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억울하게 희생된 '인혁당 8인'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09.18 13: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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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지났지만…그들은 눈을 감지 못했다

[일요시사=김민석 기자] '인혁당 사건'을 두고 박근혜 후보가 적절치 못한 발언을 해 온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빌미를 잡은 민주통합당은 총공세를 펼치고, 새누리당은 우왕좌왕 맥을 못 추고 있다. 정작 박 후보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 일언반구 사과 한마디 없이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고 싶단다. 인혁당 사건은 도대체 어떤 사건이기에 이토록 후폭풍이 큰 걸까. 그리고 '인혁당 희생자 8인'은 도대체 무슨 죄목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걸까.

지난 10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5·16쿠데타와 유신체제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데 이어 지난 12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인혁당 사건'을 두고 "대법원에서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같은 대답을 반복해 그 여파가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인혁당 사건의 당사자인 유인태 의원이 앞장서며 총공세를 폈다. 유 의원은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대법원의 판결이 두 개라니,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이 있을 수 있나"라며 포문을 열었다. 이어 "박 후보는 아직도 인혁당 사건의 무죄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결국 아버지의 유신도 잘한 일이고, 빨갱이로 누명을 씌워 사형 집행한 것도 잘했다고 하는 인식이 내면에 깔린 것 아니냐"며 직격탄을 날렸다.

유신체제도 잘한 일
사법살인도 잘한 일

민주당 지도부도 일제히 박 후보의 인혁당 발언을 문제 삼았다. 이해찬 대표는 지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을 유신정권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한 조사 결과를 내놓았을 때, 당시 박 후보는 "가치 없는 모함"이라고 말했다며 "이런 역사인식을 갖고 감히 대통령이 되려고 하냐"며 힐난했다. 이종걸 최고위원도 "사법살인이 자행될 때 박 후보는 퍼스트레이디의 직무를 수행했다"며 꼬집었다.

반면 새누리당은 박 후보의 발언을 놓고 두 가지 반응을 표출했다. 역사적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박 후보를 감싸는 목소리가 동시에 나온 것. 또 홍일표 새누리당 대변인은 박근혜 후보의 발언을 두고 사과했지만 정작 박 후보 측은 사과한 적이 없다고 밝히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 12일 홍일표 새누리당  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에서 "박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 소지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며 "박 후보는 유신체제의 그늘 속에 있었기에 역사 관련 발언이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친박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왔는데 대선캠프 한 관계자는 "5·16은 논란이 될 수 있지만, 유신과 인혁당 사건은 논란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역사인식 논란에 휩싸인 당시 '퍼스트레이디'
유신 "역사적 판단에" 인혁당 "판결 두 가지"

반면 박 후보의 발언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특히 이한구 원내대표는 오찬간담회에서 "다들 배가 부른가 보다. 민생 때문에 난리인데"라고 말한 데 이어 "딴지를 걸려고 하는 것까진 좋은데 정정당당하게 해야지"라고 말해, 대선후보의 법과 역사 인식에 대한 문제 제기를 '딴죽'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인혁당 사건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박 후보의 말 몇 마디에 이리도 큰 후폭풍이 불게 된 걸까?
문제가 된 제2차 인혁당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72년 12월 유신체제 발족과 1973년 8월 8일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1973년 10월 항쟁을 시작으로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이 본격화됐다.

1974년 4월3일 저녁,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는 요지의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다.

감히 딴지를…
배가 불렀구먼!

4월25일,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사건 수사상황발표에서 민청학련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을 주축으로 한, 정부를 전복하려는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규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긴급조치 제4호 및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1024명이 체포되고, 그 중 253명이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되었다.

1974년 7월11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재판부는 군 검찰부가 구형한 그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1명 중 서도원, 도예종 등 8명에게는 사형, 김한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 6명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하였고 1975년 4월8일 상고를 기각한 채 판결을 확정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8명에 대한 사형 판결이 확정된 지 불과 18시간 만에 형을 집행해 버린 것. 그 외에도 복역 중 사망한 장석구,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전재권, 유진곤 등 많은 사람들이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시간이 흘러 오늘날 인혁당 사건은 국가가 법으로 무고한 국민을 죽인 사법살인 사건이자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인권 탄압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2005년 12월에 이르러 재판부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 소를 받아들여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8월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시국사건 사상 최대의 배상액수인 637억여 원(원금 245여억 원+이자 392여억 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렇다면 인혁당 사형수 8인은 무슨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걸까?

