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돌아온 불사조' 박주선 대통령취임준비위원장

“걱정 마쇼잉∼ 호남 홀대 없응께”

[일요시사 취재1팀] 남정운 기자 = ‘불사조’가 돌아왔다. 박주선 전 국회부의장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 취임준비위원장직 제의를 전격 수락했다. 호남 4선 의원이 보수 진영 대통령 취임식을 총괄하게 되는 진풍경이 예고됐다. 아울러 박 위원장은 윤석열정부 초대 국무총리 하마평에도 올라 있다. 한편으로는 어색해 보이기도 하는 중용(설)의 연속. 많은 이가 박 위원장의 이력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다.

박주선 대통령취임준비위원장은 1949년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이름난 수재였다. 보성남초등학교, 보성중학교, 광주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1974년,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응시한 사법시험(16회)에서도 수석으로 합격했다.

출세 가도
돌연 암초

이후 검사의 길을 걷게 된 그는 일명 ‘특수통’으로 승승장구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검찰 내에서는 호남 출신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하지만 박 위원장은 순전히 ‘개인기’로 불리한 여건들을 이겨냈다.

영남 출신 일색이었던 대통령·검찰 수뇌부 아래에서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1·2·3과장, 서울지방검찰청 특수 1·2부장 등 검찰 요직을 두루 지냈다. 이때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외화 밀반출 사건, 손성훈 비리 사건 등 당대 굵직한 사건들을 맡아 처리했다.

1997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수사기획관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15대 대선에 얽혀 있던 ‘김대중 후보 비자금 의혹’의 수사 유보를 건의했다.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발탁되는 계기가 됐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면서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실 법무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직책은 향후 검사장 승진·검찰총장 후보군 부상 등이 사실상 보장되는 최고 요직으로 꼽혔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박 위원장을 “나와 역사를 함께 쓸 사람”이라고 칭할 정도로 신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5년간 순항하던 그의 출세 가도에도 암초가 나타났다. 1999년 벌어진 ‘옷 로비 의혹 사건’에서 공문서 유출 혐의로 구속됐기 때문이다. 이 바람에 청와대에서 쫓기듯 나와야 했다. 이후 해당 혐의는 치열한 법정 다툼 끝에 무죄가 선고됐다.

이듬해인 2000년에는 ‘명예 회복’을 명분으로 정계 입문을 선언,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인생은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제16대 총선에서 보성‧화순 지역구 공천을 신청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결국 첫 선거부터 탈당 후 무소속으로 나서는 모험을 감행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무소속임에도 불구하고 득표율 59.92%를 기록하면서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선 후에는 다시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했다.

정계 입문 뒤에도 ‘친정’인 검찰과의 악연은 계속 이어졌다. 검찰 수사로 정치생명에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초선 의원 임기 막바지이던 2004년, 검찰은 나라종금 뇌물수수와 현대건설 비자금 혐의 2가지를 묶어 박 위원장을 또다시 구속 기소한다. 당시 그는 검찰 조사를 마치고 나와 “차라리 정치를 그만두라고 하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악재는 다시 이어졌다. 그가 구속돼있던 때, 지역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보성군은 고흥군에, 화순군은 나주시로 병합됐다. 박 위원장은 고향인 보성이 포함된 고흥·보성 지역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옥중 출마까지 감행했지만, 그는 결국 17대 총선에서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낙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두 혐의는 훗날 모두 무죄 판결이 났다. 나라종금 뇌물수수 혐의는 같은 해 11월, 현대 건설 비자금 혐의는 2005년 5월 확정됐다.

결백이 입증된 날, 박 위원장은 김 전 대통령의 서울 동교동 자택을 찾아 위로를 구했다고 전해진다. 정치적 부담을 털어낸 후에는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민주당에 복당하는 등 재기를 준비했다. 그러다 2006년 제4회 지방선거에 출마한다.

처음에는 전남도지사 예비후보로 선거를 준비했다. 그러다 한화갑 당시 당 대표의 의중에 따라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전략공천됐다. 본선에서는 7.71%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낙선했다.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 열린우리당 강금실 후보에 이은 3위였다.

호남 괄시 
이겨냈다?

그는 18대 총선에서 새 출발을 알렸다. 줄곧 출마해오던 ‘고향’ 보성을 떠나 통합민주당 후보로 광주광역시 동구에 출마했다. 광주 동구는 금남로와 충장로 등 광주 중심가를 포함한 지역구로, 예전부터 ‘호남 정치 1번지’로 불려왔다.

박 위원장은 선거운동 당시 “광주시장과 동구청장, 지역 당원 5000명이 광주 동구로 와달라고 요청했다”며 “처음에는 주저하고 사양했지만 광주 동구의 낙후된 모습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라진 동구의 빛을 반드시 되살려놓겠다”고 출마의 변을 전했다.

