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사형수 대부’ 삼중 스님

재소자에 평생을 바치다

[일요시사 취재1팀] 최윤성 기자 = 재소자 포교와 사회 적응을 지원해 온 삼중 스님이 지난 20일 세수 82세 법랍 66년으로 원적에 들었다. 60여년간 재소자와 함께하며 사형제 폐지를 주장한 삼중 스님은 무기수, 사형수 등의 교화 활동에 힘썼다. 사형 집행 현장을 마지막까지 지키며 ‘사형수의 대부’로도 불렸던 삼중 스님은 재소자 포교에 진력했다.

60년 가까이 사형수들의 교화에 힘써 온 ‘사형수의 대부’ 삼중 스님이 지난 20일 오후, 경주의 한 병원서 만성신부전증으로 투병하다 입적했다. 세수 82세, 법랍 66년. 삼중 스님은 심부전증으로 인해 이틀에 한번 혈액투석을 하면서도 재소자들을 위한 전법·교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투병 생활
교화 활동

지난 1942년 서울 서대문형무소 뒤편 단칸방서 태어난 그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홀어머니 밑에서 피란 생활을 했다.

이후 1958년 경남 합천 해인사를 찾아 주지 청담 스님에게 “왜 중이 되려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세상서 가장 착한 사람이 되고 싶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인생을 찾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서 경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화엄사, 용연사, 자비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스님은 특히 소외된 이들의 생활 현장서 함께하는 동사섭 수행을 실천했으며 무기수, 사형수 등의 교화 활동에 힘썼다. 생전 인연을 맺은 사형수만 수백명에 이른다. 


삼중 스님은 지난 1967년부터 대구교도소를 시작으로 재소자 교화 활동을 펼쳤다. 당시 교도소는 목사와 신부들이 선교해 왔으나 스님은 전무했던 시절이었다. 대구교도소서 법사를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스님은 곧바로 달려가 법사 직을 수락하고 교화 활동을 진행했다. 

재소자들과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점점 진지해지는 표정을 보고 ‘이제 이들을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렇게 스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사형수로 이어졌다. 거물 간첩을 시작으로 사형수들에게 법문을 전하는 일을 했고, 모두 500여명의 사형수와 만났다. 

세속에서는 죄를 지어 사형이라는 중형을 받았지만, 스님의 눈에는 모두 부처로 보였다. 그는 사형수를 상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사형 집행 현장을 지켜보기도 해 ‘사형수의 대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삼중 스님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며 형벌 체계의 불평등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 2022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서 “사형이라는 제도 자체를 없애도록 국회서 법을 고쳐야 한다”면서 대신 종신형을 법정 최고형으로 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중 스님은 한국이 25년간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지만 “법무부 장관이 명령하면 집행이 재개될 수 있다”며 “제도적으로 사형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형수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고 이들이 능력 있는 변호사를 선임하기 힘들기 때문에 방어권을 충분히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힘 있는 사람들은 대단한 변호사를 선임하니 그런 허망한 일을 안 당한다”고 지적했다. 


투석 중에도 교화 활동
맺어진 인연만 수백명

사형 집행 현장을 여러 번 지켜본 삼중 스님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돈이나 권력으로 잘 마무리해서 교도소에 가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힘이 없어서 작은 실수를 하고도 엄청난 형벌을 받는 사람이 지금도 있다”며 한국 사회의 형벌 체계가 강자에게 관대하고 약자에게 가혹하다는 인식을 강조했다. 

서진 룸살롱 살인 사건의 주범 중 한 명인 서울목포파 고금석이 삼중 스님을 만나 참회한 대표적 사형수였다.

고금석은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을 참회하며 수감 생활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형 집행 전까지의 짧은 생을 나눔에 썼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의 아이들을 위해 영치금을 써달라고 보내주는가 하면, 형 집행 후에는 신체 일부를 기증하기도 했다. 

서진 룸사롱 살인 사건은 지난 1986년 서울 강남 조직폭력배 간 다툼으로 8명이 잔인하게 살해되거나 중상을 입은 사건이다. 고금석은 유도 대학 출신으로 친한 선배들을 쫓아다니다 엉겁결에 싸움에 휘말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험상궂은 외모나 잔인한 범행 수법과 달리 감옥에서는 3년간 매일 삼천배와 참선 등을 하며 교도소 내에서는 ‘선사’ ‘스님’ 등으로 불렸다. 또 자신의 영치금을 털어 산골 어린이를 돕는 선행도 베풀었다. 이런 고금석을 삼중 스님은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삼중 스님의 손에는 지금도 그가 만들어준 염주가 끼워져 있다. 지금은 오랜 시간이 지나 글씨가 닳아서 잘 안 보이지만 염주에는 고금석이 평소 좋아하던 경구들이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삼중 스님은 고금석이 사형수로서는 기록에 남을 만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독실한 불자로 어려운 재소자를 도와가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다는 것이다.

