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대전 초등생 피살사건 김하늘

아무 죄 없는 아이를…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한 어린아이의 죽음에 세상은 충격에 빠졌다. 이제 갓 초등학교를 입학해 즐거운 학교생활을 시작해야 할 아이가 믿어야 할 선생님의 손에 세상을 떠나게 됐다. 피해자 김하늘양은 8세의 어린 나이에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서 한 아이의 생명이 희생된 현실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지난 10일, 대전 서구 관저동 한 초등학교서 초등학생이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대전과학수사연구소는 이날 피해자 김하늘양의 시신을 부검했다. 김양의 사인은 ‘다발성 예기 손상에 의한 사망’으로 확인됐다. 즉, 날카로운 도구에 의해 여러 곳이 찔려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계획적 범죄
3번 경고음

당초 김양 유족은 부검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으나, 정확한 사인 규명을 위해선 부검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양은 지난 10일 오후 5시50분경 학교 내 시청각실서 교사 A씨와 함께 흉기에 찔린 채 발견됐다. 심정지 상태로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결국 오후 7시경 숨졌다. 이날 사건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김양의 친할머니였다.

오후 5시쯤 김양의 아버지로부터 손녀가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은 할머니는 즉시 김양을 찾기 위해 나섰다. 할머니는 “하늘이는 학교 정규수업을 마친 후 오후 4시20분까지 돌봄교실에 머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서 “하교 후 학원에 있어야 할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찾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아버지는 휴대전화 앱을 이용해 김양의 위치를 추적했고, 앱에 표시된 위치는 다름 아닌 학교였다. 이에 아버지는 즉시 경찰에 실종 신고를 접수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학교 외부를 수색했고, 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교내서 김양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

사건이 발생한 학교 2층 시청각실 내 창고는 외부서 내부가 보이지 않는 구조였다. 이 때문에 학교 측은 처음에는 김양이 교내에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2층을 홀로 살펴보던 할머니가 시청각실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A씨를 발견했다.

할머니는 “손녀를 찾던 중 돌봄교실 옆 시청각실로 들어갔다”며 “비품 창고까지 확인하려 했는데 안이 너무 어두웠다. 휴대전화 플래시를 켜는 순간, 피 묻은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할머니가 A씨에게 김양을 봤냐고 묻자, 그는 “없어요. 나는 몰라요”라고 답했다. 그러나 A씨의 머리맡에 손녀의 가방이 놓여 있는 것을 본 할머니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 침착하게 뒤로 물러난 뒤, 곧바로 밖으로 나와 경찰과 김양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현장 상황을 전했다.

할머니는 “그 사이 여자가 문을 잠갔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이 발로 문을 걷어차 강제로 열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119 구급대가 출동해 쓰러져 있던 김양과 A씨를 병원으로 긴급 이송했다. 현장의 참혹한 상황을 본 경찰은 김 양의 할머니에게 아이를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손녀가 숨졌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며 허망한 심정을 전했다.

경찰은 지난 11일 살인 혐의를 받는 교사 A씨에 대한 체포영장과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았다고 밝혔다. A씨는 아직 중환자실서 치료 중이며,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된 뒤 조사가 이루어질 예정이다. 경찰은 A씨가 목 부위 봉합 수술을 받기 전 피의자 진술을 확보했다.


“어떤 아이든 함께 죽을 생각”
선생님의 끔찍한 진술 충격

경찰 조사에서 A씨는 범행을 인정하며 “교무실에 있기 싫어 잠겨있던 시청각실을 열어뒀다”며 “돌봄교실서 수업이 끝난 후, 어떤 아이든 상관없이 함께 죽을 생각으로 맨 마지막에 남은 아이에게 책을 준다고 해 시청각실로 데려왔다”고 진술했다.

