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예능 늦둥이’ 허재의 인생 3막

방송가 접수한 웃기는 아저씨

[일요시사 취재1팀] 차철우 기자 =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성격이 불 같다.” 다혈질의 아이콘이었던 살아있는 농구 전설 슈퍼스타 허재. 이제는 예능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은 사람이 됐다. 첫 고정 예능 <뭉쳐야 찬다>에서 화려한 입담을 자랑하고, 실제 알려진 성격과는 다른 허당미를 뿜어내더니 예능에 없어서는 안 될 섭외 1순위가 됐다. 끝을 모르고 치솟는 주가를 올리고 있는 그에 대해 살펴봤다. 
 

▲ 허재 ⓒJTBC

“한국 농구 사상 최고의 테크니션.” 농구 대통령 허재를 두고 팬들이 한 말이다. 경기장 밖에서는 사생활 논란과 비판이 많았지만, 농구 코트에서 보여준 그의 플레이에 대한 열정과 실력으로 누구보다 찬사받은 선수다. 팬들은 그가 다른 선수와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농구선수였다고 기억한다.

슈퍼스타
농구 대통령

허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농구를 시작했다. 타고난 재능과 끈질긴 성격으로, 어렸을 적부터 농구 골대 그물이 찢어질 때까지 연습했다고 전해진다. 일찍부터 농구에 두각을 보인 허재의 승부사 기질은 어린 시절부터 두드러졌다. 전국 초등학교 농구대회 결승전에서는 종료 2초를 남기고 역전 슛을 성공시키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허재가 주축이 된 팀은 다른 팀과의 경기에서 전승을 거뒀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그가 주목을 받은 시기는 고등학교 농구부 시절이다. 특급 가드로 불리던 1학년 때 종별 선수권 대회에서 팀의 첫 우승을 이뤄냈다.

압도적 재능을 펼치던 2학년 때는 지난 1982년 아시아 청소년 농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졸업을 앞둔 대회 결승전에서 독보적인 어시스트와 득점력을 앞세워 팀을 정상에 올렸다. 전국 대학팀은 스타가 된 허재 모시기에 나섰는데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경쟁이 유독 치열했다.


그의 다음 행선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뜨거웠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중앙대학교에 진학한다. 고등학교 시절 완성형 선수라 불리던 허재는 대학팀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슈퍼스타의 싹을 보인 그는 신인상, 어시스트상 등 상이라는 상은 전부 휩쓸며, 대학 선수 이상의 능력을 보였다. 1986년 열린 농구대잔치에 참가한 중앙대학교는 허재를 앞세워 실업팀을 격파하고 결승까지 올라가는 이변을 일으켰다. 비록 그의 팀은 결승전에서 졌지만 허재의 활약은 눈부셨다.

1987년 중앙대학교에 강동희가 입학하며 한국 농구 전설의 트리오라 불린 허동택(허재·강동희·김유택)이 한 팀으로 함께 뛰었다. 이들은 출전한 경기마다 많은 업적을 쌓았다. 심지어 중앙대학교는 많은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해 4학년 농구대잔치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팬들은 허재의 불참을 두고 “허재 없는 올해 농구대회의 관중이 줄었다”며 아쉬워했다.

이는 경기에 참여하지 않아도 허재의 슈퍼스타로서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그는 ‘대학 선수 중 단연 최고’라는 수식어로 실업팀으로 갈 준비를 끝냈다.

불 같은 성격 접고 푸근하게
“방송이 시드는 날 살려줬다”

대학 최고 스타의 졸업은 실업팀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실업팀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액수의 계약금을 제시하고, 허재가 오기만을 바랐다. 그가 선택한 팀은 기아자동차(이하 기아)였다. 기아를 선택한 이유는 한기범과 허동택 트리오 중 다른 한 명인 김유택이 있기 때문이었다.


허재가 합류한 지 1년 뒤, 후배 강동희 합류로 다시 뭉친 허동택 트리오는 농구대잔치 7회 우승의 대기록을 세웠다. 기아의 시대를 아무도 끝낼 수 없었다. 