오늘날 인혁당 희생자 8인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행히 인혁당 사형수 8인이 수감돼 사형될 때까지 바로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던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이었던 전병용씨가 기록을 남겨 두어 인용하고자 한다. 전병용 교도관은 인혁당 사건의 조작성을 폭로하면서 세상을 뒤흔들었던 김지하 시인의 '고행...1974'라는 글을 감옥 밖으로 빼내기도 했다.

고문, 날조… 확정 판결 다음 날 새벽 사형 집행
박정희 정권 유지용…국가가 국민 죽인 사법살인

1975년 4월9일의 희생당한 8인의 이름과 신상은 다음과 같다.

▲서도원 : 1923년 경남 창녕 생,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민주민족청년동맹 위원장.

하재완 : 1932년 경남 창녕 생, 건축업, 중사 제대, 경북민족자주통일협의회 참가.

도예종 : 1924년 경북 경주 생, 삼화토건 회장, 대구대경제학과 졸,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

이수병 : 1937년 경남 의령 생, 삼락일어학원 강사, 경희대경제학과 졸, 민족통일연맹 위원장, 민족일보 기자.

김용원 : 1935년 경남 함안 생, 경기여고 교사, 서울대물리학과 졸, 민족통일연맹 참가.

우홍선 : 1930년 경남 울산 생,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이사, 육군 대위 예편,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

송상진 : 1928년 경북 대구 생, 양봉업, 대구대경제학과 졸, 교원노조활동 및 민주민족청년동맹 사무국장.

여정남 : 1944년 경북 대구 생, 경북대 학생회장, 경북대정치외교학과 졸, 3선개헌·유신헌법 반대투쟁.

당시 이들을 사형으로 몰아갔던 박 전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인혁당 중심인물인 서도원, 도예종 등은 경북대 졸업생 고 여정남에게 폭력에 의한 전부 전복을 선동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전국 대학생 조직 '민청학련'을 결성토록 지령을 내렸다는 죄목이었다.

하지만 재판과정을 들여다보면 이는 모두 날조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2003년 의문사위원회 2005년 국정원 진실위에 의해 인혁당 사건 공작의 전모가 밝혀졌고 2007년 인혁당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 당시 국정원 진실위는 인혁당에 대해 '유신체제 등장을 전후해 정세인식과 통일운동에 대해 토론하는 서클 수준'으로 판단했다.

전기고문, 조서날조
…이유 없는 사형

재판 당시 경북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고 이강철씨는 법정에서 "나는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다"라고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증언했으며 도예종씨는 상고이유서에서 "4월20일에서 25일까지 철야조사를 받았고 검사에게 중앙정보부 조서가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하면 즉시 중앙정보부로 또 불려 가 고문을 당하며 조서를 다시 작성했다"고 말했다.

고 하재완씨는 상고이유서와 항소이유서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탈장됐으며 폐농양이 생겨 취조관이 시키는 대로 조서가 작성됐다"고 기술했고 고 김용원씨도 "중앙정보부에서 수사관들이 미리 진술서를 가지고 와 베껴 쓰라고 해 거부했더니 몽둥이질을 했다"고 말했다.  

고 우홍선씨는 재판장에서 "고문을 할 때는 3층에서 떨어져 죽고 싶었으며, 두 번만 더 (전기고문을)돌리면 심장이 파열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고 말했고 전창일씨는 "며칠간을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수사관이 5, 6명씩 번갈아 드나들면서 죽음의 직전까지 끌고 갔으며, 온몸을 쥐어짜는 전기고문을 하여 몇 번씩 실신케 하였으며, 검찰에 넘어와서도 나는 무죄라고 주장하니 다시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 전기고문을 가했다"고 진술했다.

