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실세’ 엄삼탁 전 안기부 기조실장 ‘빌딩 암투’ 전말

테헤란로에 600억 묻고…아직 눈 못 감았다

[일요시사=김성수 기자] 국민들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6공 실세’ 엄삼탁씨가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그의 유족과 옛 측근이 3년째 소송 중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이들은 강남 수백억원대 빌딩을 두고 한 치 양보 없는 지루한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다. 과연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고인이 생전 명의신탁” vs “제값 다 주고 샀다” 
유족-측근 18층 건물 소유권 두고 3년째 진실공방


고 엄삼탁씨는 ‘6공 황태자’ 박철언씨와 함께 노태우 정권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인물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6공화국 실세 중 실세였다. 1965년 경북대 사범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학군단(ROTC) 3기로 임관한 엄씨는 수도경비사령부에 재직 당시 연대장이던 노 전 대통령과 맺은 인연으로 6공 시절 이름을 날렸다.

특유의 충성심으로 노 전 대통령의 궂은일을 도맡아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가 정권을 잡자 승승장구하다 예비역 소장으로 전역, 국가정보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보좌관(1989년)과 기획조정실장(1990∼1993년) 등을 역임했다.

노태우 정권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려

기조실은 안기부 조직관리와 예산을 총괄하는 핵심 조직이었다. 따라서 역대 안기부 기조실장은 최고 통치권자의 ‘측근 인사’가 기용됐다. 이들은 안기부의 예산을 관장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사금고지기’ 역할까지 맡았다. 엄씨는 노태우 정권 5년 중 무려 3년씩이나 기조실장을 맡았다. 노 전 대통령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엄씨는 YS정부가 들어선 뒤 1993년 병무청장으로 기용됐으나 곧바로 슬롯머신 사건에 휘말려 낙마했다. 이후 끊임없이 정치적 재기를 노렸다. 1997년 대선 때 재경 경북도민회장을 맡으면서 반대편에 섰던 DJ 진영에 합류했지만, 이듬해 대구 달성 보선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맞붙어 패배하는 등 정치 재기가 여의치 않자 체육계로 돌아섰다.

군 시절 국군체육부대장을 비롯해 대한체육회 부회장(1993년), 국민생활체육협의회 회장(1998년), 한국씨름연맹 총재(1999∼2002년) 등을 지냈다. 민주당 부총재와 대구시지부장을 역임하고 2002년 탈당한 뒤 또 다시 2005년 뇌물수수 혐의로 사법처리되면서 완전히 정치생명을 잃었다. 그리고 2008년 2월 지병인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세.

이렇게 국민들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6공 실세 엄씨가 최근 세간에 회자되고 있다. 그의 유족과 옛 측근이 3년째 소송 중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이들은 강남 수백억원대 빌딩을 두고 한 치 양보 없는 지루한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다.

그렇다면 한때 가깝게 지내던 이들은 무슨 이유로 어쩌다 서로의 ‘멱살’을 잡고 있는 것일까. 사건은 엄씨가 별세한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씨의 유족에 따르면 엄씨는 사망 직전 지인에게 “차명으로 맡겨 놓은 강남 빌딩을 찾아 달라. 내 소유인데 다른 사람 명의로 명의신탁을 해 놓은 것이니 원래대로 내 가족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엄씨는 인감증명이 첨부된 확약서와 위임장, 각서 등도 건넸다. 문서엔 ‘위 부동산은 본인 명의로 돼 있으나, 부동산의 실질적인 소유주는 엄삼탁이고 본인은 단순한 명의수탁자입니다’란 내용이 적혀있었다.

유족은 “토지와 건물의 소유주였던 권모씨 등이 엄씨로부터 돈을 빌렸는데, 이를 변제하기 위해 2000년 부동산을 엄씨에게 팔았다”며 “당시 강남에 신축 중인 빌딩의 부지를 다른 사람의 명의로 옮긴 뒤 공사비용을 엄씨가 대줘서 2001년 건물을 완공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치인에 대한 계좌 추적을 피하기 위해 엄씨가 다른 사람에게 부동산 명의를 맡기고 관리하도록 했던 것”이라며 “엄씨는 실소유주가 노출될 만한 금융 자료를 전혀 남기지 않는 등 빌딩과 토지가 다른 사람의 재산으로 보이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자금 추적 피해 숨겨둔 재산”
무슨 돈으로…출처 의문 증폭


‘명의신탁’은 소유관계를 공시하도록 돼 있는 부동산 등의 재산을 자신의 이름이 아닌 제3자의 명의로 등기부에 등재한 뒤 실질소유권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종중(문중)재산의 위탁관리 등을 인정하기 위해 허용된 당사자간의 계약관행으로, 그동안 법률적인 규정이 없어 취득세·양도세 등의 조세부과를 회피하거나 각종 규제를 피하는 등 재산도피 수단으로 악용됐었다. 그러나 1995년 7월부터 시행된 ‘부동산 실권리자 명의등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예외조항을 제외하고 명의신탁은 원칙적으로 금지됐다.

엄씨가 자신의 빌딩을 명의신탁했다고 지목한 사람은 생전 측근인 박모씨였다. 박씨는 엄씨의 고교 1년 선배로, 평소 호형호제하던 막역한 사이였다. 박씨는 이같은 각별한 친분으로 엄씨가 회장을 맡았던 국민생활체육협의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또 엄씨가 한국씨름연맹 총재로 재직할 때 연맹 이사로 함께 일하기도 했다.

