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전 일이다.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는 딸아이가 한 공연기획사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고 계약서를 가지고 왔다. 기쁜 마음으로 계약서를 찬찬히 살펴보고는 말미에 딸아이를 통해 기획사 측에 아빠의 말이라 전하라며 계약 불가를 통보했다.
한 개인의 인격의 침해 그리고 성폭력 등 유사행위에 대해 딸아이가 을의 위치에 서있는 내용으로 기록돼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가수가 (갑인)기획업자 또는 그와 관련된 사람들로부터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범죄(성폭력, 성추행 등)를 당한 경우 법원 판결이 내려지면 을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얼핏 살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필자가, 그리고 보통의 상식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살피면 심하게 표현해서 가증스럽다. 성범죄 특성상 입증도 어렵지만 최종 법원인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긴 시간을 다시 가해자와 함께해야 한다니, 이는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격이 된다. 성범죄를 당한 피해자는 당한 그 순간 동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조처해 지속되는 피해를 예방하는 게 최선임은 불문가지다.
여하튼 딸아이를 통해 계약불가를 전달받은 기획사 대표로부터 즉각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필자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첨언도 덧붙였다. 그런 이유로 그를 만나 계약서 전반에 관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제시한 표준계약서 내용을 그대로 인용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속으로 절로 육두문자가 떠올랐다. 잠시 쓰디쓴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획사 대표에게 필자가 앞서 언급한 사항들과 관련해 내 아이가 갑에 위치에 서야함을 역설했다.
비근하게 상기 조항을 ‘가수가 (갑인)기획업자 또는 그와 관련된 사람들로부터 육체적, 정신적으로 성범죄(성폭력, 성추행 등)를 당한 경우 혹은 당했다는 타당한 정황이 존재하는 경우 계약은 바로 종료된다’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사람이 젊어서 그런지 혹은 열린 마음의 소유자인지 필자의 의견을 흔쾌히 모두 수용하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내 아이가 갑의 위치에 서는 내용으로 계약서를 수정하고 받아들였다.
이제 최근에 발생한, 성폭력 피해를 당하고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공군 여중사 사건에 초점을 맞춰보자.
이를 위해 군형법 제 15장 ‘강간과 추행의 죄’ 중 3항(강제추행) ‘폭행이나 협박으로 제1조제1항부터 제3항까지에 규정된 사람(군인 혹은 군무원)에 대해 추행을 한 사람은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를 인용한다.
동 법조항을 살피면 앞서 필자가 인용했던 문화체육관광부의 표준계약서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말인즉 우리의 법은 물론 현대인들은 성폭력과 일반적 폭력을 동일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 폭력과는 달리 성폭력은 당한 그 순간으로 끝을 맺지 않고 오히려 그 이후의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기하고 있다.
결국 여중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도록 만든 주요 요인은 성폭력과 일반 폭력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이 사회의 어리석음 탓으로 돌려도 무방하다.
아울러 진정 성폭력으로 인한 제 2차 피해를 방지하고자 한다면 필자가 요구했던 방식, 피해자가 성폭력을 당할 당시의 환경에서 곧바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