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트럼프 잡은 조 바이든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20.11.09 19:04:54
  • 호수 12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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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다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트럼프 시대가 막을 내렸다.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선거에 당선됐다. 오바마 행정부에서 부통령으로 역임했던 바이든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

트럼프를 누르고 새로운 미국 대통령이 탄생했다. 바이든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흑인 유권자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민주당 경선에서도 바이든은 흑인 유권자 덕분에 구사일생한 적이 있다.

바이든 승리의 일등공신은 ‘히든 바이든’ 지지들이다. 이들의 뒷심이 개표 종반에 역전 드라마를 만들었다. 히든 바이든이란 우편투표 또는 개표 시간 지연 등으로 막판까지 표심이 드러나지 않은 채 숨어있던 바이든 지지층을 말한다.

‘히든 바이든’
역전 드라마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턴에서 태어난 바이든은 장남이었다. 집안은 아일랜드 계통이며 종교는 가톨릭이었다. 아버지 조지프 바이든 시니어와 어머니 캐서린 바이든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의 증조부는 도시공학자로서 부를 쌓아 펜실베이니아 주 상원의원까지 지냈다.

이후에도 부유한 집안이었지만, 바이든 주니어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가세가 기울었다. 1950년대에 불황이 오자 고향 펜실베이니아를 떠나 델라웨어 주로 이주해 성장했다. 이후 델라웨어 클레이몬트에 있는 가톨릭계 사립학교인 아키메어 아카데미로 진학했다. 


그는 학교에 다닐 때 미식축구를 즐겼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농성 운동에도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학비를 벌기 위해 유리창 청소를 하고 풀을 뽑아야 했다. 말을 더듬는 습관으로 놀림을 받았지만, 혼자 거울을 보고 시를 암송하며 극복한 것으로 전해진다. 

1961년 델라웨어 대학교에 진학했으며 미식축구팀인 델라웨어 파이팅 블루헨즈에서 뛰었다. 전공은 역사학과 정치학으로 성적은 좋지 않았다. 688명 중 506등으로 졸업했다. 학부 전공은 정치학으로, 졸업 후 시라큐스 대학교 로스쿨에 진학했다. 

로스쿨 재학 중에 논문 인용을 날림으로 하다가 표절 시비를 일으키기도 했다. 1966년 로스쿨 재학 중에 네일리어 헌터를 만나 결혼하고 2남1녀를 뒀다. 5차례 입영 연기를 한 후 1968년에 받은 선병검사에서 1-Y 등급을 받고 베트남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천식이었다.

1969년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고 권력있는 사람의 편에 서는 것에 자괴감을 느껴 국선변호인 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1970년 11월 뉴캐슬 카운티의 카운티 의회 의원이 됐다. 2년 뒤 민주당원으로 연방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당시 해당 선거구의 상원의원은 정계 은퇴를 고려하던 보그스였다. 그러자 그의 후계를 두고 공화당에 분열이 생겼고 당시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은 한 번만 더 출마하라고 보그스를 설득했다.

변호사에서 국회의원으로
2008년 오바마와 한솥밥

당시 갓 서른에 가까웠던 바이든은 보그스를 이겼고 미국 역사상 다섯 번째로 어린 상원의원이 됐다. 그러나 그해 12월18일에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러 차를 끌고 나간 가족들이 교차로에서 트레일러에 추돌되는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 네일리어와 장녀인 나오미가 사망한다.


바이든은 상원의원 생활을 하며 1977년에 영어 교사 질 제이콥스와 결혼한다. 두 사람 다 재혼이었다. 계속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며 민주당에서 중진으로 경력을 쌓았는데 1988년에 목 통증이 심해져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뇌동맥류가 파열된 탓에 그는 사경을 헤맸지만 7개월 만에 재활해 복귀했다.

1988년에는 당시 역대 2번째로 어린 나이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젊은 이미지로 베이비붐 세대의 지지를 받는 유력 후보 중 한 명이었지만 영국 노동당 당수인 닐 키녹의 연설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결국 경선을 중도 포기했다. 

이후 2008년까지 36년 동안 델라웨어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지냈다. 주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했고 특히 코소보 문제에 많이 관여했다. 코소보 문제 당시에 미군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공화당 의원인 존 매케인과 결의서를 통과시키기도 했다. 1991년 걸프전에는 반대표를 던졌지만 2003년 조지 워커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할 때는 용인했고, 대신 사담 후세인의 제거에는 반대했다.
 