고문뿐만 아니라 공판조서를 날조해서 작성하기도 했다. 고 이수병씨의 공판조서 중 408쪽을 보면 "피고인 등이 모여 어떠한 조직과 결의를 하였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분명히 "그런 사실이 없다"고 대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판기록에는 "네, 혁신계 동지들을 규합, 과거 인혁당과 같은 통일적 조직을 하여 대정부 투쟁에 합의하고, 4인 지도부를 조직 구성하여 활동상황을 조정하였습니다"로 되어있다. 또 "피고인 등 4인 지도부 정기회합은 매월 첫 일요일 10시로 정하고 지도위원에 도예종, 서도원을 추대하였다는데 사실인가"에 대하여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분명히 진술했는데, "네,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되어있는 것. 또 고 도예종씨가 "조국이 하루빨리 적화통일 되기를 바란다"고 최후진술(유언)을 남긴 것을 두고 국정원 진실위는 최후진술조차 조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내 남편, 내 아들, 우리 아버지 살려내라!"
빨갱이 가족으로 살아온 유족들의 피눈물

이처럼 고문으로 얻은 진술과 날조된 조서를 근거로 재판이 진행된 것이다. 이에 고 이수병씨는 사형 집행 직전 교수대 앞에서 "나는 유신체제에 반대한 것밖에 없고,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것밖에 없는데 왜 억울하게 죽어야 되느냐. 반드시 우리의 이번 억울한 희생은 정의가 밝힐 것"이라고 외쳤다.

다른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 역시 왜 자신이 사형당해야 하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최후진술을 해야 했다. 최후진술에서 유진곤씨는 "나는 80년대 수출목표를 달성하느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 젊은 기업인의 장래를 막지 마라"라고 말했고 김한덕씨는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이유가 있다면 연행되기 전날 유진곤과 같이 술을 마셨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행되기 전 희생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물론 4·19 직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혁신계 조직인 민족민주청년동맹, 민족통일학생연맹 등과 진보적 색채의 신문이었던 '민족일보' 등에서 활약했던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고 이수병씨의 경우 4·19 당시 경희대 민족통일연맹 위원장으로 있었으며, 논문 '만적론'의 필자이기도 했다. 그는 또 5·16쿠데타 후 혁명재판에서 15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7년 동안 복역했다.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과 민청학련을 연관시키기 위한 중간다리로 끼워 넣은 고 여정남씨도 경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6·3 사태 당시 학생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고 김용원씨의 경우 단지 이수병씨의 친구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희생당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자연과학도로서 정치적 이유보다는 이수병씨가 고등학교 동창이었기에 여러 차례 돈을 빌려줬고 모임에도 몇차례 참가했다. 그런데 이것이 혹독한 고문에 의해 조직자금으로 둔갑한 것이다.

희생자 8인 유족들
시체 확인도 못 해

이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975년 4월9일 아침, 서대문구치소 앞은 느닷없는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시체라도 찾기 위해 몰려온 희생자의 가족들에 그야말로 통곡의 바다였다. 당시 신부의 옷깃을 부여잡고 "신부님 안 죽을거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죽었지 않아요?"하고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이 유족들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가족의 시체마저 찾지 못했다. 시체는 벽제화장터(현 서울시립 승화원)로 강제로 이송되더니 유족들의 마지막 확인도 없이 화장돼 버렸다. 그일 이후 유족들은 재심 무죄판결이 나오기까지 빨갱이의 아내이자 자식들이라고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면서 평생을 숨죽이고 살아왔다.

2012년 9월 박 후보의 짧은 생각에서 나온 몇 마디 발언은 희생자 유족들이 1975년 구치소 앞에서 외쳤던 37년 전 구호를 다시 외치게 만들고 있다. "내 남편, 내 아들 살려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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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1위 하이브, 수사 리스크 타개책 있나?

K-POP 1위 하이브, 수사 리스크 타개책 있나?

