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김성수 기자] 서울 폭력조직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 이른바 ‘나와바리’(담당구역)를 지키기 위해 조직간 ‘기동타격대’를 결성, 활동 무대를 확장하거나 또 다른 지방의 다른 ‘파’와의 결합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범죄와의 전쟁’당시 수감됐다가 속속 출소하고 있는 중간 보스급들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조직원들을 다시 규합해 와해된 조직을 재건할 조짐이다. 조직간 세력다툼이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지방 폭력조직 조직원을 무차별 폭행한 서울지역 연합 조폭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최근 조직원을 때린 지방 조직폭력배를 집단으로 보복 폭행한 혐의(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상 집단 흉기 등 상해)로 서울 내 폭력조직 일원 고모씨 등 15명을 입건, 이중 4명을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고씨 등은 지난 6월4일 오후 7시30분께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한 웨딩홀에서 광주지역 한 폭력조직원 자녀의 돌잔치에 온 ‘전주 나이트파’ 조직원 홍모씨의 얼굴을 수차례 때려 기절시키고 몸을 밟아 다치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답십리파’, ‘이글스파’, ‘화양리식구파’ 등 서울에 기반을 둔 폭력조직들이 연합된 조직원들이다.
“시내 폭력조직간
회합·연계 시도”
‘답십리파’ 한 조직원은 지난해 10월 대구지역 폭력배의 결혼식에서 홍씨 등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 “전라도 애들이 서울에서 설친다”등의 지방 폭력조직을 낮춰보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폭행을 당한 조직원은 때를 기다리다 돌잔치에 홍씨가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다른 소속의 서울지역 조직원 16명을 끌어 모았고, 돌잔치에 찾아가 홍씨의 얼굴을 수차례 때려 실신시킨 뒤 발로 가슴과 팔 등을 짓밟는 등 집단으로 보복폭행을 가했다. 홍씨는 양팔 척골골절 등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다음날 ‘전주나이트파’ 조직원들이 재차 보복하기 위해 대거 상경했다. 서울 연합 조폭 일당은 이들과 맞붙기 위해 특수 제작된 흉기 등 상해 도구를 지니고 단체로 차에 타고 있다가 시민의 신고로 경찰 검문에 걸려 해산했다.
경찰 관계자는 “지방 출신 조직폭력배들이 서울에 올라와 각종 이권에 개입하자 서울 토박이 폭력조직원들의 위기감이 높아졌다”며 “서울 지역 폭력배들이 대응하기 위해 연합세력을 구축한다는 사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서울 폭력조직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 조직간 ‘기동타격대’를 결성, 활동 무대를 확장하거나 또 다른 지방의 다른 ‘파’와의 결합을 추진하고 있다. 과거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서로 ‘밥그릇’을 빼앗기도 모자랄 판에 쉽게 손을 잡는다는 것은 조폭계에선 보기 드문 현상이다.
경찰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서울 시내 폭력조직이 다른 폭력조직과 회합 또는 연계를 시도하고 있다”며 “최근 폭력조직간 경계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희미해지고 특정 이권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필요시 폭력조직간 소규모로 협력·연계하는 등 이합집산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서울 조폭들이 ‘이합집산’하는 이유가 뭘까. 한마디로 이른바 ‘나와바리’(담당구역)를 지키기 위해서다.
지방세력 속속 상경…‘돈 되는’ 각종 이권 개입
위기 느낀 서울 토박이 조직들 ‘연합전선’ 구축
‘형님’들도 불경기의 한파는 피할 수 없었다. 지하세계는 ‘성매매특별법’ 시행으로 유흥업소가 철퇴를 맞은 이후 밥그릇인 오락실마저 ‘바다이야기’후폭풍을 맞으면서 자금줄이 막힌 상태다. 게다가 러시아 ‘야쿠트파’, 일본 ‘야마구치구미’, 중국 ‘삼진회’, 태국 ‘차이파’, 방글라데시 ‘우슈파’ 등 국제 범죄조직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만큼 토종(?) 조폭들의 ‘나와바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때문일까. 조폭들은 기존의 활동무대였던 유흥업, 사행성 게임장 등에 국한되지 않고 건설업, 유통업, 용역업, 입찰, 채권추심 등 다양한 분야로 합법을 가장해 영역을 넓히고 있다.
문제는 70, 80년대보다 덜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소외된 지방 조폭들이 이권 개입 여지가 적은 지역을 벗어나 ‘먹고 살기’ 위해 속속 상경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 조폭들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활동무대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상황에 따라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 강남을 근거지로 한 ○○파 행동대장 A씨는 “당국의 단속과 규제로 먹고 살 일이 막막하다보니 이쪽 세계에서 금기시 돼 왔던 강도, 보험사기 등 자잘한 범행에도 손을 대고 있다”며 “이 와중에 지방 조폭들까지 줄줄이 서울로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어 구역다툼을 자제하고 밥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항상 긴장하고 있다. 조만간 서울 조직과 지방 조직간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귀띔했다.
