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101세에 나오는 정명석

“손바닥으로 하늘이 가려지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로 많은 공분을 산 정명석이 징역 23년을 선고받았다. 선고대로라면 현재 78세인 정명석은 101세에 출소한다. <일요시사>는 수년간 계속된 정명석의 성범죄 스캔들을 되짚어봤다.

기독교복음선교회(이하 JMS) 총재 정명석이 징역 23년의 철퇴를 맞았다. 신도를 성폭행하고 강제추행한 혐의다. 지난 2022년 11월 첫 재판이 열린 뒤 1년여 만에 선고가 이뤄졌다.

2023년 12월22일 대전지법 제12형사부(부장판사 나상훈)는 준강간·준유사강간·준강제추행·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정명석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했다. 이어 재판부는 신상정보 공개 및 고지 10년, 아동·청소년 및 장애인 관련 기관 취업제한 10년,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명령 15년 등을 명령했다.

1년 만에 선고
2046년 출소

이는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양형 기준(징역 4년∼징역 19년3개월)을 넘어선 형량이다.

정씨 측은 재판 과정서 “피해자들의 진술이 현장에 있던 다른 신도들의 주장과 배치돼 신빙성이 없고 항거 불능에 대해서도 메시아라 칭한 적이 없다. 현장 녹음파일 또한 사본은 원본이 삭제돼 원본과의 동일성이 확인되지 않아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제출된 녹음파일이 사본이며 원본은 삭제돼 사본과 원본의 동일성이 확인되지 않아 증거능력이 없고 피해자들 진술 역시 현장에 있던 다른 신도들과 진술이 배치돼 신빙성이 없으며 항거불능 상태가 아니었고 자신을 스스로 메시아라고 칭하지도 않았고 주장하고 있다”며 “다만 증거로 제출된 사본 녹음파일 4개 중 3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와 법원 재생 청취 결과 피해자와 참고인 수사기관 진술 및 증언 등을 토대로 원본과 동일성이 입증돼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이어 “1시간40분에 가까운 내용임에도 내용상 맥락이 자연스럽고 끊기거나 위화감이 드는 부분이 없어 편집 흔적이 없다고 판단했으며 피고인 측에서 어느 부분이 위작이고 원래 무슨 내용이었는지 제시하지 못했다”며 “피해자들의 진술 역시 고소 이전부터 일관되고 구체적이며 생생하며 탈퇴한 과거 선교회 간부 등 진술을 토대로 보면 피해자들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재판부는 “정씨가 스스로를 재림 예수 메시아로 칭하고 절대적인 지위를 갖고 있던 사실이 인정되며 선교회 교리 내용 등 관계에 비춰보면 피해자들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는 상태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부연했다.

신도 2명이 자신을 허위 고소했다며 맞고소해 추가된 무고 혐의도 인정됐다.

재판부는 “무고 부분을 보면 피고인의 성범죄 사실이 모두 인정됨에 따라 피고인을 고소한 피해자들을 무고라고 볼 수 없고 이러한 것을 오히려 역으로 고소한 것은 허위 사실을 토대로 고소한 행위로 평가할 수 있다”며 “나이가 고령이지만 종교적 약자며 항거불능 상태인 피해자들을 상대로 상습적인 성폭행 범죄를 저질렀고 심지어 23건 범죄 중 16건은 누범 기간 중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여성신도들과 쌓인 인적 신뢰감을 이용하거나 심신장애 상태를 이용해 범행을 저질러 죄질이 나쁘고 동종범죄로 10년 동안 수감돼있다가 나와 또다시 범행을 저질렀다”며 “현장 녹음파일이 있음에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이 이 사건 범행을 모두 부인하며 피해자들을 인신공격하고 무고죄로 고소까지 하는 등 사건 범행을 반성하지 않고 기피 신청권을 남용해 재판을 지연시키고 정당한 형사사법권의 행사를 방해하는 등 정황도 나쁘다”고 강조했다.

정씨는 선고 직후 사실오인과 법리 오해, 양형부당 등을 이유로 항소했다.


