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저작권료 '편취형' 사재기의 비밀

차트 빈틈 노리는 음원 사기꾼들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음원 스트리밍을 조작해 음원 순위를 조작한다는 개념의 ‘음원 사재기’는 가요계의 화두다. 최근 가수 영탁의 소속사 대표가 음원 사재기를 의뢰했다는 정황이 밝혀지면서 재점화됐다. 음원 플랫폼 업체는 지속해서 “음원 사재기가 없다“고 밝히고 있고, 분명한 증거도 없지만 이를 믿지 못하는 대중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 가운데 플랫폼 기업의 빈틈을 이용한 사재기는 존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른바 ‘생계형 사재기’다. 최근에는 ‘저작권료 편취형 사재기’로 명칭을 바꿨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국회와 방송계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온 적 있다. 넷플릭스가 국내 콘텐츠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수익을 거둬들인 데 반해 국내 제작사가 받는 인센티브가 너무 적다는 내용이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넷플릭스를 향한 국회와 일부 언론의 비판을 대신 막아준 건 대중이다. 넷플릭스의 수많은 작품이 실패했을 때는 아무런 보호를 하지 않다가 <오징어 게임>으로 수익을 얻자 인센티브가 적다는 비판을 하는 건 지나친 욕심이라는 게 당시 반박의 요지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콘텐츠 산업은 ‘하이 리스크 & 하이 리턴’의 구조를 갖고 있다. 실패할 확률이 높은 만큼, 성공했을 때 수익도 매우 큰 산업이다. 이런 구조는 대형 킬러 콘텐츠의 수익이 다른 콘텐츠의 손실을 막아주는 형태도 띤다. 

하이 리스크 & 하이 리턴 구조는 비단 넷플릭스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영화계나 드라마, 음악 콘텐츠도 비슷하다. <극한직업>과 <기생충> 등 공전의 히트작이 대거 개봉한 2019년은 한국 영화계가 이전 해보다 약 1000억원의 매출을 더 기록한 해다.


이전에 4500억원의 총매출을 기록했다면, 2019년에는 5500억원가량의 수익을 거뒀다. 당시 30억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된 상업 영화 45편 중 수익을 거둔 영화는 18편에 불과했다. 즉 27편의 영화는 손실이 불가피했다는 얘기다. 

이는 콘텐츠 산업이 평균값보다는 중앙값을 더 중시하는 배경이다. 중앙값보다 값이 낮으면 손실, 높으면 수익으로 계산한다. 

스트리밍 1회에 저작권료 약 4.2원
1분5초짜리 BGM, 한 달 내내 돌려

음악 산업은 영화 산업보다 부익부 빈익빈의 차이가 극심하다. 가온차트에서 제작한 유튜브 채널 ‘OK-POP’에 따르면 국내 굴지의 음원사이트인 멜론, 벅스, 지니 등에 수록된 모든 곡은 약 3000만곡이다. 이 중에서 1년에 단 1회라도 스트리밍이 되는 곡은 500만곡이며, 2500만곡은 한 번도 스트리밍이 되지 못하고 사장된다. 

유의미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가온지수 차트-인(Chart-in) 200위는 0.00066%의 확률을 뚫고 올라간 곡들이다. 보기에 따라서 로또 당첨 확률보다 더 적은 수치일 수 있다. 차트-인이 되고 이른바 스타의 수준으로 발돋움하면, 광고나 행사 등으로 어마어마한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음악 사업자 중에는 성공을 위해 음원 스트리밍 조작을 시도한다. 단 한 번만이라도 성공하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어서다. 특히 과거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기 전, 다운로드 시장이 스트리밍 시장보다 더 클 때는 이른바 음원 사재기를 시도한 정황이 정말 많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불법적으로 음악 시장의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음악 사업자를 막아내기 위해 각종 음원 플랫폼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해왔다. 업계에서는 지속적인 모니터링 결과 ‘성공한 음원 사재기는 없다’고 확신하고 있다. 


총 3000만곡
1/5만 선택

특히 0.00066%에 해당하는 200위권 내 곡들은 가온차트와 해당 플랫폼에서 예리하게 관찰했다는 것. 적어도 200위권 내에 진입하려면 10만 단위의 청취자가 필요하다. 불특정 다수가 불특정 장소에서 청취해야만 한다. 

