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원수' 칭호 받은 김정은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07.23 10:5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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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대장' 딱지 떼고 북한 절대권력 손에 넣나?

[일요시사=김민석 기자] 북한 권력판도가 숨 가쁘게 변화하고 있다. 그동안 '꼬마대장' 딱지를 달고 있던 김정은이 북한에서 6번째 원수 칭호를 받은 것이다. 김정일이 사망한 지 딱 7개월 만이다. 김정은은 이날 발표가 나기 전까지 원수보다 두 단계가 낮은 대장 칭호를 쓰고 있었다. 단번에 두 계급이나 특진한 셈이다. 이것으로 김정은은 북한 내에서 1인자 자리를 굳히고 향후 내각은 김정은 체제로 대대적 개편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셋째아들로 후계자로 지목되기 전까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후계자로 거론된 이후로도 그의 행보는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다. 이에 <일요시사>는 김정은의 과거사를 주목해봤다.

지난 18일 12시 <조선중앙통신>, <평양방송> 등 북한매체는 중대보도를 통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게 '원수' 칭호를 수여했다고 밝혔다. 이날 결정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당 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의로 나온 것으로 김정은이 당과 군을 통제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앞서 지난 15일 군부 최고실세인 이영호(70) 총참모장의 전격 해임과 이틀 뒤 현영철의 차수 승진에 이어 속전속결로 원수자리까지 꿰차 본격적으로 김정은의 절대권력 체제가 견고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수 칭호는 큰 의미
진정한 최고지도자 반열

이번 김정은의 원수 칭호 수여는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 오진우·최강 전 인민무력부장, 혁명1세대 이을설에 이어 역대 6번째다. 김일성은 1953년 2월 처음으로 원수 칭호를 받았고 1992년 대원수로 추대된 뒤 1994년 7월 사망했다. 김정일은 1992년 북한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원수 칭호를 받고 지난해 사망 후로도 원수 계급을 유지해오다 올해 2월15일에 이르러서야 대원수로 추대 받았다. 그리고 오진우·최광 전 인민무력부장은 각각 1992년과 1995년 원수에 올랐다. 현재 생존해 있는 원수 칭호를 받은 인물은 혁명 1세대로서 1995년 원수 칭호를 받은 이을설에 김정은이 합류하여 2명이다. 이을설은 항일빨치산 활동 당시 소년경호원으로 활약했고 1983년 평양방어사령관을 지냈다.

정영철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는 "이는 김정은이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로 자리를 굳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며 "원수 칭호는 상징적인 의미가 굉장히 크다. 원수 칭호 받았다는 것은 최고지도자로서 갖춰야 하는 것은 다 갖췄다는 것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후계자로 선정되기 전까지 베일에 싸여 있다 갑자기 툭 튀어나와 원수 칭호까지 단번에 거머쥔 김정은. 그는 누구이며 북한체제 내에서 어떤 존재일까?


저택에 음악단원 상주시키며 호화로운 생활 즐겨
김정일은 어린 김정은을 왜 후계자로 점찍었을까?

7개월 전 타개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삼남 김정은은 1983년 평북 창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군복을 입고 자랐고 평양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나온 뒤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다닌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김정은의 신장은 175㎝, 몸무게는 90㎏으로 추정되며, 20대임에도 고혈압과 당뇨를 앓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이름이 김정운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며 결혼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정은은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은 큰형인 정남과 작은형 정철에 가려 베일에 싸여 있었다. 관련 소식이 그나마 외부에 알려진 것은 1996년 여름부터 2000년 가을까지 김정철과 함께 스위스 베른의 공립학교에서 유학하면서부터이다. 동창생들은 김정은이 미국프로농구(NBA)의 팬이었으며 수학을 잘했고, 영어·독일어 등 외국어도 제법 능통하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모아 김정일의 아들인 줄은 몰랐다고 한다.

스위스에서 김정은은 "자본주의에 물들면 안 된다"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학교와 집을 오가며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 안에 음악단원들을 상주시키다시피 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으며 미성년자 시절부터 술·담배를 즐겨한 것으로 전해졌다.

