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 분석> 서울연합파 vs 지방파 ‘조폭전쟁’ 막전막후

텃새냐 철새냐…형님들 ‘나와바리’ 대혈투

[일요시사=김성수 기자] 서울 폭력조직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 이른바 ‘나와바리’(담당구역)를 지키기 위해 조직간 ‘기동타격대’를 결성, 활동 무대를 확장하거나 또 다른 지방의 다른 ‘파’와의 결합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범죄와의 전쟁’당시 수감됐다가 속속 출소하고 있는 중간 보스급들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 조직원들을 다시 규합해 와해된 조직을 재건할 조짐이다. 조직간 세력다툼이 언제, 어디서 발생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지방 폭력조직 조직원을 무차별 폭행한 서울지역 연합 조폭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최근 조직원을 때린 지방 조직폭력배를 집단으로 보복 폭행한 혐의(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상 집단 흉기 등 상해)로 서울 내 폭력조직 일원 고모씨 등 15명을 입건, 이중 4명을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고씨 등은 지난 6월4일 오후 7시30분께 서울 강동구 천호동의 한 웨딩홀에서 광주지역 한 폭력조직원 자녀의 돌잔치에 온 ‘전주 나이트파’ 조직원 홍모씨의 얼굴을 수차례 때려 기절시키고 몸을 밟아 다치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답십리파’, ‘이글스파’, ‘화양리식구파’ 등 서울에 기반을 둔 폭력조직들이 연합된 조직원들이다.

“시내 폭력조직간
회합·연계 시도”

‘답십리파’ 한 조직원은 지난해 10월 대구지역 폭력배의 결혼식에서 홍씨 등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 “전라도 애들이 서울에서 설친다”등의 지방 폭력조직을 낮춰보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폭행을 당한 조직원은 때를 기다리다 돌잔치에 홍씨가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다른 소속의 서울지역 조직원 16명을 끌어 모았고, 돌잔치에 찾아가 홍씨의 얼굴을 수차례 때려 실신시킨 뒤 발로 가슴과 팔 등을 짓밟는 등 집단으로 보복폭행을 가했다. 홍씨는 양팔 척골골절 등 전치 12주의 중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다음날 ‘전주나이트파’ 조직원들이 재차 보복하기 위해 대거 상경했다. 서울 연합 조폭 일당은 이들과 맞붙기 위해 특수 제작된 흉기 등 상해 도구를 지니고 단체로 차에 타고 있다가 시민의 신고로 경찰 검문에 걸려 해산했다.


경찰 관계자는 “지방 출신 조직폭력배들이 서울에 올라와 각종 이권에 개입하자 서울 토박이 폭력조직원들의 위기감이 높아졌다”며 “서울 지역 폭력배들이 대응하기 위해 연합세력을 구축한다는 사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서울 폭력조직들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 조직간 ‘기동타격대’를 결성, 활동 무대를 확장하거나 또 다른 지방의 다른 ‘파’와의 결합을 추진하고 있다. 과거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서로 ‘밥그릇’을 빼앗기도 모자랄 판에 쉽게 손을 잡는다는 것은 조폭계에선 보기 드문 현상이다.

경찰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서울 시내 폭력조직이 다른 폭력조직과 회합 또는 연계를 시도하고 있다”며 “최근 폭력조직간 경계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희미해지고 특정 이권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필요시 폭력조직간 소규모로 협력·연계하는 등 이합집산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서울 조폭들이 ‘이합집산’하는 이유가 뭘까. 한마디로 이른바 ‘나와바리’(담당구역)를 지키기 위해서다.

지방세력 속속 상경…‘돈 되는’ 각종 이권 개입
위기 느낀 서울 토박이 조직들 ‘연합전선’ 구축

‘형님’들도 불경기의 한파는 피할 수 없었다. 지하세계는 ‘성매매특별법’ 시행으로 유흥업소가 철퇴를 맞은 이후 밥그릇인 오락실마저 ‘바다이야기’후폭풍을 맞으면서 자금줄이 막힌 상태다. 게다가 러시아 ‘야쿠트파’, 일본 ‘야마구치구미’, 중국 ‘삼진회’, 태국 ‘차이파’, 방글라데시 ‘우슈파’ 등 국제 범죄조직들이 판을 치고 있다.

그만큼 토종(?) 조폭들의 ‘나와바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때문일까. 조폭들은 기존의 활동무대였던 유흥업, 사행성 게임장 등에 국한되지 않고 건설업, 유통업, 용역업, 입찰, 채권추심 등 다양한 분야로 합법을 가장해 영역을 넓히고 있다.

