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쑥갓, 가지… 소박한 우리네 밥상의 주인공이자 <식재료 이력서>의 주역들이다. 심심한 맛에 투박한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무슨 이력이 있다는 것일까. 여러 방면의 책을 집필하고 칼럼을 기고해 온 황천우 작가의 남다른 호기심으로 탄생한 작품 <식재료 이력서>엔 ‘사람들이 식품을 그저 맛으로만 먹게 하지 말고 각 식품들의 이면을 들춰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나름 의미를 주자’는 작가의 발상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인해 인간이 식품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마
다음 백과에 실려 있는 다시마 관련 내용이다.
「한국에서는 원래 북한의 원산 이북에서만 자라났으나, 지금은 제주도를 뺀 거의 모든 바다에서 양식하고 있다. 옛날부터 사람들이 먹어 왔으나 최근 혈압을 낮추는 라미닌이라는 아미노산이 들어 있음이 밝혀져 약용식물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다시마가 원래 북한의 원산 이북에서만 자라났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정약용의 <경세유표>에 실려 있는 글을 인용한다.
「생각건대, 북도의 곤포(昆布)는 천하에 진기한 것이었다(곤포 중에 작은 것은 방언으로 다시마(多士麻)라 한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나 이 물건은 오직 함흥(咸興) 바다에서만 생산돼서 그 맛이 뛰어나게 좋고 온 나라가 다 이것을 받아 먹는다.」
이 대목에서 묘한 생각이 인다.
위 내용이 사실이라면 한국전쟁 발발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식용하고 있는 다시마는 자연산이 아닌 인공양식으로 생산된 것이라는 말이 성립되는데, 과연 그럴까.
이를 살피기 위해 1968년 6월17일 <매일경제>에 실려 있는 기사 내용을 인용해본다.
「다시마 시험 양식에 성공, 국립수산진흥원은 15일 우리나라 연해에는 없는 다시마를 일본 북해도로부터 기증받아 4개월간 인공으로 시험 양식한 결과 옆체장 160cm-230cm로 성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71년 3월31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자연산 다시마는 거의 생산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아울러 수산청은 대대적으로 양식 사업을 개발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 자연산 다시마가 널리 퍼져 있는데 어떻게 된 사연일까.
이에 대한 논의는 접고 다시 <동아일보> 1928년 12월23일 기사를 인용해본다.
동 기사는 다시마와 미역을 ‘불로장수의 약’으로 규정짓고 그 효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시마는 정혈작용에 특화를 보이고 있고, 혈관경화를 예방하며 모발을 검게 해 준다.
또 쌀·보리·육류·생선 등이 지니고 있는 산성을 중화시켜 줄 수 있는 알칼리성 식품이라고 기록돼있다.
혈관경화를 예방하고, 모발을 검게 하는 효과
산후조리에 ‘특화식품’ … 우리 민족의 전유물
미역과 미역줄기
미역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생일이다.
생일을 맞이하면 어김없이 미역국과 흰 쌀밥으로 아침 식사를 했던 때문이다.
그런데 왜 생일이면 반드시 미역국을 먹었을까.
바로 출산과 관계가 있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께서 나를 낳고는 처음 접하는 음식이 미역국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 해 준 어머니의 고마움을 느껴 보라고 미역국을 먹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또 다른 의문이 발생한다.
왜 어머니들이 아기를 낳게 되면 굳이 미역국을 먹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를 이상히 여기며 조사하던 중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산부계곽변증설’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음을 알게 됐다.
我東傳言。海澨人泅水。爲新産鯨所噏呑。入鯨腹。見鯨之腹中。海滯葉滿付。臟腑惡血。盡化爲水。僅得出腹。始知海帶爲産後補治之物。傳於世人
이를 번역하면 ‘우리 동방에 전하기를, 어떤 사람이 해안가에서 수영하다가 갓 새끼를 낳은 고래에게 삼켜져 고래 뱃속에 들어가 보게 됐다. 고래 뱃속에 미역이 가득 들어찼는데 내장의 모든 악혈이 물로 변해 있었다. 간신히 고래 뱃속에서 나와 미역이 산후조리에 좋다는 것을 알고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다’이다.
언뜻 애매하게 느껴진다.
한편의 전설을 접하는 듯하지만 이로 인해 미역이 산후조리에 특화된 식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심지어 미역을 생산하는 부락인 藿所(곽소)가 있었다.
앞 부분에서 콩잎을 이야기할 때 콩잎을 가리켜 藿(곽)이라 한다 했다.
그런데 미역의 원 이름 역시 藿(곽).
특히 甘藿(감곽)이라 한다.
미역을 甘藿(감곽)이라 함은 그 맛이 달착지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튼 위 글에 我東(아동, 우리 동방)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어느 지역을 의미할까.
이를 위해 조선조 제 4대 임금인 세종 시절 예조참의 이선제의 상소문을 살피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타난다.
夫藿者, 他國之所無, 獨於東方(독어동방), 處處皆有之。 濟州所産尤繁。 土民之居積致富, 商船之往來販鬻, 皆用此也
미역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것으로서 오직 우리나라에만 곳곳에 다 있사온데, 제주에서 나는 것이 더욱 많아서, 토민이 쌓아 놓고 부자가 되며, 장삿배가 왕래하면서 매매하는 것이 모두 이것이옵니다.
어린 시절 생일이면 어김없이 미역국을 접했는데 미역줄기를 먹은 기억은 없다.
미역줄기는 그저 미역에서 분리하여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 지인들에게 물어보자 지인들은 미역줄기 역시 미역과 함께 미역국에 넣어 식용했다고 강변했다.
그런데 1975년 7월30일 <동아일보> 지면에 흥미로운 기사가 등장했다.
간편한 대용식(代用食)이라는 제하로 ‘미역줄기볶음’에 대해 ‘안 먹고 버리는 미역줄기를 소금에 절였다가……’라고 쓰인 대목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