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덮친 ‘실세 사정’막전막후

  • 김성수 kimss@ilyosisa.co.kr
  • 등록 2012.02.09 1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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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임덕 쓰나미에 ‘스폰 그룹’쓸려간다

[일요시사=김성수 기자] 박희태, 이상득, 최시중 ‘3인방’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정권 실세이자 지금은 비리 스캔들의 주인공이란 사실이다. 그렇다면 각 스캔들의 쟁점은 뭘까. 바로 ‘돈줄’이다. 실세 비리 수사에 돈줄 역할을 한 기업인들이 줄줄이 엮이는 모양새다. 검찰은 재계 인사들이 정치 거물들에게 거액을 지원한 스폰 정황을 속속 포착해 ‘사정’이 재계로 확대되는 형국이다.

‘MB맨’박희태·이상득·최시중 비리 스캔들 ‘발칵’
검, 검은돈 출처 수사력 집중…기업 자금줄 정조준

검찰의 정권 실세 비리 수사가 재계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검찰은 박희태, 이상득, 최시중 등 MB 최측근인 정계 거물 ‘3인방’의 의혹을 캐고 있다. 여기에 연루된 혐의자만 수십명. 이중 핵심고리인 ‘돈줄’에 수사가 집중되면서 기업인들이 줄줄이 서초동으로 불려가고 있다.

문병욱 회장 소환
박희태에 돈 유입

9일 전격 사퇴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돈봉투’ 의혹을 받고 있다.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당시 의원 등에게 돈 봉투를 돌렸다는 것이다. “박 의장 측 인사가 현금 300만원과 박 의장의 명함이 든 봉투를 두고 갔다”는 고승덕 한나라당 의원의 폭로로 시작된 이 수사는 ‘박희태 캠프’의 재정지출·자금집행 내역과 돈봉투 전달 지시 여부 및 경위 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검찰은 우선 돈봉투 자금의 출처를 찾는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박 전 의장이 돈봉투를 뿌린 게 사실이라면 어디서 돈이 나왔냐는 의문이다. 검찰은 ‘기업 자금줄’을 의심하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는 지난달 30일 문병욱 라미드그룹(옛 썬앤문그룹) 회장을 소환해 박 전 의장과의 수상쩍은 자금거래 사실 여부에 대해 집중 추궁했다. 검찰은 전대 당시 박희태 캠프의 자금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문 회장 자금이 박 의장 측에 유입된 단서를 포착했다.

문 회장이 박 전 의장에게 건넨 돈은 전대를 앞두고 박희태 캠프의 재정 담당이었던 조정만 국회의장 정책수석의 계좌에서 인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문 회장의 돈이 박 전 의장의 경선 자금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의원과 당협 간부 등에게 전달된 돈이 문 회장 돈인지를 확인하고 있는 것. 앞서 검찰은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라미드그룹 본사를 압수수색해 관련 자료를 확보했다. 이어 라미드그룹 회계 담당 간부 2명을 소환해 조사했다. 박 전 의장과 문 회장 측은 관련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돈이 오간 것은 맞지만, 경선자금과 무관하다는 게 둘의 이구동성이다.


박 전 의장 측은 “문 회장에게서 받은 돈은 전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정당하게 받은 수임료”라며 “(박 전 의장이 문 회장과) 수임계약서를 2008년 2월에 작성했고 이모 변호사와 함께 1억원이 넘는 수임료를 3월 초까지 두 차례 나눠서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 돈은 대부분 제18대 총선을 준비하는 경비로 썼다는 게 박 전 의장 측의 주장이다.

문 회장 측도 선임료라고 일축했다. 라미드그룹은 문 회장이 소환된 날 서울중앙지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문 회장이 박 의장에게 준 돈은) 정치자금이 아니다. 적법한 변호사 수임료”라며 “2008년 2월 박 의장 등 변호사 2명과 선임계약을 맺고 계약금 수천만원을 포함해 총 1억원 정도를 선임료로 줬다”고 해명했다. 문 회장 역시 검찰 조사에서 박 전 의장에 유입된 자금과 관련해 “변호사 선임료일 뿐 전대와는 관련이 없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룹에 따르면 라미드그룹은 2007년 12월 경기도를 상대로 양평골프장 사업과 관련된 사업계획변경승인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민사상 분쟁 등을 이유로 승인이 유보됐다. 이후 2008년 2월 ‘박희태·이창훈 법률사무소’를 통해 등록체율시설업 사업계획변경승인 유보처분 취소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룹은 “돈은 문 회장이 직접 주지 않고 회사 실무자(법무팀)가 법률사무소 사무장에게 수표로 전해줬다”며 “선임료는 문 회장의 개인 자금이 아닌 회사 자금이었다”고 주장했다. 다만 검찰이 의심하고 있는 박 전 의장의 선임계 누락 부분에 대해선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임계에 박 의장이 빠진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고 말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상고 4년 후배인 문 회장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함께 기업인 가운데 몇 안 되는 ‘노무현 후원인’이었다. 이런 이유로 노 전 대통령 집권 이후 대선자금과 측근비리 사건 등에 얽혀 여러 차례 수사를 받았던 문 회장은 2003년 12월 노 전 대통령의 측근들에게 대선자금을 건넨 혐의 등으로 구속, 2005년 6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확정받았다. 그룹 측은 “박 의장 선임 당시는 노 전 대통령 시절 정치자금법 문제로 집행유예 기간이었다. 다시 정치자금을 건넸다는 것은 정신이 나간 짓”이라고 의혹을 반박하기도 했다.

