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이기흥 잡은 유승민

탁구 영웅, 체육 대통령 됐다

[일요시사 취재 1팀] 안예리 기자 = ‘아테네의 영웅’이었던 유승민 전 대한탁구협회장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대한체육회장 선거서 3연임을 노리던 이기흥 현 회장을 꺾으면서 또 한 번 반전의 역사를 쓴 것이다. 역대 대한체육회장 중 최연소(43세)로 새로운 수장이 된 유 신임 회장은 한국체육계의 미래를 이끌게 됐다.

지난 14일 서울 송파구 소재의 올림픽홀서 열린 제42대 대한체육회장 선거서 가장 많은 표(34.5%)를 얻은 유승민 후보가 당선됐다. 이번 선거에는 이기흥 현 대한체육회장, 김용주 전 강원특별자치도체육회 사무처장, 유승민 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강태선 현 서울특별시체육회장, 오주영 현 대한세팍타크로협회장, 강신욱 현 단국대학교 명예교수까지 총 6명이 후보자로 출마했다. 

3연임 저지
변화 시발점

이번 선거는 역대 최대 경쟁률을 기록했다. 투표인단은 총 2244명이었고 대한체육회 대의원, 종목단체, 시·도 체육회, 시·군·구 체육회 임원 및 대의원, 선수, 지도자, 동호인들로 꾸려졌다.

2244명 중 1209명(투표율 53.9%)이 투표에 참여했고 유승민 후보가 417표 34.5%, 이기흥 후보 379표, 강태선 후보 216표, 강신욱 후보 120표, 오주영 후보 59표, 김용주 후보 15표, 무효표 3표로 유 후보가 최다 득표로 당선됐다. 유 후보와 이 후보는 단 38표 차이로 승패가 갈렸다.

이 회장은 3연임을 노렸지만, 체육계는 기존 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겠다는 유승민을 선택했다. 이번 선거 결과는 한국 체육계가 현 체제의 변화를 간절히 원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유 당선인은 지방체육회와 종목단체의 자립성 확보를 통한 동반 성장, 선수와 지도자 케어 시스템 도입, 학교 체육 활성화 프로젝트 추진, 생활체육 전문화를 통한 선진 스포츠 인프라 구축, 글로벌 중심 K-스포츠 육성과 대한체육회 수익 플랫폼 구축을 통한 자생력 제고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유 당선인이 내건 공약들은 많은 유권자들의 표심을 사로 잡았다.

물론 공약만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동요시킨 것은 아니다. 유 당선인은 이번 선거를 앞두고 체육회 가맹 68개 전 종목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지난 7일 유 당선인의 캠프 측 관계자는 “유 당선인은 출마 기자회견 이후 3개월 이상 대한체육회 가맹 68개 종목을 직접 체험하기에 나섰다”며 “계절적인 요인으로 체험이 어려웠던 패러글라이딩과 수상스키를 제외하고는 경기장과 코트를 일일이 찾아 대부분의 종목 체험을 마쳤다”고 밝혔다.

택견이나 태권도 같은 전통 무술과 배드민턴, 테니스 등 라켓 종목, 승마, 수영 등 전 종목을 직접 체험한 이유는 모든 종목을 경험하며 선수, 지도자와 만나 각 종목 선수들이 겪는 고충과 현안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현정화 전 탁구 감독은 “전 종목 체험은 유 당선인이 젊고 소통하려는 진정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유 당선인은 선수 시절이나 탁구협회장 때도 엄청난 에너지로 목표한 것을 이뤄내는 집념이 있었다. 체육회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 것으로 확신한다”고 신뢰했다.