경찰 조사 결과, A씨는 범행 당일 오후 학교 근처 마트서 흉기를 미리 구매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A씨가 범행에 사용한 흉기를 사건 당일 오후, 학교서 약2㎞ 떨어진 주방용품 가게서 구입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흉기의 길이는 28㎝였다”고 밝혔다. A씨는 범행 동기에 대해 “복직 후 3일 만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교감이 수업을 못 하게 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사건 발생 직전까지 약 6개월간 질병 휴직을 했다가 복직한 지 불과 20여일 만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유족 측은 이번 사건이 계획된 범죄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특히 A씨가 사건 당일 마트서 흉기를 미리 구매한 점과, 할머니가 최초로 현장을 발견했을 당시 가해 교사에게 자해 흔적이 없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김 양의 할머니는 “시청각실 문이 잠겨있었는데 경찰이 강제로 개방했을 때, A씨는 이미 피투성이였다. 들킨 후 자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김양의 아버지는 사건 당시 딸의 위치를 추적할 때 사용한 애플리케이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하늘이의 휴대폰에 부모 보호 앱을 설치해뒀기 때문에 전화를 걸지 않아도 실시간으로 아이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며 “오후 4시50분쯤부터 아이 휴대폰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를 확인하면서 현장으로 향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4시50분부터 들었을 때 하늘이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나이 든 여성이 달리기한 뒤 숨을 헉헉거리는 소리, 서랍을 여닫는 소리, 가방 지퍼를 여는 소리 등이 들렸다”며 당시의 녹취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다수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A씨는 2018년부터 우울증 치료를 받아왔다. 지난해 12월9일엔 질병 휴직을 신청했으며, 휴직 기간 동안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가 휴직 당시 제출한 진단서에는 “5년 전부터 우울증 치료를 반복해 왔으며, 지난해부터 집중 치료를 받았지만 9월 이후 증상이 악화됐다. 심한 우울감과 무기력감에 시달려 최소 6개월간 안정과 치료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를 근거로 A씨는 지난해 12월9일부터 6개월간 질병 휴직에 들어갔다. 그러나 불과 20여일 만에 다시 학교로 복귀했다.

휴직 당시
진단서 보니…

복직 당시 제출한 진단서에는 “12월 초에 심했던 잔여 증상이 현재는 거의 사라져 정상 근무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기재돼있었다. 문제는 이 두 개의 진단서가 같은 병원의 동일한 의사에 의해 발급된 것으로 확인됐다는 점이다. 즉,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같은 의사로부터 정반대의 소견을 받은 것이다.

A씨는 복직 후, 의사의 소견과는 달리 이상행동을 보였다. 그는 “왜 내가 이렇게 불행해야 하느냐”며 혼잣말을 반복하는 등 피해망상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 주변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사건 발생 나흘 전에는 동료 교사를 폭행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당시 A씨는 웅크린 채 앉아있었고, 이를 걱정한 동료 교사가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갑자기 헤드록을 걸고 손목을 강하게 붙잡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 상황은 주변 동료 교사들이 말려야 할 정도로 심각했으나, 경찰 신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학교 측은 A씨의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에게 다시 휴직을 강하게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학교 측은 A씨의 문제 행동과 관련해 대전시교육청에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전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교육청은 같은 병력으로는 추가 휴직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전시교육청 초등담당 장학 관계자는 “학교 측이 대전서부교육지원청에 해당 사안을 보고해, 지난 10일 오전 장학사가 학교를 방문해 사실 조사를 진행했다”며 “조사 후 장학사는 학교 측에 해당 교사의 분리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한 뒤 돌아갔으나, 결국 그날 오후 사건이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당사자를 직접 조사할 경우 자극할 우려가 있어 면담은 진행하지 않았다”고 부연했다.