그는 이곳에서 88.74%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며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당대 최고 득표율이었다. 여세를 몰아 당 최고위원 자리까지 오르며 정치적 입지를 쌓았다.

19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 출마를 준비했지만 무산될 위기에 처한다. 민주통합당이 19대 총선에서 광주 동구 지역구에 무공천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때 광주 동구에서 발생했던 ‘불법 선거인단 모집’ 사건의 여파였다. 

민주통합당 선거운동원으로 알려진 조모씨가 2012년 2월26일 선거인단 대리 모집 의혹으로 선관위 조사를 받던 도중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광주지검은 민주통합당 국민경선을 앞두고 사조직을 결성, 활동한 혐의로 동구 구의원과 통장 여러 명을 구속하기도 했다. 

지역구 현직 의원이었던 박 위원장도 수사망에 올랐다. 검찰은 그를 선거 사조직 운용·사전선거운동 혐의 등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사법고시 수석 출신…호남 4선 중진
4번 구속 4번 무죄 파란만장 정치역경


금품·동원 선거 논란이 급속도로 확산됐다. 민주당 지도부는 진상조사단 파견·동구 전략공천 지역구 선언 등 비판 여론 진화에 나섰지만 여의치 않았다. 결국 고육지책으로 ‘무공천’ 방침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박 위원장이 이에 반발해 탈당·무소속 출마하면서 내홍은 더욱 확산됐다. 당시 민주통합당을 탈당하고 광주 동구에 출마한 후보만 3명에 달했고, 다른 진보 정당 후보들도 가세하면서 범진보진영 후보들의 각축장이 됐다.

혼전 상황에서, 현직 의원이라는 강점을 살린 박 위원장이 결국 당선됐다. 18대 총선에서 전국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던 박 위원장은 19대 총선에서 전국 당선인 중 최저 득표율(31.55%)을 기록했다.

당선 후에도 위기는 계속됐다. 박 위원장은 ‘불법 선거인단 모집’ 사건으로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 중 국회에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돼 구속됐다가 선고 후 석방되는 고초도 겪었다.

연말에는 무소속 의원 신분으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 지지 의사를 발표하려다 자신의 지지자 30여명에게 끌려가 갇혀 기자회견을 열지 못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1년이 넘는 법정 다툼 끝에, 대부분의 혐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다만 동장들에 대한 지지 호소 부분만 죄가 인정돼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으며 의원직은 지켜냈다.


박 위원장은 판결 직후 ‘판결에 대한 소회’라는 입장을 내고 그간 겪어온 심적 고통을 토로했다. 그는 총 5번의 기소돼 4번 구속됐고, 구속된 사건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불사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는 입장문에 “그동안 ‘4번 구속, 4번 무죄’를 경험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정치 역경이었다”며 “상상할 수 없고 유례가 없는 동서고금 전후무후한 법살(法殺)이었다”고 적었다.

이후에는 전보다 순탄한 정치활동을 이어왔다. 통합신당 창당을 추진하다 국민의당으로 통합한 뒤, 최고위원 지명·20대 총선 당선(광주 동·남 을, 54.7%) 등을 시작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제20대 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했고, 국민의당 대선 예비후보로 나서 예비경선을 통과하기도 했다. 본선에서는 안철수 후보의 독주체제 아래에서 3위를 기록하는 데 그쳤지만 대선 패배 이후 비상대책위원장에 선출되는 등 중진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2018년 2월, 바른미래당 창당에 합류해 유승민 전 의원과 공동대표를 맡은 것을 마지막으로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4개월 뒤 치러진 제7회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바른미래당 해체 후 호남 다선 의원들과 민생당을 창당했지만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21대 총선에 출마해 낙선했다. 당의 좁은 입지와 공천 과정에서 불거진 내분 등이 패인으로 지목됐다.

‘친정’ 검찰
인연과 악연

박 위원장이 다시 정치적 존재감을 드러낸 건 지난해 말부터다. 박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또 다른 호남 4선 의원인 김동철 전 바른미래당 원내대표와 함께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 공개 지지선언에 나섰다.

