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끼리 왜 이래' 극악무도 패륜범죄 실상

아들이 아버지를… 손자가 할머니를…

[일요시사 취재1팀] 차철우 기자 = 가족은 ‘천륜’이라고 불린다. 부모와 자식이 하늘의 도리로 이뤄져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천륜도 이젠 옛말이다. ‘패륜범죄’가 만연해서다. 

나이가 여든 가까이 됐지만 할머니는 평소처럼 손자를 위해 주름진 손으로 교복을 빨았다. 빨랫줄에는 정성스럽게 빨아 걸어둔 교복이 지금도 널려 있다. 그런 할머니를 손자가 칼로 찔러 살해했다. 형제가 할머니를 살해한 이유는 잔소리가 심하고, 심부름을 시켜서였다.

남보다
못한 사이

할머니를 살해한 고등학생 형제가 지난달 30일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존속살인 혐의로 형제 관계인 A군과 B군을 체포했다. 경찰 조사 결과 A군은 같은 날 새벽 0시10분경 자택에서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과 어깨 등을 30차례 찌른 혐의를 받는다.

현장에 도착한 구급대가 할머니를 병원으로 옮기며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할머니는 끝내 숨졌다. 

경찰은 할아버지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 A군과 B군을 현행범으로 붙잡았다. 이 과정에서 동생인 B군도 함께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범행 당시 할아버지는 하반신을 거의 사용하지 못해 범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 할머니와 손자 사이에 특별한 갈등이 있지도 않고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말 한마디 때문에 가족을 살해한 일은 또 있었다. 바로 1994년 벌어진 ‘박한상 부모 살해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대표적인 패륜범죄로 남아있다. 부모를 살해했던 박씨는 부족함 없이 자라왔다. 아버지가 100억원대 자산가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풍족해서다. 

아버지는 박씨에게 사업을 물려주기 위해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평소 공부에 관심이 없던 박씨는 대학 진학 후 유흥에 빠졌다. 유학을 가서는 도박을 하거나 용돈을 받아 탕진하는 등 사치를 일삼았다.

부모가 박씨에게 “넌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라며 질책하자 이에 분노해 범행 계획을 세웠다. 서울 일대를 돌아다니며 칼과 휘발유를 산 뒤 기회를 엿봤다.

3일 뒤 박씨는 집에 불을 냈다. 화재는 주택을 전부 태울 만큼 크게 번졌다. 2층으로 구성된 주택의 지하 1층이 완전히 불에 탔다. 

소방당국과 경찰은 화재를 진압한 뒤 감식을 위해 집으로 들어가 불에 탄 박씨의 부모 시신을 발견한다. 시신에는 칼에 찔린 흔적이 가득했다. 몸 곳곳 50군데가 찔려 피가 흘렀다. 

말 거슬리면 칼 드는 사회
구성원 줄면서 범죄율 상승


부검 결과 부모는 화재로 인해 사망한 게 아니라 흉기에 찔려 사망한 것으로 판명됐다. 단순 화재사건에서 살인사건으로 수사 방향이 전환됐다. 

조사 과정에서 박씨는 “급하게 나오느라 부모님을 구하지 못했다”며 울었다. 경찰은 ‘자식이 부모를 죽일 리 없다’며 몇 가지 조사만 진행한 뒤 용의선상서 제외했다. 이후 경찰은 부모의 원한 관계 등을 조사했으나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하는 등 수사 진행이 순조롭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제보 하나로 인해 수사가 진전을 보였다. 

박씨를 치료한 간호사가 “박씨 발목에 물린 자국이 있고, 머리에 피가 묻어있었다”는 제보를 하면서다. 경찰은 박씨를 상대로 재차 수사를 벌였고, 박씨가 자백을 하면서 사건이 종결됐다. 

범행 동기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대한 보복과 ‘유산 상속에 대한 욕심’으로 드러났다. 해당 사건은 여론의 공분을 샀다. 박씨가 키워준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점에서다.

검거된 박씨는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현재 박씨는 사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복무 중인 상태다. 박씨 사건 이전만 해도 패륜범죄는 전례를 찾기 힘들었을 만큼 잔혹한 범죄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재 패륜범죄는 지속적으로 증가 추세다. 패륜범죄란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빚어진 범죄를 일컫는다. 

법적으로 인정되는 패륜범죄는 존속살해, 존속상해, 존속폭행 등과 같이 주로 ‘존속에 대해 용인되지 않는 폭력적 범죄행위’로 국한돼 규정한다. 형법상 자신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상대로 살인, 상해, 폭행, 유기, 학대, 체포, 감금, 협박 등의 범죄를 저지른 경우다.

법에서는 해당 행위를 ‘존속범죄’로 보고 일반 범죄에 비해 더 큰 중형이 내려진다. 일반 살인의 경우 법정형이 사형,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임에 반해 존속살해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잔소리
한다고…

검찰청이 최근 5년간 접수한 존속 대상 범죄 사건은 2016년 3277건, 2017년 2978건, 2018년 3424건, 2019년 3767건, 지난해 3825건이다. 올해 상반기 통계에서는 이미 2000건을 넘어서 지난해 건수를 넘어설 전망이다.

지난해 존속 대상 범죄 중에서는 폭행이 2817건으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 뒤이어 상해 432명, 협박 374건, 살해 81건 등이다. 비율로 보면 폭행·상해가 84.9%, 살해는 2.1%에 달한다.


신고하지 않은 범죄까지 합하면 존속 대상에 대한 패륜범죄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법과학회지에 실린 ‘한국의 존속살해와 자녀살해 분석’ 논문에 따르면 존속살해의 주요 범행 동기 중 가정불화(49.34%), 경제 문제(15.22%)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김대근 한국형사 법무정책연구원 부패경제범죄연구실장은 “과거 가족은 혈연을 중심으로 긴밀한 생활 공동체였지만 최근 개념이 희석됐다”며 “기존 가치관이 와해된 탓에 갈등이 부각됐다”고 설명했다. 