귀국 후 2002년부터 2007년 4월까지 군 간부 양성기관인 김일성군사종합대학(5년제) 특설반에서 군사학을 극비리에 공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선발된 교수진이 김정은의 얼굴을 볼 수 없게 하기 위해 특수유리를 사이에 두고 강의했다는 설도 있다. 또 2005년부터 2년 정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로부터 철학, 역사, 경제학 분야의 개입교습을 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포병과를 졸업한 김정은은 위성항법장치(GPS)를 활용해 포사격 정확도를 높이는 방법을 졸업논문으로 제출했다.

김정은은 조부 김일성의 성격과 외모를 빼닮아 어릴 적부터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아버지 김정일은 김정은이 7살 때 호화 별장에서 벤츠600을 운전하게 했고, 셋째부인인 고영희가 자리를 비우면 김정철 대신 자신의 옆자리에서 식사하게 할 정도로 편애가 심했다고 전해진다.

김정일 총애 한몸에
형들 제치고 정상 올라


김정은은 대학 졸업 후 돌연 종적을 감추는데, 이때는 후계순위가 수면위로 떠오르지는 않았던 시점이었다. 정치적 야심이 강했던 김정은은 장남이자 이복형인 김정남에 대한 견제심리도 강했다고 한다. 일례로 2004년 11월에는 노동당 작전부 공작원을 동원해 오스트리아에서 형 정남을 암살하려다 현지 정보기관에 의해 제지당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2008년 8월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어 북한 최고지도부 내에서 후계자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결국 김정일의 총애를 받던 김정은이 후계자로 최종 결정되었고 2009년 1월 처음으로 대외적으로 김정은이 알려졌다. 그리고 2010년 9월 인민군 대장 칭호를 받으며 북한 매체에 전격 등장했다. 당시 김정일은 김정은의 생일인 1월8일에 맞춰 그를 후계자로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결정을 담은 교시를 노동당 조직지도부에 하달하면서 후계를 둘러싼 혼선이 정리됐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시점은 이보다 훨씬 앞선 2006년이라고 주장했다. 북한군이 지난해 5, 6월경 배포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외비 문건인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에 "2006년 12월24일 김정은 대장 동지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졸업증서가 기여된 자리에서 주체의 선군혁명위업을 빛나게 이으실 것을 바라시었다"라고 언급됐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김정은이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돼 후계수업을 받다가 2008년 김정일이 건강 이상으로 쓰러진 뒤 짧은 시간에 후계자로 결정됐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리더십 남다르지만
포악한 면모도 있어

한때 김정일과 성혜림(2002년 사망) 사이에서 태어난 김정남이 후계자로 지목된 바 있다. 하지만 지난 2001년 여성 2명과 디즈니랜드에 가기 위해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 적발되는 등 기행이 알려지면서 권력에서 차츰 멀어졌다. 현재 김정남은 북한을 떠나 중국 마카오와 베이징 등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2000년대 초까지는 후계자로 차남 김정철이 거론되기도 했다. 김정은이 그를 제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김정은이 형인 김정철보다 카리스마와 리더십에서 앞섰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압도적이다. 일각에서는 김정일이 김정남보다 나이가 어린 김정은을 총애하여 형제들 사이에 불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는 그의 저서 <김정일의 요리사>를 통해 권력욕과 리더십이 남다른 김정은이 차기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김정은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당 간부들을 무차별 해고하는 등 포악한 면모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이 강한 면모 외에 세심함도 갖췄다고 적고 있다. 지난 2000년 7월 김정일 일가와 백두산에 올랐을 때 마실 맥주가 떨어져 무심코 김정은에게 이야기 했더니 며칠 후 김정은이 직접 방으로 찾아와 주머니에서 하이네켄 맥주를 두 병 꺼내 내밀었다는 것이다.

과거 '샛별장군'으로 불렸던 김정은은 후계자 결정 이후부터 '김대장' 혹은 '청년대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2009년 4월부터 김일성과 김정일에게만 붙는 '친애하는'이라는 수식어가 김정은에게도 붙게 됐으며, 같은 시기 김정은을 찬양하는 노래인 '발걸음'이 북한 전역에 보급되기도 했다.