그는 지지선언문에서 “공정과 정의, 상식은 우리 두 사람과 윤 후보가 만나는 지점”이라며 “정파를 떠나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고 본다. 민주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우리가 국민의힘 소속 윤 후보를 선택한 것은 그가 참된 공정과 정의를 실현할 유일한 후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12월에는 국민의힘 선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으며 전면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당시 대선후보)을 도왔다. 선대위 동서화합미래위원장도 겸임하며 윤 당선인이 호남 민심 소구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지난 1월 선대위가 해체된 이후에도 광주·전남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윤 당선인을 계속 지원해왔다. 당선 이후에는 대통령취임준비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윤 당선인이 지난 14일, 직접 연락해 “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은혜 대통령 당선인 대변인은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 브리핑에서 “박 위원장은 워낙 수많은 정치 역정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을 바꾸는 데 헌신적인 역할을 해왔다. 정의롭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완성하기 위해 국정 통합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은 윤석열정부의 가치와 철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며 “취임식 준비 위원장으로서 윤 당선인의 가치와 철학을 국민에게 전달하기에 가장 적임자”라고 인선 이유를 설명했다.

이날 박 위원장은  MBC라디오 <표창원의 뉴스 하이킥>에 출연해 임명 비화를 밝혔다. 그는 “처음에는 완곡히 사양했는데 재차 요청해 수락했다”며 “윤정부 출범부터 앞으로 끝날 때까지 성공하기 위해서는 조금의 밀알의 역할이라도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보수진영 대통령 취임식 총괄 진풍경
국무총리 등 차기 정부 역할론 ‘솔솔’

박 위원장은 임명 직후부터 위원회 구성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그는 같은 날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담당부처인 행정안전부로부터 연락이 오면 완벽한 취임식과 취임사를 준비할 수 있도록 탁월한 위원들을 모시겠다”고 약속했다.

박 위원장 설명에 따르면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는 위원 8명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위원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전례를 살펴보고 학계, 관계, 일반 국민 대표들을 망라해 대한민국 미래 비전을 담아내는 데 탁월한 능력과 경륜을 가진 분에게 기회를 드릴 생각”이라고 답했다.

또 박 위원장은 5·18광주민주화운동 정신을 취임사에 포함할지 실무진과 논의할 예정이다. 박 위원장은 지난 16일 <해럴드경제>와의 통화에서 “윤 당선인은 5·18정신이 그동안 헌법 전문에도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수차례 광주 정신을 강조해왔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대통령 취임사에서 5·18정신이 명시적으로 언급된 적은 없다. 논의가 구체화된다면 윤 당선인은 취임사에서 5·18정신을 언급한 최초의 대통령이 되는 셈이다. 만약 실현될 경우, 국민 통합을 논하며 ‘5·18정신을 계승한다’ 정도로 짧게 언급될 것이라는 게 주된 관측이다.

정계 일각에서는 박 위원장이 호남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관련 논의가 구체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고 있다.

박 위원장 역할론은 인수위원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 차기 정부 초대 국무총리 하마평에도 오르내리고 있다. 다만 인수위원회 측은 아직 국무총리 인선과 관련해 어떤 공식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박 위원장 역시 “전달받은 바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지난 16일 KBS라디오 <최강욱의 최강시사>와의 인터뷰에서 “크게 기대하거나 바라고 있지는 않다”면서도 “내가 바란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국민이 평가해주셔야만이 가능할 수 있는 일”이라며 여지를 남겼다.

인수위까지?
총리직까지? 

정치인생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화려하게 재기해왔던 ‘불사조’ 박 위원장. 21대 총선 낙선의 수모를 딛고 또다시 국내 정치 한복판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과연 그의 이번 여정은 어디까지일까. 그 종착지가 인수위원회일지, 국무총리실일지 온 정계가 주목하고 있다.

<jeongun15@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인수위 호남 인사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 안에는 박주선 대통령취임준비위원장 외에도 호남 인사들이 여럿 포진돼있다.

대표적으로는 김동철 전 의원, 국민의힘 이용호 의원, 장성민 세계와동북아포럼 이사장 등이 있다.

김 전 의원은 광주 광산구에서만 내리 4선을 쌓은 호남 중진 인사로 지난해 10월, 박 위원장과 함께 윤 당선인 공개 지지를 선언한 바 있다.

인수위에서는 윤 당선인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부위원장에 내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의원은 국민의힘 소속 의원 중 유일하게 호남(전라북도 남원시·임실·순창군)에 지역구를 둔 인사다.

제21대 총선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지난해 12월 윤 당선인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고 국민의힘에 전격 입당했다. 인수위에서는 정무사법행정분과 간사에 임명됐다.

장 이사장은 국민의 정부에서 초대 청와대 국정상황실장과 정무비서관을 지낸 동교동계 핵심 인사다. 전라남도 고흥 출신으로, 그간 ‘DJ 적자’라고 불려왔다. 

그는 대선 기간 중 윤 당선인에게 거침없이 ‘쓴소리’를 해온 것으로 전해지며 인수위에서는 정무특보를 맡았다. <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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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