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친부 살해 누명 벗은 김신혜

짜깁기로 만들어진 ‘패륜아'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무기수로 평생을 감옥서 지내게 될 수도 있었던 김신혜씨는 억울하게 24년의 세월을 빼앗겼지만, 나머지 시간들을 돌려받았다. 김씨는 그동안 있었던 여러 차례의 재판 과정서 무죄를 주장해왔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까지는 24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김씨의 빼앗긴 시간은 대체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친부를 살해했다는 누명으로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던 지난 6일, 재심 1심서 김신혜씨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김씨의 억울함이 24년 만에 풀리게 된 것이다. 재판부는 김씨의 진술에 일관성이 부족하고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있지만, 이를 유죄로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했다.

24년 만에
되찾은 자유

김씨의 24년간의 비극은 한 남성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 2000년 3월7일 전라남도 완도군의 버스 정류장서 한 남자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발견된 장소서 약 7㎞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3급 지체 장애인으로 김씨의 아버지였다. 처음 발견 당시 경찰은 사건 현장 주변에 자동차 방향 지시등이 깨져있어서 단순 뺑소니로 의심했지만 시신에 외상이 전혀 없었다.

시신 부검 결과 별다른 외상이나 출혈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혈중알코올농도는 0.303%였고, 수면 유도제 성분인 독시라민이 검출됐다. 경찰은 부검 결과에 따라 누군가가 수면유도제와 술을 이용해서 김씨를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한 것으로 보고 계획적인 타살로 추정했다.

이후 수사에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그의 큰딸(당시 나이 23세) 김씨였다. 최초 신고자는 김씨의 고모부였다.

경찰은 김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당해 3월9일 오전 0시10분에 이 사건 용의자로 긴급체포했다. 경찰 조사에서 김씨는 순순히 모든 범행을 인정했고, 범행 동기는 ‘아버지의 성추행’이었다고 진술했다.

사건 발생 2개월 전인 2000년 1월, 김씨는 “고향에 살고 있는 이복 여동생과의 전화 통화에서 동생이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됐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과거 중학생 시절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었고,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 싫어서 범행을 계획했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당일 새벽 1시에 수면유도제 30알을 술에 녹여 아버지에게 ‘간에 좋은 약’이라고 속여 마시게 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함께 차를 타고 이동 중에 아버지가 정신을 잃자 버스 정류장에 시신을 유기한 뒤 교통사고로 위장해 현장을 떠났다고 추정했다. 현장 검증서 김씨는 밥그릇에 수면제를 갈아 넣는 모습을 재연했다.

경찰은 김씨가 아버지 앞으로 다수의 상해보험을 들어놨다는 점도 범행의 동기 중 하나인 것으로 유추했다. 수사 도중 김씨의 집에서 범행 계획을 적어 놓은 듯한 수첩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범행 도구인 ‘양주’ ‘수면제’ ‘버스정류장’과 같은 키워드를 발견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첩 안에는 보험금을 계산한 흔적이 보이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 같은 증거물들을 근거로 경찰은 김씨가 아버지를 살해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지난 2000년 8월12일 모든 범행 사실에 대해 인정했던 김씨는 현장검증 시점부터 돌연 “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처음 조사부터 현장검증, 법정서 했던 진술까지 모든 사실을 번복한 것이다. 김씨가 말을 번복하게 된 건 다름 아닌 남동생 때문이었다.

김씨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장례식장서 고모부와 큰아버지를 만났다. 고모부는 “네 아버지를 죽인 것은 너의 남동생”이라면서 “네가 대신에 감옥에 가야 하고, 자수를 해야 한다”며 거짓 자백을 요구했다. 심지어 큰아버지는 “성추행을 원인으로 삼으라”며 감형될 수 있는 방법까지 조언했다.

그 말을 듣고 김씨는 남동생을 대신해 감옥에 가기 위해 거짓 자백을 하게 된 것이다.