현행 교육공무원법에 따르면, 휴직 교사는 기간 만료 후 30일 이내에 복귀 신고만 하면 자동으로 복직할 수 있다. 문제는 복직 심사에 대한 법적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각 지역 교육청마다 내부 지침이 다르다 보니, 어떤 곳은 단순한 서류 검토만으로, 또 어떤 곳은 면담 한 번으로 복직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서는 김양의 죽음을 막을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고 지적한다. 복직 직후 나타난 이상행동, 학부모들의 문제 제기, 동료 교사들의 반복된 이상 행동 보고 등 세 차례의 경고 신호를 무시한 결과 비극이 발생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교육공무원법 제44조에 따르면, 교사가 정신적 또는 신체적 문제가 명백할 경우 임용권자가 직권으로 휴직을 명령할 수 있다. 또, 제45조에는 정신 건강 문제가 의심될 경우 최대 5년까지 휴직이 가능하다고 명시돼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는 정신질환이 있는 교원이 교직 수행이 가능한지 심의하고, 필요할 경우 교육감이 직권으로 휴·면직을 권고할 수 있는 ‘질환교원심의위원회’가 열리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교육 당국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예쁜 별’
애도 물결

결국 법적 장치가 마련돼있었음에도 이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은 점이 이번 사건의 핵심 문제라는 것이다.

한편, 일부 전문가들은 가해자의 정신질환 이력이 언론을 통해 반복적으로 노출될 경우, 이에 대한 편견을 더욱 가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나종호 미국 예일대학교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조교수는 지난 11일 엑스(구 트위터)에 “우울증은 죄가 없다”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나 교수는 해당 글에서 “가해자는 응당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면서도 “아직 아무것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서 언론이 우울증 휴직 전력을 앞다퉈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죄는 죄인에게 있지, 우울증이 죄는 아니다”라며, “우울증 휴직 이력을 강조하는 보도는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을 강화해, 정작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한국의 정신건강 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어 “현재 한국의 우울증 치료율은 10%에 불과하다. 즉, 10명 중 9명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언론이 정신질환을 자극적으로 보도할 경우, 치료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아울러 “사람의 생명은 의사만이 살리는 것이 아니다. 펜으로도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 있다”며, 신중한 보도를 당부했다.

나 교수는 “같은 나이 딸을 둔 아버지로서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다. 피해자 유가족의 감정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며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이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역시 가해 여교사의 우울증을 앞세운 보도에 대해 나 교수와 비슷한 의견을 냈다. 백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서 “오늘 오전 환자들이 ‘회사에서 나를 살인자로 보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많이 전해왔다”며 “우울증이 있을 때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국내 현실인 만큼 여론이 이런 방식으로 조성되는 것이 무척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중앙정신건강복지사업지원단은 언론에 가해자의 진단명 언급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보건복지부 장관 소속으로 정신 건강 관련 자문을 담당하는 지원단은 지난 12일 성명을 통해 “특정 진단명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편견을 가중시킬 뿐, 문제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사실에 기반해 사건의 사회 구조적 요인과 개선 방안에 집중해 주길 요청한다”고 밝혔다.

“막을 기회 3번 있었다”
병력 언급 편견만 가중

이어 “범죄 행위는 철저한 수사를 통해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하며, 유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비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원단은 정신 건강 보도와 관련한 권고 기준으로 기사 제목에 정신질환을 언급하는 것을 지양할 것, 정신 질환을 범죄 동기나 원인과 연결하는 데 신중을 가할 것을 제안했다.

김양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김양의 아버지는 딸이 그룹 아이브의 장원영을 특히 좋아했다고 전했다. 그는 “하늘이의 꿈이 장원영이었다. 생일 선물로 아이브 포토카드를 받길 원했고, 특히 장원영 카드만 원했다”며 “어떤 프로그램이든 장원영이 나오면 늦게 자더라도 본방 사수를 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동생이 뽀로로를 보고 싶어해도 무조건 장원영을 봐야 하는 아이였다”며 “장원영양이 하늘이가 가는 길에 따뜻한 인사 한마디를 건네준다면 정말 감사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접한 그룹 아이브는 김양의 빈소에 근조화환을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다.

화환에는 “가수 아이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황선홍 K1 대전시티즌 감독도 김양의 빈소를 찾아 추모했다. 생전 김양은 축구 팬인 아버지와 함께 대전시티즌 서포터즈로 활동해 왔다. 홈 경기 때마다 대전월드컵경기장을 찾아 응원했을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던 김양의 갑작스러운 비보에 축구계도 깊은 애도를 표했다.

