부도 결정할 계획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는 윤 대통령 사건도 담당하고 있다. 재판부에 배당된 내란 혐의 피고인만 6명이다. 조 청장과 김 전 청장만 함께 기소되고 나머지는 별도로 기소돼 5개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검찰은 각 피고인의 직업, 지위마다 12·3 비상계엄 상황서 수행한 역할과 세부 혐의가 달라 분리해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주 1~3회의 ‘집중심리’를 요청하고 있다. 반면 피고인 측은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사건을 병합하고, 방어권 보장 차원서 2~3주에 1회 정도 재판을 희망하고 있다. 확인해도 처벌 불가? 부장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현재 상황서 김용현 등의 증거인멸 지시는 교사로 처벌될 순 있지만 문서 파쇄 등의 직접적 인멸 행위는 ‘고의성’ 여부가 중요하다. 이들의 행위가 차후 수사기관의 수사에 영향을 미친 정도에 따라 유무죄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결국 윤 대통령의 재판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검찰의 공소 사실 외에도 구속 기소된 인물들의 증언에 따라 윤 대통령의 재판에 영향이 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