국내 누명 사건 최고 장기 복역
24년간 억울함에 갇혔던 무기수

거짓 자백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이후, 김씨는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동생이 “고모부께서 네 누나가 아버지를 죽인 것 같다고 말해서 누나를 걱정했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김씨는 고모부의 말에 이상함을 느끼고, 그 후 현장검증을 하던 시점부터 “아버지가 성폭행을 했을 리 없고, 고모부가 이 사건의 뒤에 있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고모부는 김씨가 “본인 스스로 자백했다”고 말했지만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면서 김씨는 “고모부의 말에 자신이 동생을 대신해 감옥에 가겠다”고 했을 뿐, 아버지를 살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혔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김씨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서 사건 이후 고모부와 있었던 일에 대해 밝혔다. 그는 고모부와 아버지의 장례식장서 이야기를 나눈 이후, 자신을 경찰서에 끌고 갔다고 주장했다. 김씨의 이 같은 주장에 경찰은 고모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김씨가 신고 내용과 다르게 진술하고 있다”며 단순히 어떻게 생각하는지 참고인으로서 조사했고, 김씨 고모부는 “김씨의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김씨의 자백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결국 해당 진술은 대법원까지 모두 받아들여졌다.

김씨가 자백한 부분과 이 자백을 들었다던 고모부의 증언, 그리고 김씨가 아버지의 명의로 상해보험을 8개나 들었다는 점과 범행 계획으로 보이는 수첩이 발견된 사실들이 증거가 돼 김씨의 범죄 혐의는 기정 사실로 굳어졌다.

김씨는 경찰이 보험금 목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의심했지만, 당시 아버지 앞으로 들어놓은 8개의 보험 중 3개는 이미 해지된 상태라고 주장했다. 또 보험설계사 자격증이 있었고 3년이 지나야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다는 점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또 경찰이 자신을 상대로 ‘강압수사’를 했다며 수사 과정서 “폭언과 폭행을 당했다”고억울함도 호소했다.

재판서 김씨는 아버지의 성추행 사실에 대해선 부인하며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사실은 없다”고 증언했다. 김씨의 주장은 대법원까지 전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2000년 8월31일 존속살해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의문의 죽음
비극의 시작

무기징역 선고 후, 복역 중에도 김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교도소의 노역을 거부했다. 노역 거부 시 향후 감형에 어려움이 있는 등 불리한 점이 많았지만 김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알리는 일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복역 중에도 지속해서 무죄를 주장하면서 김씨의 목소리가 점점 외부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이하 대한변협) 법률구조단에도 수사 및 재판 과정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대한변협은 해당 사건서 위법을 인지하고 법률적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김씨는 대한변협의 도움을 받아 2015년 1월28일에 재심을 청구했다. 광주지방법원은 재심 청구를 인용했고 본격적인 재심 절차에 들어갔다. 이후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서 공판을 진행했다. 이날 검찰은 김씨가 먼저 자수해 강압 수사할 이유가 없다는 점, 남은 보험금 5개의 수령이 가능하다는 점, 수면 유도제 30알로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점 등을 주장했다.

김씨는 복역 중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한 노트에 상세히 메모했는데, 경찰의 강압수사에 대한 부분과 불법 증거 취득에 관한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대한변협은 해당 메모 내용을 기반으로 재조사를 신청했고 후에 조사가 진행됐다.

당시 경찰서 제시했던 증거물인 김씨의 수첩에는 보험금을 계산한 내역과 범행 계획을 적어놓은 듯한 내용이 있었다. 경찰은 그 수첩이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김씨는 이에 대해 “나는 영화 시나리오 작가를 꿈꿨고 그 과정서 노트에 시나리오를 작성했었다”며 “수첩에 적힌 글 중 ‘수면제’ ‘양주’ ‘버스정류장’이라는 단어가 있었고 그것을 살해 계획으로 오인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아버지 사망보험금 계산 내역에 대해서는 “당시 보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보험 실적을 위해 아버지의 명의로 보험 8개를 가입했었다. 그 과정서 작성했던 계산 내역”이라고 주장했다. 보험 중 3개는 이미 해지됐다는 사실과 아버지 사망 시점에는 사망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없는 약관이 있는 보험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심지어 그 보험금의 실질적 수령자는 자신이 아닌 동생들과 계모라는 사실도 언급했다.

