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으로 사라진 ‘철강왕’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대한민국 격동의 반세기 쇳물처럼 뜨거운 삶 “수고 많으셨습니다”

[일요시사=송응철 기자] ‘철인’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던 1960년대, 모래 바람만 자욱하던 경북 포항에 ‘죽기 살기’로 일관제철소를 세운 그였다. 무리수라는 비난에도 ‘제철보국’의 신념으로 포스코를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으로 키워낸 그였다. 삶의 모든 순간에 청렴함을 잃지 않던 그였다. 그런 그의 무쇠 같던 육체와 집념도 결국 죽음을 비켜가진 못했다. 84년간 쇳물처럼 뜨겁게 살다 간 고 박태준 명예회장. 그가 남긴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 봤다.

육사 나와 한국전쟁 등 거친 뒤 육군대학 입교
대한중석 사장 맡아 1년 만에 적자에서 흑자로


‘철강왕’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84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박 명예회장은 지난 13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10년 전 수술했던 흉막섬유종 후유증으로 흉막 전폐절제술을 받고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1927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박 명예회장은 1933년 6세의 나이로 모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수학했다. 1945년 와세다대 공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광복과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귀국했다.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2학년까지만 학업을 마치고 다시 귀국했다.

흉막섬유종 후유증
입원 치료 받다 타계

1948년 육군사관학교 전신인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생으로 군에 몸담았던 그는 한국전쟁 을 겪으며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했다. 또 육군대학 5기로 입교해 1954년 수석 졸업했다. 탄도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었다.

군인의 길을 걷고 있던 박 명예회장은 1961년 5ㆍ16쿠데타 이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박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전격 발탁됐다. 같은 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회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임명돼 경제인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박 명예회장은 1963년 신문에 연재된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우리가 잘 사는 길>을 읽으며 ‘1인당 국민소득이 76달러에 불과한 가난한 대한민국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외자 도입에 의한 공업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뜻을 같이했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으나 박 명예회장은 정치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박 명예회장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1964년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대한중석 사장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대한중석을 1년 만에 적자에서 흑자로 돌려놨다. 박태준의 탁월한 경영능력을 높게 평가한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소 건설의 특명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 이전에도 제철소 건설 시도는 있었다. 한국 정부가 철강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최초의 종합제철 건설 계획을 세운 것은 1958년 자유당 정부 시절. 그러나 자금 부족, 정국 혼란 등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박 명예회장이 제철소 건립 프로젝트를 맡았을 당시에도 우리나라는 자본과 기술, 경험은 물론 자원까지 없는 상태였다. 일관제철소(제선, 제강, 압연의 세 공정을 모두 갖춘 제철소) 건설은 현실과 동떨어진 꿈에 가까웠던 것이다.

특히 전쟁으로 황폐화된 한반도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에 어느 나라도 자금을 투자할 의향이 없었다. 이에 박 명예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가 대일청구권자금을 제철소 건설에 쓸 수 있도록 하는 회담을 극적으로 성사시켰다. 또 일본 3대 철강 오너들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기술 이전 약속을 받아냈다. 이런 노력 끝에 1970년 연산 103만톤 조강 규모의 1기 설비가 착공에 들어갔다. 비로소 ‘영일만의 기적’이 시작된 셈이다.

‘제철보국’과 ‘우향우 정신’이 포스코의 좌우명이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제철보국은 일관제철소를 건설해 경쟁력 있는 ‘산업의 쌀’을 안정적으로 공급함으로써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자는 의미였다. 또 우향우정신은 선조들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하는 일관제철소를 반드시 성공시켜야하며,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는 제철소 건설부지에서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몸을 던지자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박 명예회장은 그야말로 제철소건설에 죽기 살기로 매진했다.

그는 특히 공기업 체제에 따르는 비효율과 부실의 여지를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중점을 뒀다. 이런 책임의식은 자연스레 완벽주의로 이어졌다. 1977년 3기 설비공사 도중 80% 정도 진행된 발전 송풍 설비 구조물 공사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이를 모두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 의지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 일으로 손실은 봤지만 ‘포철 사전에 부실공사는 없다’는 무형의 자산이 남았다. 또 그는 하버드대 등의 경영학 교재에 모범 경영 관리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철저한 비리근절도 박 명예회장이 한결같이 지향했던 경영철학이다. 1970년대는 설비공급사나 정치권에서 각종 납품비리나 청탁압력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박 명예회장은 정치권의 압력 배제와 함께 설비 공급업자 선정의 재량권 인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메모에 적어 박 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소위 ‘종이마패’로 불린 이 메모는 외부압력을 차단하고 비리를 근절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부실 발견하자
건물 전체 폭파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86년 12월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한 포항공대 를 설립했다. 학사운영정책, 신입생 선발 등에서 당시 사회 분위기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획기적인 정책들을 과감하게 추진함으로써 국내 정상의 대학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대학으로 급성장했다. 또 직원들을 위한 최고 수준의 주택단지를 조성하는가 하면 사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을 포함해 초ㆍ중ㆍ고등학교를 설립하는 등 사원복지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81년 포철 초대회장에 취임한 그는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정치인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해 제11대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진출한 것. 사실상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일군 포철을 외풍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13ㆍ14ㆍ15대 국회를 거쳐 1990년 민정당 대표에 취임했고 노태우ㆍ김영삼ㆍ김종필의 3당합당으로 창당한 민주자유당(민자당)의 최고위원에 오른데 이어 32대 국무총리를 맡기도 했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일평생 지켜온 박 명예회장은 청렴한 생활로 유명하다. 그는 1960년대 제철소 건설초기부터 단 한 주의 주식도 보유하지 않았다. 소유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해야 제대로 된 조직운영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제철보국’ ‘우향우 정신’으로 일관제철소 건설
사망 전까지 이어진 청렴…가진 건 모두 사회에