정씨의 이번 범죄는 2022년 3월 홍콩계 영국인인 메이플 잉 퉁 후엔(이하 메이플)의 폭로로 불거졌다. 당시 메이플은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정씨를 고발했다. 기자회견서 외국 국적인 피해자들은 정씨가 출소한 뒤 수차례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여신도 성폭행 징역 23년 선고 
대법원 양형 기준 넘어선 형량

메이플씨는 2011년 신도가 된 뒤 정씨를 재림 예수라고 믿게 돼 한국에 들어왔다고 밝혔다. 또 2018년부터 충남 금산에 있는 JMS 수련원서 생활하며 정씨로부터 성추행 7회, 유사간음 6회, 성폭행 2회 등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피해를 당했을 때 이상하고 혼란스러웠지만 ‘믿음의 시험’이라며 나 자신을 설득했다”며 “지인들의 조언으로 정신이 들었다. 더 이상 나 같은 피해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했다.

호주 국적인 다른 피해자 A씨도 영상을 통해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2014년 신도가 됐다는 A씨는 정씨 출소에 맞춰 한국에 들어왔다가 2018년 7월 처음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는 호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으나 정씨의 압박 등으로 2019년 12월까지 한국에 머물렀고 이 기간에 총 5차례에 걸쳐 준강제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메이플은 JMS의 수법에 대해서도 폭로했다. 그는 “(JMS는)너는 하나님의 신부라 하며 모든 시간과 사랑을 성령, 성자, 성부 하나님께 바치게 한다. 삼위일체가 이 땅에 보낸 재림주 정명석에게 모든 걸 바치면 성부, 성자, 성령께 하는 것과 똑같다고 정명석을 메시아로 섬기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천주교 수녀처럼 하나님만을 위해 살고 결혼하지 않는 ‘스타’를 뽑는다. 스타는 하나님과 결혼한 셈이고 메시아 정명석과 결혼한 셈”이라며 “스타를 외모로 뽑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뽑는다고 하지만 결국 키 크고 예쁘고 젊은 여자를 뽑는 게 대부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JMS는)그런 스타를 편지와 돈 등 다양한 방식으로 특별히 관리하며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는 것처럼 관리한다. 목회자들은 스타들에게 다른 이성을 쳐다보지 말고 정씨를 더 사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고 정씨와 편지로 소통하라고 하며 정성껏 정씨를 사랑하게끔 한다”고 폭로했다.

이들의 폭로와 추가 고소로 인해 정씨는 지난 2022년 10월 다시 구속됐다. 

해당 내용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신이 배신한 사람들>에 적나라하게 방송되며 더욱 관심을 받았다. JMS는 <나는 신이다> 방영을 막아달라는 방송금지 가처분을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서울서부지법 민사합의21부는 “넷플릭스 등은 상당한 분량의 객관적, 주관적 자료를 수집해 이를 근거로 프로그램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며 “JMS 측이 제출한 자료만으로는 프로그램 중 JMS와 관련된 주요 내용이 진실이 아니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지금도
혐의 부인

해당 다큐멘터리의 공익성에 대해선 “JMS 교주는 과거에도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실이 있는 공적 인물”이라며 “프로그램 내용이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항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검·경의 수사가 진행되며 정씨의 범행이 JMS의 조직적인 성범죄임이 드러났다. 정씨의 범행을 도운 간부 5명에게도 징역형이 선고됐다. 

대전지법 제12형사부(부장판사 나상훈)는 JMS 2인자 김지선(가명 정조은)씨에게 징역 7년과 8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와 10년간 아동 관련 장애인복지시설 취업제한을 명령했다. 김씨와 함께 정명석의 범행에 가담한 JMS 간부 5명에게는 징역 3년~6개월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과거 단순히 정명석의 범행 현장에 머무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범행에 직접 가담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피고인이 정명석의 범행에 관여한 것에 대해 어떠한 반성도 없어 행위에 대한 비난 가능성이 크다”고 판시했다.

또 “피고인은 정명석이 과거 피해자들의 무고로 억울하게 수감됐다고 설파하는 등 선교회 내에서 정명석 신격화에 앞장서 정명석이(이전 성범죄로) 출소한 후에도 여신도를 상대로 한 범행 여건을 제공했다”며 “선교회 대외협력국을 통해 피해자가 정명석을 고소한 점에 대해 언론이나 수사기관에 알리는 것을 저지하도록 적극적으로 회유하고 협박하는 등 범행 후 정황도 좋지 않다”며 이같이 양형했다.


이 밖에 피고인 5명 중 징역 3년을 선고받은 김모씨에 대해 “피고인은 정명석의 성범죄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거나 성폭행 피해자 요구에 따라 데려다준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며 “그러나 공소 사실과 마찬가지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인정되고 피고인과 정명석 등 사이의 통화녹취록 등 증거가 있다. 피고인이 오랜 기간 성범죄에 부역한 바 있고 이 사건 범행 외에도 피해자를 회유한 정황이 있어 동조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판시했다.

