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차철우 기자 = 가족은 ‘천륜’이라고 불린다. 부모와 자식이 하늘의 도리로 이뤄져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천륜도 이젠 옛말이다. ‘패륜범죄’가 만연해서다.
나이가 여든 가까이 됐지만 할머니는 평소처럼 손자를 위해 주름진 손으로 교복을 빨았다. 빨랫줄에는 정성스럽게 빨아 걸어둔 교복이 지금도 널려 있다. 그런 할머니를 손자가 칼로 찔러 살해했다. 형제가 할머니를 살해한 이유는 잔소리가 심하고, 심부름을 시켜서였다.
남보다
못한 사이
할머니를 살해한 고등학생 형제가 지난달 30일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존속살인 혐의로 형제 관계인 A군과 B군을 체포했다. 경찰 조사 결과 A군은 같은 날 새벽 0시10분경 자택에서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과 어깨 등을 30차례 찌른 혐의를 받는다.
현장에 도착한 구급대가 할머니를 병원으로 옮기며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할머니는 끝내 숨졌다.
경찰은 할아버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 A군과 B군을 현행범으로 붙잡았다. 이 과정에서 동생인 B군도 함께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범행 당시 할아버지는 하반신을 거의 사용하지 못해 범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 할머니와 손자 사이에 특별한 갈등이 있지도 않고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말 한마디 때문에 가족을 살해한 일은 또 있었다. 바로 1994년 벌어진 ‘박한상 부모 살해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대표적인 패륜범죄로 남아있다. 부모를 살해했던 박씨는 부족함 없이 자라왔다. 아버지가 100억원대 자산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풍족해서다.
아버지는 박씨에게 사업을 물려주기 위해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평소 공부에 관심이 없던 박씨는 대학 진학 후 유흥에 빠졌다. 유학을 가서는 도박을 하거나 용돈을 받아 탕진하는 등 사치를 일삼았다.
부모가 박씨에게 “넌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며 질책하자 이에 분노해 범행 계획을 세웠다. 서울 일대를 돌아다니며 칼과 휘발유를 산 뒤 기회를 엿봤다.
3일 뒤 박씨는 집에 불을 냈다. 화재는 주택을 전부 태울 만큼 크게 번졌다. 2층으로 구성된 주택의 지하 1층이 완전히 불에 탔다.
소방당국과 경찰은 화재를 진압한 뒤 감식을 위해 집으로 들어가 불에 탄 박씨의 부모 시신을 발견한다. 시신에는 칼에 찔린 흔적이 가득했다. 몸 곳곳 50군데가 찔려 피가 흘렀다.
말 거슬리면 칼 드는 사회
구성원 줄면서 범죄율 상승
부검 결과 부모는 화재로 인해 사망한 게 아니라 흉기에 찔려 사망한 것으로 판명됐다. 단순 화재사건에서 살인사건으로 수사 방향이 전환됐다.
조사 과정에서 박씨는 “급하게 나오느라 부모님을 구하지 못했다”며 울었다. 경찰은 ‘자식이 부모를 죽일 리 없다’며 몇 가지 조사만 진행한 뒤 용의선상서 제외했다. 이후 경찰은 부모의 원한 관계 등을 조사했으나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하는 등 수사 진행이 순조롭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제보 하나로 인해 수사가 진전을 보였다.
박씨를 치료한 간호사가 “박씨 발목에 물린 자국이 있고, 머리에 피가 묻어있었다”는 제보를 하면서다. 경찰은 박씨를 상대로 재차 수사를 벌였고, 박씨가 자백을 하면서 사건이 종결됐다.
범행 동기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대한 보복과 ‘유산 상속에 대한 욕심’으로 드러났다. 해당 사건은 여론의 공분을 샀다. 박씨가 키워준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점에서다.
검거된 박씨는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현재 박씨는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복무 중인 상태다. 박씨 사건 이전만 해도 패륜범죄는 전례를 찾기 힘들었을 만큼 잔혹한 범죄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재 패륜범죄는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다. 패륜범죄란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빚어진 범죄를 일컫는다.
법적으로 인정되는 패륜범죄는 존속살해, 존속상해, 존속폭행 등과 같이 주로 ‘존속에 대해 용인되지 않는 폭력적 범죄행위’로 국한돼 규정한다. 형법상 자신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상대로 살인, 상해, 폭행, 유기, 학대, 체포, 감금, 협박 등의 범죄를 저지른 경우다.
법에서는 해당 행위를 ‘존속범죄’로 보고 일반 범죄에 비해 더 큰 중형이 내려진다. 일반 살인의 경우 법정형이 사형,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임에 반해 존속살해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잔소리
한다고…
검찰청이 최근 5년간 접수한 존속 대상 범죄 사건은 2016년 3277건, 2017년 2978건, 2018년 3424건, 2019년 3767건, 지난해 3825건이다. 올해 상반기 통계에서는 이미 2000건을 넘어서 지난해 건수를 넘어설 전망이다.
지난해 존속 대상 범죄 중에서는 폭행이 2817건으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 뒤이어 상해 432명, 협박 374건, 살해 81건 등이다. 비율로 보면 폭행·상해가 84.9%, 살해는 2.1%에 달한다.
신고하지 않은 범죄까지 합하면 존속 대상에 대한 패륜범죄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법과학회지에 실린 ‘한국의 존속살해와 자녀살해 분석’ 논문에 따르면 존속살해의 주요 범행 동기 중 가정불화(49.34%), 경제 문제(15.22%)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김대근 한국형사 법무정책연구원 부패경제범죄연구실장은 “과거 가족은 혈연을 중심으로 긴밀한 생활 공동체였지만 최근 개념이 희석됐다”며 “기존 가치관이 와해된 탓에 갈등이 부각됐다”고 설명했다.