선수로서 항상 최고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것과 대조적으로, 내내 그가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판과 논란 역시 선수 생활 내내 끊이지 않았다. 팬들은 허재의 성격과 개인기,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보냈다. 

더불어 허재가 약한 팀과의 경기 전날이면 과음을 하고 나타나 눈에 힘이 없고, 플레이할 때 힘겨운 모습을 보여 농구 팬들의 원성을 샀다. 실제로 그는 선수로서 최고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 크고 작은 논란이 많았다. 위태로운 최고였다.

심판이 상대팀 선수의 반칙을 인정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며 항의해 논란도 많았다. 할 말은 해야 하는 성격 때문에 경기 중 상대편 선수의 폭행에 대해 분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화냈던 상황이 문제였다.
 

팀의 내부 문제까지 생겼다. 몇몇 선수들이 은퇴하자, 팀은 제대로 된 선수를 기용할 수 없어 전력이 점차 쇠퇴했다. 이 문제는 주전선수들의 체력 부담으로 이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유택과 한기범의 부상이 잦아졌고, 선수들의 기량이 하락했다는 지적들이 많았다. 당시 실업 농구계에선 한국 나이 30세는 노장이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끊임없는 논란과 악재 속에 1994년 농구대잔치에서 허재의 팀은 모교 후배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선수 은퇴 후 허재는 이를 두고 “커리어 중 대망신”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최고의 자리에서 추락하자 그는 위기를 느꼈다. 그는 선수로서의 가치를 다시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1995년 농구대잔치에서 심기일전한 허재가 맹활약해 MVP를 수상했고, 기아는 우승을 차지했다. 비로소 허동택 트리오 이름에 걸맞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다음 시즌 농구팬들은 “곧 기아의 시대가 끝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주협 등이 이끌던 고려대학교가 무서운 기세로 승승장구할 것이라는 예측과 이상민을 필두로 입대한 스타 선수들로 이뤄진 상무의 기량이 최고로 만개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빵빵 터지는
유쾌한 입담

다시 최고가 되기 위해 허동택 트리오와 새로 입단한 김영만은 최선을 다했다. 선수들의 부상과 체력 저하 등의 악조건 속에서 기아는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위기 중 기회였을까. 허재는 플레이오프 8강 2차전에서 SBS를 상대로 50득점을 기록해 여전히 그가 왕임을 과시했다. 기아는 그해 결승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기아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은 허재도 “이 이상의 최악은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더욱 열악한 상황이었다. KBL이 새로 출범했지만, 그때까지는 아무도 그를 넘을 수 없었다. 1998년 현대와의 결승전에서 그는 팬들이 눈물을 흘릴 만큼 맹활약한다.

오른손의 손등 뼈가 부러지고, 피가 나도 개의치 않고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고 그를 비판했던 팬들은 결국 침묵했다. 7차전까지 이어진 명승부에서 아쉽게 패배했지만, 허재는 챔피언 결정전 준우승팀 최초 MVP를 받았다. 현재까지도 준우승팀 선수 중 MVP를 받은 사례는 그가 유일하다. 
 

▲ 예능 프로그램 &lt;뭉쳐야 쏜다&gt; ⓒJTBC

허재가 농구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유를 모두가 확실히 알게 된 순간이다. 당시 허재의 나이는 은퇴의 갈림길에 선 34세였다. 당시 한 매체는 그를 “상처 입은 사자가 다른 맹수에 포위당한 채, 공격을 당하면서도 결연하게 싸워나가는 모습이 연상됐다”고 평가했다. 

기아에서 시즌을 마무리하고 선수로서의 마지막 생활을 위해 나래 블루버드로 팀을 옮겼다. 선수로서 능력이 전성기 시절보다 하락했지만 새로 이적한 팀에서 자신의 능력 저하를 인정하고 후배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해,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2003년 시즌 마지막 우승을 달성한 허재는 1년 정도 선수생활을 이어가다가 2004년 정규리그가 끝나고 은퇴하며 “지도자를 준비하기 위해 코트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농구 대통령은 잠시 농구공을 내려놨다. 농구 대통령의 선수 인생이 화려하게 막을 내린 순간이다. 