빈소를 찾은 황 감독은 “하늘이가 너무 어리고,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라 더 가슴이 아프다”며 “좋은 곳에서 편안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애도했다. 축구 팬들도 추모의 뜻을 전했다. ‘대전하나시티즌 팬’ ‘대전 붉은악마’ 등의 이름으로 근조화환이 보내졌다.

김양의 빈소에는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육종명 대전 서부경찰서장, 국민의힘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방문해 조의를 표했다.

김양의 아버지는 빈소서 기자들과 만나 “제가 바라는 건 앞으로 우리 하늘이 같은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정신질환을 앓는 교사들의 치료와 저학년 학생들의 안전을 보장할 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교육부는 교원이 정신질환 등으로 정상적인 교직 수행이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직권 휴직 등의 조치를 내릴 수 있는 ‘하늘이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하늘이 법
입법 추진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며 정신질환이 있는 교원이 일정 절차를 거쳐 직권 휴직을 받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늘이법은 교직 수행이 어려운 교사를 학생들과 분리하고, 복직 시 정상 근무 가능 여부를 엄격히 심사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부총리는 폭력성 등 특이 증상을 보이는 교원에 대한 긴급 개입 제도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번 법 개정으로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대책이 마련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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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분당보건소 부지 올스톱 비스토리

