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무기로 남은 이재명의 앞날

눈앞에 놓인 세 갈래의 길

[일요시사 정치팀] 정인균 기자 = ‘세상은 1등만 기억한다’는 문구가 한국사회를 뒤덮은 적이 있다. 2등과 3등도 노력해 이룬 성적이지만, 세상은 항상 1등만을 기억한다는 아쉬움이 섞인 소리다. 그러나 적어도 2022년 대선에는 이 문구가 먹혀들지 않아 보인다. 정계는 대선에서 2등을 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상임고문을 아직 잊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인사는 그가 정계에 조기 복귀해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사람은 살면서 여러 선택의 순간과 마주한다. 청소년기엔 무엇을 공부해 어떤 학교를 갈지 선택하고, 청년기엔 어떤 일을 하며 장래를 그려 나갈지, 또 누구와 만나 어떤 가정을 꾸려나갈지를 선택한다. 그때그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다.

역할인가
책임인가

정치인들의 정치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중요한 순간에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정치인은 대통령까지 클 수도 있고, 조기 은퇴 수순을 밟을 수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을 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네 번째 대권 도전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를 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대통령이 되지 못하고 정치 인생을 조기에 마감했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상임 고문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대선에서 패배하며 낙담하고 있을 그에게 민주당은 당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해 지방선거를 이끌어야 한다는 ‘역할론’을, 그리고 대선 패배를 책임지고 당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책임론’을 내놨다. 역할론을 제시한 쪽은 이재명 선거대책위원회에서 주요 보직을 맡았던 ‘친이(친 이재명)계’ 의원들이고 책임론을 제시한 쪽은 이낙연 전 대표를 비대위원장으로 모시자는 쪽의 ‘친문(친 문재인)계’ 의원들이다.

민주당 내부 목소리에 의하면, 대선 패배 후 선대위를 해체하기 직전 이 고문은 몇몇 친한 민주당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전 대표의 비대위원장 위촉에 반대할 뜻을 내비쳤다고 한다.

패배 후 당내 이권싸움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고문은 공식 대통령선거 기간인 지난 4일 선거유세 중에 “정치를 끝내기에는 아직 젊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그가 대선 패배를 가정하고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패배로 정계를 은퇴한다거나 대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뜻을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의 말처럼 이 고문은 정계 은퇴를 하기에는 너무 어리다.

올해 59세(만 57세)인 그는 정치인으로서 이미 약 10년의 커리어를 쌓은 베테랑이다.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 경력을 두루 갖춘 이 고문이 동년배 정치인 중에서 국정 경험은 압도적으로 깊다는 데 정치 평론가 모두가 동의한다.

이번 대선을 거치며 ‘비주류’ 정치인이었던 이 고문은 일약 ‘주류’ 정치인으로 탈바꿈했다. 경선부터 본선까지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율을 바탕으로 선거를 치러온 이 고문은 그간 패배한 민주당 대권주자들과는 다르게 정치적으로 많은 것을 얻으며 대선 레이스를 마쳤다.

그중 하나가 ‘차기 대권 가능성 확인’이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 일컬었던 이번 선거에서 보통 정치인이었으면 하나만 터졌어도 곤란했을 논란이 서너 가지가 연이어 터졌다.

여배우 스캔들부터 형수 욕설 논란, 아들의 도박 논란, 배우자의 갑질 논란, 그리고 대장동 비리 관여 의혹까지 굵직 굵직한 네거티브 뉴스가 매스컴을 장식할 때마다 이 고문의 입지는 좁아져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재빠른 사과와 진실 규명을 적절히 섞어가며 난관들을 헤쳐나갔다.

기지를 발휘한 이 고문의 대처 덕분에 지지율에는 큰 영향이 없었고, 오히려 대선 레이스 막판에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격차를 좁혀가는 양상을 그려내며 분전했다.

정계 조기 복귀해 당내 역할?
지방선거 다시 출마 가능성은?

일각에서는 ‘김대중 이후에 논란을 가장 잘 대처한 진보진영의 정치인’이란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본인 리스크나 도덕성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대중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내는 ‘정치’를 잘했다는 평가다.

선대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어떨 때 사과를 해야 하는지, 어떨 때 맞서 싸워야 하는지 이 고문에게는 본능적인 감각이 있다”고 전했다.

리더의 소양이 충분하다는 평가와 함께 나온 것이 이 고문의 ‘책임론’이다. 이처럼 능력 있고 힘 있는 리더가 지금 민주당 비대위에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현재 민주당은 윤호중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비대위가 구성돼있다.

민주당 선대위는 N번방 추적단 불꽃 활동가 박지현씨 등 참신한 인물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쇄신 분위기에 힘쓰고 있다. 민주당은 대선에서 많은 지지를 보내준 ‘이대녀’(20대 여자)'를 중심으로 선거 분위기를 개편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윤 비대위원장은 선대위에서 활동했던 ‘책임’져야 하는 인사다. 지도부가 모두 사퇴한 시점에 비대위를 꾸리기에 부적절한 인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비대위를 이끌 만큼의 여력도 충분하지 못하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현재 윤 비대위원장은 일부 민주당 지지자에게 문자 폭탄을 받는 등 ‘정치적 테러’를 겪고 있다. 다른 선대위 인사들처럼 선거 패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게 문자의 주 내용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고문에게 역할론이 제시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책임을 져야 하는 후보긴 하지만, 동시에 국민으로부터 지지율로 인정받은 후보이기에 지금 시점에 비대위원장을 맡을 능력이 있는 후보는 그뿐이라는 것이다.