인생 1막이 끝나고 2막을 시작하기 위해 그가 날아간 곳은 미국이었다. 2년 동안 객원 코치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그러던 중 감독직을 제안받고 귀국해 2005년 KCC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허재는 KBL 출범 후 최초의 농구선수 출신 감독이 됐다. 큰 우려와 달리 첫 해에 팀을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으며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감독을 맡은 두 번째 시즌은 베테랑 선수의 은퇴와 악재가 겹쳐 최하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감독으로서의 역량에 대한 의문이 계속 수면 위로 떠올랐다. 


허재는 자신의 역량에 의문을 갖는 팬들의 논란을 종식하기 위해 팀을 이끌고 다음 시즌을 철저하게 준비시켰다. KCC는 2008년 정규리그 2위 업적을 달성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팀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2009년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시작으로 KCC를 챔피언 자리에 앉혔다. 이로써 허재는 선수와 감독으로 우승을 경험한 최초의 감독이 됐다. 

“그거슨 아니지”
 허당미 발산

수장으로서 선수 트레이드 및 영입을 활용해 팀의 컬러를 압박과 속공으로 바꿔 좋은 결과를 끌어냈다는 점을 많은 사람이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논란 속에서 KCC를 과감하게 변신시킨 후 팀을 우승시키고, 승승장구하며 감독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감독이었지만 농구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누구보다 뜨거웠다.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이 열정으로 비쳤던 것일까. 무조건 화내며 심판 판정에 대해 많은 항의를 했지만, 선수 시절의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팬들은 더 이상 이를 논란거리로 만들지 않았다. 
 

실제로 허재의 팀이 모비스와 붙은 경기에서 모비스 선수가 KCC 선수의 손을 친 적 있었다. 반칙으로 인정되지 않자 흥분한 나머지 화를 내며 ‘Block’이라는 단어를 ‘불낙’이라고 어눌하게 발음해 많은 패러디를 탄생시켰다.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을 때는 중국과 경기 후 인터뷰 중 중국 기자가 “중국 국가가 나오는데 한국 선수들이 움직인 이유”에 대해 질문 하자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 하고 있어, 짜증나게”라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허재의 답변이 큰 이슈가 돼 여론은 “잘 대처했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중은 그가 할 말은 해야 하는 다혈질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불같은 성격은 농구에 대한 사랑으로 비쳤다. 은퇴 후 허재는 한 방송에서 자신의 성격에 대해 “화낼 때만 카메라에 담기고 선수들을 독려하는 모습은 거의 중계되지 않았다”고 뒷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허재의 성격에 대해 선수들은 “감독님은 화낼 때 정말 무섭지만 슬럼프에 빠지거나 무명인 선수도 자신 있게 경기 하라며 독려한다. 선수들의 활약을 끌어 낸 사람”이라고 말했다. 허재는 감독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 그의 팀 성적은 점점 하락했다.

결국 10년 동안 이끌던 KCC를 떠나게 된 허재는 “팀의 성적이 좋지 않으니 책임지고 자진해서 사퇴한다”는 말을 남기고 농구계를 두 번째로 떠났다. 성적 하락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고, 지휘봉을 내려놨다.

이후 2016년 한국 농구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지만 아들 허웅·허훈을 발탁해 논란이 발생했고, 성적 부진을 남긴 채 국가대표 감독에서 하차했다. 선수로서의 화려한 마무리와는 다르게 다소 씁쓸한 농구 인생 2막이 끝났다.

팬들 기억과 다른 인간적인 면모
예능계 이끌 새로운 스타로 우뚝

1년의 정비 시간을 가진 허재는 농구가 아닌 방송으로 자신의 복귀를 알렸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농구 전설의 첫 고정 예능 출연이었다. JTBC <뭉쳐야 찬다>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알만한 스포츠계 전설들이 뭉쳐 함께 축구 경기를 하는 스포츠 예능이다. 

허재는 처음에 농구가 아닌 축구라서 출연을 고민했다. 제작진과 출연에 대해 상의하며 고량주 6병을 마셨다고 전해진다. 그는 출연 이유로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 PD가 나를 설득하는 모습이 마음에 와닿았고, 추억이 될 것 같아 출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선수, 감독 때 쉽게 화내던 모습과는 다르게 여유로운 모습과 불평과 불만은 많지만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어딘가 어리숙한 행동을 대중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너털웃음 짓는 코 큰 50대 후반 아저씨 캐릭터에 모두가 손뼉을 친다. 