삼중 스님은 “지금까지도 여생을 이렇게 보낸 사형수는 본 적이 없다”며 “자신의 죄를 받아들였고, 사소해도 타인을 위한 일이라면 스스로 나서고 나누고 싶어 했다”고 회고했다. 

삼중 스님은 한국인 차별에 항거해 야쿠자를 사살하고 일본 교도소서 무기수로 복역 중이던 재일동포 김희로의 석방 운동을 펼쳐, 석방과 귀국에 기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1980년대부터 일본 교도소서 교화 활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서 한국인 차별에 격분해 일본인 야쿠자를 살해한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인 재일교포 김희로를 만나 사정을 듣고 그의 구명운동을 펼쳤다. 

사형제 폐지
재소자 구제


삼중 스님의 10년간의 구명운동으로 김희로는 지난 1999년 석방돼 국내로 돌아왔다. 또 일본서 교화 활동을 하는 스님들과 교류하며 200여차례 일본을 오가며 한일 관계의 가교 역할을 해오기도 했다. 

김희로 사건은 지난 1968년 2월 일본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의 클럽 밍크스서 터졌다. 야쿠자는 빌려 쓴 돈을 갚으라며 협박한 뒤 김희로에게 “조센징, 더러운 돼지새끼”라며 욕설을 퍼부었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서 살아오면서 온갖 차별과 모멸을 받아온 그는 이 한마디에 큰 분노를 느꼈다. 김희로는 갖고 있던 엽총으로 시즈오카현 야쿠자 두목과 그 부하를 사살했다. 

살해 후 그는 현장서 45km 떨어진 시즈오카현 스마타쿄의 후지노미 온천여관으로 달아나 여관 주인과 투숙객 13명을 인질로 잡고 장장 88시간의 인질극을 벌였다. 김희로는 이를 재일교포의 차별 문제를 부각하는 기회로 최대한 활용 했다. 당시 사건은 일본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그의 인질극과 주장이 TV와 신문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됐으며 쉬쉬하던 재일교포의 인권과 차별 문제가 수면 위로 본격적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그의 투쟁은 사건 나흘째에 기자로 위장한 수사관에 의해 전격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체포 당시 김희로는 혀를 깨물어 자결을 시도했지만, 실패해 구마모토 형무소서 24년을 복역했다. 


삼중 스님이 교화를 위해 일본을 드나들던 중 그의 절절한 사연을 듣고 발벗고 석방 운동에 나섰다.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김희로의 석방 운동을 시작했다. 

1990년 10만명 서명을 시작으로 김희로의 가석방을 위한 서명운동 결과를 모아 세 차례 일본 규슈 갱생보호위원회와 일본 법무성에 보냈다. 수만명의 서명이 담긴 석방 청원서는 효력이 있었다. 

김희로의 석방을 구체화한 것은 1998년부터였다. 삼중 스님은 일본 법무성이 요구하는 신원인수보증서를 구마모토 형무소에 제출한 데 이어 김희로로부터 고국행 의사를 구두로 받아냈다. 이 같은 김희로의 귀국 의사는 이후 석방 절차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후 김희로는 1999년 6월7일과 7월16일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에 출옥 후 한국으로 가되 일본을 비방하지 않으며 오로지 삼중 스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제출했고, 이를 검토한 일본 정부가 석방을 최종 결정함으로써 그의 ‘31년 전쟁’이 일단락됐다. 

삼중 스님은 1980년대 초 대구 시립희망원서 장애인과 부랑자들을 돌보던 최소피아 수녀에게도 부처님오신날 거리서 모금한 성금 40만원을 전달하는 등 종교의 벽을 넘는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서로 다른 종교에 몸담았지만 끊어질 듯 말 듯했던 두 사람의 인연은 40년 가까이 이어졌다. 

삼중 스님이 최소피아 수녀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80년대 초다. 그는 시립희망원서 일하는 최소피아 수녀의 이야기를 접하고서 그해 부처님오신날 거리서 모금한 성금 40만원을 전달했다.