김정은의 '업적 쌓기'도 꾸준히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서른 살도 안 된 나이에 후계자가 되고 원수 칭호까지 부여받기 위해선 '업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결정된 후로는 김정일을 따라다니며 거의 모든 공개활동을 수행하였고, 특히 군사분야에서 김정일을 각별히 보좌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함께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 지난해 5월 시행된 '150일 전투', 김일성 주석의 97회 생일(4월15일)을 기념해 평양 대동강변에서 펼쳐진 '축포야회'(불꽃놀이) 등이 모두 김정은의 작품이라고 주민들에게 은연중에 선전됐다는 것이 북한 소식통들의 전언이다.

또 북한은 김정은 후계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해 1966년 이후 44년 만에 개최한 노동당대표자회를 통해 권력지도를 통째로 바꿨다. '김정은 시대'의 본격 진입을 앞두고 대대적인 교체·보완 인사를 단행한 것이다.

리스마와 리더십 두 형들 압도…권력욕도 강해
"어머니 누구?"…베일에 싸인 출생의 비밀 아킬레스건

김정은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은 출생의 비밀이다. 외부에는 김정은의 생모가 김정일의 셋째부인 고영희(2004년 작고)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넷째부인으로 알려진 김옥이라는 설도 나오고 있다. 김정일의 장남인 김정남이 "김정은은 김옥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는 주장도 있다.


김정일의 정부인은 김영숙 1명뿐이고 고영희 김옥 모두 동거녀(첩)일 뿐이기 때문에 모계의 정통성은 취약하다. 김정일의 어머니 김정숙은 김일성의 정부인으로서 '백두산 3대 장군'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다.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에서 권력핵심으로 부상하면 모든 노동당원이 먼저 묻게 되는 것이 '노동당에 언제 입당했고, 현직은 무엇이며, 부모는 누구냐'는 것"이라며 "이 때문에 당에서 김정은을 후계자로 띄우려면 모친이 누구인지를 밝혀야 하는데, 그러면 김정일의 복잡한 사생활을 언급해야 하는 결과가 된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고영희와는 1976년부터, 김옥과는 2006년부터 동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1983년생인 김정은의 생모가 김옥이라면 김정일은 부인 김영숙과 동거녀 고영희를 둔 상태에서 당시 19세였던 제3의 여인 김옥을 통해 아이를 낳은 셈이 된다.

대북 소식통은 "당에서 김정은의 초상화 1000만 장을 찍어놓고도 못 돌리는 것이 모친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정은 체제의 앞날에 대해서는 외국에서 유학한 김정은이 서방문화에 익숙한 만큼 미국 등 서방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개혁 개방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북한은 작년 6월 남북정상회담 비밀접촉이 최종 결렬되고, 남측에서 대화할 의지가 없다는 점이 확인되자 '이명박 정부와는 상종조차 하지 않겠다'라는 반응을 보였고, 특히 김정은 체제를 수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내부결속을 위해서인지 대남강경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은 과거에도 새로운 후계자가 확립되는 기간에는 강경한 자세를 보여 왔다.

김정은 체제
남북관계는?


다만 북한이 북미·남북대화 병행기조가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  김정은은 첫 연설에서 "진정으로 나라의 통일을 원하고 민족의 평화번영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손잡고 나갈 것이며 조국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책임과 인내성 있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그리고 한국의 정권 변화 후 남북대화에 나설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따라서 북한은 이명박 정부와는 대화의 뜻을 접었지만 2013년에 들어설 새로운 정권과는 여당이 재집권하든, 야당이 집권하든 관계없이 남북대화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남북대화는 6자회담 재개와 남측 새로운 정부의 6·15공동선언 및 10·4선언 인정, 이행여부가 주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주요 프로필>