강압수사
무기 선고

김씨는 경찰의 수첩 취득 과정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수첩이 발견된 장소는 집인데 이 수첩을 취득하는 과정이 위법적이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영장 없이 김씨의 집을 압수수색했고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므로 이미 법적 효력을 상실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경찰의 강압수사가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김씨는 경찰의 수사 과정서 명백한 폭행과 가혹행위가 있었고 그를 통해 자백과 범행 현장 재연을 강요받았다고 호소했다. 특히 경찰이 자신의 집을 불법 수색서 김씨가 찍은 누드 사진을 경찰끼리 돌려봤고, 이를 빌미로 범죄를 인정하라고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변호인 측은 김씨의 아버지가 사망 당시 음주량과 독실아민 수치에 대해 재조사했다.

김씨 측 변호인은 “수면 유도제의 치사량이 약 100알 정도므로, 치사량으로 보기 어렵다”며 “술에 다량의 알약을 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고, 그 정도 양을 용해시킨다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항변했다. 김씨의 자백 당시 증언대로 양주에 수면제 독실아민을 치사량만큼 먹인다면 양주 750㎖ 기준 4병을 먹여야 한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숨진 부친의 혈중알코올농도는 4병을 마셔야 나오는 수치와는 차이가 컸고, 이 사실을 경찰은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경찰이 조사했던 치사량 수치에도 문제가 있었다. 치사량 수치를 계산할 때는 사망자의 정확한 체중을 필요로 한다. 경찰이 당시 조사한 체중은 60㎏이었지만, 실제 사망자의 체중은 41㎏이었다.

이로써 경찰의 조사가 미흡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증거 효력을 잃게 됐다.

김씨에게 현장 재현을 하게 했을 때, 밥그릇에 수면제를 갈았다고 했지만 실제 그 밥그릇에서는 수면제 성분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점도 언급했다.

사건 당일 자신의 알리바이에 대한 억울함도 호소했다. 사건 발생 이틀 전인 2000년 3월6일에 남동생을 김씨의 고향인 완도에 데려다줬고, 김씨는 서울의 거처로 이동했다. 후에 남동생의 ‘데리러 오라’는 연락에 데리러 가려 했지만 김씨의 차량이 사고가 나 3월7일에 차량을 렌트한 후 완도로 내려갔다.

“나는 아버지 죽이지 않았다”
재판에 청춘 바쳐…결국 무죄

김씨는 완도에 있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지만 내려가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3월8일 0시경에 도착했다고 한다. 도착 후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다음 날 약속을 잡았다. 이후 집에 전화를 걸었고 김씨의 여동생이 전화를 받아 “아버지가 술에 취해 할머니와 싸우고 집에서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 여동생은 김씨에게 어딘지 물어봤지만 당시 술에 취하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아버지에게 혼나는 것이 두려워 ‘검문소 앞’이라고 거짓말했다.

앞선 재판서 경찰은 거짓말 부분에 대해 아버지를 죽이기 위한 것으로 추정했다. 김씨는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는 친구들을 증인으로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김씨는 이 같은 사실을 주장하며 큰아버지와 조카에 대해서도 거론했다. “사망한 아버지의 장애인 보조금과 기타 지원금에 대한 다툼이 있었고 고소까지 하게 된 일이 있었다”며 “마음 약한 저의 아버지가 합의해줬고 그 이후로 큰아버지와의 관계도 안 좋다”고 증언했다.

큰아버지는 부친 장례식서 “너의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하면 감형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김씨는 이를 근거로 사건의 배후에 큰아버지와 고모부가 관여돼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버지의 성추행은 말도 안 된다”며 “고모부가 그렇게 말하도록 시켰고 이복 여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지도 않았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딸을 추행한 파렴치한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손도 못 쓰고 보고만 있었던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아버지의 누명을 벗길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내내 이 생각만 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내용으로 약 10여년의 수감생활 동안 김씨는 무죄를 받기 위해 검찰의 주장을 반박해 왔고, 마침내 지난 6일 재심 1심서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재판부는 이번 재심서 범행 동기, 자수 경위와 물적 증거, 알리바이, 강압수사 여부 등을 중요하게 여겼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의 증거 수집 과정이 적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경찰 측이 내놓은 증거에 대해 “영장 없이 확보한 증거물이므로 적법 절차와 영장주의에 반한 위법 수집 증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김씨의 진술이 강요에 의한 허위 자백일 수 있다는 사실도 배제하지 않았다.