당초 민주당 지도부는 이 전 대표에게 비대위원장을 맡기려 했으나 당내 분위기와 이 전 대표의 의지에 따라 무산됐다. 리더십 있고, 무게감 있는 인사가 부재한 탓에 돌고 돌아 이 고문에게까지 역할 제안이 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고문 또한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는 만큼, 이 제안이 성사될 가능성이도 있다.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가 후에 차기 당 대표로 선출된 사례는 과거에도 많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랬고, 문재인 대통령도 그랬다. 

바로 복귀?
경기 또지사?

다만 이 고문은 여의도 정치 경력이 전무하다는 점이 약점으로 꼽힌다. 일찌감치 이번 대선은 ‘0’선 의원 간의 대결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이 고문은 그간 민주당 대통령들과는 달리 국회에서 국회의원들과 함께 일해 본 경험이 없다. 지방 행정 이력만 갖추고 있는 이 고문의 세력은 결집도도 매우 약한 집단으로 평가된다.

비록 이번 대선에서 ‘주류’로 탈바꿈한 모양새지만, 당권이 약한 그에게 당 대표를 맡겨도 되는지 의구심을 품는 이가 많다. 아무래도 ‘친문파’ 의원이 대다수인 민주당 내에서 세력을 통합하기가 쉽지 않지 않겠냐는 걱정이다. 이 고문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캐릭터다.


워낙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언변으로 논란이 많이 된 탓에 같은 당에 있더라도 그에게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다고 내부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실제로 이번 경선이 끝난 후 민주당 지도부는 원팀을 표방했지만, 몇몇 중진 의원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 고문의 당선을 진심으로 돕지 않았다.

심지어 이낙연 경선 선거 캠프에 있던 한 인사는 윤 당선인의 캠프에 합류해 활약하는 등 분열을 우회적으로 내비치기도 했다.

리더로서의 재목으로서 당에 역량을 보여준 적 없는 이 고문은 이제 시험대 위에 섰다. 다수 의견을 무릅쓴 채 당권을 잡으려면 지난 대선 본선에서 보여준 능력을 이번 지방선거에서 보여줘야만 한다.

‘친문’과 ‘친이’의 대립이 극심한 민주당을 하나로 통합해 낼 수 있을지에도 정계 전문가들은 주목하고 있다. 사실 대선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하자마자 바로 당내로 복귀한 사례는 아직 없다. 모두 몇 개월에서 몇 년간 야인 생활을 거친 후에 정계로 돌아왔다.

역대 가장 많은 표차로 대선에서 진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제18대 총선이 있을 때까지 약 1년간 야인 생활을 했다. 후에 당의 요청으로 서울 동작구에 출마했으나 당시 한나라당 정몽준 후보에게 패하여 낙선한 뒤, 2009년에 무소속으로 전북 전주시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2010년 2월 민주당에 복당하며 대선 낙선 후 3년 후에나 본격적인 정치 재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

문 대통령 또한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패한 후 의원직만 유지하고 평당원으로 잠행을 이어오다 2015년에나 당 대표로 선출되며 다시 대권에 도전하게 된다.

200명에 전화
과연 의미는?

평균으로 치면 최근 민주당 후보들은 대권 패배 후 약 3년이 지나서야 세력을 갖추고 당내 실세로 복귀했다. 이 고문은 3주도 채 지나기 전에 당내 복귀설이 나왔기 때문에, 이는 너무 이례적인 데 많은 이가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배경에서 이 고문이 야인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이도 많다. 그간 대선에서 패배한 후보들이 그랬듯, 패배 후보는 시간을 갖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대통령선거는 가장 중차대한 선거다. 선거 승패는 당의 운명을 판가름할 만큼 무게감이 있기에 역대 대선에서 패배한 세력들은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 것을 관례처럼 여겼다.

이 고문이 정 전 장관, 문 대통령과 다른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대선 경선과 본선 과정에서 제기된 수많은 의혹들이 그를 휘감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고문에게는 사법 처벌의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 이 고문은 지난달 선거유세 과정에서 “저 지면은 감옥 갈 것 같다. 없는 죄도 만들어서 뒤집어 쓸 것 같다”며 상대 후보인 윤 당선인을 공격하는 동시에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듯한 발언을 해 눈길을 끈 바 있다.

대선 기간 지금 이 고문에게 걸린 검찰 수사는 배우자 김혜경씨 공무원 사적 동원 의혹, 허위 해명 혐의, 신천지 압수수색 거부에 대한 허위사실 공표 혐의, 김씨 법인카드 유용과 경기주택공사 합숙소 비선캠프 의속, TV토론에서 정영학 녹취록 왜곡 공개 혐의, 검사 사칭 전과 기록 허위 소명 의혹 등 6개다.