바이든은 2008년 민주당 공천에 출마했지만 중도 하차하고 오바마 대선 열차에 합류했다. 이후 부통령으로서 오바마 전 대통령과 8년 동안 일했다. 건강보험개혁법, 경기부양책, 금융산업 개혁 등 그가 내세우는 정책 상당 부분이 오바마 시절의 유산이기도 하다.

바이든이 ‘형제’라고 언급하는 오바마와의 친분은 흑인 유권자들의 지속적인 지지를 얻어내는 원천이 됐다. 워싱턴 정가의 오랜 내부 인사인 바이든은 상대적으로 정치 경험이 적었던 오바마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줬다.

사경 헤매다
재활해 복귀

‘중산층 대표주자’로 불렸던 바이든은 오바마 대통령을 선호하지 않는 집단인 블루칼라 백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투입됐다. 부통령 시절이던 2012년 바이든은 “동성 결혼에 대해 개인적으로 편안하다”고 언급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완전히 동성 결혼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발언이라 더욱 화제가 됐다. 며칠 후 오바마 대통령은 동성 결혼을 찬성한다고 밝혔다. 연임을 거친 오바마 대통령을 보좌하며 부통령직을 맡았던 시간은 40년 정치 인생의 정점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조지 워커 부시 행정부 시절 미 상원 외교위원장을 거쳐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 부통령으로 활동하는 등 워싱턴 정가의 잔뼈가 굵은 정치인이다. 한국에서는 주로 이명박정부 및 박근혜정부 시절 활동했던 정·관계 인사들과 깊은 교류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근혜정부에서 청와대 1차장을 했던 미래통합당 조태용 의원, 이명박정부에서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을 맡았던 같은 당 박진 의원 등이 그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 정권 인사로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등이 거론된다.

조 의원은 1차장 직을 역임하던 시절 현재 바이든 캠프의 외교·안보 분야 선임자문을 맡고 있는 토니 블링컨 당시 오바마 행정부 국무부 부장관의 업무 카운터파트였다. 또 북한 핵 위협이 고조되던 2016~2017년 블링컨 선임자문과 총 5차례 한미 고위급 전략협의를 가지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조 의원은 “블링컨 선임자문과는 문자를 주고받던 사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박 의원은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통역비서관으로 근무하며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바이든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오바마 행정부에서 바이든이 외교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박 의원도 한나라당 국제위원회 위원장,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장 등을 맡아 수차례 의견을 교환했다.

18대 국회에서 한미 의원 외교협의회 회장을 맡았던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도 바이든과 수차례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정몽준 이사장은 민간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아산정책연구원을 이끌며 워싱턴 정·관계 인사들과 꾸준히 교류해 인맥이 탄탄하다.

한국인
인맥은?

현 정부·여당 관계자는 보수 정부 10년을 거치며 바이든 측 인사들과 특별한 교류를 한 이력은 없다. 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이 외통위에서 오래 활약하며 미국 민주당 측 인사들과 잘 아는 편으로 평가된다.

송 의원은 과거 미국 민주당 연찬회에서 바이든을 직접 만나 인사를 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외교·안보 브레인으로 꼽히는 문정인 특보도 미국을 활발히 오가며 민주당 측 인사들과 꾸준히 교분을 쌓았다.


바이든은 글로벌 리더로서 미국의 역할을 강조하고, 불법 이민자에 대해 좀 더 관대한 조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경찰 개혁과 총기 규제, 코로나19에 대한 방역 조치는 강력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인하한 개인과 법인에 대한 세금을 다시 올리고, 최저임금을 인상해 중산층을 육성하며, 건강보험 확대 등 사회보장 제도를 확대하려 한다. 바이든은 유색인종과 진보층, 도시 지역과 젊은 층, 이민자, 대졸 이상의 고학력층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바이든은 중도·진보 성향의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모두를 위한 건강보험, 대학학자금 면제 등 급진적 진보 공약을 앞세운 샌더스를 제치고 오바마 케어 지지 등 익숙한 정책으로 중도층의 지지를 결집했다.

일방적 주장과 상대를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트럼프에 비해 바이든은 슬픈 가족사를 언급하는 등의 공감능력이 강점으로 꼽힌다. 대선 슬로건에서 보듯 바이든은 ‘미국의 정신을 위한 투쟁’을 통해 유권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며 화합을 강조했다.