피고인의 자백을 직접 들었다는 친척과 경찰관의 진술 역시 신빙성이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당시 김씨가 보험금을 목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주장도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김씨가 보험설계사 자격증이 있었고, 보험계약 체결 2년 이내에 보험사고 발생 시 보험금 지급이 어렵다는 부분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보험금 목적?
뒤집힌 판결

또 김씨가 사건 발생 당일 친구들과 만남을 약속했던 점을 감안할 때, 사전에 범행 계획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결국 재판부는 “김씨의 진술에 일관성이 부족했고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있지만 이를 유죄로 단정할 수는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재심서 김씨의 사건을 맡은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는 “24년 동안 무죄를 주장해 온 당사자의 진실의 힘이 무죄의 강력한 증거”라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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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방부 검찰단, 내란 고발자 ‘닥치고 기소’ 막전막후

[단독] 국방부 검찰단, 내란 고발자 ‘닥치고 기소’ 막전막후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종합특검팀이 종료됐다. 12·3 내란과 관련된 수사는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마무리되지 않은 사건은 경찰 국수본으로 이첩됐다. 검찰 특수본과 특검팀의 수사에 협조한 이들이 없었다면 확인이 어려운 의혹이 산적했다. 이 중에는 정보사 공작 업무와 내란 당일 계엄군의 움직임을 알린 군인들이 있다. 대개 국방부 검찰단에 의해 재판에 넘겨졌다. 수사기관 간 판단이 다른 걸 두고 형평성에 어긋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12·3 내란에는 여러 수사기관이 뛰어들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 국방부 내란 특수본, 내란 특별검사팀(특별검사 조은석), 2차 종합특검팀(특별검사 권창영) 등이다. 복수의 군인들은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일부는 혐의가 있었다. 수사기관마다 판단이 달랐다는 게 핵심이다. 국방부 검찰단의 경우가 그렇다. 누군가의 공작이나 의도, 내란 당일 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조차 받지 않는 사례가 존재했다. 협조했는데 다른 판단 내란 특검팀과 검찰 특수본에 협조한 데 이어 재판에서 핵심 증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중 1명은 김창학 전 수도방위사령부 군사경찰단장(대령)이다. 김 전 단장은 지난 2월 국방부 검찰단에 의해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두 달 뒤인 4월에는 법령준수의무위반 및 성실의문위반으로 파면됐다. 김 전 단장은 수사기관에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의 지시로 국회로 갔던 계엄군의 움직임에 대해 진술했다. 종합특검팀이 내란의 리허설이라고 판단한 국군방첩사령부 자유의 방패(FS) 훈련과 이 전 사령관의 이례적인 지시가 담긴 녹취를 제출하기도 했다. 여기엔 내란 특검팀에 제출된 적 없는 자료도 포함됐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관련 녹취에는 방첩사의 전시 합동수사본부 훈련 과정에서 수방사 실무진들이 병력 지원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김 전 단장을 포함한 전·현직 수방사 관계자들은 “‘합수단 수사관들은 경호 대상이 아니다’ ‘합수단 경호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병력 지원 자체에 난색을 표했다”고 진술했다. 수방사 관계자들은 “전시 상황이라면 검토가 가능하지만 평시에 병력을 지원하려면 수방사 작전계획부터 변경해야 한다. 육군본부 군사경찰실과의 협의가 필요하다”고 이 전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이 전 사령관과 방첩사의 압력에 못 이긴 수방사는 당시 훈련에 군사경찰단 50명과 35특임대대 20~25명 등 70여 명 규모 병력을 지원했다. 이 같은 진술을 확보한 종합특검팀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2024년 3월 전시나 계엄 시 부대별 임무와 병력 운용 등을 규정한 군 내부 계획 문서인 ‘전시 비문’ 개정을 추진하며 기존과 다른 방식의 합수본 운영을 준비한 것으로 의심했다. 이 전 사령관은 이 과정에서 수방사 병력 지원을 추진하며 실무진의 반대에도 병력 파견을 지시한 혐의를 받았다. 