문제는 70, 80년대보다 덜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소외된 지방 조폭들이 이권 개입 여지가 적은 지역을 벗어나 ‘먹고 살기’ 위해 속속 상경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 조폭들이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활동무대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상황에 따라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서울 강남을 근거지로 한 ○○파 행동대장 A씨는 “당국의 단속과 규제로 먹고 살 일이 막막하다보니 이쪽 세계에서 금기시 돼 왔던 강도, 보험사기 등 자잘한 범행에도 손을 대고 있다”며 “이 와중에 지방 조폭들까지 줄줄이 서울로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어 구역다툼을 자제하고 밥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항상 긴장하고 있다. 조만간 서울 조직과 지방 조직간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귀띔했다.

다른 조직 한 일원은 “지방 조직들은 서울로 진출할 때 단독으로 오지 않고 지역 군소 조직들을 통합해 몸집을 키운 뒤 상경한다”며 “지역 연고가 아닌 전국 각지에서 조직원을 모으기도 하는데, 두목급들이 자금력만 있으면 이곳저곳에서 돈 냄새를 맡고 벌떼처럼 모여든다”고 전했다.

‘지방에서 서울로’
활동무대 대이동

서울 조직의 위축은 자료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경찰청 ‘전국 조직폭력배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서울에서 활동 중인 폭력조직은 모두 22개, 조직원은 총 474명에 이른다. 2009년(조직 23개·조직원 507명)에 비해 각각 1개, 33명 감소했다. 경기 지역도 30개 조직 924명에서 25개 조직 865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같은 기간 주요 지방 도시들의 폭력조직은 ▲부산 23개 385명→22개 396명 ▲광주 8개 307명→8개 332명 ▲대전 9개 124명→9개 136명 ▲전북 15개 486명→16개 512명 ▲전남 6개 185명→8개 214명 ▲경남 16개 325명→17개 348명 등으로 세를 늘린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토박이 조직은 ‘구로동파’, ‘영등포중앙파’, ‘진성파’, ‘이글스파’, ‘답십리파’, ‘화양리식구파’, ‘남부동파’, ‘역전식구파’, ‘동대문파’, ‘상계파’, ‘돈암동파’, ‘길동파’, ‘장안동파’, ‘청량리역전파’, ‘영택이파’ 등이다.

반면 지방에서 상경해 뿌리내린 조직은 국내 ‘3대 패밀리’라 불리는 ‘양은이파’, ‘서방파’, ‘OB파’를 비롯해 전남 영광출신 폭력배들이 모여 종로에 자리 잡은 ‘영광파’, 호남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다가 상경한 ‘연합 새마을파’ 등이다.

이들 조직의 특징은 기존 조폭과는 다른 형태인 ‘기동타격대식’이란 점이다. 돈 되는 일이면 무작정 뛰어든다. 과거 폭력조직은 학연·지연을 연결고리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 특정지역을 근거삼아 활동하며 타 조직과 혈투를 벌였다.

그러나 방계 조직들은 지역근거 없이 전방위로 활동하며 이권을 위해 대립관계의 조직과도 연계하는가 하면 점조직 형태의 은밀한 연락체계를 통해 조직원들을 동원, 폭력을 행사한다.

그 대표적인 조직이 ‘연합 새마을파’다. 1970년대 서울을 무대로 악명을 날렸던 ‘범호남파’방계조직인 ‘연합 새마을파’는  ‘목포 새마을파’, ‘무안파’, ‘청계파’, ‘해제파’ 등 전남 지역 4개 조직의 폭력배 300여명이 모여 결성됐다. 이들은 의정부, 대전 등의 숙소에서 후배들을 합숙·관리하며 거대조직을 이끌고 호남을 벗어나 서울을 무대로 활동해왔다.


이권을 위해 ‘판문이파’, ‘쌍택이파’, ‘오비파’, ‘동아파’, ‘보성파’ 등과의 합세도 이뤄졌다.

‘조폭과 전쟁’ 철퇴 수괴급 출소 임박
와해조직 재건?…신흥구도 재편 전망

전남 고흥에서 상경한 ‘연합 고흥 식구파’도 합종연횡을 통해 세를 키웠다. ‘연합 고흥 식구파’는 2007년 7월 교도소에서 함께 수감돼있던 ‘고흥식구파’ 부두목 최모씨와 ‘OB파’ 두목 유모씨가 함께 연합해 서울에서 활동하다 소탕된 기존 폭력조직인 ‘고흥식구파’와 ‘상택이파’, ‘이글스파’ 등의 조직원들을 모아 만든 신흥 폭력조직이다.

