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양서 서우관과의 인연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서우관은 종적을 감추었고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결국 서우관이 존재하지 않는 한양에 붙어 있을 필요가 없는 계생은 다시 부안으로 돌아와 자리 잡았다.
“지금 정여립이라 하였소?”
“그러하옵니다, 나으리.”
“정여립의 난에 연루되었다고 한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터인데.”
“그 이후로 그분의 소식조차 듣지 못한 것으로 보아 필시 그리되시지 않았나 싶사옵니다.”
“정여립이라…….”
허균이 정여립을 읊조리며 슬며시 눈을 감았다.
찾게 된 이유
“그 분은 어떤 분이신지요.”
“글쎄, 너무 나서대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려.”
순간 매창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리처럼 말인가요.”
허균이 대답 대신 헛기침을 내뱉으며 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급히 매창의 손이 안주거리로 향했다.
“나리, 제가 기생인지요.”
“기생이라…….”
“이보시게, 매창.”
“예, 나리.”
“실은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이귀 선배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은 바 있소. 그래서 일부러 이곳을 찾아들었다오.”
“비를 피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소녀를 찾으셨다고요?”
“그러이, 바로 고부로 가야 할 일이건만 일부러 매창을 만나기 위해 부안현에 들렀다오.”
일부러라는 허균의 진정 어린 말투에 매창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왜, 내가 매창을 찾으면 안 된다는 말이신가.”
“그런 것은 아니옵고.”
“그래서 이야긴데, 내 매창을 한낱 기생으로 생각한다면 중차대한 일정을 무시하며 이곳에 들렀겠냐 이 말이오.”
“하오면.”
허균이 대답 대신 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매창이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호리병을 잡아 들어 기울였다.
잔으로 들어가는 술 소리가, 술이 잔에 부딪치면서 일어나는 경쾌한 음이 잠시의 적막을 갈랐다.
“우리 아무런 부담감 가지지 말고 서로간의 정분이나 실컷 나누어 봄세.”
잔을 만지작거리던 허균이 그윽한 시선으로 매창을 바라보았다.
매창의 나이 거의 30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들었다.
그 나이면 기생으로서는 퇴물에 해당하는 나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눈가에 주름이 잔잔하게 번져있었다.
“나으리, 저와 같은 퇴물과 정분을 나누려 하심은.”
매창이 허균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했다.
허균이 매창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만지작거리던 술잔을 기어코 들었다.
“본시 묵은 된장이 더 맛있는 법이거늘. 그러니 매창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시게. 자, 이번에는 같이 쭈욱 한잔 하시게.”
“네, 묵은 된장이오!”
매창의 손이 잔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제 보니 기생도 아주 햇병아리 기생일세. 매창이 된장이란 이야기가 아니고 원숙한 멋이 풍겨 나와 좋다는 말이요.”
“네?”
허균이 매창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직도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대가 참으로 갸륵하구려.”
그 소리에 매창이 수줍은 듯 살며시 잔을 들어 허균의 뒤를 따라 입으로 가져갔다.
이번에는 허균이 매창을 바라보지 않았다.
마시든지 말든지 마음대로였다.
그 뜻을 간파했는지 매창도 멈추지 않았다.
“매창의 경우와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구려.”
빈 잔을 내려놓은 허균이 막 술잔을 내려놓는 매창을 주시했다.
중차대한 일정 무시하며 들른 이유는?
강릉서 태어나기까지…부모님의 노력
“네?”
“놀라시기는. 나도 매창의 경우와 조금은 흡사하다 이 말이오.”
“천하의 나리께서도 말씀이신가요.”
“아니, 그럼 나라고 용빼는 재주 있겠소. 또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정해지는 일이던가. 그저 운명이려니 해야지.”
매창이 이야기를 이어달라는 듯 허균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매창은 이곳 서해에서 태어났지만 나는 반대편인 동해에서 태어났다오.”
“동해요?”
“그렇소. 혹시 강릉이라는 지명을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소.”
“강릉, 많이 들어보았지요. 경치 좋고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태어난다는 곳 아닌가요.”
“나와 나의 형님 그리고 누님도 역시 그곳에서 태어났다오.”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일찌감치 상을 당했다.
현모양처였던 청주 한 씨 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당시 예조참판을 지냈던 김광철의 딸과 재취하게 되었다.
외할아버지 김광철의 호는 애일당으로 그는 강릉의 경치 좋은 자리에, 풍수지리상 가장 총명한 영기가 서려있는 장소에 애일당이라는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자주 그곳에 기거했다.
아버지 허엽이 혼인하고 강릉을 자주 방문했다.
한양에서 벼슬하고 있던 당시 사정으로 처갓집 나들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허엽은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강릉 처갓집을 자주 찾았다.
애일당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수태하려는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혼인 전에 아버지 또 주변 사람들로부터 애일당과 관련한 이야기를 듣고는 반드시 자신의 아이들은 그곳에서 수태하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허엽이 강릉을 찾을 때면 외할아버지 김광철과 아버지 허엽 그리고 어머니 사이에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친손자를 그곳에서 수태하도록 하겠다는 외할아버지와 자신의 아이들을 반드시 그곳에서 수태하겠다는 부모와 일대 신경전이 벌어지고는 했었다.
외할아버지 몰래
아버지가 강릉에 오실 때면 외할아버지는 항상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행여나 애일당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도록 조처를 취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아버지께서 당신의 동생 일로 급하게 출타하시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그 틈을 이용해 애일당으로 들어가 결국 수태에 성공했다.
외할아버지의 망연자실 속에서 태어난 이가 바로 허균의 형인 허봉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매창이 웃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