불심으로 모은 돈을 왜 다른 종교에 보내느냐는 말도 나왔지만 좋은 일에 보태는 것을 가리지 말자는 삼중 스님 의견에 뒷말은 없었다. 

그렇게 둘의 인연은 시작됐다. 스님은 최소피아 수녀를 만나러 희망원을 종종 찾았는데 누군가 피부를 잡아 뜯어놓은 듯 그의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인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억울한 사연
도움의 손길

당시 희망원 시설에는 지체·정신 장애를 함께 지닌 중복 장애인들이 많았다. 주사 하나 놓기 쉽지 않은 상황서 얼굴이 긁히고 잡히는 일이 많아지며 상처가 생겼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삼중 스님은 “얼굴에 그렇게 상처를 입고서도 또다시 주사를 놓으러 방으로 향하는 수녀님을 보니 내가 정말 정신적으로 깊이 반했다”고 떠올렸다. 

삼중 스님은 교도소 재소자 교화 일을 하며 언론을 통해 얼굴이 많이 알려졌지만 최소피아 수녀는 희망원 봉사를 하는 동안에도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한번은 삼중 스님이 언론사 기자를 불교청년회 회원으로 속이고 최소피아 수녀를 취재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가 기사가 크게 퍼지는 바람에 둘 사이가 급격히 틀어져 버렸다. 선의로 도와주려 했던 일이 큰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최소피아 수녀는 자신이 한 일은 하나님에게 보고하는 것이지,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것은 아니라며 스님을 나무랐다고 한다.

당시 삼중 스님은 “수녀님이 화를 많이 냈다”며 “최소피아 수녀도 이런 일이 있고 나서 10년가량 나와 거리를 뒀다”고 말했다. 

연락해도 외면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삼중 스님이 시설 설립에 어려움을 겪던 최소피아 수녀에 적십자사를 통해 도움을 받도록 연결해 주면서 마음을 되돌릴 수 있었다고 한다. 

삼중 스님은 안중근 의사 유해 찾기 운동과 유묵을 찾는 데도 헌신했다. 아쉽게도 수십차례 중국을 방문했으나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본서 안중근 의사의 유묵 ‘경천’을 찾아내 이를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전했으며, 현재는 이탈리아 로마 교황청 바티칸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어려운 사람 그냥 못 지나쳐”
서진 룸살롱 고금석 참회 도움

삼중 스님은 살아생전 두 개의 염주를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구명운동으로 풀려난 최씨가 과거 사형수 시절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염원을 담은 염주고, 다른 하나는 앞서 언급한 고금석이 생전에 금강경 법문을 새긴 것이다. 두 사형수의 삶과 죽음이 스며 있다. 

삼중 스님과 최씨의 인연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최씨는 3인조 은행 강도살인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서울구치소에 복역 중이었다. 이미 대법원서 사형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형수 법문을 해온 삼중 스님은 그를 만났다. 최씨의 손에는 굵은 알의 염주가 들려 있었는데,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바람이 새겨져 있었다.

삼중 스님은 사형수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다는 게 의아해 물어봤다고 한다. 최씨가 의연한 어조로 “스님, 저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고 답하자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모르게 두 명의 공범을 면회했다. 무기수였던 한 명의 공범은 이미 숨진 뒤였다. 나머지 한 명은 강도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했다. 

이 공범은 본인의 처지보다는 오히려 가족이 있는 최씨를 걱정했다고 한다. 이후 삼중 스님은 최씨를 믿고 구명운동을 시작했다. 변호사회 등의 도움으로 사건이 조작됐다는 의구심이 커졌다. 범행 현장은 숨진 피해자가 흘린 피투성이였지만, 최씨 의류에서는 혈흔은 발견되지 않았다.

옷을 태우거나 버린 정황도 찾지 못했다. 

사건 당일 최씨는 얼굴 상처로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범행 현장 답사를 온 것으로 의심되는 또 다른 3인조 중 붕대를 감은 이를 봤다는 직원은 없었다. 숨진 피해자의 상처도 설명하지 못했다. 