엄모씨에 대해선 “정명석의 범행을 방조한 행태가 비교적 적극적임에도 모순되는 증거로 반성하지 않고 있고 용서받지도 못했다”며 “피고인 범행으로 피해자가 준유사강간 등 피해를 입어 범행 결과가 중하다”고 2년6개월을 선고했다.

계속된
스캔들

또 다른 김모씨에게는 “피고인과 정명석의 통화 녹음을 보면 피고인이 주사랑교회서 목회활동을 하며 어린 신도들이 정명석과 만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한 정황이 있어 죄질이 나쁘다”며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한 차모씨 대해선 “허위진술을 일관되게 하고 있고 범행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며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해 죄질이 가볍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 밖에 윤모씨에겐 “범행에 관여한 정도가 가볍게 보기 어렵고 범행을 반성하지 않으며 피해자로부터 용서받지 못해 죄질이 가볍다고 볼 수 없다”며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정씨는 1999년부터 대만으로 도주한 뒤 홍콩과 중국을 전전하며 도피 행각을 벌였다. 2003년에는 한국 검찰의 요청으로 인터폴 적색 수배 대상에 올랐으며 2007년 중국 공안에 체포돼 2008년 한국으로 강제 송환됐다.

당시 그는 대법원 항소심서 혐의가 확정돼 10년간 복역했다.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준강간·강제추행·준강제추행·강간치상 죄 등이다. 다만 대법원서 유죄를 확정한 사건은 한국서 저지른 성폭력이 아니라 그가 해외 도피 도중 가한 성폭력이었다.

판결문에 등장하는 피해자는 5명이었다. 이들 중 자매였던 B씨와 C씨는 2003년경 정씨가 두 사람을 홍콩으로 불렀다. 자매는 부모도 속이고 출국했고 정씨는 그의 권위를 이용해 이들은 자기 성욕을 해소했다.

정씨는 두 사람을 차례로 성폭행했다. 재판 당시 정씨는 두 사람을 홍콩으로 불러 방에서 안마를 받고 양 옆에서 팔베개하고 눕도록 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강간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다른 피해자 D씨는 2006년 4월 중국서 정씨를 만났다. 정씨는 이때 D씨와 단둘이 목욕탕으로 가 속옷을 벗으라고 강요하고 강제로 성관계를 가졌다.

또 다른 고소인 E씨는 정씨가 2001년 말레이시아에 머무를 당시 추행을 당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정씨는 의학박사 자격증도 있고 하나님을 통해 부인과 검사를 해준다며 E씨를 추행했다. 

조직적인 성범죄 드러나
JMS 간부도 징역형 선고

1심 재판부는 피해자 B씨, C씨, D씨에게 가한 성폭력만 인정하며 징역 6년을 선고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E씨의 피해 역시 인정하며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항소심의 판결이 옳다며 징역 10년을 확정했다.

정씨는 일본서도 성범죄를 저질렀다. 2000년대 초 일본 오사카나 지바의 측근 자택에 머무르며 하루에 2~3명서 10명까지 여학생들을 매일 같이 불러 ‘건강체크’의 명목하에 성적인 행위를 반복했다고 한다.

측근들은 여성 신도들에게 교주가 만나고 싶어 한다며 은신처로 불렀고 정씨의 범행 이후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식으로 강하게 입막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중 한 명인 F씨는 “성폭행당하고 있을 때는 무엇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머릿속이 혼란해 교주가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현지 언론서 토로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일본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가 나온 이후 대학가엔 ‘위험한 종교단체 주의’라는 포스터가 대학 캠퍼스 곳곳에 붙기도 했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JMS 교회들은 문을 닫고 잠적했다.

정씨는 대전지방법원 형사12부에 항소장을 제출한 상태다. 정씨 측 변호인은 “피해자들을 성폭행 또는 추행한 사실이 없다“며 “본인을 재림예수 등 신적인 존재라고 자칭한 사실도 없고 피해자들이 항거불능 상태도 아니었다”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앞서 2009년 대법원 판결에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했으며 신도들은 이를 철저히 믿었다. 당시 JMS가 제작한 팸플릿에는 ‘언론과 방송이 조성한 여론의 영향을 받은 종교 편향적 재판, 증거 없는 자유 심증주의에 의한 편파적 판결’ ‘유죄의 결정적 증거는 없고 무죄를 입증할 증거는 철저히 배제된 형사재판의 기본원칙이 무시된 결과’라고 적혀있다.

