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기획특집]기축년, 봄을 찾는 사람들 ②재계 범털들의 히든카드

MB가 풍운아를 만났을 때…‘미워도 다시 한번?’


재계 ‘잠룡’으로 분류되는 거물급 ‘범털’들이 재기의 칼날을 갈고 있다. 족쇄 풀린 전직 오너들의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는 것. 한때 재계를 호령하다 일장춘몽으로 ‘강퇴’당한 재계 스타들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하나같이 여전히 사업에 대한 열정과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꿈틀대고 있다는 근황만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2009년 부활이 점쳐지는 재계 풍운아들의 패자부활전을 들여다봤다.

족쇄 풀린 전직 오너들 ‘부활 날갯짓’…러브콜 쇄도
불황 틈타 패자부활전 본격 태세 “옛 명성 되찾을까”
마당발 인맥 등 노하우 재활용
물밑접촉 개시…사전 작업 완료


정부는 지난해 8월 34만여명에 대한 8·15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여기엔 포함된 재계 전·현직 총수들은 모두 14명. 정부는 면죄부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을 풀어줬다.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창출하라’는 게 조건이었다. 경제성장을 위해 재계 거물들의 노하우가 꼭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물론 김대중 정부에서도 그랬고, 노무현 정부에서도 그랬다.

“신화창조 재조명…
왕성한 활동 주목”

이 대통령은 사면을 앞두고 “대기업들도 투명윤리 경영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존경받는 기업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며 “사면은 대기업들이 보다 공격적인 경영으로 투자를 늘리고 중소기업과 고통을 분담하는 자세로 상생 협력해 달라는 뜻”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정부가 경제살리기 일환으로 내놓은 ‘특단의 대책’에 족쇄가 풀린 총수들은 경영 복귀와 함께 즉각 화답했다. 그룹별로 속속 투자와 고용 확대 방안을 내놓고 있는 것. 당시 세상 밖으로 나온 재계 범털들의 행보도 같은 이유로 주목받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재기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대표적인 인사가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이다. 최 전 회장의 거취는 언제나 초미의 관심사다. 그중에서도 최 전 회장의 복귀는 최대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1970년대 중동건설 붐을 일으키면서 고속성장한 동아건설은 1980년대 현대건설에 이어 도급 순위 2위의 ‘건설명가’ 반열에 올랐고, 1990년대 초엔 리비아 대수로 신화를 일궈내며 현대건설, 대우건설과 함께 ‘건설 트로이카’를 이끌었다.

그러나 동아그룹은 IMF 때 무리한 차입경영의 부담을 이기지 못한 채 부도를 냈다. 최 전 회장은 1998년 동아건설 워크아웃 과정에서 분식회계, 배임, 불법 사기대출 등이 드러났고 결국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2004년 이런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그는 지난해 8월 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최 전 회장의 사면은 벌써 세 번째다.
최 전 회장의 올해 나이는 66세. 여타 총수들과 비교해 충분히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기다. 최 전 회장은 2005년 7월 법원의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풀려난 이후 줄곧 부활 의지를 불태웠지만, 안방을 재탈환하기 위한 ‘재기의 꿈’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최 전 회장은 그동안 “직책이나 돈에 연연하지 않고 백의종군해 리비아 등 대규모 해외공사를 수주할 수 있다”며 경영일선 복귀를 희망해 왔다.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도 옛 명성을 되찾을지 주목되는 인사다. 국세청이 발표한 ‘1991년도 100대 납세자 리스트’를 보면 당시 종합소득세 납부 1위는 안 전 회장이다. 그는 신고소득 47억원, 납세액 23억원으로 재계에서 내로라하는 부호들을 제쳤다. 안 전 회장의 부활이 시선을 끄는 대목이다.
1984년 나산그룹을 설립한 안 전 회장은 1990년대 신흥재벌로 등극했다. 하지만 안 전 회장은 1994∼2000년 부도난 ㈜나산의 자금 40억원을 차명계좌로 빼돌리는 등 회삿돈 290억원을 횡령하고 계열사 등에 2359억원을 부당 지원한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역시 지난해 8월 사면된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도 부활의 날갯짓을 쉽사리 접지 않고 있다. 나 전 회장 역시 1990년대 재계 샛별로 등장했지만, 1998년 한남투신을 인수한 뒤 2945억여원을 부당 지원한 혐의로 구속,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았다.

나 전 회장 일가의 재기 노크는 끊이지 않고 있다. 그의 가족과 가신들은 이미 기린과 서현개발 등의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나 전 회장도 모 코스닥업체 경영권 장악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유상부 전 포스코 회장,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김영진 전 진도그룹 회장, 엄상호 전 건영그룹 회장, 장치혁 전 고합그룹 회장, 김선홍 전 기아차 회장,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 등 한때 재계를 호령하다 일장춘몽으로 강퇴당한 재계 범털들도 온갖 논란 속에서 재기의 칼날을 갈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노크 또 노크’
두드리면 열릴까