팀이 찬 공을 손으로 잡거나, 헛발질하는 허당의 모습을 보여준 허재는 화려한 애드리브로 “그거슨 아니지”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내는 등 빠르게 예능을 섭렵하고 있다. <뭉쳐야 찬다>를 시작으로 농구 대통령에서 예능 대통령으로 변화하는 모습이 팬들을 사로잡았다. 
 

▲ 절친 사이로 알려진 허재(사진 오른쪽)와 박중훈

수많은 토크 예능은 발 빠르게 그를 섭외하기 시작했다. 그가 앞으로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는 <뭉쳐야 찬다>에 나오는 것 이상은 힘들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긴 하다. 하지만 허재라는 사람 자체를 보여준 것으로 왕년 스타의 인간적인 모습을 대중은 두 팔 벌려 환영한다.

허당끼 있는 동네 아저씨 캐릭터는 대중에게 정확히 먹혔고, 이번 방송을 통해 스타에 대한 옛 추억을 떠올리며 “그때는 허재가 최고였지”라는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뭉쳐야 찬다>에 이어 농구에 도전하는 <뭉쳐야 쏜다>에서 허재는 감독을 맡았다. <뭉쳐야 쏜다>는 첫 방송부터 시청률 7%라는 기록을 세우며 시청자들을 안방으로 불러 모았다. 안정환은 선수로, 허재는 감독으로 출연해 뒤바뀐 입장에서 티격태격하는 케미가 부각되자 대중의 반응은 뜨겁다. 

이제는 
스포테이너

과거에는 무거운 왕관을 지고 힘들게 버텨온 감독의 자리였지만 지금은 예능인으로서 허당 감독 캐릭터로 도전하고 있다. 농구 레전드의 농구 특급 과외와 허당이라는 숨겨진 면모가 시너지를 발휘하게 될지 많은 사람이 주목한다.

허재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방송은 시들어가는 나를 다시 살려줬다. 계속 기회가 주어진다면 처음 농구하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안정환, 서장훈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만능 스포테이너로 변신하는 중이다. 

앞으로 그가 가진 허당 캐릭터와 과거 농구선수 시절 보여주었던 열정적인 행보를 보인다면, 예능 캐릭터의 발굴이 쉽지 않은 예능가에 단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또 과거 농구 전설은 머지않아 예능 전설로 방송계에 한 획을 그을 것이라는 기대가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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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단독] 김건희 일가 연루 의혹 ‘선라이즈F&T’ 주주명부 공개