다른 조직 한 일원은 “지방 조직들은 서울로 진출할 때 단독으로 오지 않고 지역 군소 조직들을 통합해 몸집을 키운 뒤 상경한다”며 “지역 연고가 아닌 전국 각지에서 조직원을 모으기도 하는데, 두목급들이 자금력만 있으면 이곳저곳에서 돈 냄새를 맡고 벌떼처럼 모여든다”고 전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활동무대 대이동
서울 조직의 위축은 자료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경찰청 ‘전국 조직폭력배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서울에서 활동 중인 폭력조직은 모두 22개, 조직원은 총 474명에 이른다. 2009년(조직 23개·조직원 507명)에 비해 각각 1개, 33명 감소했다. 경기 지역도 30개 조직 924명에서 25개 조직 865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같은 기간 주요 지방 도시들의 폭력조직은 ▲부산 23개 385명→22개 396명 ▲광주 8개 307명→8개 332명 ▲대전 9개 124명→9개 136명 ▲전북 15개 486명→16개 512명 ▲전남 6개 185명→8개 214명 ▲경남 16개 325명→17개 348명 등으로 세를 늘린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토박이 조직은 ‘구로동파’, ‘영등포중앙파’, ‘진성파’, ‘이글스파’, ‘답십리파’, ‘화양리식구파’, ‘남부동파’, ‘역전식구파’, ‘동대문파’, ‘상계파’, ‘돈암동파’, ‘길동파’, ‘장안동파’, ‘청량리역전파’, ‘영택이파’ 등이다.
반면 지방에서 상경해 뿌리내린 조직은 국내 ‘3대 패밀리’라 불리는 ‘양은이파’, ‘서방파’, ‘OB파’를 비롯해 전남 영광출신 폭력배들이 모여 종로에 자리 잡은 ‘영광파’, 호남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다가 상경한 ‘연합 새마을파’ 등이다.
이들 조직의 특징은 기존 조폭과는 다른 형태인 ‘기동타격대식’이란 점이다. 돈 되는 일이면 무작정 뛰어든다. 과거 폭력조직은 학연·지연을 연결고리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 특정지역을 근거삼아 활동하며 타 조직과 혈투를 벌였다.
그러나 방계 조직들은 지역근거 없이 전방위로 활동하며 이권을 위해 대립관계의 조직과도 연계하는가 하면 점조직 형태의 은밀한 연락체계를 통해 조직원들을 동원, 폭력을 행사한다.
그 대표적인 조직이 ‘연합 새마을파’다. 1970년대 서울을 무대로 악명을 날렸던 ‘범호남파’방계조직인 ‘연합 새마을파’는 ‘목포 새마을파’, ‘무안파’, ‘청계파’, ‘해제파’ 등 전남 지역 4개 조직의 폭력배 300여명이 모여 결성됐다. 이들은 의정부, 대전 등의 숙소에서 후배들을 합숙·관리하며 거대조직을 이끌고 호남을 벗어나 서울을 무대로 활동해왔다.
이권을 위해 ‘판문이파’, ‘쌍택이파’, ‘오비파’, ‘동아파’, ‘보성파’ 등과의 합세도 이뤄졌다.
‘조폭과 전쟁’ 철퇴 수괴급 출소 임박
와해조직 재건?…신흥구도 재편 전망
전남 고흥에서 상경한 ‘연합 고흥 식구파’도 합종연횡을 통해 세를 키웠다. ‘연합 고흥 식구파’는 2007년 7월 교도소에서 함께 수감돼있던 ‘고흥식구파’ 부두목 최모씨와 ‘OB파’ 두목 유모씨가 함께 연합해 서울에서 활동하다 소탕된 기존 폭력조직인 ‘고흥식구파’와 ‘상택이파’, ‘이글스파’ 등의 조직원들을 모아 만든 신흥 폭력조직이다.
이 조직은 리모델링업자로 가장, 호텔 등에 접근해 일부 공사만 진행한 후 부풀린 공사대금을 회수한다며 호텔을 점거하고 경영권을 빼앗는 등 117억원 상당을 강취하다 경찰에 일망타진됐다.
최근엔 6개 폭력조직 조직원들이 연합해 서울 강남 고급 빌라에 사설 카지노를 차려놓고 판돈 100억원대 도박판을 벌이다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이들은 ‘신흥동파’, ‘신양관광파’, ‘국제 PJ파’, ‘순천시민파’, ‘십계파’ 등 호남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는 6개 폭력조직 연합으로 2009년 12월부터 5개월 동안 서울 강남구 삼성동 빌라 등 5곳에 사설 도박장을 운영했다.
눈에 띄는 점은 1990∼2000년 ‘범죄와의 전쟁’ 당시 수감됐다가 속속 출소하고 있는 중간 보스급들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호남지역 ○○○○파 두목 B씨는 지난해 출소한 뒤 룸살롱을 처분하고 의료기 수입업체를 운영 중이다. 충청 ○○파 두목 C씨는 2008년 구속됐다가 풀려난 뒤 유통회사를 인수해 경영하고 있다.
서울 거대조직인 ○○○파 부두목 D씨는 2009년까지 수감생활을 하다가 출소, 광고회사를 차려 직접 운영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들이 운영자금을 모은 뒤 조직원들을 다시 규합해 와해된 조직을 재건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돌고 있다. 여기에 주요 조직 핵심수괴급들의 출소 시기가 다가오면서 신흥조직들을 중심으로 세력이 재편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 경우 더 많은 방계 조직이 생길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학연·지연 버리고
지역근거 없이 뭉쳐
경찰은 서울에서 조폭간 세력 다툼이 벌어질 조짐이 없다고 일축했다. 경찰 관계자는 “조폭 가운데 집중 관리 대상자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조직원간 연계 혹은 충돌 가능성이 있는 조직에 대해 이미 계보도와 소재지 등을 파악하고 있다”며 “폭력배들에 대한 범죄정보 수집을 강화하고 심층적인 기획수사로 폭력조직의 존립 기반 자체를 와해시키는 활동을 적극 전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