종합특검팀은 두 사령관을 지난달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모든 특검에 자료 넘겨 김 전 단장을 비롯한 복수의 군 관계자들은 현재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반대로 행위가 비슷했던 조성현 대령(전 수방사 제1경비단장)은 훈장을 받았다. 종합특검팀은 지난달 말 조 대령을 조사한 후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조 대령은 합참 지휘통제2팀장 직을 수행하다 최근 인사 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조 대령이 2024년 12월3일 오후 11시51분 이 전 사령관과 통화하며 “그렇게 지금 임무를 줬고” “충성, 계속 작전하겠습니다”고 라고 언급한 녹취와 다음 날인 12월 4일 오전 1시2분 김 전 단장이 “(이진우) 사령관이 울타리를 넘어서라도 국회에 들어가라고 하는데, 그게 안 되잖아”라고 말하자 조 대령이 “우리는 그렇게 들어왔습니다” “경찰과 협조해 한적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라고 답한 내용을 확인한 종합특검팀은 조 대령이 이 전 사령관의 지시를 전달하고 국회 침투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중간 실행자’ 역할을 했다고 결론 냈다. 김 전 단장이 기소된 점도 기소 근거로 꼽혔다. 이 전 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조 대령은 예하 제2특임대대와 제35특임대대에 하달했다. 실제 35특임대대는 계엄 당시 국회 경내에 투입됐다. 종합특검팀의 판단은 내란 특검팀의 수사 결론과 배치된다. 내란 특검팀은 조 대령이 “상부의 위헌·위법적인 지시를 거부했다”며 그를 입건하지 않았다. 종합특검팀은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는 조 대령의 지시가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고 의심했다. 일부 군인들 특검에 핵심 진술·자료 제출하고 불기소 군검찰, 내란 중요임무 종사 재판 넘기고 대거 파면 종합특검팀은 조 대령이 같은 해 12월4일 새벽 1시4분 서강대교 북단에 도착한 제2특임대대 2지역대장 윤덕규 소령에게 총 세 가지를 지시했다고 봤다. ▲총기와 탄약을 차량에 두고 진압봉을 챙겨 서강대교를 넘어올 것 ▲진입 방법은 국회에 이미 들어가 있는 부대와 상의할 것 ▲임무는 국회 안에 있는 인원을 끌어내는 것 등이다. 조 대령은 “2지역대장에게 정확하게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는 말을 한 사실이 있나요”라는 종합특검팀의 질문에 “윤덕규에게 2024년 12월4일 1시20분경 다시 북으로 올라가라고 말한 것이고, 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고 진술했다. 조성현 대령 측은 문자 그대로 “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지시가 회군의 취지였다는 점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윤 소령은 “조 대령이 ‘너희가 (서강대교를) 넘어왔을 때 시민과 충돌하게 되면 크게 다친다. (서강대교 인근에) 대기하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끝까지 반대 김 전 단장과 동시에 파면된 핵심 증인 중 1명은 정성우 전 방첩사 1처장이다. 그는 지난해 6월24일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린 여 전 사령관의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정 전 처장은 검찰 특수본에서 진술했던 것처럼 “여인형 전 사령관이 당시 선관위 전산실을 통제하고 이후 민간 수사기관에 넘기며, 여의치 않으면 서버를 복사하거나 ‘떼어오라’는 3단계 지시를 내렸다”고 증언했다. 정 전 처장을 비롯해 방첩사 법무실 간부들은 여 전 사령관의 지시에 대해 기술적·법률적 검토 결과 현실적으로 이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여 전 사령관은 “제 기억으론 정성우 증인한테 서버를 복사해라, 떼오라고 이야기한 기억은 분명히 없다”며 “정성우에게 서버를 떼서 가져오는 방법이 있을까 정도를 문의했다면 모를까, 명시적으로 카피해라, 떼서 가져오라고 했을 것 같지 않다. 카피도 안 되는데 어떻게 떼서 가져오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정 전 처장은 내란 사태 당일부터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과 총 6차례 통화했다.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50분 정 전 처장은 여 전 사령관으로부터 노 전 사령관의 전화번호를 넘겨받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 전 사령관은 정 전 처장에게 “(병력이) 출발을 했느냐”라고 물었고 정 전 처장은 “이제 영외 거주자를 소집한 상황”이라고 답했다. 