바이든 홈페이지 첫 화면은 유색인종, 장애인, 성수소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일러스트가 배치하는 등 포용과 화합의 이미지 앞세운다. 경제회복과 실행력, 성과 등을 강조한 트럼프와는 비교된다.

유색인종·장애인 등 화합 강조
2015년 부적절한 스킨십 논란도

바이든은 오바마 정권 8년 동안 부통령을 역임하면서 흑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지난 6월 바이든은 경찰의 무력 사용 과잉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의 가족을 찾아 위로했다. 유색인종 여성을 처음으로 부통령 후보로 지명, 인종 격차를 해소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유색인종 지지층을 견고히 하고 있다.

하지만 큰 약점도 세 가지가 꼽힌다. 건강, 아들 스캔들, 성추행 등이다. 1946년생인 트럼프보다 4세 많은 바이든(만 77세)은 1988년 두차례 뇌동맥류 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로 인해 잦은 말실수와 기억력 둔화 증세를 보인다는 우려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을 ‘졸린 조’라고 칭하며 인지력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바이든은 지난 6월 인터뷰에서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아오고 있다”고 말했지만 7월 인터뷰에서는 “검사를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기도 했다.
 

바이든의 둘째 아들 헌터는 기업 로비스트로 활동하면서 바이든의 정치적 후광으로 혜택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과 관련,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정책을 담당하던 당시 바이든의 아들 헌터는 2014년부터 5년간 우크라이나 에너지 회사 부리스마 홀딩스 사외이사를 맡았다.

당시 바이든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10억달러(1조1265억원) 규모의 미국 대출 보증을 보류하겠다”며 검찰청장 사임을 요구했다. 2019년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우크라이나 검찰이 부리스마 홀딩스의 횡령에 대해 수사를 진행하자, 바이든이 “수사를 막기 위해 정부를 압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이든은 아들과 관계없이 부패 청산을 요구한 것이라고 밝혔으나, 아들이 우크라이나 동업자와 골프를 친 사진이 공개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헌터는 2013년 바이든 당시 부통령이 중국 방문 시 BHR(Bohai Harvesr Rst)사모펀드를 세워 중국 국영은행에서 투자를 받았다. 헌터 바이든은 2019년까지 BHR 이사로 재직하면서 중국 기술기업에 투자했으며 특히 중국 신장웨이우얼 지역 무슬림을 감시하는 모바일 앱에 5000억원 이상을 투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트럼프는 바이든을 ‘친중 인사’라고 비난했다.

부적절한 접촉
망신 당하기도

바이든은 다수의 부적절한 신체 접촉 사례로 ‘소름 끼치는 바이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가지고 있다. 2015년 에슈턴 카터 국방부 장관 취임식에서 장관 부인에게 과도한 신체접촉을 해서 비난을 받은 바 있으며 같은 해 크리스 쿤스 상원의원의 10대 딸에게 부적절한 스킨십을 하다가 저지당한 적도 있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뜬금없는 바이든 치매설?

바이든 후보는 지난 25일 열린 화상 대담 행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조지’로 일컫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그는 “내가 출마해서가 아니라 내가 맞서고 있는 인물 때문에, 이번 선거는 가장 중대한 선거”라며 “조지가 4년 더, 조지, 어, 그는(Four more years of George, uh, George, uh, he…)”이라고 말을 더듬었다.

공화당의 스티브 게스트 신속대응국장은 트위터에 해당 부분을 담은 영상을 올리면서 “바이든 후보가 트럼프 대통령과 조지 워커 부시 전 대통령을 혼동했다”며 맹공을 펼쳤다.

트럼프 대통령도 트위터에서 “조 바이든이 어제 나를 조지라고 불렀다”며 “내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이든 후보가 말실수할 때마다 ‘치매설’을 점화하려 “인지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공격해왔다.

바이든 캠프 측은 바이든 후보가 말실수 한 게 아니라며 방어하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이 아닌 이날 질문자로 나선 코미디언 조지 로페스의 이름을 두 차례 부른 것이라는 반박이다.

공화당 측이 교묘하게 영상을 편집해 악용하고 있다고도 했다.

다만 바이든 후보가 그간 말실수로 자주 구설에 올랐던 건 사실이다.

코로나19 미국 사망자 수치를 2억명이라고 잘못 말하거나, 자신이 대통령 선거가 아닌 상원선거에 출마했다고 말하는 식이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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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