김택수 미래에셋 탁구단 감독은 “유 당선인이 선수로 최고 자리에 올랐고, 지도자와 행정가로서 성과를 내 자질을 검증받았다”며 “선거 공약은 직접 전국을 돌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만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감독은 “체험을 바탕으로 진정성을 갖고 다가갔기 때문에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38표 차’ 대한체육회장 당선 대이변
42세 역대 최연소 수장 “변화 선택”

이번 선거는 이 회장과 ‘반 이기홍 연대’ 간의 대결이었다. 이 회장의 직원 부정 채용 및 금품수수, 후원 물품 횡령, 선수촌 시설 관리업체 입찰 비리 의혹 등으로 유 당선인을 포함한 다섯명의 후보가 이 회장의 실정을 비판하며 출사표를 던졌다.

여론은 이 회장의 3연임 성공을 점쳤다. 각종 비위 혐의로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로부터 직무 정지를 당하고 사법 당국의 수사를 받아 비판 여론이 컸지만, 역대 최다 인원인 6명이 회장 선거에 입후보하고 ‘반 이기흥’ 단일화가 끝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 당선인은 야권 단일화 논의에 참여했었지만 “야권 후보들 사이에 권위 의식과 연장자에게 양보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각종 의혹으로 수사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포츠공정위원회로부터 도전 자격을 승인받아 출마했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정부를 겨냥해 “문화체육관광부, 검찰, 경찰, 국회, 국조실, 감사원 등 거의 모든 국가 권력기관이 체육회 조사에 나섰다”며 “나를 악마화하고 있다”고 강력 항의했다.

이 회장은 문체부 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체육회장 집행 정지 신청 항고심서 1심에 이어 패했다. 체육회장에 당선된 뒤 국면을 전환시키겠다던 이 회장의 전략은 끝내 좌절됐다.

한편 유 당선인은 대한탁구협회 회장 재임 시절 ▲후원금 페이백 의혹 ▲2020 도쿄올림픽 탁구 국가대표 선발 과정서 선수 바꿔치기 의혹을 받았다.

지난 4일 열린 제1차 후보자 정책토론회서 그는 “후원금 유치를 위해 인센티브 제도를 만든 건 사실이지만, 총 100억원의 후원금 가운데 직접 끌어온 28억5000만원에 대해 단 한 푼의 인센티브도 받지 않았다”면서 “대한체육회 감사를 매년 받았고, 5년간 일하면서 개인적으로 법인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이어 “도쿄올림픽 당시 경기력향상위원회서 추천한 선수가 있었지만 선발전 성적과 세계랭킹이 더 높은 선수를 최종 선발했다”며 “위원회서 추천한 선수를 뽑았다면 오히려 불공정했다는 사회적 논란이 일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 당선인은 해당 의혹을 제기한 후보들에게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젊은 피
행정가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금메달리스트 안세영 선수로부터 시작됐다. 안세영은 ‘28년 만의 금메달이라는 영광’을 안았지만, 대한배드민턴 협회의 비리와 불합리한 행정을 비판하고 한국 체육 행정의 변화를 요구했다.

안세영의 목소리는 개혁의 씨앗이 돼 닫혀 있던 체육계 내부의 말문을 틔웠다. 그동안 체육계에 뿌리 깊었던 비효율적 행정 시스템에 대한 젊은 선수들의 불만을 안세영이 대변함으로써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의 선거공약은 체육인들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유 당선인은 체육계의 오래된 관습을 타파하고, 더 나은 행정과 투명한 시스템을 도입하겠다는 공약으로 많은 체육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유 당선인의 현재 가치관은 고단했던 선수 생활로부터 형성됐다. 선수 시절부터 뛰어난 면모를 보였던 그는 중학생 때 국가대표에 선발될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천부적 재능을 보였다. ‘탁구 천재’라는 수식어만큼 타고난 재능이 있었지만, 부친과 함께 체력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등 노력파로 통한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이미 실업팀들이 서로 스카우트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고, 삼성생명의 후원을 받을 정도의 인재였다. 16세였던 1997년 아시아 주니어 탁구 선수권 단식 4강에 진출했으며, 단체전에선 우승했다.

유 당선인의 신승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의 신승 연대기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서 시작됐다. 당시 한국 탁구 국가대표였던 그는 탁구 남자 단식 결승서 중국의 왕하오(당시 세계랭킹 4위)를 4-2로 꺾는 ‘녹색 테이블 반란’을 일으켰던 역사가 있다.

