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끼리 왜 이래' 극악무도 패륜범죄 실상

아들이 아버지를… 손자가 할머니를…

[일요시사 취재1팀] 차철우 기자 = 가족은 ‘천륜’이라고 불린다. 부모와 자식이 하늘의 도리로 이뤄져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천륜도 이젠 옛말이다. ‘패륜범죄’가 만연해서다. 

나이가 여든 가까이 됐지만 할머니는 평소처럼 손자를 위해 주름진 손으로 교복을 빨았다. 빨랫줄에는 정성스럽게 빨아 걸어둔 교복이 지금도 널려 있다. 그런 할머니를 손자가 칼로 찔러 살해했다. 형제가 할머니를 살해한 이유는 잔소리가 심하고, 심부름을 시켜서였다.

남보다
못한 사이

할머니를 살해한 고등학생 형제가 지난달 30일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존속살인 혐의로 형제 관계인 A군과 B군을 체포했다. 경찰 조사 결과 A군은 같은 날 새벽 0시10분경 자택에서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과 어깨 등을 30차례 찌른 혐의를 받는다.

현장에 도착한 구급대가 할머니를 병원으로 옮기며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할머니는 끝내 숨졌다. 

경찰은 할아버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 A군과 B군을 현행범으로 붙잡았다. 이 과정에서 동생인 B군도 함께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범행 당시 할아버지는 하반신을 거의 사용하지 못해 범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 할머니와 손자 사이에 특별한 갈등이 있지도 않고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말 한마디 때문에 가족을 살해한 일은 또 있었다. 바로 1994년 벌어진 ‘박한상 부모 살해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대표적인 패륜범죄로 남아있다. 부모를 살해했던 박씨는 부족함 없이 자라왔다. 아버지가 100억원대 자산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풍족해서다. 

아버지는 박씨에게 사업을 물려주기 위해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평소 공부에 관심이 없던 박씨는 대학 진학 후 유흥에 빠졌다. 유학을 가서는 도박을 하거나 용돈을 받아 탕진하는 등 사치를 일삼았다.

부모가 박씨에게 “넌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며 질책하자 이에 분노해 범행 계획을 세웠다. 서울 일대를 돌아다니며 칼과 휘발유를 산 뒤 기회를 엿봤다.

3일 뒤 박씨는 집에 불을 냈다. 화재는 주택을 전부 태울 만큼 크게 번졌다. 2층으로 구성된 주택의 지하 1층이 완전히 불에 탔다. 

소방당국과 경찰은 화재를 진압한 뒤 감식을 위해 집으로 들어가 불에 탄 박씨의 부모 시신을 발견한다. 시신에는 칼에 찔린 흔적이 가득했다. 몸 곳곳 50군데가 찔려 피가 흘렀다. 

말 거슬리면 칼 드는 사회
구성원 줄면서 범죄율 상승


부검 결과 부모는 화재로 인해 사망한 게 아니라 흉기에 찔려 사망한 것으로 판명됐다. 단순 화재사건에서 살인사건으로 수사 방향이 전환됐다. 

조사 과정에서 박씨는 “급하게 나오느라 부모님을 구하지 못했다”며 울었다. 경찰은 ‘자식이 부모를 죽일 리 없다’며 몇 가지 조사만 진행한 뒤 용의선상서 제외했다. 이후 경찰은 부모의 원한 관계 등을 조사했으나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하는 등 수사 진행이 순조롭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제보 하나로 인해 수사가 진전을 보였다. 

박씨를 치료한 간호사가 “박씨 발목에 물린 자국이 있고, 머리에 피가 묻어있었다”는 제보를 하면서다. 경찰은 박씨를 상대로 재차 수사를 벌였고, 박씨가 자백을 하면서 사건이 종결됐다. 

범행 동기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대한 보복과 ‘유산 상속에 대한 욕심’으로 드러났다. 해당 사건은 여론의 공분을 샀다. 박씨가 키워준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점에서다.

검거된 박씨는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현재 박씨는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복무 중인 상태다. 박씨 사건 이전만 해도 패륜범죄는 전례를 찾기 힘들었을 만큼 잔혹한 범죄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재 패륜범죄는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다. 패륜범죄란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빚어진 범죄를 일컫는다. 

법적으로 인정되는 패륜범죄는 존속살해, 존속상해, 존속폭행 등과 같이 주로 ‘존속에 대해 용인되지 않는 폭력적 범죄행위’로 국한돼 규정한다. 형법상 자신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상대로 살인, 상해, 폭행, 유기, 학대, 체포, 감금, 협박 등의 범죄를 저지른 경우다.

법에서는 해당 행위를 ‘존속범죄’로 보고 일반 범죄에 비해 더 큰 중형이 내려진다. 일반 살인의 경우 법정형이 사형,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임에 반해 존속살해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잔소리
한다고…

검찰청이 최근 5년간 접수한 존속 대상 범죄 사건은 2016년 3277건, 2017년 2978건, 2018년 3424건, 2019년 3767건, 지난해 3825건이다. 올해 상반기 통계에서는 이미 2000건을 넘어서 지난해 건수를 넘어설 전망이다.

지난해 존속 대상 범죄 중에서는 폭행이 2817건으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 뒤이어 상해 432명, 협박 374건, 살해 81건 등이다. 비율로 보면 폭행·상해가 84.9%, 살해는 2.1%에 달한다.


신고하지 않은 범죄까지 합하면 존속 대상에 대한 패륜범죄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법과학회지에 실린 ‘한국의 존속살해와 자녀살해 분석’ 논문에 따르면 존속살해의 주요 범행 동기 중 가정불화(49.34%), 경제 문제(15.22%)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김대근 한국형사 법무정책연구원 부패경제범죄연구실장은 “과거 가족은 혈연을 중심으로 긴밀한 생활 공동체였지만 최근 개념이 희석됐다”며 “기존 가치관이 와해된 탓에 갈등이 부각됐다”고 설명했다. 