갈수록 증폭되는 평택 논란 이제야 공개된 소소한 흔적 쉽게 거두지 못하는 의심 의미심장 세력 교체 과정 [일요시사 취재1팀] 양동주 기자 = 소문이 어느덧 사실처럼 인식되고 있다. 명확한 물증이 없는 가운데 파편적인 의혹이 덧씌워진 양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으며, 흐름을 파악할 만한 유의미한 흔적이 이제야 겨우 나왔을 뿐이다. 증폭된 의혹 뒤편에서 여전히 진실은 빼꼼히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9월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황해경제자유구역에 자리 잡은 유일한 농산물 가공 업체로, 그간 심심치 않게 밀수 의혹을 받아왔다. 가공 목적으로 수입한 농산물을 가공 없이 시중에 유통시켜 엄청난 차익을 봤다는 꼬리표가 뒤따랐다. 의혹하는 눈초리 선라이즈에프앤티가 취급했던 대다수 농산물이 고관세 품목이라는 점은 이 같은 의혹을 부채질했다. 그간 선라이즈에프앤티는 ▲녹두 ▲콩나물콩 ▲다대기(혼합양념) ▲생강 ▲마늘 ▲참깨 ▲팥 ▲서리태 등 높은 세율이 붙는 고관세 품목을 주로 수입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 예로 콩나물콩의 경우 그대로 들여와 국내에 유통하면 487% 관세가 부과되지만, 콩나물 재배 목적으로 수입하면 27%만 반영된다. 평택세관에 몸담았던 다수의 전직 세관공무원이 기업 출범 및 운영에 관여했다는 점도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심지어 선라이즈에프앤티 이사진에 포함됐던 특정 세관 출신 임원이 한때 다이아몬드 밀수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사례도 존재한다. 수년 전부터는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선라이즈에프앤티의 밀수 의혹을 수차례에 걸쳐 제기했던 공익 제보자 이성열씨가 재판에 연루되는 과정에서 김건희씨의 모친인 최은순씨가 거론됐던 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지핀 형국이다. 이런 가운데 정치평론가인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이 최근 ‘평택항’을 언급하자,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은 사실처럼 받아들여질 정도가 됐다. 장 소장은 SBS라디오 <김태현의 뉴스쇼>가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 김건희씨 일가의 수상한 물건 수입 의혹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장 소장은 “최은순씨가 주인으로 있는 농수산물 수입업체에서 이상한 것을 들고 오려고 하다가 걸려서 (김건희) 오빠와 김건희씨가 그것을 무마시키려고 여러 가지 이상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며 “어떤 물건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부적절한 물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급기야 선라이즈에프앤티의 폐업이 알려지자, 의혹은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양상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국세청 사업자 과세 유형 조회 결과 지난 10일자로 폐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폐업자로 조회된 지난 10일은 김건희 특검법이 공포된 시기와 맞물린다. 물론 꾸준히 의혹이 제기된 것과 별개로, 김건희씨 일가와 선라이즈에프앤티 간 연관성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는 상황이다. 특히 주주명부가 지금껏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게 의혹과 진실을 구분 짓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일요시사>가 최초 입수한 주주명부는 간접적으로나마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로 작용할 여지를 남긴다. 의문 해소 첫 단추 2022년 10월 작성된 ‘카리나에프앤티(선라이즈에프앤티에서 2020년 9월 상호 변경) 주주명부’를 검토한 결과 주주는 총 17명, 발행주식은 91만8400주(1주당 5000원)로 확인됐다. 2010년 9월 자본금 5억원으로 설립된 선라이즈에프앤티는 수차례 증자를 거쳤고, 해당 시기에 자본금을 45억9200만원으로 늘린 상태였다. 일단 주주명부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대신 경영권 교체 과정이나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법인 등기와 주주명부를 교차 검증한 결과를 토대로 추정하면, 표면상 선라이즈에프앤티 지배 세력은 ‘전직 세관공무원(설립~2018년 중순)→지엔티에이치(~2020년 중순)→킴스에O엔O(~2022년 초순)→동OO앤에스(~2025년 6월)’ 순으로 변경된 흐름이다. 첫 번째 경영권 교체는 ‘펀딩하이 연체 사건’과 함께 발생했다. 펀딩하이는 중국·동남아시아에서 농산물을 수입하는 업체에 돈을 빌려 주고, 투자자들에게 15% 이상 수익을 보장하는 펀딩 상품으로 인기를 끌던 P2P 업체였다. 그러나 펀딩하이는 2018년 6월20일 ‘마늘 시즌2-17차(모집 금액 3억원, 차주 승리산업)’ 펀딩 상품의 연체를 시작으로 ▲세척 당근 시즌2-18차(모집금액 5억원, 차주 지엔티에이치) ▲김치 펀딩 2차(모집금액 1억2000만원, 차주 상아농산) ▲번데기 펀딩 1차(모집금액 1억8000만원, 차주 월량완코리아) 등에서 차주의 투자금 상환 실패를 알렸다. 연체 금액은 ▲지엔티에이치 29억원 ▲승리산업 33억원 ▲상아농산 11억8000만원 ▲월량완코리아 1억8000만원 등 총 75억6000만원에 달했다. 급기야 펀딩하이는 연체율 100%를 찍은 채 영업을 중단했다. 