10만 단위의 아이디를 활용하려면 최소 수십억원의 비용이 발생하는데, 100만명 청취자가 한 달 내내 들어도 음원 수익은 약 2억원 내외다. 코로나19로 자영업자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최근 음악 제작사가 벌어들이는 수익은 거의 반 토막이 났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OK-POP 영상에 따르면 국내 음원 플랫폼은 대중이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범주에서 모든 검토를 했으며, 200위권 내 곡에서는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음원 사재기 감별법’이라는 영상도 제작한 상태다. 

해당 영상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1위곡과 2위곡의 청취자는 겹치기 마련이다. 대부분 톱100을 틀어놓으며, 그런 경우 1위부터 듣기 때문에 상위권 곡들의 청취자가 겹친다는 것. 사재기 음원은 최소 2위곡과 겹치지 않아야 하는데, 이러면 데이터가 분명히 튀기 때문에 잡힐 수밖에 없다는 게 요지다. 

만약 이를 예상하고 2위곡도 함께 스트리밍한다면, 2위곡은 기존 청취자가 이른바 사재기 곡보다 많으므로 사재기곡은 1위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국내 음원 사이트에서 1위를 기록한 곡들은 대중이 말하는 사재기로 볼 수 없다는 얘기다.

1위 노래
사정권 밖

한 음원 플랫폼 관계자는 “현재 국내 음원 플랫폼 사이트는 한 장소에서 100~200개의 아이디로 스트리밍을 조작하려는 시도마저 걸러낼 정도로 보안이 촘촘하다”며 “숀과 닐로, 가수 박경의 공론화 시점까지 세 차례 이상의 대규모 조사가 있었다. 성공한 음원 사재기는 없다고 확신한다”고 밝혔다. 

그런 가운데 음원 사재기 논란이 발발한 2018년부터 지난해 초까지 음원 플랫폼이 대규모 조사를 하던 중에 이른바 ‘생계형 사재기’가 발견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대중이 인지하고 있는 차트-인 목적이 아닌 저작권료를 노린 형태다. 국내에서 1회 스트리밍이 될 때마다 약 4.2원의 저작권료가 발생한다. 이 4.2원을 대규모로 부풀리는 작업이 ‘생계형 사재기’라는 명칭이었다. 

무명의 음악 사업자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저지른 방법이라 해서 ‘생계형 사재기’라 했지만, 이 역시 음악 시장을 교란시키는 편법일 뿐 아니라 ‘생계형’이라는 단어가 측은지심을 유발하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최근에는 ‘저작권료 편취형 사재기’라고 명명한다. 

“한 달 1000만원 벌어간 무명 작곡가 있다”
“업계 통틀어 유일하게 성공한 음원 사재기”


저작권료 편취형 사재기는 매우 의도성이 짙다. 업계에 따르면 한 청취자가 약 3분가량의 곡을 끝까지 듣지 않고, 단 1분까지만 들어도 저작권료를 줘야 한다. 이를 알고 있는 무명 작곡가 A는 가창이 없는 1분5초짜리 멜로디를 수백 곡을 제작해, 한 달 내내 스트리밍을 돌렸다고 한다.

당시 A는 한 달 동안 약 1000만원 이상의 수익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음원 플랫폼 관계자에게서 직접 들은 얘기다. 음악 사업자 A가 수백곡을 한 달 내내 종일 튼 것으로 확인됐으며, 1000만원 이상을 벌었다고 한다. 음원 플랫폼이 이를 확인했고, A는 법적 조치를 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는 최근 국내에서 벌어진 음원 사재기 중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사재기로 알려졌다. 하지만 해당 음원 플랫폼 관계자는 “위의 사례가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음원 스트리밍을 조작하는 시도는 무수히 많이 일어나고 있다. 약 100개에서 200개의 아이디를 활용해 스트리밍을 조작하는 사례는 말할 수 없이 많다는 것.

순위권 진입에 어림도 없는 수치라 하더라도 음원 플랫폼에서 이상 흐름을 감지하면, 해당 소속사에 경고한다. 심한 경우 계약 해지를 하기도 한다. 


100∼200개
아이디로 조작 

한 관계자는 “국내 음원사이트는 차트 방식을 바꾸거나,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아주 작은 이상 흐름만 감지되더라도 조치를 취하고 있다.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사재기를 시도했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상식적인 범주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intellybeast@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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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