최근 상황도 별반 다를 바 없다. 1심 선고 직후 방청하던 JMS 신도들은 울음을 터뜨리거나 강하게 항의하며 반발했다. 이들은 정씨의 범행을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방영 이후 국민적 관심이 커지면서 여론 재판에 떠밀렸다고 주장했다.

JMS 교인협의회는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명석 목사는 증거에 의한 공정한 재판이 아닌 여론재판을 받았다”면서 “넷플릭스에 방영된 음성은 여성 신음을 짜깁기하고 허위로 자막을 내보낸 것으로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JMS 피해자 모임 ‘엑소더스’의 김도형 단국대 교수는 이제 시작이라는 입장이다. 이 교수는 “이제 겨우 1심 판결이 나온 것”이라며 “추가로 고소한 피해자가 18명 더 있다”고 했다. 이어 “18명 중 미성년자 시절에 피해를 본 3명이 고소한 사건이 최근 검찰로 송치됐는데, 이 사건도 조만간 기소돼 1심 재판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8명 더...
추가 고소

그러면서 “추가 고소인 중 1명은 부모님 모두 JMS 신도”라며 “그녀가 부모에게 피해 사실을 말했다가 오히려 어머니께 혼났다고 한다”고 했다. 이어 “그 어머니 말이 ‘나도 젊은 시절 (정명석)선생님이 건강검진을 해주셨는데 넌 왜 그걸 못 받아들이고 평지풍파를 일으키려고 하냐’라고 말했다더라”며 “이런 말 하는 부모를 이해할 수 있는가? 거리에 나와 시위하는 (JMS) 사람 중에는 이런 신도가 많다”고 덧붙였다.