과거 대가족 중심사회에서는 친인척 등이 개입해 질책이 쉽게 가능했다. 이는 가족 간 공동체 의식이 약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가족 간 소통도 문제 중 하나다. 최근에는 핵가족화로 인해 구성원 간 위계질서로 이뤄진 전통적 가족관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가족 구성원 간 존중이 사라진 대목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핵가족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가족끼리 서로 지지하거나 도와주는 기능이 축소됐다”며 “과거에는 친척이 함께 그 역할을 했는데, 현재는 이 같은 행위가 축소돼 폭행, 살인 등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패륜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인 셈이다.

그 밖에도 패륜범죄 발생 원인은 인성교육의 부재, 물질만능주의, 자녀의 늦은 독립 등이 있다. 가족의 기능과 의미보다는 개인의 물질 추구가 더 중요해진 현실이 반영된 탓으로 풀이된다.

끝까지
숨겨줘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존속살해는 동양 문화권에서 자주 발생하는 범죄”라며 “일찍 가족과 떨어져 사는 서구문화권에서는 잘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녀 과보호와 높은 기대심리로 부모의 잣대에 맞추어 가기를 강요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자녀가 독립에 대한 불안감으로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써 범행을 택한다고 보인다. 

가족 간 패륜범죄의 또 다른 문제점은 발생 가능성이 다른 중범죄에 비해 높다는 점이다. 사회구조의 변화와 유대감이 약화된 상태에서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구성원은 빈번하게 마주친다. 

가족끼리의 신뢰가 무너진 상태에서 공동의 주거 공간 안에 있는 가족이야말로 언제든지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구조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생활 반경 안에서 마주치는 횟수와 시간이 증가함에 따라 범죄 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패륜범죄는 폭언과 폭행에서 시작된다. 폭행에서 시작된 패륜범죄는 살해까지 이어기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패륜범죄는 우발적인 상황보다는 가족 간의 사소한 범법행위들이 누적되면서 나타난다.

존속폭행은 직계존속에게 폭행을 가했을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다만 상해 정도가 중상 미만일 경우 피해자가 용서를 한다면 처벌할 수 없다. 반의사불벌죄가 적용되는 탓이다.

신고가 들어와 수사기관에서 존속폭행, 존속협박죄에 대해 조사를 한다고 해도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면 처벌되지 않는다. 

핏줄이라서 신고 못 하고 은폐
국가적 대책 시스템 마련 필요

한 전문가는 “현재 존속범죄에 대한 실태 파악과 대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며 “패륜범죄 가해자를 단죄하고, 사건에 대한 사례 분석만으로 범죄를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패륜범죄의 더 큰 문제는 특성상 범행이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피해를 입더라도 자식 등이 형사처벌을 받는다는 점을 우려해 범죄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경우에만 신고하는 경우가 다수다.

또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족이기 때문에 범죄 발생 장소가 가정으로 한정된다. 자식이라는 이유로 잘못을 용인한다는 점에서도 실제 신고하는 데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도 가족 간 패륜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여전히 미흡하다. 패륜범죄를 개인의 비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로만 여기고 대안이 마련된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패륜범죄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살해까지 이어지는 범행동기를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패륜범죄 행위를 금지할 필요성이 제기된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패륜범죄가 발생하기 전 사회의 인식 전환과 효율적인 치료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또 가족 중심 사회의 보양·부양이 해소돼야 패륜범죄 등의 존속살해 근절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사회 특성상 가족 간 접촉이 많고, 기대감이 높은 상황이 패륜범죄의 발단이 된다는 분석이다. 

자녀의 개성이나 적성 등을 고려할 필요도 제기된다. 진학이나 진로선택 등에 있어서 자녀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의미다. 과거 예의를 강조했던 점과는 다르게 최근에는 이 같은 교육이 부족한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인성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이러한 패륜범죄가 근절될 수 있다고 여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패륜범죄에 대해 가정의 통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실정이다. 따라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국가가 적극 개입해 통제해야 한다는 것. 

패륜범죄를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가족의 연대성 약화에 따른 사회 문제 현상 중 하나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의 문제?
연대성 약화

이에 대해 한 전문가는 “패륜범죄 현상에 대한 정확한 규명과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패륜범죄는 형량 가중으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국가가 적극 개입하지 않는다면 패륜범죄의 발생 빈도는 더욱 증가 한다”고 지적했다.


<ckcjfd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심각한 비속범죄 실상
부모가 자식에 하면 괜찮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존속·비속 관련 범죄가 함께 증가하는 추세다. 존속범죄의 경우 가중 처벌 대상이지만 비속범죄는 다르다.

비속범죄란 부모가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를 뜻한다. 최근 아동 학대 등 부모들의 비속 범죄도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존속범죄는 가중처벌의 대상인 반면 비속범죄는 그렇지 않다. 특히 살해에 대해선 형량의 차이가 존재한다. 

아동 학대 등 끊이지 않아
관련 법 개정 필요성 대두

존속살해는 잔혹성, 패륜성 탓에 가중처벌이 적용된다. 하지만 비속의 경우 가중처벌 규정이 없다. 이에 비속범죄에도 존속범죄와 똑같은 처벌 수준을 적용해야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2월 ‘정인이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성인 자녀 등을 대상으로 한 비속범죄는 여전히 일반 살인죄만 적용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부모가 자식에 저지르는 범죄는 체벌이나 훈육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법을 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 지적했다.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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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