결국 최씨는 경찰의 고문에 허위 자백을 했음이 드러났다. 각계의 노력으로 최씨는 사형수서 무기수로 감형됐고, 결국 19년 만에 특사로 풀려나기에 이른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최씨는 복역생활에도 서예 등을 익혀 교정작품전에 출전, 입상하기도 했다. 최씨는 석방 후 자신을 고문한 형사를 찾아가 용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삼중 스님을 40년 가까이 스승으로 모시고 근래에는 주 3회 투석 치료 때 병원에 동행하기도 한 재가자는 “어려운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스님이셨다”며 “억울한 사형수도 여러 명 살리셨다”고 삼중 스님의 활동을 회고했다. 그러면서 “너무 존경했고 이런 분을 만난 것이 나에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가르침 전파
약자 대변인

삼중 스님은 <길> <가난이 죄는 아닐진대 나에게 죄가 되어 죽습니다> <사형수 어머니들의 통곡> <그대 텅빈 마음 무엇을 채우랴> <사형수들이 보내온 편지> <사형수의 눈물을 따라 어머니의 사랑을 따라> 등 여러 책을 남기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세상에 전했다. 약자를 보살피는 여러 활동 등으로 대한불교조계종 종정표창, 대한적십자사 박애상 금상, 대통령 표창, 국민훈장 목련장 등을 수상했다. 

<yuncastl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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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아웃’ 김병기 수난 시대