권력형 비리인 이른바 ‘게이트’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풍운아들의 복귀도 가시화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다시 주목받고 있는 최규선, 이용호, 진승현 씨 등이 주인공이다. 권력의 그늘 밑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들은 모두 저마다 ‘복귀 히든카드’를 쥐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인물은 최규선 씨다. 국민의 정부 때 ‘최규선 게이트’의 장본인 최씨는 2002년 DJ의 3남 홍걸 씨와 정치권 커넥션을 동원해 온갖 이권에 개입한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2006년 2월 만기출소했다.
이후 지난해 국내 굴지의 기업들과 함께 이라크 쿠르드 유전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그의 ‘마당발 인맥’이 총동원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측근들도 그의 해외 거물 네트워크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자원 외교를 펼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란 게 대체적인 시각이지만, 최씨는 “아직은 전면에 나설 단계가 아니다”라며 정중동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용호 게이트’당사자인 이용호 씨도 이미 재기를 위한 물밑활동을 시작했다. 2001년 G&G그룹 회장 당시 이씨는 계열사의 자금 수백억원을 횡령하고 주가를 조작한 뒤 수사 무마를 위해 검찰, 국가정보원, 정치인 등에게 로비를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씨는 2005년 11월 대법원에서 징역 6년이 확정됐지만, 2007년 3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이씨 측근에 따르면 그는 출소 직후 여기저기서 러브콜을 받았다. “돈을 댈 테니 사업을 같이 하자”는 제안이다. 또 “경영자나 자문으로 와 달라”는 제의도 잇따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재 그의 거처는 확실치 않다. ▲서울 미아동 A호텔 나이트클럽을 소유하고 있다 ▲코스닥상장사 I사의 실질적 오너다 ▲황우석 박사 등과 접촉해 신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등 그를 둘러싼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는 까닭이다.

‘진승현 게이트’ 진승현 씨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진씨는 2000년 2300여억원을 불법대출 받는 과정에서 정·관계에 로비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진씨는 이 사건으로 2002년 7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확정됐다. 예정대로라면 출소해야 할 시점. 그러나 수용과 병원 치료를 반복해 형기가 늘어난 그는 올해 출소를 앞두고 있다.
진씨는 앞서 형집행정지 상태에서 코스닥 상장사의 배후 실세로 활동하며 문어발식 기업인수에 관여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됐던 측근들을 통해서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 진씨 회사에 몸담았던 인물들이 여러 코스닥 상장사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진씨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며 “진씨가 수백억원대의 자금을 국내 주식시장과 해외시장에서 조달해 관리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고 귀띔했다.

현직에서 ‘화려한 부활’을 노리는 거물들도 적지 않다. 바로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과 박병엽 팬택계열 부회장이다.
삼성전자 반도체부문 사장 출신인 진 전 장관은 ‘삼성 신화’를 일궈낸 국내 최고의 반도체 전문가. 삼성의 옷을 벗은 것은 2003년 2월.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2006년 3월까지 3년 동안 정보통신부 장관을 역임했다. 사임 뒤 2006년 5·31 지방선거에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했다 낙선한 진 전 장관은 같은해 11월 속칭 ‘진대제 펀드’로 불리는 IT 전문 투자사인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SIC)를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진 전 장관의 행보는 재계 최대 관심거리였다. 여러 기업들은 그를 영입하기 위해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냈다. 친정인 삼성 복귀 가능성도 고개를 들었고, 하이닉스 사장 후보로도 이름을 올렸다. 진 전 장관은 2007년 5월 동부그룹 계열사인 동부하이텍 경영고문 역할을 맡았지만 불과 7개월 만에 물러나기도 했다.
진 전 장관은 지난 대선 당시 이명박 캠프에 참여해 경제참모 역할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진 전 장관의 올해 행보가 더더욱 주목받는 이유다.
박 부회장도 부활을 위해 진땀을 흘리고 있다. 그가 1991년 설립한 팬택계열은 2005년 매출 3조원을 돌파하며 승승장구했다. 이도 잠시. 2006년 말부터 자금난이 불거지더니 급기야 부도 위기까지 내몰렸다.
하지만 지금 사정은 다르다. 팬택계열은 당시의 위기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듯 보인다. 박 부회장은 경영 효율화를 위해 뼈를 깎는 자구책을 동원했다. 사옥을 팔았고, 1000여명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임금 삭감, 상여금 반납, 담보 제공 등 허리띠도 졸라맸다. 박 부회장도 2500억원 상당의 지분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 결과 팬택계열은 2007년 3분기부터 연속 영업이익을 내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2조원을 넘어섰고, 휴대전화를 1000만대나 팔았다. 놀라운 실적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말 팬택계열 대표이사로 재선임된 박 부회장은 “팬택계열의 기업개선작업이 2011년까지 예정돼 있지만 이르면 내년 워크아웃 조기 졸업이 자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재기 앞두고 정중동
컴백 비난도 쏟아져

재계 범털들의 컴백에 대해 비난도 적지 않다. 불법과 부실화 장본인이란 우려에서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복귀나 재기를 노리는 대부분의 전직 총수들은 거액의 지방세를 미납하거나 추징금을 아직 납부하지 않았다”며 “일부는 거액의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기업을 부도내거나 각종 혐의로 구속된 오너들이 사면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경영일선에 복귀하는 것은 방만경영 또는 부실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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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