앞서 1999년 주니어 아시아선수권서 당시 기대주였던 운명의 상대 왕하오를 처음 마주했다. 이때 왕하오를 단식 결승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 최고 유망주 반열에 올랐다.

이후 5년 만인 아테네올림픽서 왕하오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당시 거의 모든 기술적 측면서 우위에 있다고 평가받았던 그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압도적 경기력으로 결국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이번엔
역전승

2012년 은퇴 이후 유 당선인은 체육 행정가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 2016년 리우올림픽 기간 중에 쟁쟁한 후보였던 역도 장미란, 사격 진종오를 제치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 위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IOC 선수 위원 당선 이후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선수촌장을 역임한 유 당선인은 2018 평창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내고, 대한탁구협회장 선거에 당선된 후 본격적인 체육 행정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유 당선인이 43세라는 젊은 나이에도 당선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은퇴 후 쌓은 체육 행정가로서의 다양한 경험도 한몫했다.

선수 생활 25년, 지도자 2년, 대한탁구협회장과 IOC 선수 위원으로서 8년간 행정경험을 쌓아온 유 당선인은 대한탁구협회장 재임 중 세계선수권대회인 부산 탁구 세계선수권대회를 최초로 국내에 유치했다. 또 2018 평창기념재단 이사장으로서 ‘신남방 선수 육성 사업’ ‘드림 프로그램’ 등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유산 사업들을 차질 없이 추진했다.

유 당선인은 당선 확정 후 “선거 과정에선 치열하게 경쟁했지만, 이젠 더 이상 네 편 내 편이 없다. ‘스포츠’라는 한 지붕 아래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발전 방향을 고민할 수 있는 장을 열겠다”며 “당선 직후 모든 후보자들에게 전화를 드렸다. 이 회장께서는 잘하라고 말씀해주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많은 책임감을 느낀다”며 앞으로 풀어가야 할 수많은 현안에 대해 걱정했다.

주무 부처인 문체부와의 관계 회복은 가장 큰 숙제로 남아있다. 이 회장이 이끄는 체제 아래서 문체부와 체육회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문체부와 체육회는 국무총리 산하 민관 합동기구인 국가스포츠정책위원회 인사 구성, 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분리, 연임 제한 폐지 내용이 담긴 정관 개정안 승인, 예산 교부 등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갈등의 여파로 체육회 예산은 약 1000억원가량 줄어들었다. 특히 문체부는 대한체육회를 거쳐 시도체육회로 배정되던 예산 400억원을 직접 교부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체육회 주요 사업이 문체부 등 다른 기관으로 이관되면서 삭감 폭이 더욱 커졌다.

21년 전 왕하오 꺾듯
또다시 짜릿한 신화

이에 대해 유 당선인은 “나는 아직 누군가와 척을 져본 적이 없다. 그 부분은 부드럽게 잘 풀리지 않을까 싶다”며 “지금은 체육계 현안을 해결해야 한다. 정부와 소통으로 해결된다면 빠르게 대화를 해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방체육회의 독립 행정과 예산 집행이 안 되면 줄기가 막힌다. 그 부분을 해결해야 한다”면서 “지방체육회의 경우 시간이 많지 않다. 아수라장이 돼버린 학교 체육 정상화에도 힘쓰겠다”고 약속했다.

대한탁구협회장, IOC 선수 위원, 2018 평창기념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문체부와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유 당선인은, 정부와의 갈등을 해소할 적임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현재 체육계는 정말 많은 현안을 갖고 있는데,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 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제가 부족하지만, 열심히 그 역할을 해보도록 하겠다. 체육인이라는 자긍심을 잃지 말아주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대한민국 스포츠의 경쟁력을 한층 높이겠다는 포부도 드러냈다.