[일요시사 취재1팀 ] 장지선 기자 =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가 사면초가 상태에 빠졌다. 업계에서는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지만 내부는 엉망진창이라는 풍문이 돌고 있다. 레이블 간의 갈등이 법정 공방으로 번졌고 주력 IP는 과거와 비교해 힘을 못 쓰는 모양새다. 연예계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수장은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하려는 걸까? 2024년 5월 엔터테인먼트 기업 하이브가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계열사 자산 총액과 자본 총액을 더한 자산이 5조원을 넘긴 곳을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한다. 2024년 3월 공개한 사업보고서 기준으로 하이브 자산 총계는 5조원을 넘었다. 당시 기준으로 재계 순위 85위에 올랐다. 빛 좋은 개살구?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공정거래법상 기업의 의무가 늘어난다. 엄격한 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상징성도 얻는다. 실제 하이브는 국내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최초로 대기업집단에 지정됐다. 국가 차원에서 하이브가 ‘업계 1위’로 인정받은 셈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K팝의 세계화로 앨범, 공연, 콘텐츠 등이 주요 수익원인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급격히 성장한 것이 반영됐다”고 지정 배경을 밝혔다. 하이브의 대기업집단 지정은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와의 갈등이 한창 불거질 무렵에 이뤄졌다. 앞서 2024년 4월 하이브는 그룹 뉴진스 등이 소속된 레이블 어도어를 이끌고 있던 민 전 대표가 경영권을 탈취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감사를 진행했다. 민 전 대표와 하이브 간 이른바 ‘민-하 대전’의 시작이었다. 이후 뉴진스, 다른 레이블까지 싸움에 뛰어들었다. 뉴진스는 자신들의 프로듀서는 민 전 대표라고 주장하면서 계약 해지를 요구했고 다른 레이블은 민 전 대표가 제기한 표절 의혹 등에 반발해 소를 제기했다. 민 전 대표와 하이브 간의 계약 문제도 송사로 번졌다. 그 사이 뉴진스는 쪼개졌고 멤버 1명은 계약 해지 후 피소됐다. 내부 문제 외에도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의 경영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카카오와의 갈등도 현재 진행형이다. 카카오와 하이브는 ‘아이돌 명가’로 불리는 SM을 인수하기 위해 엄청난 출혈 경쟁을 벌였다. 인수전이 과열되면서 카카오가 주가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김범수 의장이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구속됐다가 보석 석방되기도 했다. 1900억원대 부당이득 혐의 경찰 영장 청구, 검찰 반려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방시혁 하이브 의장은 두문불출 상태였다. 미국에 머물다가 인터넷 방송 BJ ‘과즙세연(본명 인세연)’과 거리를 걷는 사진이 찍혀 입길에 오른 것을 제외하면 행보를 알기 어려웠다. 방 의장이 프로듀싱을 도맡아 온 방탄소년단(BTS)도 ‘군백기(군대+공백기)’ 상태였다. 하지만 BTS의 광화문 공연 이후 방 의장에 대한 언급이 늘었다. BTS는 멤버 전원이 군대에 다녀온 뒤 ‘완전체’ 첫 행보로 광화문 공연을 선택했다. 정부와 서울시가 하이브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성사된 공연은 각종 논란으로 이어졌다. 정부가 하이브에 특혜를 주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이 제기된 시점도 이때다. 지난달 21일 광화문 일대는 경찰 등에서 동원된 경비 인원으로 삼엄했다. 광화문 인근을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문이 이뤄졌고 그 수위는 살벌했다. 공연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들도 검문 대상으로 지목됐고 결혼식 등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사람도 어김없었다. 정부와 전폭적인 지원에도 BTS 공연을 위해 광화문에 모인 인파는 예상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앞서 26만명이 몰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공연 직후 경찰은 4만명으로 추산했고 하이브는 10만여명으로 발표했다. 어떤 기준을 갖다 대도 예상치보다 적은 인원이 모이면서 공연 자체를 비판하는 목소리와 모두의 광장인 광화문을 사기업이 특정 시간대에 독점하는 게 맞느냐는 지적이 이어졌다. 회사 뒤에 숨어 있나 실제 BTS의 광화문 공연은 ‘관급 행사’를 방불케 하는 모습을 보였다. 공연 전 국무총리가 하이브를 방문했고 서울시는 공연 당일 경비를 위한 회의를 여러 번 진행했다. 물 샐 틈 하나 없는 경비 체제를 구축한다는 명분으로 안전 관리에만 경찰 6700여명 등 모두 1만5000명에 이르는 인력이 동원됐다. 이재명 대통령도 가세했다. 이 대통령은 공연 전에는 안전 관리를 당부하는 목소리를 냈고 공연 이후에도 호평을 남겼다. 이 대통령은 공연 이후인 지난달 24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번 공연은 광화문 홍보를 넘어 대한민국 홍보에 결정적이었다”며 “기획을 잘 해서 잘 진행했다”고 평했다. 대통령까지 언급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은 공교롭게도 방 의장에 대한 비판으로 튀었다. 방의장이 현재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는 점, 그 내용이 주식과 관련된 것이라 정부 정책에 반한다는 점 등이 화두가 됐다. 