‘투아웃’ 김병기 수난 시대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지난 6월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후보가 서영교 의원을 누르고 22대 더불어민주당 2기 원내대표로 당선됐다. 김 원내대표는 내란 종식과 헌정 질서 회복, 권력기관 개혁을 외쳤다. 이로부터 두 달 뒤인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청래 신임 당 대표가 선출됐다. 이재명정부 첫 여당 지도부가 제모습을 갖추면서 안정 궤도에 접어드는 듯했다. 약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와 정청래 대표의 첫 갈등이 불거졌다. 정 대표가 지난 9월11일 여야 원내 지도부가 합의한 3대 특검법 합의안에 대해 “협상안을 수용할 수 없고, 지도부 뜻과 달라 재협상을 지시했다”고 밝히면서다. 불안불안 이인삼각 특검법 개정안의 핵심인 기간 연장을 제외한 채 합의해 특검법의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게 정 대표의 입장이다. 김 원내대표는 곧바로 반박했다. 원내 지도부와의 긴급회의를 거듭하던 그는 밖에서 기다리던 취재진을 향해 “정청래한테 공개 사과하라고 그래!”라며 소리쳤다. 이후 당 안팎에서 원성이 쏟아지자 김 원내대표는 오히려 취재진을 향해 “왜 자꾸 합의라고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는 “(합의가 아니라) 1차로 논의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의원총회에서 추인을 받아야 한다”며 “수사 기간과 규모에 다른 의견에 있으면 그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제 총론만 (발표)하고 나갔는데 원내수석들이 각론에서 너무 많이 나갔다. 마치 합의가 된 것처럼 보도됐다”며 합의문이 아니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두 사람 간의 갈등은 사흘 만인 13일 봉합됐다. 김 원내대표는 자신의 SNS에 “심려 끼쳐서 죄송하다. 심기일전해 내란 종식과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위해 분골쇄신하겠다”고 게시글을 작성했다. 이렇게 냉전은 끝났지만 지지층의 비난은 거셌다. 김 원내대표를 향해 ‘수박’ ‘변절자’ 등 원색적인 비판을 쏟아내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문재인정부 당시 민주당 대표를 지냈지만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의 손을 들어준 이낙연 전 국무총리의 행보와 비교하는가 하면 ‘역시 서영교 의원을 뽑아야 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지지층의 미묘한 기류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에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검사 징계안을 놓고 두 번째 갈등이 터졌다. 법사위 소속 범여권 의원들이 대장동 항소 포기에 반발한 검사장 18명을 고발한다고 밝힌 데 대해 “협의가 없었다”고 선을 그으면서 개혁 의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 것이다. 지난달 19일 법사위 소속 민주당·조국혁신당·무소속 등 범여권 의원들은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이의를 제기한 검사장 18명을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발했다. 여당 간사인 민주당 김용민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 조직 기강과 헌정 질서를 무너뜨린 검사장 18명의 집단 항명 행위에 대해서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다”고 밝혔다. ‘당심’이 뽑은 정, ‘의심’이 뽑은 김 연일 삐거덕…벌써 이재명 리더십 부재? 김 원내대표는 고발 소식이 알려진 뒤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금 봤다”며 “그렇게 민감한 것은 정교하고 일사불란하게 해야 한다. 협의를 좀 해야 했다”고 당혹한 기색을 보였다. 이어 “뒷감당은 거기서 해야 할 것”이라며 고발장을 제출한 법사위 쪽에 책임을 물었다. 법사위의 검사장 고발은 원내 지도부뿐 아니라 당 지도부와도 사전 논의가 없었다는 게 김 원내대표의 설명이다. 하지만 김용민 의원은 검사장 고발 문제에 대해 “당의 기조와 흐름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 저희가 고발장을 그날 제출하는 기자회견을 한 것뿐, (원내 지도부와) 소통이 없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김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원내(지도부)와 소통할 때 이 문제를 법사위는 고발할 예정이라는 걸 얘기했다”며 “원내가 많은 사안을 다루다 보니까 (고발 문제를) 진지하게 듣거나 기억하지 못하셨을 가능성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저희가 더 적극적으로 설명을 해야 했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한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면서도 “소통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당시 한 여권 관계자는 “당 대표가 당 전체를 이끄는 일이라면 원내대표는 말 그대로 원내 상황을 조율하고 총괄하는 위치인데, 오히려 갈등을 키우고 있으니 (민주당) 의원들도 혼란스러운 것”이라며 “이런 상황이 조금씩 노출되면서 지지층까지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당과 원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뉜 민주당의 배경에는 정 대표와 김 원내대표의 선출 방식이 거론된다. 강경 지지층이 밀어 올린 정 대표와 달리 김 원내대표는 당내 의원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당시 원내에 친명(친 이재명)계가 다수 포진했던 만큼 김 원내대표 의중은 ‘명심(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에 가깝다. 더 강하고 더 빠르게 개혁을 외치는 정 대표의 지지층과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강성 지지층에게 김 원내대표는 이미 ‘투아웃’이다. 여기에 정 대표의 공약이었던 대의원과 권리당원 간 표 반영 비율을 ‘1대 1’로 변경하는 당헌·당규 개정이 부결되면서 지지층의 반발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밑서 치솟고 위서 누르고 그동안 민주당은 당 대표나 최고위원 등 선출 시 대의원과 권리당원 투표 반영 비율을 20:1 미만으로 규정해 왔다. ‘동등한 1인1표제’는 정 대표가 당 대표 경선 당시 공약으로 내건 정책 중 하나로 “나라의 선거에서 국민 누구나 1인1표를 행사하듯 당의 선거에서도 누구나 1인1표를 행사해야 한다”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졸속 추진’이라는 비판이 나오면서 정 대표와 김 원내대표 두 사람 모두 시험대에 올랐다. 