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2차 손님’ 신상 현찰 거래 추적

  • 김성민 기자 smk1@ilyosisa.co.kr
  • 등록 2023.07.03 12:13:51
  • 호수 1434호
  • 댓글 3개

“남편 성매매 알려드립니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성매매 업소가 손님의 개인정보를 수집해 돈벌이로 사용하다 적발됐다. 업주들은 성매수자의 전화번호는 물론, 직업까지 메모했는데 이는 잠복 경찰인지 미리 파악하기 위함으로 파악된다. 실제로 손님이 경찰인 것으로 의심될 경우 ‘○○○ 경찰’ 등으로 저장했다. 동종업자들끼리 공유해 단속을 피하려는 이유다. 특히, ‘진상 손님’을 걸러내기 위한 메모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수집된 개인정보가 현찰로 거래되는 실태를 <일요시사>가 직접 확인했다. 

대부분의 성매매 업소는 ‘안마시술소’ 등 은유적 간판을 사용한다. 단속 때문에 ‘OO 안마’라는 간판을 걸어두지만, 실체는 성매매 업소인 셈이다. 업주들은 성매수자를 더욱 끌어들이기 위해 솔직한 광고 수단이 필요했다. ‘성매매 광고 사이트’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추천 업소
없인 불가

업주들은 사이트를 보고 연락한 성매수자가 경찰이나, 진상일까 걱정이 앞선다. 성매수자의 신상정보를 공유하는 ‘제로나인’ 앱을 설치한 이유다. 앱은 사이트에 가입된 업주만 설치할 수 있다. 까다로운 인증절차를 통과해야 하며, 월 이용료는 12만원이다.

2021년부터 지난 2월까지 전국 6400여개 성매매 업주를 회원으로 둔 제로나인의 전신 ‘더봄’의 운영진이 최근 경찰에 붙잡혔다. 지난달 22일, 경기남부경찰청은 운영진 3명을 구속 송치했다. 이들은 성매매 업주 스마트폰에 저장된 성매수자의 정보를 불법으로 수집, 공유하면서 성매매처벌법 및 개인정보보호법 위반과 이용료 명목으로 18억4000만원의 수익을 챙긴 혐의를 받는다.

경찰은 더봄 운영진이 벌어들인 수익도 몰수 조치했다. 운영진은 약 2년간 총 5100만건 이상의 개인정보를 수집했다. 중복 정보를 제외하면 약 460만건의 전화번호가 확인됐다. 이는 모두 성매매 업주들의 휴대폰서 수집된 정보로 방법은 간단하다. 업주가 휴대폰에 앱을 설치하면 자동으로 손님의 전화번호, 메모 등이 특정 서버에 저장된다.


이렇게 취합된 정보는 제로나인 이용자라면 누구나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업주가 저장한 손님 정보도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앱에는 전화번호 조회 기능도 있어 특정인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검색하면 성매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하루 15건의 무료 검색이 가능하며, 이후 3만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문제는 검색 대상자가 남성에 국한되는 것만이 아니다. 업소에 취업을 문의한 여성들의 번호도 공유된다는 점이다. 호기심에 연락한 무고한 사람까지 포함된다.

가입비 받고 개인정보 ‘실시간 공유’
제3자가 특정인 출입 여부 확인 가능

업계 관계자는 “장난삼아 사촌형 번호를 조회했는데, 수원까지 가서 그 짓(성매매)을 하고 왔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애인, 배우자 등의 성매매 이력을 확인해준다고 홍보해 부당이득을 취한 ‘유흥탐정’도 이 앱을 사용했다. 이들은 텔레그램, 카카오톡 오픈채팅 등 SNS로 의뢰받았다. 한 보이스피싱범은 성매수자에게 전화해 성매매 이력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돈을 요구한 사례도 있다.

<일요시사>는 앱을 어떻게 설치하는지 파악했다. 우선, 까다로운 성매매 업주 인증을 거쳐야 한다. 텔레그램 등을 통해 만난 운영자는 업소의 실체를 요구한다. 이 때문에 성매매 광고 사이트에 등록된 업소 정보가 담긴 이미지를 전송해야 한다. 이때 광고 제휴 기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이도록 한다. 광고 기간이 만료된 업주는 받지 않는다. 