이 대통령은 ‘주가조작은 패가망신’이라면서 엄하게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바 있다. 방 의장은 하이브 IPO(기업 공개) 이전인 2019년 기존 투자자들에게 상장 계획이 지연될 것처럼 설명하는 등 기망행위를 통해 주식을 매수하고 이후 자신과 관련된 사모펀드가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에 지분을 넘기는 방식으로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를 받는다. 경찰이 추산한 부당이득 액수는 1900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7월 이 대통령의 ‘주가조작은 패가망신’ 경고 이후 주식시장을 교란한 혐의를 받는 인사들에 대한 금융 당국의 제재가 강해졌다. 당시 지목당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방 의장이었다. 금융위원회 증권선물위원회는 지난해 7월16일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금지 위반 혐의로 방 의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경찰도 같은 혐의로 방 의장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미국 압박 경찰 발끈? 검․경의 중복 수사 우려까지 불거졌던 사안은 경찰이 내사에 착수한 2024년 말 이후 1년 반이 지나도록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경찰은 지난해 9월 방 의장을 처음 소환한 이후 같은 해 11월까지 총 5차례 조사했다. 이후 5개월간 추가 소환이나 신병 확보가 진행되지 않으면서 ‘늑장 수사’라는 비판이 일었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지난 21일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방 의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박정보 서울경찰청장은 구속영장 청구 하루 전인 지난 20일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방 의장 수사는 거의 마무리됐다”며 “법리를 검토 중이고 머지않은 시간 내에 종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고 다음 날 방 의장에 대한 신병 확보에 나선 것이다. 방 의장 측은 즉각 유감을 표명했다. 그의 변호인단은 “장기간 성실히 수사에 협조했음에도 구속영장이 신청된 것은 유감”이라며 “향후 법적 절차에도 충실히 임해 최선을 다해 소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주한미국대사관의 압박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최근 방 의장의 미국 방문과 관련해 출국 협조를 요청하는 서한을 경찰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한에는 오는 7월4일 예정된 미국 독립기념일 250주년 행사 참석과 BTS의 월드투어 지원 필요성 등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방 의장은 출국금지 상태다. BTS 광화문 공연부터 특혜 의혹 솔솔 나와 주한미국대사관의 행보에 경찰 내부는 격앙된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BTS 콘서트나 독립 250주년 기념행사 등을 고리로 미국 측을 움직여 수사 편의를 우회 압박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나왔다. 이번 사건의 공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이 지난해 미국으로 출국한 뒤 귀국하지 않는 상황이라 방 의장이 입을 맞추거나 도주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고, 경찰의 신병 확보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하이브는 국민 정서를 자극할 수 있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주한미국대사관의 서한 발송이 당혹스럽다는 분위기다. 하이브 관계자는 “공식적으로 행사 참석을 요청받은 적도 없고 출국금지를 해제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다”고 전했다. 구속 갈림길에 서 있던 방 의장은 검찰의 구속영장 반려로 한숨 돌리게 됐다.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합동수사부는 지난 24일 방 의장에게 신청된 구속영장을 돌려보냈다. 검찰은 “현 단계에서 구속을 필요로 하는 사유 등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보완수사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일단 구속 위기는 피했지만 방 의장의 사법 리스크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하이브의 최대 변수가 되는 모양새다. 하이브는 핵심 IP인 BTS 컴백으로 최대한 분위기를 띄워야 하는 상황에서 광화문 공연이 한 차례 논란이 된 데 이어 오너 리스크까지 덮쳤다. 무엇보다 방 의장이 하이브에 끼치는 영향이 절대적인 만큼 향후 상황에 따라 발생할 예측 불가능한 수준의 후폭풍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오너 리스크 K-팝도 영향 연예계 관계자 사이에서는 방 의장의 사법 리스크가 하이브를 넘어 K-팝 업계에 미칠 영향이 상당할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우리나라 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K-팝의 이미지가 업계 1위 수장의 오너 리스크로 얼룩질 수 있다는 걱정이다. 방 의장은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할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