체육회에 대해 “내부 조직은 물론, 사업 방식 등에 정체돼있거나 개선 여지가 있는 부분들을 찾아낼 것”이라며 “시스템을 합리적으로 바꿔 자존감이 낮아진 체육회 직원들에게 새로운 동기 부여를 하겠다. 개혁의 목적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집단 따돌림으로 사망한 철인3종경기 선수 고 최숙현의 부친으로부터 당선 직후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는 그는 “대한민국 체육이 건강하고 올바르게 갈 수 있도록 이끌어달라는 문자 내용을 확인하고 가슴이 먹먹했다”고 토로했다. 이어 “IOC 선수 위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IOC 산하 인권 소위원회에 몸담으며 배우고 익힌 내용들을 적극활용해 체육인들의 인권 보장에 힘쓰겠다”고 다짐했다.

유 당선인에게는 2026 밀라노·코리티나담폐초동계올림픽,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아경기대회, 2028 LA 올림픽 등 다수의 국제종합대회가 기다리고 있다. 이들 대회서 좋은 성적을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도 맡았다.

또 생활체육 활성화 및 학교 체육 진흥 등 체육계 전반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대한민국 스포츠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등 현안들이 포진해있다. 대한체육회장은 연간 4400억원의 예산 집행을 결정하며, 정회원 64개, 준회원 4개, 인정회원 15개 등 총 84개 종목단체를 총괄해야 한다.

새로운 바람
책임감 막중

유 당선인의 당선은 앞으로 체육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올 것을 암시한다. 기존 관습을 타파하고 개혁을 어떻게 이끌어나갈지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유 당선인은 문체부 장관의 승인을 거쳐 다음달 취임한다. 임기는 2029년 2월까지로, 앞으로 4년간 한국 체육계의 미래를 책임지게 된다. 유승민 대한체육회장의 행보에 체육계의 미래가 달려 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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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 올인’ 민주당 그래도 불안한 이유