앱 설치를 원하는 업주를 신뢰할만한 다른 업소의 추천이 필요해 까다롭다. 추천업소는 ‘이 업주를 안심하고 추천한다’는 식의 텔레그램 메시지를 운영자에게 보내야 한다. 다른 업소의 추천이 확인되면, 신규 등록 양식을 받을 수 있다. 양식에는 ‘전화번호’ ‘업종’ ‘업체명’ ‘지역’ 등을 적어야 한다.

업종은 영업 형태를 의미한다. 오피, 안마방, 룸싸롱 등 다양한 형태가 포함된다. 업체명은 성매매 광고 제휴 사이트에 등록된 업소명이다.


등록 양식을 완성하면 앱을 설치할 수 있는 링크와 함께 계좌번호가 전송된다. 결제가 완료되면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생성되며, 앱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용비는 30일에 12만원, 60일에 20만원이다. 업주가 앱 설치를 위해 성매매 광고 사이트에 가입한 비용 12만원을 포함하면 최소 24만원을 지출한 셈이다.

성매매 광고 사이트는 지역·업종별로 특화돼있다. 먼저 수도권에 특화된 ‘오ⅩⅩⅩ니’ ‘오ⅩⅩⅩ걸’ 사이트가 있다. 이외에 지역별 사이트로는 부산 업소를 모아둔 ‘부산ⅩⅩⅩ’, 대구지역 ‘오피Ⅹ’, 충청권은 ‘오파Ⅹ’ 등이 존재한다.

제로나인 외 다양
앱 기술도 발전

업종별로도 주력하는 사이트가 따로 있다. ‘오피ⅩⅩ니’라는 사이트는 건전 마사지를 찾는 수요가 많고, 단순 성매매는 ‘OPⅩⅩ’에 몰리는 것으로 전해진다.

성매수자 정보를 공유하는 앱은 제로나인 외에도 다양하다. 최근 구속된 더봄은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했기에 긴 꼬리를 잡혔다. 일부 운영진이 체포됐지만, 해외에 서버를 둔 이상 뿌리 뽑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제로나인과 같은 아류가 여전히 판을 치는 이유다. 최근엔 ‘페이커’라는 동종 앱도 활개를 펴고 있다.

앱의 구동 기술도 발전하고 있다. 기존에는 앱을 켜고 팝업창을 띄워 정보를 검색했으나 최근에는 기본 통화앱 형태로 진화했다. 스피커폰으로 통화도 가능해졌다. 다이얼을 눌러 발신과 수신이 모두 가능해졌다. 더봄 운영진이 검거됐지만, 동종업계 기술자들은 음지서 활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성매매 업계에도 카르텔은 존재한다. 여성·청소년 성매매 근절단(여청단)의 반전이 드러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여청단 전 대표인 신모씨 등은 ‘보도방(여성 접객원 소개업체)’ 업주들에게 ‘여청단에 가입하지 않으면 신고하겠다’고 협박한 혐의 등으로 2018년 기소됐다. 

여청단의 설립 목적과 실상은 달랐다. 2016년 신모씨 등이 성매매 근절을 명목으로 세운 여청단은 경기도 일대에 성매매 업소를 운영하는 조직폭력배와 결탁했다. 2018년에는 경기도 비영리 민간단체로 등록하는 등 합법적인 시민단체로 위장했다.

자신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업체에는 자동발신시스템을 이용한 이른바, ‘콜폭탄’을 행사했다. 성매매 업주의 휴대폰에 계속 전화를 걸어 영업을 방해한 것이다. 또 가입하지 않은 업소에 ‘탕치기’를 가해 영업을 방해했다. 탕치기는 손님으로 위장해 접대부를 폭행하고, 금품을 갈취하는 것을 말한다.

업소 카르텔
갈수록 늘어

2021년 법원은 여청단 간부 등 사건 관계자 4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당시 수원지법 형사4단독 김두홍 판사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여청단 간부 A씨에게 징역 2년6월을 선고했다. 사건 현장서 범행에 가담한 폭력배 B씨에게도 똑같이 선고했다. 