과거 대가족 중심사회에서는 친인척 등이 개입해 질책이 쉽게 가능했다. 이는 가족 간 공동체 의식이 약해졌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가족 간 소통도 문제 중 하나다. 최근에는 핵가족화로 인해 구성원 간 위계질서로 이뤄진 전통적 가족관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가족 구성원 간 존중이 사라진 대목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핵가족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가족끼리 서로 지지하거나 도와주는 기능이 축소됐다”며 “과거에는 친척이 함께 그 역할을 했는데, 현재는 이 같은 행위가 축소돼 폭행, 살인 등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패륜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원인 중 하나인 셈이다.

그 밖에도 패륜범죄 발생 원인은 인성교육의 부재, 물질만능주의, 자녀의 늦은 독립 등이 있다. 가족의 기능과 의미보다는 개인의 물질 추구가 더 중요해진 현실이 반영된 탓으로 풀이된다.

끝까지
숨겨줘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존속살해는 동양 문화권에서 자주 발생하는 범죄”라며 “일찍 가족과 떨어져 사는 서구문화권에서는 잘 발생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녀 과보호와 높은 기대심리로 부모의 잣대에 맞추어 가기를 강요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자녀가 독립에 대한 불안감으로 심리적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써 범행을 택한다고 보인다. 

가족 간 패륜범죄의 또 다른 문제점은 발생 가능성이 다른 중범죄에 비해 높다는 점이다. 사회구조의 변화와 유대감이 약화된 상태에서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구성원은 빈번하게 마주친다. 

가족끼리의 신뢰가 무너진 상태에서 공동의 주거 공간 안에 있는 가족이야말로 언제든지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구조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은 생활 반경 안에서 마주치는 횟수와 시간이 증가함에 따라 범죄 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패륜범죄는 폭언과 폭행에서 시작된다. 폭행에서 시작된 패륜범죄는 살해까지 이어기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패륜범죄는 우발적인 상황보다는 가족 간의 사소한 범법행위들이 누적되면서 나타난다.

존속폭행은 직계존속에게 폭행을 가했을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이나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다만 상해 정도가 중상 미만일 경우 피해자가 용서를 한다면 처벌할 수 없다. 반의사불벌죄가 적용되는 탓이다.

신고가 들어와 수사기관에서 존속폭행, 존속협박죄에 대해 조사를 한다고 해도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면 처벌되지 않는다. 

핏줄이라서 신고 못 하고 은폐
국가적 대책 시스템 마련 필요

한 전문가는 “현재 존속범죄에 대한 실태 파악과 대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며 “패륜범죄 가해자를 단죄하고, 사건에 대한 사례 분석만으로 범죄를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패륜범죄의 더 큰 문제는 특성상 범행이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피해를 입더라도 자식 등이 형사처벌을 받는다는 점을 우려해 범죄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경우에만 신고하는 경우가 다수다.

또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족이기 때문에 범죄 발생 장소가 가정으로 한정된다. 자식이라는 이유로 잘못을 용인한다는 점에서도 실제 신고하는 데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도 가족 간 패륜범죄를 방지하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은 여전히 미흡하다. 패륜범죄를 개인의 비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로만 여기고 대안이 마련된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패륜범죄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살해까지 이어지는 범행동기를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패륜범죄 행위를 금지할 필요성이 제기된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패륜범죄가 발생하기 전 사회의 인식 전환과 효율적인 치료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또 가족 중심 사회의 보양·부양이 해소돼야 패륜범죄 등의 존속살해 근절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사회 특성상 가족 간 접촉이 많고, 기대감이 높은 상황이 패륜범죄의 발단이 된다는 분석이다. 

자녀의 개성이나 적성 등을 고려할 필요도 제기된다. 진학이나 진로선택 등에 있어서 자녀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는 의미다. 과거 예의를 강조했던 점과는 다르게 최근에는 이 같은 교육이 부족한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인성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뤄져야 이러한 패륜범죄가 근절될 수 있다고 여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패륜범죄에 대해 가정의 통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실정이다. 따라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국가가 적극 개입해 통제해야 한다는 것. 

패륜범죄를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가족의 연대성 약화에 따른 사회 문제 현상 중 하나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의 문제?
연대성 약화

이에 대해 한 전문가는 “패륜범죄 현상에 대한 정확한 규명과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패륜범죄는 형량 가중으로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국가가 적극 개입하지 않는다면 패륜범죄의 발생 빈도는 더욱 증가 한다”고 지적했다.


<ckcjfdo@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심각한 비속범죄 실상
부모가 자식에 하면 괜찮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존속·비속 관련 범죄가 함께 증가하는 추세다. 존속범죄의 경우 가중 처벌 대상이지만 비속범죄는 다르다.

비속범죄란 부모가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범죄를 뜻한다. 최근 아동 학대 등 부모들의 비속 범죄도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존속범죄는 가중처벌의 대상인 반면 비속범죄는 그렇지 않다. 특히 살해에 대해선 형량의 차이가 존재한다. 

아동 학대 등 끊이지 않아
관련 법 개정 필요성 대두

존속살해는 잔혹성, 패륜성 탓에 가중처벌이 적용된다. 하지만 비속의 경우 가중처벌 규정이 없다. 이에 비속범죄에도 존속범죄와 똑같은 처벌 수준을 적용해야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2월 ‘정인이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성인 자녀 등을 대상으로 한 비속범죄는 여전히 일반 살인죄만 적용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부모가 자식에 저지르는 범죄는 체벌이나 훈육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법을 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 지적했다.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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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