과거 대가족 중심사회에서는 친인척 등이 개입해 질책이 쉽게 가능했다. 이는 가족 간 공동체 의식이 약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가족 간 소통도 문제 중 하나다. 최근에는 핵가족화로 인해 구성원 간 위계질서로 이뤄진 전통적 가족관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가족 구성원 간 존중이 사라진 대목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핵가족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가족끼리 서로 지지하거나 도와주는 기능이 축소됐다”며 “과거에는 친척이 함께 그 역할을 했는데, 현재는 이 같은 행위가 축소돼 폭행, 살인 등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패륜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인 셈이다.
그 밖에도 패륜범죄 발생 원인은 인성교육의 부재, 물질만능주의, 자녀의 늦은 독립 등이 있다. 가족의 기능과 의미보다는 개인의 물질 추구가 더 중요해진 현실이 반영된 탓으로 풀이된다.
끝까지
숨겨줘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존속살해는 동양 문화권에서 자주 발생하는 범죄”라며 “일찍 가족과 떨어져 사는 서구문화권에서는 잘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녀 과보호와 높은 기대심리로 부모의 잣대에 맞추어 가기를 강요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자녀가 독립에 대한 불안감으로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써 범행을 택한다고 보인다.
가족 간 패륜범죄의 또 다른 문제점은 발생 가능성이 다른 중범죄에 비해 높다는 점이다. 사회구조의 변화와 유대감이 약화된 상태에서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구성원은 빈번하게 마주친다.
가족끼리의 신뢰가 무너진 상태에서 공동의 주거 공간 안에 있는 가족이야말로 언제든지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구조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생활 반경 안에서 마주치는 횟수와 시간이 증가함에 따라 범죄 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패륜범죄는 폭언과 폭행에서 시작된다. 폭행에서 시작된 패륜범죄는 살해까지 이어기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패륜범죄는 우발적인 상황보다는 가족 간의 사소한 범법행위들이 누적되면서 나타난다.
존속폭행은 직계존속에게 폭행을 가했을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다만 상해 정도가 중상 미만일 경우 피해자가 용서를 한다면 처벌할 수 없다. 반의사불벌죄가 적용되는 탓이다.
신고가 들어와 수사기관에서 존속폭행, 존속협박죄에 대해 조사를 한다고 해도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면 처벌되지 않는다.
핏줄이라서 신고 못 하고 은폐
국가적 대책 시스템 마련 필요
한 전문가는 “현재 존속범죄에 대한 실태 파악과 대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며 “패륜범죄 가해자를 단죄하고, 사건에 대한 사례 분석만으로 범죄를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패륜범죄의 더 큰 문제는 특성상 범행이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피해를 입더라도 자식 등이 형사처벌을 받는다는 점을 우려해 범죄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경우에만 신고하는 경우가 다수다.
또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족이기 때문에 범죄 발생 장소가 가정으로 한정된다. 자식이라는 이유로 잘못을 용인한다는 점에서도 실제 신고하는 데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도 가족 간 패륜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여전히 미흡하다. 패륜범죄를 개인의 비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로만 여기고 대안이 마련된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패륜범죄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살해까지 이어지는 범행동기를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패륜범죄 행위를 금지할 필요성이 제기된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패륜범죄가 발생하기 전 사회의 인식 전환과 효율적인 치료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또 가족 중심 사회의 보양·부양이 해소돼야 패륜범죄 등의 존속살해 근절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사회 특성상 가족 간 접촉이 많고, 기대감이 높은 상황이 패륜범죄의 발단이 된다는 분석이다.
자녀의 개성이나 적성 등을 고려할 필요도 제기된다. 진학이나 진로선택 등에 있어서 자녀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의미다. 과거 예의를 강조했던 점과는 다르게 최근에는 이 같은 교육이 부족한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인성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이러한 패륜범죄가 근절될 수 있다고 여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패륜범죄에 대해 가정의 통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실정이다. 따라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국가가 적극 개입해 통제해야 한다는 것.
패륜범죄를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가족의 연대성 약화에 따른 사회 문제 현상 중 하나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의 문제?
연대성 약화
이에 대해 한 전문가는 “패륜범죄 현상에 대한 정확한 규명과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패륜범죄는 형량 가중으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국가가 적극 개입하지 않는다면 패륜범죄의 발생 빈도는 더욱 증가 한다”고 지적했다.
<ckcjfd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심각한 비속범죄 실상
부모가 자식에 하면 괜찮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존속·비속 관련 범죄가 함께 증가하는 추세다. 존속범죄의 경우 가중 처벌 대상이지만 비속범죄는 다르다.
비속범죄란 부모가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를 뜻한다. 최근 아동 학대 등 부모들의 비속 범죄도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존속범죄는 가중처벌의 대상인 반면 비속범죄는 그렇지 않다. 특히 살해에 대해선 형량의 차이가 존재한다.
아동 학대 등 끊이지 않아
관련 법 개정 필요성 대두
존속살해는 잔혹성, 패륜성 탓에 가중처벌이 적용된다. 하지만 비속의 경우 가중처벌 규정이 없다. 이에 비속범죄에도 존속범죄와 똑같은 처벌 수준을 적용해야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2월 ‘정인이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성인 자녀 등을 대상으로 한 비속범죄는 여전히 일반 살인죄만 적용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부모가 자식에 저지르는 범죄는 체벌이나 훈육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법을 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 지적했다.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