“차명건물 찾아달라”
사망 전 유언 남겨
 
엄씨의 사망 직후 지인에게 유언을 전해들은 유족은 명의수탁자인 박씨에게 빌딩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박씨는 “내가 엄씨로부터 사들여 소유권을 이전받은 빌딩”이라며 유족들의 반환 요청을 거부했다.

박씨는 “내가 엄씨에게 130억원을 주고 신축 중이던 건물과 땅을 샀다. 이후 내 돈 160억원을 더 들여 건물을 완공했다”며 “매매대금은 매달 일정 금액을 나눠 지불했는데, (엄씨와 작성한) ‘잔금 완불 시 그 전의 관련 문서는 모두 효력을 상실한다’는 내용의 확약서까지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정상적으로 거래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자금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내 명의의 7개 계좌에 매달 일정액을 입금하면 엄씨가 그 돈을 인출하는 방법으로 빌딩 매매대금을 모두 지급했다”고 설명했다.

엄씨의 유족과 박씨가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빌딩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 테헤란로에 자리 잡고 있다. 현재 박씨 명의의 ○○빌딩은 2001년 5월 XXX-XX번지 외 2필지에 지어진 지하 6층 지상 18층 건물로, 대지면적 1128㎡(약 340평)에 연면적 1만6690㎡(약 5100평) 규모다.

이 빌딩의 매매가는 약 600억원대를 호가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건설교통부 조회 결과 빌딩 부지의 공시지가는 지난해 1월 기준 단위면적(㎡)당 2990만원으로 나타났다. 땅값만 약 340억원에 이르는 셈이다. 여기에 국세청이 산정한 건물 기준시가를 더하면 총 500억원이 넘는다는 계산이다.

실거래가로 따지면 이를 훨씬 웃돈다. 이 빌딩은 건축된 지 10년 정도 됐지만 대한민국 중심인 강남, 그중에서도 ‘노른자 중 노른자’라 할 수 있는 테헤란로 변에 위치해 있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들은 이 일대의 실거래가가 공시지가와 기준시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흥정된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빌딩과 비슷한 규모의 주변 빌딩들이 600억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기도 했다는 전언이다.

박씨는 빌딩 신축 전 부지를 먼저 사들였다. 등기부등본상 땅 주인이 된 것은 2000년 4월. 박씨는 1980∼90년대 잘나가던 △△그룹 오너 권씨 형제로부터 토지를 매입했다. 이듬해 7월엔 완공된 빌딩 소유자로 등기됐다.

문제는 엄씨가 세상을 뜨면서다. 유족인 부인 정모씨와 두 아들은 엄씨가 사망하고 일주일 뒤 박씨를 횡령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형사 고발하는 한편 박씨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명의신탁 무효로 인한 소유권보존등기말소를 청구하는 민사 소송을 냈다.

반환 요구 거부하자 민·형사 ‘줄소송’
형, 대법원 “증거 없다”측근 손들어 
민, 1심 측근 ‘승’…2심선 유족 ‘승’


우선 형사 소송은 박씨의 승리로 끝났다. 지난 7월 대법원이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박씨에게 무죄 확정 판결을 내리면서 일단락됐다.

대법원 형사재판부는 “박씨의 딸이 엄씨의 부인에게 80억원에 합의를 시도하는 등 박씨가 엄씨로부터 명의신탁을 받아 그를 위해 관리했다는 강한 의심이 들지만, 박씨가 명의수탁자였다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없는 진실이라는 확신을 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박씨에게 무죄를 확정했다.

“아내·자녀에 넘겨라”
원심 깨고 유족 승소

하지만 민사 소송은 1·2심이 각각 다른 결과가 나왔다. 1심은 박씨의 승소. 서울중앙지법 민사10부는 지난해 1월 엄씨의 유족이 박씨를 상대로 낸 소유권보존등기말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엄씨가 지인 권모씨 등으로부터 토지 및 미완성 건물을 박씨의 명의로 사들였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며 “오히려 엄씨가 권씨 등으로부터 토지 등을 산 뒤 등기를 생략한 채 박씨에게 팔았으며 박씨는 대금을 여러 차례 나눠 지급했다”고 밝혔다.

또 “명의신탁자가 명의수탁자로부터 약속어음을 교부받은 것과 130억원에 이르는 매매대금을 수차례 분할해 지급하는 방식도 매우 이례적이기는 하나 정치인인 엄씨의 신분상 자금추적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러한 매매대금 지급 방식이 약정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특히 “박씨는 엄씨로부터 사들인 미완성 건물을 160여억원을 들여 모두 지었고 이 과정에서 엄씨는 자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며 ‘실제 건축주의 사정으로 미완성인 건물을 인도받아 완성했을 경우 완성을 한 사람을 소유주로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를 그 근거로 들었다.

2심에선 유족이 이겼다. 서울고법 민사31부는 지난 2일 원심을 깨고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재판부는 “박씨는 이 건물 소유권 가운데 엄씨의 아내에게 지분 7분의3을, 두 자녀에게 각각 7분의2씩 이전등기하라”며 “원고 측의 주된 청구를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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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