김 판사는 “B씨가 직접적으로 피해자를 협박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당시 신씨 바로 옆에 앉아서 자신들의 세를 과시했다”며 “신씨와 공모해 피해자를 강요한 사실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앞서 여청단은 성매매 근절단체를 표방, 성매매업소의 불법영업을 신고하는 방식으로 업주들을 수하에 두고 상납금을 받았다.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업체는 지속적으로 신고하거나 콜폭탄을 걸며 영업을 방해하다가 수사망에 올랐다.

성매매 업계는 여청단 조직원이 성매매 광고 사이트에 오래전부터 개입한 것으로 봤다. 이들은 성매매 알선 사이트인 ‘밤의 전쟁’과 ‘아찔한 달리기’를 개설해 막대한 수익을 벌었다. 실제로 다수의 성매매 업소 광고를 했고, 업주들에게 가입을 강요하기도 했다.

업계에선 성매매 광고의 1세대로 불린다. 여청단 조직원은 필리핀서 생활하며 해당 사이트를 운영해왔으나, 경찰은 국제공조수사를 통해 붙잡았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논란이 된 제로나인 등 성매수자 정보 앱도 여청단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해석했다. 성매매 광고 사이트에 등록된 업주만 가입할 수 있는 부분도 의심되는 대목이다. 이 관계자는 “다른 성매매 업소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건, 아는 사람끼리만 받겠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커지는 성매매 시장
강화되는 처벌 수위

성매매 업계가 온라인상에 보따리를 풀게 된 계기는 대략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2년 서울시는 청량리 집창촌이 지역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철거했다. 당시 용산, 영등포 등에 즐비한 집창촌들도 사라져갔다. 최근엔 수원역과 평택 쌈리 집창촌에 이어 파주 용주골도 70년 만에 폐쇄됐다. 그렇다고 성매수자의 욕구가 사라지진 않는다. 


공급이 줄어드니, 수요를 맞추기 위해 업주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단속을 피해 음지로 숨어든 곳이 온라인이다. 접대부의 사진, 서비스 시간, 가격까지 나와 있으니 청소년도 손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실제로 불법 온라인 성매매 광고는 전년 대비 증가했다. ‘서울시 인터넷 시민감시단’은 지난해 총 14만1313건의 불법 온라인 성매매 알선·광고를 적발했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2011년 출범 이래 역대 최대 실적으로, 전년 대비 1.3배 증가한 수준이다.

적발 현황을 플랫폼별로 보면 SNS를 활용한 광고가 12만735건(88.6%)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어 성매매 알선 사이트 1만5061건(11.0%), 메신저 518건(0.4%) 등이 뒤를 이었다. 내용별로는 출장 안마, 보도방 등 출장형 성매매 알선·광고가 7만2814건(53.4%)으로 가장 많았다. 성매매 알선 사이트 및 의심업소 구인광고는 1만5346건(11.3%)로 나타났다.

성매매도 성범죄의 일종이다. 성매매특별법에 따르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과료에 처하고 있다. 과거에는 기소유예나 벌금형 등 비교적 처벌이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으나, 최근에는 정식 기소가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경찰청이 조사한 성매매 사범 단속 현황에 따르면 2018년 검거 건수는 약 7000여 건이며, 검거 인원은 1만6000여명이며 시장 규모는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온라인 활개
30조원 육박

국내 성매매 시장 규모는 30조원서 37조원에 이른다고 분석됐다. 시장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성범죄에 대한 수사망도 촘촘해질 전망이다.

앞서 ‘더봄’ 운영자는 검거 전 수배 중인 상태서도 앱 명칭만 변경한 채 대포폰, 대포통장, 텔레그램으로 운영했다. 수익금 인출책에게는 전기자전거를 이용해 전국을 돌며 출금하도록 지시했다. 약 6개월간에 걸친 경찰의 추적 수사 끝에 운영자를 포함한 관련자 15명이 전원 검거됐다. 경기남부경찰청은 동종 범죄자 등에 대한 수사를 계속 진행할 방침이다.  

<smk1@ilyosisa.co.kr>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