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바야흐로 K-문화의 시대다. K-팝이 미국 빌보드차트에 오르내리고 K-드라마와 K-영화가 OTT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전 세계 곳곳에 우뚝 선 금자탑은 오랜 기간 명맥을 이어온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세워졌다. 30년 넘게 지역에서 묵묵히 ‘전통문화 지킴이’로 활동한 양영두 사선문화제전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여의도 중앙보훈회관에 자리한 ‘연대와공생’ 사무실에서 양영두 사선문화제전위원회 위원장을 마주했다. 해가 잘 드는 사무실은 영하의 날씨가 무색하게 훈훈했다. 셀 수 없을 만큼 언론을 접했을 양 위원장은 <일요시사>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긴장된다. 그리고 긴장한 상태로 진행하는 게 맞다”며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사선대 전설
지난 9월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간 전북 임실군 사선대 일원에서 ‘2022년 사선문화제’가 열렸다. 올해로 36회째를 맞는 ‘사선녀 선발대회’를 비롯해 사선가요제, 호남좌도농악 전국경연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됐다. 각 분야 사회발전에 헌신해온 유공자를 발굴해 시상하는 소충·사선문화상도 함께 진행했다.
전주에서 남원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임실군 관촌면에 사선대가 있다. 명승고적 설화집에 따르면 2000년 전 선녀들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풍광이 좋은 곳을 찾다가 내려온 땅이다. 진안 마이산의 두 신선과 임실 운수산의 두 신선이 시를 읊으며 노니는 모습을 네 선녀가 보고 함께 어울렸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1985년 12월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양 위원장은 1986년 제전위원 100명으로 구성된 사선문화제전위원회 창립 때부터 현재까지 사선문화제를 이끌고 있다. 사선문화제는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관 주도 방식이 아니라 민간이 주도하는 지역향토문화 축제다. 사선대의 전설을 향토문화재로 지키고 승화시켜 나가자는 의지는 양 위원장을 필두로 36년째 이어지고 있다.
양 위원장의 남원 양씨 가문은 1599년 정유재란 막판에 퇴로가 막힌 왜군의 살육을 피해 임실군 회봉촌으로 이거했다. 양 위원장은 “이 지역의 후손으로서 향토문화유산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사선문화제를 기획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임실군 내 읍면 출신 100명이 제전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창립부터 현재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1986년 사선문화제전위원회 창립, 1987년 1회 사선문화제를 시작한 이래 한해도 빠짐없이 행사가 열렸다. 태풍이나 폭염 등 자연재해,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코로나19 등 감염병 창궐에도 쉬지 않았다.
양 위원장은 30년 넘게 한결같이 이어진 사선문화제의 기록을 집대성해 지난 11월 <사선문화 35년사>를 발간했다.
“사선문화제전위원회 창립 때부터 계셨던 제전위원이 많이 돌아가시고 자료도 유실되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꺾어지는 해(10년 주기)는 아니지만 기록을 정리해보자는 생각에서 책을 내게 됐습니다. 1987년부터 지난해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열린 지역향토문화 축제의 역사인 셈이죠.”
<사선문화 35년사>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선문화제 개최를 축하하기 위해 양 위원장에게 보낸 휘호가 담겼다. ‘양춘포덕택 만물생광휘(陽春布德澤 萬物生光輝)’ ‘따뜻한 봄이 그 덕화를 베풀면 모든 생물이 화려한 빛을 나타낸다’는 내용이다. 김용택 시인이 <사선문화 35년사> 발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쓴 시 ‘사선대로 오너라’도 실렸다.
양 위원장은 “사선문화제의 의의는 고향 사랑의 집합이고 나아가 나라 사랑의 결집”이라고 말했다. 사선문화제의 핵심 프로그램은 ‘사선녀 선발대회’다. 양 위원장은 “미인을 뽑는 게 아니라 한국의 전통적인 여인상을 찾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역에서 도내로, 현재는 전국 단위로 확장됐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한 사람에게 시상하는 소충·사선문화상도 사선문화제만의 특징으로 꼽힌다. 1999년 임실 군민의 날 행사이던 소충제와 사선문화제가 통합되면서 소충·사선문화상으로 승화됐다. 임실에는 구한말 항일의병 운동을 한 이석용 장군과 그 휘하 28의사를 배향하는 사우인 소충사가 있다.
“이석용 장군이 돌아가시면서 한 말씀이 ‘내가 우리나라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일왕을 공격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셨습니다. 이 분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36세 젊은 나이에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셨어요. 28의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들을 존경하고 존중하는 뜻을 담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사당을 짓도록 했습니다. 바로 소충사입니다.”
호남좌도농악 전국경연대회도 진행하고 있다. 임실에는 호남좌도굿의 대표격인 필봉농악이 전승된다. 필봉농악은 임실군 강진면 필봉리에서 전승된 농악으로 무형문화재 마-11호로 등록돼있다. 양 위원장은 “농악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우리의 전통문화다.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장학사업·독립운동가 후손 돕기
“정부·지자체 지원 꼭 필요하다”
양 위원장은 1986년부터 올해에 이르기까지 사선문화제가 이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자신보다는 제전위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도움을 첫손에 꼽았다. 그는 “내려놓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주변 분들이 정말 헌신적으로 도와줬다. 그분들의 힘이 아니었으면 이렇게까지 이어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저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보자는 일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지역향토문화 축제를 계승할 수 있는 후배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창립 때부터 같이 해온 후배들 혹은 참신한 분이 나타나면 이 행사를 물려줄 수 있도록 그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중심축을 유지할 생각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지만 양 위원장은 내년 구상으로 몹시 바빴다. 졸업시즌이 다가오면서 오랜 기간 이어오고 있는 장학 활동을 해야 한다. 또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알리기 위한 학술강연대회도 예정돼있다. 내년 사선문화제에서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신선’을 뽑는 대회도 구상 중이다.
독립운동가 후손을 돕는 일도 계속 이어간다. 양 위원장은 현재 1913년 5월13일 도산 안창호 선생이 결성한 NGO단체인 흥사단 민족통일본부의 공동대표다. 그는 “흥사단에서 독립운동가 후손을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나는 전북에 있는 분을 살피자는 생각에 명절 때 쌀이나 생활용품을 전달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우리 사회가 그분들의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 위원장은 이 같은 노력에도 전통문화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순수 민간 주도의 행사, 설화나 전설에 의해 전래돼오는 전통문화를 지켜줘야 한다. 지역의 전통문화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꼭 말하고 싶다”고 힘줘 말했다.
명맥 잇기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문을 당한 양 위원장은 현재 오른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 또렷한 시선의 왼쪽 눈과 달리 약간 흐릿한 그의 오른쪽 눈에서는 간간히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눈물에서 ‘전통문화 유지·계승·발전’이라는 오롯한 외길을 걸어온 국가 원로의 30년 넘는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