[단독] 분당보건소 부지 올스톱 비스토리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펜스로 둘러쳐진 땅에는 드문드문 잡초만 나 있었다. 입구 쪽의 주차 차단기도 작동하지 않았다. 사거리 주변서 이 땅만 ‘이가 빠진 듯’ 공터 상태다. 누가 봐도 ‘목이 좋다’는 말이 나올 법한 위치지만 오늘도 텅 비어있다. “원래 보건소가 들어오기로 했어요. 그전에는 정자1동 행정복지센터(임시 청사)가 있었고요. 노인분들이 휠체어 타고 다니면서 편의시설을 이용하고 그랬어요.” 한 성남시민이 텅 빈 부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건널목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는 대기업 사옥, 오른편으로는 상가, 뒤편으로는 아파트가 자리한 이른바 ‘노른자위 땅’이었다. 한 부동산 관계자는 지도를 확인한 뒤 “완전 정자동 메인이네. 부르는 게 값일 것”이라고 했다. 앞 뒤 양 옆 꽉꽉 찼는데…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163번지 일원 2832㎡(약 854평) 규모의 땅. 원래 성남시 소유의 땅이었다가 용도변경을 거쳐 기업에 매각됐다. 성남시가 ‘기업 유치’를 목적으로 부지의 매각 절차를 본격적으로 밟기 시작한 시기는 2015년이다. 2020년 성남시 판교에 있는 한 기업이 400억원이 넘는 돈을 들여 해당 부지를 매입했다. 문제는 그걸로 끝이었다는 점이다. 올해 6월에 이르도록 건물 건립을 위한 삽 한 번 뜨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20~2022년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공사가 어려웠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그 이후에도 해당 부지는 여전히 공터로 남아있다. 한 성남시민에 따르면 주차장으로 사용된 적이 있을 뿐 공사는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초 성남시는 정자동 163번지에 보건소를 세우려 했다. 그러다 2015년 11월16일 성남도시관리계획에 의거해 공공청사 부지서 중심상업지역으로 용도를 변경했다. 성남시는 고용 창출과 지역경제 활성화 등 토지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우수 기업을 유치하려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실제 2016년 1월21일 열린 성남시의회 제216회 경제환경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당시 한 시의원이 “정자동에 있는 공공청사 부지를 매각해서 업무 단지로 사용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지”라고 질문하자 성남시 회계과장은 “고용도 창출하고 시 재정의 효율성도 증대시키고, 실제로 보면 기업체가 유치됨으로써 지역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다고 보고 있다”고 답했다. 성남시의회는 2016년 1월과 3월, 5월에 ‘정자동 163번지 기업 유치를 위한 매각’ 안건을 두고 질의와 토론을 진행했다. 두 번의 부결 끝에 2016년 5월24일 안건이 가결됐다. 당시 경제환경위원회 위원장은 “매각 대금이 지역주민들께 일정 부분 투입될 수 있도록 신경 써주길 바란다”고 말한 뒤 안건 가결을 선포했다. ‘부르는 게 값’ 노른자위 땅 보건소 부지였다가 용도변경 성남시는 2017년 5월23일 보도자료를 내고 해당 부지의 매각을 공식화했다. 보도자료에 따르면 성남시는 첨단산업육성위원회를 열어 해당 부지에 기업 유치를 위한 공모 지침과 평가 기준을 확정한 뒤 ‘우선 협상 대상자 선정 모집 공고’를 냈다. 해당 부지의 공시지가는 211억원(㎡당 745만원), 감정평가액은 376억원(㎡당 1329만원)이라고 밝혔다. 당시 해당 부지에는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들어선 상태였고 정자1동 행정복지센터(임시청사)는 그해 9월 분당정자 청소년 수련관으로 옮긴다고 했다. 성남시는 부지 매입 자격을 ▲제조업의 연구시설 ▲벤처기업 집적 시설 ▲문화산업 진흥시설 등으로 제한했다. 지식산업, 전략산업, 벤처기업을 유치해 지역발전을 꾀하겠다는 취지다. 성남시는 “성남하이테크밸리, 판교테크노밸리, 분당벤처밸리 등 3대 산업집적지와 한 축을 이뤄 도시 균형발전과 첨단사업 고도화에 시너지효과를 낼 것으로 내다봤다”고 말했다. 부지 매각과 관련해 우선 협상자를 선정하기 위한 접수는 그해 7월17일부터 21일까지 닷새 동안 이뤄졌다. 성남시는 공급 신청서, 기업 현황, 사업 계획, 입찰 계획 등을 작성해 성남시 창조산업과에 직접 방문해 제출하라고 고지했다. 8월 중에 개발 방향 이해도, 사업 계획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최고 득점 기업을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한 뒤 협상을 거쳐 매매계약을 체결한 계획이라고 전했다. 시의회서도 지역 기여 강조 성남시는 ▲기업 현황(정량 300점) ▲사업 계획(정성 500점) ▲토지 가격(200점) 등 총 1000점 만점으로 평가하겠다고 밝혔다. 기업 현황의 경우 규모와 재무 상태로 구분해 각각 70점, 230점을 배점했다. 사업 계획은 사업 평가(200점), 건축 운영(150점), 지역 기여(150점) 등 세 분야로 나눴다. 2018년 4월 성남시는 드림시큐리티가 제안한 소프트웨어 진흥시설 설치 사업 계획이 시 첨단산업 육성위원회를 통과했다고 밝혔다. 드림시큐리티는 핀테크 서비스와 FIDO 기반의 생체인증 기술, 블록체인 기반의 인증과 암호를 개발하는 연구·개발 중심의 IT 벤처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성남시와 드림시큐리티 간의 계약은 체결되지 않았다. 성남시 관계자에 따르면, 드림시큐리티 측에서 매입을 철회했다. 이후 재차 공모 절차를 거쳐 ㈜마이다스아이티가 해당 부지를 매입했다. 