‘서울시장 올인’ 민주당 그래도 불안한 이유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내년 6월 치러질 지방선거의 최대 격전지는 단연 서울시다. 서울시에 깃발을 꽂는 쪽이 전체 선거의 승리라 봐도 무관하다는 해석도 나온다. 진보 진영에서는 당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오세훈 대항마’를 자처하는 후보군이 속속 등장했지만, 서울 시민의 마음까지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전국 지역위원장 워크숍에서 제9회 지방선거(이하 지선) 승리라는 목표를 세웠다. 이달 중으로 지선 공천 룰을 확정해 빠르게 선거에 임하겠다는 방침이다. 큰 틀로는 ▲당원 민주주의 실현 ▲완전한 민주적 경선 ▲깨끗하고 유능한 후보 선출 ▲여성·청년·장애인 기회 확대 등 4대 방향이 제시됐다. 출사표 만지작 민주당은 이번 지선의 성격을 ‘완전한 내란 종식’으로 규정했다. 민주당 전국 지역위원장은 워크숍에서 ‘이재명정부 성공과 지선 승리를 위한 더불어민주당 전국지역위원장 결의문’을 통해 “국민의 준엄한 명령을 받들어 민생회복·내란청산·개혁완수라는 역사적 사명을 반드시 이루어 낼 것을 결의한다”고 밝혔다. 내년 지선서 압도적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서 ‘무능 부패한 국민의힘 지방권력’을 심판하고 ‘진짜 자치분권 균형성장’의 시대를 만들겠다는 방침이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 또한 “이정부 성공을 위해 당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모든 초점을 맞춰야 한다”며 “다가오는 지선은 민주당의 책임과 기회의 시험대다. 당의 힘을 모아 이정부의 성공과 지선 승리라는 두 목표를 함께 이뤄낼 것”이라고 밝혔다. 주목도가 높은 서울시장 선거 최종 후보가 되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키울 수 있다. 차기 서울시장 임기는 2030년으로 21대 대통령선거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그동안 서울시장은 대선주자로 가는 지름길로 여겨졌던 만큼 정치인으로서 큰 꿈을 꾸는 이들에게는 ‘일생일대의 기회’다. 민주당은 서울시장 선거 본선행 티켓을 놓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원내 의원들의 공식 출마 선언 이후에도 자칭타칭 물망에 오른 진보 인사들이 시기를 재고 있어 다양한 경선 구도가 그려질 것으로 관측된다. 박주민 의원은 민주당 내에서도 가장 먼저 공식 출마 의사를 밝힌 인물이다. 그는 “서울이 ‘맏이’ 역할을 하며 지방 도시들과 함께 성장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며 일찌감치 선거판을 예열했다. 뒤이어 민주당 서영교 최고위원이 출사표를 던졌다. 조희대 대법원장 저격수를 자처하며 존재감을 키운 그가 이번에는 “서민을 위해 일 잘하는 시장이 필요하다”며 오세운 서울시장 대항마로 나섰다. 서 최고위원은 “(오 시장은) 토지거래허가구역을 무리하게 해제하면서 부동산 폭등을 자초했다”며 “이태원 참사의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시점에서 큰 책임이 있는 용산구청장에게 서울시 주최 지역축제 안전관리 대상을 주는 등 시민의 요구, 시대의 요구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전현희 최고위원은 “국정감사 이후 결단을 내리겠다”며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는 지난달 오마이TV ‘박정호의 핫스팟’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적 중요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할 후보가 서울시를 탈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그런 자리에 과연 제가 적합한 후보인지 고민을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큰 판 향하는 의원들 오세훈만 꺾으면 끝? 지난 조기 대선 당시 ‘민주당 골목골목선대위 서울위원장’을 맡아 서울시 정책 로드맵을 짜는 데 참여한 만큼 출마 명분은 충분하다는 평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원내 인사인 박홍근 의원과 김영배 의원도 몸풀기에 나섰다. 특히 박 의원은 자신의 거취와 관련해선 지난해 8월 당시 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과 사전 논의가 있었던 점을 강조만 만큼 오랜 고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홍익표 전 의원도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생각하고 준비 중”이라며 도전을 시사했다. 홍 전 의원은 가장 민감한 서울 부동산 문제를 겨냥하는 등 오 시장의 강남권 토지거래허가구역 해제를 집값 상승의 원인으로 꼽으며 저격에 나섰다. 박용진 전 의원의 출마 가능성도 점쳐진다. 박 전 의원은 “아직 정해진 건 없다”면서도 연일 오 시장을 때리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최근에는 “민주당의 정치가 ‘영포티(젊어 보이려 애쓰는 40대)’ 정치로 전락하지 않도록 몸부림쳐야 한다”며 청년세대와의 통합을 강조하기도 했다. 