<kcj5121@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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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악’ 쿠팡 개인정보 유출 막전막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사회상을 반영하는 표현으로 ‘○○ 공화국’을 쓰곤 한다. OECD 국가 중 극단적 선택률 1위를 놓치지 않는 우리나라를 ‘자O 공화국’이라고 하거나 연예인에게 지나치게 높은 관심을 보이는 모습에 ‘연예인 공화국’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최근 또 하나의 공화국이 세워졌다. 바로 ‘쿠팡 공화국’이다.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창업자 김범석 의장이 제시한 쿠팡의 비전이자 슬로건이다. 국민의 일상에 깊숙하게 파고들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실제 쿠팡은 전 국민의 생활을 차례로 잠식했다. ‘로켓배송’을 무기로 이커머스 시장을 장악했고 ‘쿠팡이츠’로 배달업계를 흔들었다. ‘쿠팡플레이’로 OTT 업계에도 진출했다. 생태계 잠식 대체재 없다 쿠팡의 위력은 이번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서 더욱 뚜렷하게 증명됐다. 지난달 29~30일 쿠팡 이용자에게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가 발송됐다. 문자메시지에 따르면 유출된 정보는 이름, 이메일 주소, 배송지 주소록, 주문 정보 등이다. 쿠팡은 결제 정보와 로그인 관련 정보는 안전하다고 설명했다. 이용자에게 문자메시지가 도착한 시기가 주말이어서 혼란은 배가 됐다. 특히 배송 과정에서의 편의를 위해 적은 공동현관 비밀번호, 최근 주문 내역 등이 유출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안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유출된 정보를 조합하면 가족 구성을 알 수 있는 상황이라 교묘하게 제작된 스팸 문자 등으로 피해를 볼 가능성도 있었다. 개인정보가 유출된 고객의 수는 무려 3370만명에 달했다. 올해 기준 우리나라 인구(5168만명)의 65%에 이르는 숫자다. 여기에 개인정보 유출이 지난 6월24일, 무려 5개월여 전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소비자의 분노가 폭발했다. 또 해킹 등으로 개인정보 유출 사고를 겪은 다른 업체와 달리 쿠팡 사건은 내부 직원의 소행으로 알려지면서 충격이 가중됐다. 중국 국적의 직원이 해외에서 개인정보를 빼돌렸다는 것이다. 앞서 쿠팡은 지난달 20일 개인정보 유출 피해 고객 계정이 4500개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열흘 새 3370만명이라고 다시 공지하면서 신뢰를 잃었다. 쿠팡의 프로덕트 커머스 부분 활성고객(구매 이력이 있는 고객)은 2470만명인데 피해 고객은 이보다 900만명 많다. 최근 3개월 간 구매 이력이 없는 고객까지 포함한 수치다. 사실상 전체 고객의 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 2010년 소셜커머스 시작 로켓배송 도입 날개 달아 이번 쿠팡 사태의 규모는 지난 2011년 해킹으로 약 3500만명의 개인정보 유출을 겪은 싸이월드·네이트 사례와 맞먹는다. 올해 4월 발생한 SK텔레콤의 개인정보 유출 사고(약 2324만명)를 상회한다. 당국의 조사 과정에서 피해 규모가 더 커진 선례를 보면 쿠팡 역시 피해 범위와 규모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의로든 타의로든 쿠팡을 놓지 못하는 이용자가 상당하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쿠팡 사태 이후 보고서를 통해 “쿠팡은 한국 시장에서 비교할 수 없는 지위를 갖고 있다”며 “한국 소비자는 데이터 유출 이슈에 상대적으로 민감도가 낮아 고객 이탈은 제한적일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국내 이커머스 시장을 쿠팡이 독점하고 있기에 이번 사태가 일시적인 충격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는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에 걱정을 표하면서도 막상 탈퇴하긴 어렵다는 글이 보인다. 당장 내일 가게 문을 열어야 하는데 쿠팡이 아니면 재료를 조달할 방법이 없다는 글도 있다. 김범석 의장이 지향하던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가 아이러니하게도 쿠팡에 문제가 생겼을 때 현실화한 셈이다. 쿠팡은 어떻게 한국을 지배하게 됐을까. 전문가들은 쿠팡이 ‘틈새시장’을 기가 막히게 파고들었다고 분석했다. 다만 그 틈새를 만든 건 쿠팡이 아니라 정부였다는 것이다. 정부가 골목상권을 살리겠다는 취지로 대형마트를 규제하자 소비자는 전통시장을 찾는 대신 온라인으로 눈을 돌렸다. 그 결과 2010년 소셜커머스로 출발한 쿠팡은 현재 대적할 상대가 없는 ‘유통 공룡’으로 성장했다. 2012년 ‘유통산업발전법(유통법)’이 시행됐다. 정보 털려도 쓸 수밖에… 유통법에는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은 오전 10시부터 밤 12시까지만 영업 가능 ▲대형마트 월 2회 의무 휴업일 지정 ▲의무휴업일과 영업 제한 시간에는 온라인 주문 배송 서비스 금지 ▲전통상업보존구역 반경 1km 내 출점 불가 등의 내용이 담겼다. 대형마트 등이 규제에 발 묶인 사이 이커머스 시장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쿠팡이 2014년 도입한 로켓배송은 그 틈새를 절묘하게 파고든 ‘신의 한 수’였다. 쿠팡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투자금을 등에 업고 심야, 새벽 배송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쿠팡이 공격적으로 물류센터를 늘릴 때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지금은 그 물류 센터가 지역 배송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에서 택배기사의 건강권을 위해 심야 새벽 배송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비자는 물론 택배기사 사이에서도 민주노총의 주장에 반발이 나왔다. 