1974년 관세법 위반혐의로 가택수색이 진행돼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지만 집문서와 패물 몇 가지, 해외출장의 흔적으로 보이는 푼돈만 있어 조사관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박 명예회장은 지난 2000년 40년간 거주하던 아현동 소재 주택을 처분해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이 집은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 당시 의장이었던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특별 하사금’을 받아 매입한 집이었다.

박 명예회장의 청렴함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어졌다. 그의 명의로 남은 재산은 한 푼도 없었다. 최근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맏딸 진아씨 집에서 지냈으며 입원비조차 본인 스스로 감당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박 명예회장은 이처럼 빈손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 근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던 1960년대. 모래 바람만 자욱하던 경북 포항에 번듯한 일관제철소를 세운 그였다. 당시 모두가 ‘무리수’라고 혀를 찼지만 그는 오늘날 포스코를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으로 키워냈다.

사회에 남긴 공적에
사회장으로 장례

그는 대한민국이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 장교로 전장에 섰고, 경제회생을 위해 산업의 역군을 찾을 때 최고의 경영자가 됐으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리더가 절실할 때 정치인이 됐다. 이처럼 조국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헌신과 열정으로 기꺼이 조국에 봉사하는 삶을 살다 간 ‘청암’ 고 박태준 명예회장. 이제는 그간의 고단한 짐들을 모두 내려놓고 영원한 안식을 취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한편, 박 명예회장의 장례는 당초 국가장으로 검토되기도 했으나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사회장은 국가와 사회에 공적을 남긴 저명인사가 사망했을 때 사회 각계 대표가 자발적으로 장의위원회를 구성해 치르는 장례의식으로 정부에서는 장례비용 중 일부를 보조하거나 고인의 업적을 감안, 훈장을 추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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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전국 한의과대학교에는 ‘졸업준비위원회’가 존재한다. 말 그대로 졸업 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명목상 자발적인 가입을 독려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로 가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졸업준비위원회(이하 졸준위)는 졸업앨범 촬영, 실습 준비, 학번 일정 조율, 학사 일정과 실습 공지, 단체 일정뿐 아니라 국가시험(이하 국시) 대비를 위한 각종 자료 배포를 하고 있다. 매 대학 한의대마다 졸준위는 거의 필수적인 조직이 됐다. 졸준위는 ‘전국한의과대학졸업준비협의체(이하 전졸협)’라는 상위 조직이 존재한다. 자료 독점 전졸협은 각 한의대 졸업준비위원장(이하 졸장)의 연합체로 구성돼있으며, 매년 국시 대비 자료집을 제작해 졸준위에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의텐’ ‘의지’ ‘의맥’ ‘의련’ 등으로 불리는 자료집들이다. 실제 한의대 학생들에게는 ‘국시 준비의 필수 자료’로 통한다. 국시 100일 전에는 ‘의텐’만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졸준위가 없으면 국시 준비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정설이다. 한의계 국시는 직전 1개년의 시험 문제만 공개되기 때문에 시험 대비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시 문제는 오직 졸준위를 통해서만 5개년분 열람이 가능할뿐더러, 이 자료집은 공개자료가 아니라서 학생이 직접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실상 전졸협이 자료들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자료집을 얻을 수 있는 경로는 단 하나, 졸준위를 결성하는 것이다. 졸준위가 학생들의 투표로 결성되면 전졸협이 졸준위에 문제집을 제공한다. 이 체계는 오랫동안 유지돼왔고, 학생들도 졸준위를 통해 시험 자료를 제공 받는 것이 ‘관행’처럼 받아들여왔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반드시 결성돼야만 한다는 기조가 강하다. 학생들의 반대로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시 전졸협은 해당 학교에 문제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은 모든 학생들의 가입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졸준위 가입 여부는 실질적으로 선택이 아니다. 자료집은 전졸협을 통해서만 제공되기 때문에, 졸준위에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이 학생들 사이에서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학생들은 “문제를 얻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으로 문제집을 받아볼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학생들의 해당 학년 학생들을 모두 가입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실제 한 대학교에서는 졸준위 결성을 위한 투표를 진행했는데 익명도 아닌 실명 투표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진행했지만 반대자가 나오자 실명 투표로 전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반대 의견이 나오기 어렵다. 