원외에서는 정원오 성동구청장의 이름이 눈에 띈다. ‘K-브랜드지수’에서 서울시 지자체장 부문 1위 타이틀을 따낸 그는 활발한 SNS 활동으로 두터운 지지층을 보유한 인물이다. “나 서울 시민인데, 구청장님 좀 같이 씁시다” 등 밈(인터넷 유행 콘텐츠)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팬덤을 등에 업고 민주당 원내 인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지 이목이 쏠린다. 민주당 후보군은 일동 ‘오세훈 때리기’에 집중하고 있다. 오 시장의 야심작인 한강버스가 연일 구설수에 오른 데 이어 최근 서울시가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서울 종묘 맞은편에 높이 145m 건물이 들어설 수 있도록 재정비촉진계획을 변경한 것을 두고 맹공에 나선 것이다. 지난 11일 민주당 문화예술특별위원회는 기자회견을 통해 종묘 재개발 논의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당내 서울시장 후보군인 박주민 의원과 서영교 최고위원을 비롯한 전현희·김영배·박홍근 의원 등이 대거 참석했다. 특히 박홍근 의원은 “차기 시장, 그리고 대권 놀음을 위해 종묘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서울 종묘가 서울시장 선거의 새로운 전장이 된 셈이다. 이리저리 혼돈의 표심 민주당에서는 윤석열정부 조기 퇴진으로 치러진 조기 대선 승리의 후광효과가 지선까지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번 지선 기조를 내란 청산으로 내세운 것 역시 ‘내란 VS 헌법 수호’ 프레임이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다시 꺼내든 내란 종식 키워드가 내년 지선에서도 먹힐지는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지선 압승이라는 낙관론에 젖어 서울시 민심을 제대로 훑지 못한다면 ‘이정부 심판론’으로 되치기당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지점이다. 민주당 출신의 한 정치권 관계자는 “서울시 선거는 ‘오세훈만 꺾으면 당선’ 같은 일차 방정식이 아니다. 오 시장이 명태균 게이트, 한강버스 등 각종 리스크에 발목 잡혀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울시민이 내란 종식을 외치는 후보에게 표를 던지겠냐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다시 출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구 특성만큼 변수도 많은 서울시 자체가 첫 번째 허들이다. 서울은 마포·용산·영등포·광진·동작·성동·강동·중구 등 13개 선거구를 일컫는 한강벨트를 따라 보수층이 포진해 있어 보수 텃밭으로 여겨지지만, 지난해 치러진 총선에서 민주당이 서울 48석 중 37석을 얻어 과반이 넘는 지역에 파란 깃발을 수놓았다. 그럼에도 조기 대선에서 당시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서울시에서 각각 47.1%, 41.6%를 얻어 두 후보 간의 격차는 5.5%p에 불과했다. 여기에 범보수로 여겨지는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가 얻은 9.9%를 더하면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을 앞서게 된다. 비상계엄이라는 특수 상황을 경험했지만 40%에 달하는 서울 시민이 국민의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두 번째는 한강벨트를 따라 빼곡히 자리 잡은 부동산이다. 정부의 10·15 부동산 정책을 통해 서울시 민심을 움직이는 건 진영 간의 논리 싸움이 아닌 정책, 그중에서도 집값이라는 게 명확해졌다. 서울 전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과 투기과열지구·조정대상지역으로 지정하는 이재명표 부동산 대책이 발표된 지 약 보름 뒤 민주당 지지율이 1주일 새 10%포인트 하락하며 국민의힘에 오차범위 내에서 역전됐다. 지지층에 휩쓸릴라 한국갤럽이 지난달 28~30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주당의 서울 지지율은 31%로 전주 대비 10%p 떨어졌다. 반면 국민의힘은 12%p 오른 32%로 집계됐다. 서울을 대상으로 고강도 대책이 발표되자 서울 민심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전체 긍정 평가는 전주 대비 1%포인트 상승해 57%를 기록했지만,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서울 지역에서는 8%p 하락한 47%로 나타났다. 해당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로 응답률은 12.6%다. 이동통신 3사가 제공한 무선전화 가상번호를 무작위로 추출해 전화 조사원이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와 한국갤럽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 결국 이번 서울시장 선거는 진영 간의 대립구도가 아닌 인물과 정책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의견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진보 진영 후보들은 본선 진출을 위해 당원의 표심을 얻는 일을 우선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지선을 앞두고 민주당 지도부가 권리당원 권한을 대폭 강화하겠다고 밝힌 만큼 국민의힘과 잘 싸우는 ‘전투적인 후보’가 경선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차기 서울시장 후보 적합도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진보·여권 후보 가운데 정 구청장이 1위를 차지했다. 