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의 <대통령의 뒷모습>은 실화 기반의 시사 에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다뤘다. 서울 해방촌 무지개 하숙집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작가는 무명작가·사이비 교주·모창가수·탈북민 등 우리 사회 낯선 일원의 입을 통해 과거 정권을 비판하고, 그 안에 현 정권의 모습까지 투영한다.
그자들의 인간성을 조금이나마 회복시켜 주는 취지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사업이 필요해. 매일 한명씩 악인을 골라 살해한다면 백일쯤 후엔 어떤 효과가 나타나려나?
한 달 정도로는 별무효과일 거야. 남한이든 북한이든 가장 완고하고 낙후된 분야가 정치계와 군부인데, 그곳에 뿌리박은 자들은 겁먹기보다 아마 계엄령을 선포해 탱크와 총칼을 동원해서라도 잡아내 박살낸다며 난리 지랄을 칠걸.
대박과 쪽박
음, 그건 그렇고… 만일 라스콜리니코프가 여기 이 시대에 산다면, 아마 창녀보다 북한에서 고생하다 탈출한 탈북녀를 사랑하지 않을까 몰라. 하나의 상징적인 아이콘이니까….
아, 벌써 하숙집 앞에 닿았군. 이제 공상은 그만둬야지….’
나는 현실로 돌아와 머리를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불을 환하게 밝힌 하숙 건물은 보통 사람들의 희비애락을 품으며 우뚝 선 일종의 성 같았다.
토요일 밤이라 그런지 식당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누군가 불러 돌아보니 모창가수가 손을 흔들었다. 구석진 자리에 웬일로 꼽추 하씨도 함께 앉아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가서 빈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엔 소주병과 두어 가지 안주가 놓인 상태였다.
“오, 작가님… 부탁이 하나 있어요.”
볼이 발그레해진 모창가수가 말했다.
“뭔데요?”
“가사 하나만 좀 써주세요.”
“네? 모창하시는데 뭔 가사 말이죠? 설마 가사를 바꿔 부르시려는 건 아닐 테고요.”
“그런 게 아니에요! 저도 이제 모창 따윈 그만두고 창작곡을 부르기로 했다구요!”
그는 흥분해서 손바닥으로 탁자를 세게 두드리며 소리쳤다. 잔 속의 소주가 찰랑거렸다.
“갑자기 왜? 모창으로 한우물 파신다더니….”
“한평생 모창만 하고 살 순 없죠. 지금 한가락 한다는 인기 모창가수들도 아마 진심으로 좋아서 그러진 않을 거예요. 처음엔 열정을 쏟았더래두 이젠 처자식 때문에 마지못해 관성적으로 해나가고 있을 가능성이 많아요. 난 자유로운 독신인 만큼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가 있죠. 마침 거부하기 어려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대체 뭔데요?”
가수는 우선 소주잔을 들어 한 모금에 쭉 들이켰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통일대박론을 노래로 한번 불러 보고 싶어요.”
그는 갑자기 좀 수줍어했다.
“쉽지 않은 문제인데요.”
나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왜요?”
허황된 구호 통일…현실의 벽 더 높아져
“분열된 국론 통합이 먼저? 진정성 없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겠죠. 아무튼 먼저 가수님의 의견을 한번 말씀해 보세요.”
“음… 대중가요니까 대중적인 컨셉으로 가야겠죠. 통일을 바라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과연 어떤 컨셉을 잡아야 성공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어려운 문제네요. 그런데 가사만 가지고 일이 되진 않잖아요.”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아는 작곡가 분이 계셔요. 가사만 잘 빠져나오면 제가 들고 가서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기필코 곡을 받아낼 테니까요. 이후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가사만 멋들어지게 써주세요.”
“고민되네요. 대중가요 가사를 한번도 써본 적이 없어서….”
“뭔 걱정이세요. 소설 쓰시는 작가님이신데요. 꼭 좀 부탁드려요.”
그는 술잔을 들어 들이켜곤 내게 건네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자구요. 가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고 싶으세요?”
“저는 당연히 통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이 아저씬 반대하신다네요.”
그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하씨를 바라보았다.
“반대를 한다는 얘기는 아니지. 통일을 하더라도 허황스런 구호만 외치기보다 현실적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가야 가능하다는 뜻이지. 우리 대한민국도 아직 국론 통일이 안 되고 분열된 마당에 구체적인 방법도 없이 주관적인 목소리로 떠들기만 해서는 오히려 역효과라는 얘기지. 아니할 말로 지금 북한이 저런 판국인데 우리 입맛대로만 통일하자고 쪼우면 쟤네들 화만 돋굴 뿐이란 말야.”
꼽추 하씨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지 마세요. 그래도 노래가 히트하면 북한 사람들도 몰래 듣고 감동을 받아서 바뀌지 않겠어요. 대중가요는 시기를 잘 타야 대박이 날 수 있으니까 지금이 최적기라는 거죠.”
모창가수는 여전히 들뜬 상태였다. 내가 대꾸했다.
“사실 지금 통일 찬성 노래를 열심히 불러봤자 공허한 메아리밖에 돌아오지 않을 성싶어요. 그렇다고 반대한다는 메시지로 열창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 생각엔 차라리 통일을 하자니 말자니 주창하기보다 현재의 상황을 진실하게 드러내 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군요.”
찬성 노래
“스스로 들으며 판단하게끔?”
“그렇죠.”
“그것도 좋겠군요. 그런데 유행가엔 사랑이 들어가야 맛이 나잖아요. 남북한의 청춘 남녀가 어떤 사연으로 만났다가 헤어져 애달피 그리워하건만 철조망이 가로막아 피울음이 맺힌다는 식으로 스토리를 깔면 어떨까요?”
모창 가수는 벌써 노래를 부르고 싶은 듯한 눈빛이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