6건과 별개로 대장동 수사도 진척되고 있어 이 후보의 걱정은 날로 깊어지는 중이다. 최근 녹취록 공개와 관련자들의 증언이 하나둘 나오고 있는 분위기에서 이 고문은 자신을 위한 선택을 단행할 것으로 보인다.

당권을 잡는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이 고문은 지방선거에 직접 뛰어들 수도 있다. 야인인 채로 검찰과 수사를 받게 된다면 진영 차원의 방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 고문은 역대 대선 패배 후보들보다 빠르고 적극적인 정치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야인으로 지내다 다음 대선에?
당장 수사 받는 입장…선택은?

선거 패배 후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 이 고문은 민주당 모든 국회의원과 자신을 도운 인사 약 200명에게 직접 안부 인사를 하며 정계 복귀 신호탄을 날렸다.

이 고문이 실제로 노리고 있는 것이 당권인지, 지방선거 출마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 고문 스스로가 야인으로 생활하고 싶지는 않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파악된다.

민주당 입장에서도 차기 대권후보 한 명을 잃는 것은 뼈아픈 손해이기에 그의 정계 복귀를 서둘러 지원할 수 있다. 검찰수사가 진행되고 사법 처벌을 받는 등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면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이 얻었던 모든 것을 다시 빼앗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 후보이 지방선거에서 공천받을 만한, 유력하게 점쳐지는 자리는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그리고 경기도지사까지 세 자리다.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모두 민주당 인사들의 실책으로 국민의힘에 내준 자리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은 큰 표 차이로 국민의힘에 패배했다.

박원순 전 시장과 오거돈 전 시장은 모두 성추문 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난 바 있다. 정치 평론가들은 민주당이 이 자리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대선주자급의 무게감 있는 후보가 출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범한 후보로 민심을 돌리기에는 역부족할 것이란 판단이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서울시장 후보는 임종석 전 비서실장, 우상호 의원,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정도인데, 이들을 모두 제치고 이 고문이 나갈 가능성도 적지 않다.

서울시장뿐 아니라 경기도지사도 가능성이 높다. 이 고문은 지난 민주당 경선이 끝난 후 최종 후보에 당선됐음에도, 끝까지 경기도지사직 사퇴를 미뤄온 바 있다. 국정감사를 도지사 자격으로 참여해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였다.

이 고문이 경기도지사직에 애착이 남달랐다는 건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는 지난달 선거유세 과정에서 자신의 도지사 시절 업적을 언급하며 “경기도지사 시절 도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며 “시민들은 제가 도지사일 때 가장 도지사다웠다고 말해주셨다”고 언급했다.

경기도지사 민주당 후보로는 현재 안민석 의원 등이 거론되고 있다. 경기도지사에는 민주당의 귀책 사유가 없기 때문에, 대선 직전까지 도지사로 일했던 이 고문이 복귀한다면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자리다.

당선 가능성과 무게감으로 본다면 이 고문이 경기도지사에 출마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민주당 고위 인사들은 전한다.

사법 처벌
큰 타격

민주당은 또 다른 승부를 목전에 두고 있다. 패배는 이미 지나갔고, 돌이킬 수 없다. 지금 민주당이 해야 할 것은 패배에 대한 성찰과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상대의 약점 분석, 그리고 당의 쇄신이다. 명분과 사익에 집착하지 말고 승리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만을 연구해야 한다. 이 고문이 어떤 역할을 할 때 당의 승리 가능성이 가장 높아지는지 지금 민주당 비대위는 필사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ingyun@ilyosisa.co.kr>

 

<기사 속의 기사> 민주당은 문자 폭탄 전쟁 중?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는 대선 경선이 끝나자마자 미국행을 암시한 바 있다. 그는 1년 정도 미국에 머무르며 남북 관계와 국제 정치 등을 대해 공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대선 뒤로 연기됐다. 지방선거까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상임고문의 대선 지원 요청 때문이었다.

이 전 대표는 당의 선대위 수장직까지 맡아가며 총력 지원하는 이례적 행보를 보였다. 이 정도로 도와줬어도 이 고문의 지지자들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요즘 민주당 인사들에게 이 고문 지지자들이 문자 폭탄을 돌리는 중이다. 국민의힘과는 달리 당에서 이 고문을 총력 지원 안 했다는 의심에서다.

실제로 원팀 구성과 당의 전폭적인 지지는 약 한 달 남짓 남았을 때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경선 때의 앙금을 씻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언론들은 ‘친문’ ‘친문’ 사이에 있던 감정의 골이 대선 패배를 계기로 수면 위로 드러나는 중이라고 평가한다.

윤호중 비대위원장에는 ‘친문’ 지지자들이, 이낙연 측 인사들에게는 ‘친이’ 지지자들이 문자 폭탄을 보내며 다투고 있다.

당을 쇄신해야 하는 민주당은 지금 서로 물어뜯기 바쁘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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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