만일 정 구청장이 출마 의지를 굳히더라도 박주민·서영교 의원 등 쟁쟁한 원내 인사를 제치고 당원의 선택을 받을지 확신할 수 없다. 인지도면은 물론 민주당 지선 기조가 내란 청산으로 자리 잡은 한 12·3 비상계엄을 해제한 인물에게 더 많은 정치적 유산과 서사가 쥐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박 전 의원은 출마 가능성을 시사한 동시에 민주당 강성 지지층에게 집중적으로 질타 받았다. 2023년 8월 당시 이재명 대통령이 당 대표이던 시절 체포동의안을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중 불체포특권 포기 성명에 이름을 올린 31명의 의원 중 한 명인 만큼 경선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반면 민주당 지지층으로부터 꾸준히 이름을 알려온 경우 경선 통과가 수월하지만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개딸(개혁의 딸들)이 밀어준 강경파 후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면 정책이나 행정가로서의 자질은 묻히고 이에 거부감을 느낀 중도층의 표가 분산될 것이란 점에서다. 당원 마음 잡으랴, 중도층 안으랴 김민석·강훈식 ‘투톱’ 차출설도 경선과 본선을 놓고 민주당의 딜레마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김민석·강훈식 차출설’이 돌면서 서울시장 선거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인지도가 높고 행정가 면모가 돋보이는 김민석 국무총리와 강훈식 대통령실비서실장을 서울시장 후보로 내보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국정 투톱이 또다시 정치의 한가운데에 들어섰다. 앞서 김 총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서울시장 출마 가능성에 선을 그어왔지만 종묘 재개발 논쟁에 뛰어들면서 다시 불을 댕겼다. 지난 10일 김 총리가 서울 종묘 일대를 찾아 “무리하게 한강버스를 밀어붙이다 시민의 부담을 초래한 서울시로서는 더욱 신중하게 국민적 우려를 경청해야 한다”고 우려를 표했는데, 이를 두고 오 시장이 “국민 감정을 자극하려 하는데 이는 선동”이라며 지선을 겨냥한 발언이라고 의심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 차례 서울시장에 도전했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이름도 다시 거론된다. 김 총리가 서울시장 대신 당 대표로 나서고, 직을 내려놓은 정 대표가 서울시장 도전 후 대권 코스를 밟는 시나리오다. 3대 개혁을 두고 당정 불협화음이라는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붙는 만큼 교통정리를 통해 당정 서로에게 윈윈(win-win)하는 방법으로 꼽힌다. 우선 민주당 관계자들은 앞선 두 사람의 출마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총리나 대통령비서실장 자리에 생긴 공백은 국정 운영에 차질이 빚을뿐더러 정부 출범 1년도 되지 않은 시기에 지선 후보로 차출할 시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게 공통된 설명이다. 정 대표의 서울시장 도전 여부 역시 “이제 겨우 (취임) 100일이 지났다”며 일축했다. 이처럼 ‘스타 정치인’ 후보군이 물망에 오르자 당 일각에서도 지역 일꾼을 뽑는 지선의 의미가 퇴색될까 우려하는 모양새다. 경선 당락을 결정할 당원의 표심을 사로잡기 위해 지나친 선명성 경쟁이 이어질 경우 중도층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거라는 지적도 나온다. 수많은 변수들 여권 관계자는 “지선 결과를 미리 예단하기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차분하게 기다리면서 후보들의 공약을 분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앞으로 종묘 재개발 같은 이슈가 전방으로 나올 텐데 그때마다 (민주당도) 네거티브로 맞받아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우리 당원도 내란 종식과 민생회복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사람을 최종 후보로 뽑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터줏대감 눈치 보는 국힘? 더불어민주당과 마찬가지로 국민의힘 역시 서울시장을 이번 지방선거의 최대 격전지로 보고 있다. 서울시 사수를 위해 후보군을 물색하고 있지만, 오세훈 시장의 임기가 남은 만큼 누구 하나 선뜻 도전장을 내밀지 못하는 분위기다. 이에 오 시장의 재도전이 유일한 방법으로 여겨지는 모양새다. 오 시장은 “시민들이 어떤 평가를 해줄지 지켜보며 거취를 분명히 하겠다”며 3선 도전 가능성을 내비쳤다. 명태균 게이트, 한강버스, 종묘 재개발 등 리스크를 안고 있지만 현역 프리미엄에 기댄다면 시도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 셈이다. 한때 경기도지사 후보로 거론됐던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이 이번에는 서울시장 물망에 올랐다. 서울시장 출사표를 던진 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오 시장이 아닌 나 의원을 상대할 가능성이 있다”는 취지로 말하면서 이목이 쏠렸지만 정작 나 의원은 서울시장 도전 가능성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