정 대표 쪽에선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는 ‘이재명 대통령이 당 대표였던 때부터 추진됐던 개혁의 실현’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각에서 ‘시기’와 ‘방법’을 문제 삼는 등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권리당원의 힘으로 대표직에 오른 지 3개월이 조금 지난 상황에서 1인1표제를 추진하자 친명계 조직인 ‘더민주혁신회의’와 일부 당원 등을 중심으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1인1표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최고위원은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논란이 커지고 있는데 이는 찬반의 문제라기보다 절차의 정당성·민주성 확보, 그리고 취약 지역(영남 등)에 대한 전략적 규제와 과소 대표성이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친명계인 윤종군 의원도 SNS를 통해 “당원주권 강화 방향에 동의한다”면서도 “전 지역 권리당원 표를 1인1표로 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다. TK(대구·경북) 등 영남지역 당원 자긍심 저하, 당세 확장 장애 조성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 상황과 관련해서 한 정치권 관계자는 “당 대표는 당 컨트롤이 안 되고, 원내대표는 의원들 컨트롤이 안 되는 상황”이라며 “지난 지도부(이재명 당 대표, 박찬대 원내대표)가 워낙 합이 좋았고 당 대표 리더십도 강했기 때문에 더욱 비교된다. 중심축이 없으니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반 발자국만 앞서도 자기 정치라는 뒷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봤다. 결국 정 대표의 1인1표제는 중앙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5일 치러진 투표 결과 중앙위원 총 593명 중 373명이 투표에 참여해 찬성 277표, 반대 102표로 과반이 찬성하지 않아 부결된 것이다. 남은 고비 얼마나? 원내 일각에서는 무리하게 밀어붙인 ‘정청래발 개혁’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김 원내대표의 고충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대통령실에서조차 몇 차례 속도 조절을 주문했지만, 지지층을 등에 업은 정 대표는 ‘개혁 골든 타임’을 필두로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그런 김 원내대표가 내란전담재판부 추진을 못 박으면서 ‘쓰리아웃’은 겨우 면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내란전담재판부는 국민의 명령이기 때문에 당연히 설치한다”며 “여기에 대해 더는 설왕설래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내란 사범에 대한 ‘사면권 제한’ 조치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원내대표는 “시간이 지나면 내란 사범이 사면돼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도록 내란 사범에 대한 사면권을 제한하는 법안도 적극 관철하겠다”며 “내란 사범을 사면하려면 국회 동의를 받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만일 윤석열 전 대통령 등 내란 주요 피의자에 대한 내란죄가 확정될 경우 사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로부터 약 일주일 뒤인 지난 4일 범여권의 주도로 ‘내란전담재판부(내란특별재판부)’ 설치법이 법사위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법사위는 해당 법안을 이달 중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며 속도를 냈다. 해당 재판부는 12·3 내란 사태와 관련해 윤 전 대통령 등이 연루된 내란 사건 전담을 골자로 한다. 내란전담재판부 판사 및 영장전담법관 추천위원회는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법무부 장관과 판사회의에서 추천한 총 9명으로 구성된다. 내란전담재판부로 성난 지지층 달래도… 위헌 폭탄 껴안고 걸어가는 ‘불’꽃길 구성을 마친 추천위원회는 2주 안에 영장전담법관과 전담재판부를 맡을 판사 후보자를 각각 정원의 2배수로 추천해야 하며 최종 임명은 대법원장의 몫이다. 또 형사소송법상 피고인의 구속기간은 최대 6개월이지만 특별법에서는 내란·외환 관련 범죄에 대해 구속기간을 1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국민의힘은 위헌 소지가 있다며 반발했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은 “한마디로 판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골라 쓰겠다는 ‘지귀연 판사 바꾸자는 법’”이라며 “사법부의 무작위 배당 원칙을 위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미 재판하는 사건도 뺏어서 다른 판사한테 맡기겠다는 삼권분립의 침해”라고 지적했다. 이날 법사위에 출석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 역시 “1987년 헌법 아래 누렸던 삼권분립, 사법부 독립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수 있다”며 “내란특별재판부법에 여러 가지 위헌 요소가 있다”고 반대했다. 천 처장은 “헌법재판소가 결국 이 법안에 대해 위헌 심판을 맡게 될 텐데 헌재소장이 추천권에 관여한다면 심판이 선수 역할을 하게 돼 룰에 근본적으로 모순이 생긴다”며 “헌법재판소장과 직·간접적 관계에 있는 헌법재판관들이 재판(위헌심판)을 맡을 수 없게 된다면 ‘내란특별헌법재판부’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이 예정하고 있는 바”라고 설명했다. 내란전담재판부 추진으로 개혁 동력을 얻었지만 후폭풍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위헌 가능성을 지닌 사법개혁을 진행하는 건 위험요소가 다분할뿐더러 원내대표로서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중도층 민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다. 한 민주당 출신 의원은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지금 민주당은 집단 의존 증상이 있다. 지난 총선에서 이재명 당시 대표에게 충성하는 정치인만 대거 유입되다 보니 여당이 된 지금 제대로 갈피를 못 잡는 것”이라며 “2차 종합 특검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내란전담재판부를 어떻게 꾸릴 것인지, 조희대 대법원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서 국민의 피로도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종합적인 전략을 짤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175석 버거웠나 그러면서 “내란전담재판부가 설치되면 국민의힘이 위헌을 걸 것이고, 법원에서 위헌 소지가 있다고 보는 만큼 위험성도 크다. 하지만 헌재에서 위헌 판결을 내리지 못하게 하려면 민심을 우리 편으로 끌고 와야 하는, 법률 싸움이 아닌 고도의 민심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원팀’ 원내대표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단에 때아닌 ‘내 편 봐주기’ 논란이 일었다. 민주당 문진석 당 원내운영 수석 부대표가 인사청탁 의혹에 휩싸였지만 ‘엄중 경고’에 그치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앞서 지난 2일 문 수석이 본회의장에서 김남국 대통령실 디지털소통비서관에게 문자로 특정 인물을 거론하며 “내가 추천하면 강훈식 실장이 반대할 거니까 아우가 추천해줘”라고 보냈고, 이에 김 비서관이 “제가 (강)훈식이 형이랑 (김)현지 누나한테 추천할게요”라고 답한 것이 언론에 포착됐다. 인사 청탁 논란이 불거지자 문 수석은 “부적절한 처신에 송구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국민의힘은 ‘김현지 실세’ 프레임을 다시 띄우며 이재명정부를 압박했다. 김 원내대표의 엄중 경고로 논란을 수습하려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강성 지지층은 “과감히 내쳐야 한다”며 더 강한 징계를 요구하고 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