소비자는 오후에 주문해도 아침이면 집 앞에 물품이 도착하는 데서 오는 편리함, 택배기사는 경제적 이익, 노동권 등을 이유로 제시했다. 실제 민주노총의 주장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쿠팡의 배송 시스템이 국민 생활에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를 보여준 단적인 예다. 소비 트렌드가 완전히 온라인 중심으로 바뀌면서 쿠팡의 영향력은 더욱 거대해졌다. 저녁 식사 재료를 사기 위해 퇴근 후 마트나 슈퍼로 뛰어가는 모습은 드라마에서도 과거 회상 장면에나 나온다.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스마트폰을 통해 물건을 주문하며 불과 몇 시간 만에 집 앞에 배송된 택배 상자를 안고 들어가는 게 일상이 됐다. 가족끼리 대형마트나 백화점 등에서 쇼핑을 하는 일은 생활을 위한 게 아니라 이른바 ‘여가’가 됐다. 규제 업고 틈새 노려 방점을 찍은 건 코로나19였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비대면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커머스 시장은 배달업계와 함께 끝 모르고 성장했다. 이 시기 대형마트는 의무 휴업일이나 심야 시간에 온라인 배송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일부 풀어달라고 호소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규제에서 자유롭던 쿠팡은 또다시 소비자의 선택을 받았다. 그 결과 쿠팡은 2023년 창사 이후 첫 흑자를 냈다. 당시 쿠팡은 6조2000억원을 투자해 전국 30개 지역에 100여개 이상의 물류센터를 지었다. 영업손실은 2021년 1조7097억원에 달했지만 2022년 1447억원으로 줄었고 2023년에는 결국 흑자로 돌아섰다. 2023년 기준 쿠팡의 매출은 32조원에 이른다. 당시 쿠팡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2023년 4분기 실적보고서에 따르면 쿠팡의 영업이익은 6174억원이다. 매출, 영업이익 모두 전통 유통기업을 제친 1위다. 쿠팡은 흑자 전환의 비결로 고객의 충성도를 꼽았다. 이들이 쿠팡에서 씀씀이를 늘리면서 쿠팡 전체 이익이 늘었다는 것이다. 특히 2018년 쿠팡이 도입한 ‘쿠팡 와우’ 멤버십의 증가가 영업이익을 이끌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쿠팡 와우는 월 4990원(현재 7890원)을 내면 쿠팡에서 구매하는 대부분 물건을 무료로 배송받을 수 있다. 또 쿠팡플레이라는, 쿠팡이 론칭한 OTT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당시 쿠팡은 쿠팡 와우 멤버십, 즉 유료 가입자가 2021년 900만명에서 2023년 1400만명까지 늘었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쿠팡 매출은 41조원까지 뛰어올랐다. 전체 대형마트 판매액(37조1779억원)을 뛰어넘는 수치다. 영업이익은 6023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억은 전년 대비 소폭 증가했는데 매출이 30%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쿠팡 와우 멤버십에 가입한 고객은 지난해 말 기준 1500만명가량으로 추정된다. 소비트렌드 변화·코로나19로 쐐기 2023년 흑자 전환해 전체 매출 1위 눈여겨볼 대목은 쿠팡 와우의 가격이 지난해 3000원가량 올랐는데도 불구하고 고객이 이탈하기는커녕 되려 대거 늘었다는 점이다. ‘쿠팡 생태계’가 이미 공고해졌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른바 충성 고객층이 이전보다 두꺼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구독료 인상분보다 쿠팡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가치가 더 크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성장 배경은 다르지만 쿠팡을 카카오와 비교하기도 한다. 카카오는 ‘카카오톡’이라는 국민 메신저를 배경으로 각종 사업에 진출했다.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중 90% 이상의 점유율을 가진 카카오톡은 카카오가 골목상권에 침투하는 데 훌륭한 ‘씨앗’ 역할을 담당했다. 쿠팡 와우 가입자를 위한 ‘로켓배송’이 심야·새벽 배송 시장을 잠식하는 데 혁혁한 역할을 한 것과 비슷하다. 대체재가 많지 않은 것도 닮았다. 카카오는 최근 카카오톡 업데이트 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카카오가 카카오톡을 SNS처럼 바꾸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이용자들이 카카오톡 앱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방도를 찾다가 고안한 방법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하지만 이용자의 반발이 거셌다. 카카오톡 앱 평점은 1점대로 떨어졌고 조롱이 줄이었다. 결국 카카오는 가장 많은 비판이 나왔던 ‘친구탭’을 원래대로 되돌리겠다고 발표했다. 이후에도 카카오톡 변화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계속 나왔지만 결론적으로 이용자 이탈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카카오톡을 대체할 만한 메신저 앱이 마땅치 않았던 게 문제였다. ‘네이트온’이 노를 저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카카오톡 업데이트를 주도한 홍민택 최고제품책임자(CPO)도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에 ‘트래픽, 다운로드는 줄지 않았다’고 쓰기도 했다. 당시 홍 CPO의 해명에 비판이 쏟아졌지만 글 내용만 봐서는 카카오톡 자체에 타격은 크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과징금에 주저 앉나 그러면서도 카카오의 현 상황을 봤을 때 쿠팡도 당국 조사가 진행되다 보면 타격이 상당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일단 이재명 대통령이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태에 대해 과징금 강화, 징벌적 손해배상 등을 언급한 점이 눈에 띈다. 벌써부터 역대 최대 과징금(1347억원)을 받은 SK텔레콤의 사례를 넘어 1조원대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