검찰은 문 회장 외에도 전대와 관련 한나라당에 돈을 건넨 기업인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그 타깃은 전대에서 박 전 의장과 선거 공조를 했던 공성진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다. 검찰은 공성진 캠프도 몇몇 기업체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지원받아 적지 않은 돈이 뿌려진 정황을 포착하고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있다.

코오롱 “불똥 튈라”
이상득 수사 예의주시


나아가 전대 후보를 겨냥한 기업들의 전방위 자금지원 공세가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다. 이 결과에 따라 재계에 돈 봉투 사정 한파가 몰려올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에선 최소 10여개 이상의 기업이 직·간접적으로 거액의 자금을 후원했다는 얘기가 퍼지고 있다.

박 전 의장과 함께 정국을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인물은 ‘MB 형님’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이다. 이 의원은 이국철 SLS그룹 회장(구속)의 구명로비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상한 뭉칫돈이 이 의원에게 흘러간 정황을 확인했다. 바로 코오롱그룹의 자금으로 의심되는 돈이었다.

이 의원의 전 보좌관 박배수(구속)씨의 차명 계좌에서 나온 자금의 출처를 추적해온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는 박씨의 차명계좌로 의심되는 계좌 5∼6개에서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 입금된 사실을 파악했다. 이 가운데 1∼2개는 코오롱 직원의 명의였다. 박씨가 코오롱 직원 명의의 계좌를 통해 코오롱그룹으로부터 매달 수백만원씩, 모두 수천만원의 자금을 받아온 사실이 확인된 것.

검찰은 코오롱그룹이 박씨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지급할 이유가 없는 데다 차명계좌를 통해 돈을 전달한 점 등으로 미뤄 대가성 자금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추적 중이다. 이를 위해 박씨와 동료였던 코오롱그룹 계열사 상무 박모씨와 코오롱건설 부사장 출신인 권모씨 등 코오롱 전현직 임원도 조사했다.

박씨와 자금 세탁에 관여한 여비서 임모씨는 과거 코오롱그룹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이 의원을 모시기 시작했다. 1961년 코오롱(당시 한국나일론)에 공채로 입사한 이 의원은 코오롱 대표이사 출신으로 박씨 역시 코오롱 출신이다. 임씨도 코오롱 사장 비서실에 근무한 경력이 있다. 박씨와 임씨는 각각 1996년, 1991년부터 이 의원을 보좌해왔다.

“돈봉투 사정 한파 덮친다!”
‘서초동 호출’줄줄이 소환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은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혹시 수사 불똥이 회사로 튀지 않을까 해서다. 코오롱 측은 “회사와 무관한 개인적인 일”이라고 부인했지만, 검찰 안팎에선 “이 의원 측과 코오롱그룹간, 나아가 이 의원과 이 회장이 모종의 관계가 아니냐”는 추측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아직까지 이 의원과 이 회장의 연결고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MB 절친’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도 돈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다. 최 전 위원장은 박 의장과 마찬가지로 돈봉투 살포 의혹을 받고 있다. 2008년 추석(9월14일) 직전 한나라당 친이명박계 의원들에게 수백만∼수천만원씩의 돈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다. 최 전 위원장은 최근 방통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검찰의 ‘예봉’을 피하지 못할 처지다.

최 전 위원장은 “저의 퇴임이 방통위가 외부의 편견과 오해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저로 인해 방통위 조직 전체가 외부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당하거나 스마트 혁명을 이끌고 미디어산업 경쟁력을 강화시킬 주요 정책들이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사임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최근 측근 비리 등이 불거지면서 상당한 심적 부담을 느낀 표정이 역력했다.

정치권에선 최 전 위원장이 뿌린 돈이 재계에서 나온 ‘검은돈’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재계로 수사가 확대될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다. 최 전 위원장은 ▲케이블PP(방송채널사용사업자) 선정 ▲케이블TV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 선정 ▲온미디어 인수 ▲차세대 이동통신용 주파수 할당 ▲제4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종편 방송 출범 등의 사업을 진행하면서 그동안 로비·특혜·뇌물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 사업엔 SK, CJ 등 대기업들이 오르내려 수사 결과에 따라 파장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민주당은 “이제 남은 것은 검찰의 엄중 수사와 사법부의 준엄한 심판만이 최 전 위원장을 기다리고 있다”며 “지난 4년간 국민을 화나게 했던 각종 불편부당한 일들과 그 측근들의 비리에 대해 대대적인 청문회를 통해 사실을 밝혀낼 것”이라고 밝혔다. 시민단체들도 “최 전 위원장이 자행해온 각종 의혹을 사퇴로 덮어져서는 안 된다”며 “그를 둘러싼 비리와 국회의원을 상대로 돈봉투 사건에 대해 검찰의 엄정한 수사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최시중-재계 연계설
방송·통신업계 긴장


박희태, 이상득, 최시중 ‘3인방’은 현 정권 실세들이다. 지난 4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지금은 비리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몰락, MB의 임기말 레임덕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 레임덕은 언제 어디로 쓰나미를 몰고 올지 모른다. 그 쓰나미 경보가 재계에 발령됐다. ‘레임덕 쓰나미’에 기업인들이 쓸려갈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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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