회사 소개서에 따르면, 마이다스아이티는 공학기술용 소프트웨어 개발 및 보급 및 구조 분야 엔지니어링 서비스와 웹 비즈니스 통합 설루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마이다스아이티는 2020년 2월14일 424억원에 해당 부지를 샀다. 당시 성남시가 내놓은 보도자료에 따르면, 마이다스아이티는 1114억원을 들여 연면적 3만963㎡, 지상 15층, 지하 5층 규모의 벤처기업 집적 시설을 건립한다고 밝혔다. 4개 이상의 벤처기업이 입주하고 판교제1테크노밸리에 있던 마이다스아이티 직원 600명이 모두 옮겨온다고도 덧붙였다. 삽 한 번 안 떠 시민 의문 제기 그러면서 “마이다스아이티는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창업보육 지원, 커뮤니티 공간 조성, 청소년 자인씨앗학교를 운영하고 주말에 주차장(240면)을 전면 개방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또 “일자리 매칭·치매 예방·스마트 제조혁신 등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관련 기관에 무상 지원하고 지역 주민 고용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고 했다. 성남시가 우선 협상자를 선정하는 과정서 150점을 배점한 ‘지역 기여’ 관련 부분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성남시는 공사 완공 시점으로 2023년을 언급하면서 조감도도 공개했다. 당시 성남시 관계자는 “정자동 163번지 부지는 분당벤처밸리 내 벤처기업 육성촉진지구고 인근엔 네이버, 넥슨, 엔씨소프트 등 첨단지식산업 업체가 대거 포진해 벤처기업 집적 시설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며 “아시아실리콘밸리 조성의 한 축이 돼 자족 기능을 높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부지 매각 이후 5년이 지났다. 매각 전인 2019년 12월부터 주민 자율 주차장(90면)으로 사용되던 것도 이제는 운영되지 않고 있다. 마이다스아이티가 세운 ‘개발 부지 안내문’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안내문에는 ‘본 지역은 아래와 같은 방향으로 개발될 예정입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연구/업무 공간 ▲자연주의 인본 경영 공간 ▲시민 행복 공간 등이라고 쓰여 있다. 한 성남시민은 “주민 편의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다가 기업에 매각된 이후 계속 비어있다. 성남시가 부지를 매각하겠다고 밝힌 시기로 따지면 8년, 마이다스아이티가 땅을 산 시기로 보면 5년째 땅을 놀리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성남시에서 어떤 제재를 가하는 것도 아니다. 기업의 사정은 둘째치고 성남시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20년 판교 벤처기업 매입 “구체적인 내용 안내 어렵다” 성남시의회가 2020년 10월16일 진행한 경제환경위원회 제4차 회의서 정자동 163번지 관련 문제가 언급됐다. 매각 이후 8개월이 흐른 시점이다. 당시 한 시의원은 “빨리빨리 언제까지 안 되면 계약위반으로 통보해야 한다. 확인해야 한다”며 “계약위반이 될 수 있는 사항은 꼼꼼히 따져서 빨리빨리 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성남시 아시아실리콘밸리 담당관이 “지금 그곳은 설계 단계다. 주차장 사용 문제는 확인해서 보고하겠다”고 답했다. 시의원은 “우리가 정해진 규칙대로 (첨단산업)육성위원회에서 심의했던 내용대로 계약위반이 아닌지 우리가 따져야 하는 거고…(중략)…우리한테 제출한 계획대로 이행을 안 했을 경우 계약위반으로 취소할 수도 있다고 얘기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날 회의 이후 성남시의회서 정자동 163번지 관련 논의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성남시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서 “설계 변경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내용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협약서에 공사 시점에 대한 부분이 있긴 하다. 다만 그 부분에 단서 조항이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마이다스아이티서 단서 조항을 통해 공사 기간을 연장해 온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이어 “원래 올해 상반기 중에 착공하는 것으로 얘기가 나왔는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부연했다. 공사 지연에 대한 성남시 대응을 묻자 “더 이상 저희도 같은 사유로는 연장을 안 해주려는 상태”라면서도 “성남시 차원서 마이다스아이티 측에 법적으로 공사를 재촉하거나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사항이 명확하진 않다”고 설명했다. 시 직무유기? 제재 못한다 마이다스아이티 관계자는 “(해당 부지에)사옥을 지을 예정”이라며 “사옥을 처음 세우는 것이다 보니 잘 짓기 위해 설계를 변경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남시 보도자료에 언급된 부분(지역 기여 관련)이 설계에 포함돼있는지는 답하지 않았다. 홍보팀 관계자는 <일요시사>의 추가 질문에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안내가 어려운 점 양해를 부탁한다”고 답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