상환 실패 이후 차주 사이에 관련성이 드러났다. 지엔티에이치와 승리산업에서 대표이사였던 윤석호씨는 두 회사 지분을 각각 60%, 100% 보유 중이었다. 또한 월량완코리아 사내이사로도 등재돼있었다. 연체가 발생한 직접적인 사유는 선라이즈에프앤티를 대상으로 한 지분 투자였다. 지엔티에이치는 펀딩받은 금액을 농산물을 들여오는 데 쓰지 않고,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매입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를 계기로 지엔티에이치는 2018년 6월경 주식 16만1400주를 확보한 선라이즈에프앤티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확보한 이후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명단에 변화가 목격됐다. 선라이즈에프앤티 초창기부터 함께했던 사내이사와 부친에 이어 회사에 몸담았던 대표이사를 대신해 지엔티에이치가 끌어들인 얼굴들이 등기임원 자리를 꿰찼다. 정작 지엔티에이치는 연체 발생 넉 달 후인 2018년 10월 보유 중이던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에 넘겼다. 펀딩하이 투자자들과의 소송전이 불거지자 중국에 본거지를 둔 우군에 주식을 양도한 모양새였다. 거듭되는 교체 수순 두 번째 경영권 교체는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의 주체로 올라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권에 본적을 둔 킴스에O엔O는 2022년 10월 기준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10만8200주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의 친인척이 보유한 주식 13만2800주를 합산하면 우호 주식은 24만주 안팎이다. 기존 지엔티에이치 측 우호 세력(란릉현래보식품유한공사 16만1400주+마송재 3만주)과 비교해 5만주 가까이 격차를 벌린 셈이다. 킴스에O엔O 측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을 대량 매입한 시기는 2020년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선라이즈에프앤티 등기임원 구성이 크게 요동쳤다는 점을 통해 짐작 가능한 사안이다. 실제로 지엔티에이치가 지배력을 발휘하던 2018년 7월 대표이사에 선임됐던 김정일 대표는 2020년 3월 해임됐다. 2018년 9월 취임했던 또 다른 대표이사 역시 당해 10월을 넘기지 못한 채 사임했다. 공석이 된 주요 등기임원 자리는 킴스에O엔O 측 인물로 채워졌다. 킴스에O엔O 대표이사가 2020년 10월 선라이즈에프앤티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해당 시기에 사외이사, 감사 등 등기임원 전원이 새 얼굴로 교체됐다. 킴스에O엔O에 이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곳은 식료품 제조업을 영위하는 동OO앤에스였다. 이 회사는 2022년 10월 기준 주주명부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지분율 44.64%)를 보유한 단일 최대주주로 등재돼있다. 여기에 우호 세력(글로O포O 1만주+김성수 2만주+김종봉 788주)의 주식을 합산하면 지분율은 50%에 육박한다. 동OO앤에스는 사실상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인수하고자 만든 업체로 비쳐질 여지를 남긴다. 2022년 2월 출범 당시 자본금 10억원짜리였던 동OO앤에스는 불과 두 달 만인 2022년 4월14일 자본금을 21억원으로 두 배 이상 키웠다. 공교롭게도 동OO앤에스가 설립 이후 8개월 사이 선라이즈에프앤티 주식 41만주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금액은 총 20억5000만원이었다. 이는 동OO앤에스 자본금 21억원이 선라이즈 주식 41만주를 매입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게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는 기존 61만8400주였던 발행주식을 2022년 4월22일 91만8400주로 30만주 확대했다. 동OO앤에스가 자본금을 21억원으로 확충한 지 8일 만이다. 선라이즈에프앤티가 발행주식을 30만주 늘린 덕분에 동OO앤에스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주식 41만주를 확보한 형국이다. 동OO앤에스가 선라이즈에프앤티를 지배하는 위치로 올라설 무렵에 선라이즈에프앤티 임원 구성은 또 한 번 바뀌었다. 동OO앤에스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글로O포O 대표이사가 사외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김성수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 이후 김성수 대표는 선라이즈에프앤티 폐업 전까지 자리를 지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되짚어보는 연결고리 한편 일각에서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는 지엔티에이치 측이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나마 킴스에O엔O 혹은 동OO앤에스와의 연관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건희씨 일가에서 선라이즈에프앤티에 관여한 직접적인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그 시기를 2021년 이후로 특정해볼 수 있을 것”이라며 “항간에 떠도는 마약 적발 여부는 2022년 근방으로 얘기가 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eaty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