·1983년 1월8일 출생 (1981년이나 1982년, 1984년생이라는 주장도 있음)
·북한에서 인민학교(초등학교) 다닌 기록 없음
·1996년 여름~2001년 1월 스위스 베른에서 공립 중·고등학교 유학
·2001년 귀국
·2002년~2006년 12월 김일성군사종합대학 포병과 졸업
·2009년 1월 김정은 후계자 내정설 처음 나돔
·2009년 3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당선설
·2009년 6월 국정원 "북한이 김정은의 후계자 선정 사실 해외 공관 전파" 국회 보고
·2009년 6월 국정원 "김정은 우상화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김정일 현지지도 수시 동행"
·2010년 9월 대장 칭호 수여
·2012년 7월 원수 칭호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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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전국 한의과대학교에는 ‘졸업준비위원회’가 존재한다. 말 그대로 졸업 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명목상 자발적인 가입을 독려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로 가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졸업준비위원회(이하 졸준위)는 졸업앨범 촬영, 실습 준비, 학번 일정 조율, 학사 일정과 실습 공지, 단체 일정뿐 아니라 국가시험(이하 국시) 대비를 위한 각종 자료 배포를 하고 있다. 매 대학 한의대마다 졸준위는 거의 필수적인 조직이 됐다. 졸준위는 ‘전국한의과대학졸업준비협의체(이하 전졸협)’라는 상위 조직이 존재한다. 자료 독점 전졸협은 각 한의대 졸업준비위원장(이하 졸장)의 연합체로 구성돼있으며, 매년 국시 대비 자료집을 제작해 졸준위에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의텐’ ‘의지’ ‘의맥’ ‘의련’ 등으로 불리는 자료집들이다. 실제 한의대 학생들에게는 ‘국시 준비의 필수 자료’로 통한다. 국시 100일 전에는 ‘의텐’만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졸준위가 없으면 국시 준비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정설이다. 한의계 국시는 직전 1개년의 시험 문제만 공개되기 때문에 시험 대비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시 문제는 오직 졸준위를 통해서만 5개년분 열람이 가능할뿐더러, 이 자료집은 공개자료가 아니라서 학생이 직접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실상 전졸협이 자료들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자료집을 얻을 수 있는 경로는 단 하나, 졸준위를 결성하는 것이다. 졸준위가 학생들의 투표로 결성되면 전졸협이 졸준위에 문제집을 제공한다. 이 체계는 오랫동안 유지돼왔고, 학생들도 졸준위를 통해 시험 자료를 제공 받는 것이 ‘관행’처럼 받아들여왔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반드시 결성돼야만 한다는 기조가 강하다. 학생들의 반대로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시 전졸협은 해당 학교에 문제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은 모든 학생들의 가입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졸준위 가입 여부는 실질적으로 선택이 아니다. 자료집은 전졸협을 통해서만 제공되기 때문에, 졸준위에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이 학생들 사이에서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학생들은 “문제를 얻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으로 문제집을 받아볼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학생들의 해당 학년 학생들을 모두 가입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실제 한 대학교에서는 졸준위 결성을 위한 투표를 진행했는데 익명도 아닌 실명 투표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진행했지만 반대자가 나오자 실명 투표로 전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반대 의견이 나오기 어렵다. 실명으로 투표가 진행되는 데다, 반대표를 던질 경우 이후 자료 배포·학년 일정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 실명 투표로 진행 가입시 200만원 이상 납부 필수 문제는 이 졸준위 가입이 무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졸준위에 가입하면 졸업 준비 비용(이하 졸비)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돈을 걷는데, 그 비용이 상당하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한 대학교의 졸비는 3차에 걸쳐 납부하도록 했는데 1차에 75만원, 2차에 80만원, 3차에 77만원 등 총 232만원 수준이었다. 이는 한 학기 등록금에 맞먹는 금액이다. 금액 산정 방식은 졸준위 가입 학생 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한 명이라도 빠지게 되면 나머지 인원의 비용 부담이 커지게 된다. 