내란 특검팀에 협조했던 정 전 처장은 김 전 단장처럼 내란 중요임무 종사와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내란 특수본은 정 전 처장이 방첩사 인원 115명을 4개 팀으로 긴급 편성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과천·관악 청사, 선관위 수원 연수원, 여론조사 꽃 등 4곳에 출동하게 하는 등 군인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판단했다. 김 전 단장을 비롯해 복수의 군 간부들이 기소되자 내란 특검팀은 국방부 검찰단에 ‘‘사전 협의’가 있었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취지로 불만을 전했다고 한다. 군 일각에서는 정 전 처장은 아니더라도 김 전 단장과 소수의 영관급 장교들은 국방부 조사본부 차원에서 무혐의 종결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내란 특검팀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김창학 대령 외에도 여러 사람이 협조했고 그들 덕분에 수사를 할 수 있었던 게 컸다”며 “군검찰의 기소에 감 놔라 배 놔라 해서는 안 되고 해당 기관의 판단이지만 복수의 군 관계자들을 기소했을 때 ‘왜 저 사람은 기소 안 하느냐’는 등의 뒷말이 상당했다. 특검팀도 관련 내용을 알았기에 문제 제기를 했던 것”이라고 했다. 음모·모해 명확한데 혐의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가 아니지만 사실상 노 전 사령관과 여 전 사령관에게 피해를 본 사람도 있다. 박민우 전 정보사 A 여단장(예비역 준장)이다. 그는 2025년 초 국회 청문회에서 ‘노상원 수첩’에 관한 핵심 증언을 했던 인물로 주목받았다. 박 준장의 증언 후 실제 관심이 크지 않았던 노 전 사령관의 수첩의 신빙성과 중요도가 커졌다. 노 전 사령관은 정보사를 내란에 동원하려 사실상 박 준장을 축출했다. 여 전 사령관의 검찰 특수본 진술조서를 보면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박 준장의 비위, 비밀은닉, 업체 로비 등 4~5건의 중요한 제보를 받았다. 노 전 사령관이 비위 제보를 하지 않았으면 연락을 하지 않았을 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는 군형법상 군사기밀누설 및 암호 부정사용, 국가보안법·군사기밀보호법·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등 사건에 대해 수사권을 갖는다. 당시 블랙 요원 명단 유출 사건도 방첩사가 초동수사해 사건을 군검찰로 넘겼다. 여 전 사령관이 노 전 사령관의 연락을 받은 건 박 준장과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간 갈등 전후다. 박 준장이 노 전 사령관의 연락을 받은 시기와도 일치한다. 박 준장은 지난 3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갑자기 전화가 와서 ‘아직도 고집이 세냐’고 하길래 ‘그렇다’고 말한 게 전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날 내란에 동원하려 일종의 간보기 차원으로 질문했던 것 같다. 노상원에 의해 직무에서 배제됐다고 본다. 여단장이 공석이 되자 이 자리 진급을 미끼로 김봉규, 정성욱을 노상원이 조종한 것”이라고 말했다. 노상원 수첩 '핵심 증언자' 박민우, 사실상 노·여 모해로 좌천 신원식 “노상원·여인형에 의해 피해 본 것 맞다” 특검에 진술 문 전 사령관은 국방부 장관이던 신원식 전 안보실장이 2024년 8월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정보사 갈등’ 교통정리를 위한 후속 조치를 약속하고 경질될 예정이었다. 신 전 실장은 박 준장과 문 전 사령관에게 “법적 문제를 모두 취하하고 정리하라”고 했지만 문 전 사령관이 거부했다. 문 전 사령관은 유임됐고 노 전 정보사령관과 대통령실 경호처장이던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개입하면서 신 전 실장은 회의가 끝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옷을 벗었다. 오영대 전 국방부 인사기획관은 이에 관해 검찰 특수본 조사에서 “신원식 (전 국방부) 장관이 저와 원천희 국방부 정보본부장에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보직해임·정보사령관 교체 검토를 지시했으나 2024년 9월6일, 김 전 장관이 취임하면서 문 전 사령관에 대한 ‘현 보직 유지’를 지시했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였다”고 진술했다. 박 준장의 주장은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신 전 실장은 종합특검팀 조사에서 “박민우 장군은 여인형과 노상원에게 피해를 봤다. 문상호가 유임되지 않았으면 박 장군도 재판에 넘겨지거나 좌천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며 “큰일도 아니었고 그래서 둘에게 법적 문제를 모두 취하하고 정리하라고 얘기를 했던 거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