실명으로 투표가 진행되는 데다, 반대표를 던질 경우 이후 자료 배포·학년 일정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 실명 투표로 진행 가입시 200만원 이상 납부 필수 문제는 이 졸준위 가입이 무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졸준위에 가입하면 졸업 준비 비용(이하 졸비)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돈을 걷는데, 그 비용이 상당하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한 대학교의 졸비는 3차에 걸쳐 납부하도록 했는데 1차에 75만원, 2차에 80만원, 3차에 77만원 등 총 232만원 수준이었다. 이는 한 학기 등록금에 맞먹는 금액이다. 금액 산정 방식은 졸준위 가입 학생 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한 명이라도 빠지게 되면 나머지 인원의 비용 부담이 커지게 된다. 심지어 2명 이상 탈퇴하게 된다면 졸준위가 무산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사안은 ‘졸장’의 주도 하에 움직인다. 졸장은 학년 전체를 대변하며 전졸협과 직접 소통하는 역할을 맡는다. 실제 졸장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한 명이라도 탈퇴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 오갔을 정도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졸준위가 결성되면 가입한 모든 학생들은 졸준위의 통제를 받는다.<일요시사>가 입수한 한 학교의 규칙문에 따르면 졸준위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었다. ▲출석 시간(8시49분59초까지 착석 등) ▲교수·레지던트에게 개인 연락 금지 ▲지각·결석 시 벌금 ▲회의·행사 참여 의무 ▲병결·생리 결 확인 절차 ▲전자기기 사용 제한 ▲비대면 수업 접속 규칙 ▲시험 기간 행동 규칙 ▲기출·족보 자료 관리 규정 등이다. 학생들이 이 규정을 어길 시 졸준위는 ‘벌금’을 부과해 통제하고 있었다. 금액도 적지 않았다. 규정 위반 시 벌금 2만원에서 50만원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병결이다. 졸준위는 병결을 인정하기 위해 학생에게 진단서 제출을 요구하고, 그 내용(질병명·진료 소견·감염 여부 등)을 직접 열람해 판단했다. 제출 병원에 따라 병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지도 있었다. 한 병원의 진단서가 획일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단체가 학생의 개인 의료 정보를 열람해 병결 여부를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은 학생들 사이에서 부담과 압박으로 작용했다. 질병이 있어도 벌금이 부과될 수 있고, 병결을 얻기 위한 절차가 학습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 규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졸준위는 대면 면담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3:1로 면담을 진행하는 등 학생이 위축될 수 있는 방식을 행하기도 했다. 전자기기 사용 불가 규칙 어기면 벌금도 이 같은 문제로 탈퇴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실제 A 대학 졸준위 전체 학번 회의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한 학생은 규정에 문제를 느껴 졸준위 측에 탈퇴를 의사를 밝혀왔다. 이 회의에서는 그간 탈퇴 의사를 밝힌 학생과의 카톡 대화 전문이 학생들에게 공개됐다. 공개된 카톡 내용에는 탈퇴 과정이 담겨있었는데 순탄하지 않았다. 졸준위 측은 탈퇴 의사를 즉각적으로 승인하지 않았고, 재고를 요청하거나 면담하는 방식으로 요청을 지연했다. 해당 학생이 다시 한번 탈퇴 의사를 명확히 밝힌 뒤에도, 졸장은 “만나서 얘기하자”며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대화를 공개한 뒤 학우들에게 ‘졸준위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서약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졸준위 운영이 조직 이탈 자체를 문제로 판단하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압박을 가한 정황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해당 학우는 탈퇴 확인 및 권리 포기 동의서에 서명한 뒤에야 졸준위를 탈퇴할 수 있었다. 탈퇴 이후에도 갈등은 지속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시험 기간 중, 강의실 앞을 지나던 탈퇴 학생은 졸준위 임원 두 명에게 “제보가 들어왔다”며 불려 세워졌다. 임원들은 이 학생이 학습 플랫폼 ‘퀴즐렛’을 사용한 점을 언급하며, 그 자료 안에 졸준위에서 배포한 기출문제가 포함돼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졸준위에서는 퀴즐렛에 학교 시험 내용이 있다며 탈퇴자가 보지 못하도록 사용자를 색출하기도 했다. 한편, 전졸협은 10년 전 자체 제작한 문제집으로 논란된 적이 있다. 당시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문제가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예상 문제집과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시험이 끝난 직후 시험장 앞에서 수험생 60여명을 상대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압수했고, 국가시험원까지 압수수색해 기출문제와 대조 작업에 들어갔다. 기형적 구조 문제가 된 교재는 ‘의맥’ ‘의련’ 등 졸준위 연합체인 전졸협이 제작·배포해 온 자료들이다. 학생들은 교재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신분증을 확인한 후 배포하는 등 통제된 방식으로 유통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는 “학생들이 전졸협을 통해서만 기출문제를 구할 수 있는 구조는 기형적”이라며 “국가고시를 위해 몇백만원씩 돈을 받고 문제를 제공하는 건 문제를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