심지어 2명 이상 탈퇴하게 된다면 졸준위가 무산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사안은 ‘졸장’의 주도 하에 움직인다. 졸장은 학년 전체를 대변하며 전졸협과 직접 소통하는 역할을 맡는다. 실제 졸장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한 명이라도 탈퇴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 오갔을 정도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졸준위가 결성되면 가입한 모든 학생들은 졸준위의 통제를 받는다.<일요시사>가 입수한 한 학교의 규칙문에 따르면 졸준위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었다. ▲출석 시간(8시49분59초까지 착석 등) ▲교수·레지던트에게 개인 연락 금지 ▲지각·결석 시 벌금 ▲회의·행사 참여 의무 ▲병결·생리 결 확인 절차 ▲전자기기 사용 제한 ▲비대면 수업 접속 규칙 ▲시험 기간 행동 규칙 ▲기출·족보 자료 관리 규정 등이다. 학생들이 이 규정을 어길 시 졸준위는 ‘벌금’을 부과해 통제하고 있었다. 금액도 적지 않았다. 규정 위반 시 벌금 2만원에서 50만원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병결이다. 졸준위는 병결을 인정하기 위해 학생에게 진단서 제출을 요구하고, 그 내용(질병명·진료 소견·감염 여부 등)을 직접 열람해 판단했다. 제출 병원에 따라 병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지도 있었다. 한 병원의 진단서가 획일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단체가 학생의 개인 의료 정보를 열람해 병결 여부를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은 학생들 사이에서 부담과 압박으로 작용했다. 질병이 있어도 벌금이 부과될 수 있고, 병결을 얻기 위한 절차가 학습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 규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졸준위는 대면 면담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3:1로 면담을 진행하는 등 학생이 위축될 수 있는 방식을 행하기도 했다. 전자기기 사용 불가 규칙 어기면 벌금도 이 같은 문제로 탈퇴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실제 A 대학 졸준위 전체 학번 회의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한 학생은 규정에 문제를 느껴 졸준위 측에 탈퇴를 의사를 밝혀왔다. 이 회의에서는 그간 탈퇴 의사를 밝힌 학생과의 카톡 대화 전문이 학생들에게 공개됐다. 공개된 카톡 내용에는 탈퇴 과정이 담겨있었는데 순탄하지 않았다. 졸준위 측은 탈퇴 의사를 즉각적으로 승인하지 않았고, 재고를 요청하거나 면담하는 방식으로 요청을 지연했다. 해당 학생이 다시 한번 탈퇴 의사를 명확히 밝힌 뒤에도, 졸장은 “만나서 얘기하자”며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대화를 공개한 뒤 학우들에게 ‘졸준위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서약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졸준위 운영이 조직 이탈 자체를 문제로 판단하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압박을 가한 정황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해당 학우는 탈퇴 확인 및 권리 포기 동의서에 서명한 뒤에야 졸준위를 탈퇴할 수 있었다. 탈퇴 이후에도 갈등은 지속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시험 기간 중, 강의실 앞을 지나던 탈퇴 학생은 졸준위 임원 두 명에게 “제보가 들어왔다”며 불려 세워졌다. 임원들은 이 학생이 학습 플랫폼 ‘퀴즐렛’을 사용한 점을 언급하며, 그 자료 안에 졸준위에서 배포한 기출문제가 포함돼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졸준위에서는 퀴즐렛에 학교 시험 내용이 있다며 탈퇴자가 보지 못하도록 사용자를 색출하기도 했다. 한편, 전졸협은 10년 전 자체 제작한 문제집으로 논란된 적이 있다. 당시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문제가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예상 문제집과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시험이 끝난 직후 시험장 앞에서 수험생 60여명을 상대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압수했고, 국가시험원까지 압수수색해 기출문제와 대조 작업에 들어갔다. 기형적 구조 문제가 된 교재는 ‘의맥’ ‘의련’ 등 졸준위 연합체인 전졸협이 제작·배포해 온 자료들이다. 학생들은 교재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신분증을 확인한 후 배포하는 등 통제된 방식으로 유통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는 “학생들이 전졸협을 통해서만 기출문제를 구할 수 있는 구조는 기형적”이라며 “국가고시를 위해 몇백만원씩 돈을 받고 문제를 제공하는 건 문제를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