이 조직은 리모델링업자로 가장, 호텔 등에 접근해 일부 공사만 진행한 후 부풀린 공사대금을 회수한다며 호텔을 점거하고 경영권을 빼앗는 등 117억원 상당을 강취하다 경찰에 일망타진됐다.

최근엔 6개 폭력조직 조직원들이 연합해 서울 강남 고급 빌라에 사설 카지노를 차려놓고 판돈 100억원대 도박판을 벌이다 경찰에 검거되기도 했다. 이들은 ‘신흥동파’, ‘신양관광파’, ‘국제 PJ파’, ‘순천시민파’, ‘십계파’ 등 호남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는 6개 폭력조직 연합으로 2009년 12월부터 5개월 동안 서울 강남구 삼성동 빌라 등 5곳에 사설 도박장을 운영했다.

눈에 띄는 점은 1990∼2000년 ‘범죄와의 전쟁’ 당시 수감됐다가 속속 출소하고 있는 중간 보스급들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호남지역 ○○○○파 두목 B씨는 지난해 출소한 뒤 룸살롱을 처분하고 의료기 수입업체를 운영 중이다. 충청 ○○파 두목 C씨는 2008년 구속됐다가 풀려난 뒤 유통회사를 인수해 경영하고 있다.


서울 거대조직인 ○○○파 부두목 D씨는 2009년까지 수감생활을 하다가 출소, 광고회사를 차려 직접 운영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들이 운영자금을 모은 뒤 조직원들을 다시 규합해 와해된 조직을 재건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돌고 있다. 여기에 주요 조직 핵심수괴급들의 출소 시기가 다가오면서 신흥조직들을 중심으로 세력이 재편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 경우 더 많은 방계 조직이 생길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학연·지연 버리고
지역근거 없이 뭉쳐

경찰은 서울에서 조폭간 세력 다툼이 벌어질 조짐이 없다고 일축했다. 경찰 관계자는 “조폭 가운데 집중 관리 대상자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조직원간 연계 혹은 충돌 가능성이 있는 조직에 대해 이미 계보도와 소재지 등을 파악하고 있다”며 “폭력배들에 대한 범죄정보 수집을 강화하고 심층적인 기획수사로 폭력조직의 존립 기반 자체를 와해시키는 활동을 적극 전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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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단독] 엔진 멈춘 3억 마이바흐 미스터리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서울 소재 H건설사 대표가 타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최고급 사양인 마이바흐가 구매한 지 3년 만에 엔진 고장으로 멈췄다. H사 대표 박모씨는 2022년 말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와 한성자동차를 상대로 수리비 및 대차료 지급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상 수리해야 한다고 했던 1심 재판부는 급기야 ‘벤츠의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2019년식 ‘마이바흐 S560 4MATIC’은 2022년 9월13일 오전 11시, 박씨의 운전기사가 서울 용산 한강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에 엔진 경고등이 켜지면서 차체 진동과 함께 엔진이 멈췄다. 곧바로 차량을 한성자동차 성동서비스센터에 입고했으나 진단은 충격적이었다. 침수차 의심 수리 나 몰라라 “엔진 연소실에 물이 들어가 부품이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 침수 차로 의심된다”며 무상 수리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씨와 자동차 감정사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날은 폭우나 침수와 무관한 날씨였으며 정상 주행 도중 발생한 차량 고장이었기 때문이다. 원고인 H사는 “벤츠코리아가 제공하는 ‘통합서비스패키지(ISP)’ 보증에 따라 3년 또는 10만km 이내의 결함은 무상 수리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1심 재판부(서울중앙지법 민사47단독, 2024년 7월23일)는 “침수나 연료 혼유 등 외부 요인으로 단정할 증거가 부족하다. 한성자동차는 ISP 약정에 따라 엔진 결함을 무상 수리해야 한다”며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면서 벤츠의 수입사인 한성자동차에 대해 월 400만원의 대차료 배상을 명령했다. 법원은 독립 감정인 강대공씨를 지정해 정밀 감정을 실시했다. 강씨의 감정서에는 “침수 차량에서 보이는 오염 흔적이 없다. 냉각수(부동액) 누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며 “엔진 내부 수분은 외부 요인이나 정비 과정에서 유입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또 추가 사실조회 회신에서도 “혼유(연료 내 수분 혼입) 여부는 감정 범위를 벗어나며, 침수가 아닌 요인으로 인한 수분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심(서울중앙지법 제8-3민사부)에서 피고 측은 반격했다. 벤츠코리아의 법률대리인 김성진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8월27일 제출한 준비서면에서 “ISP는 차량 ‘결함’이 발견된 경우에만 적용된다.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명백히 예외 사항이며 제조사 귀책이 없는 이상 무상 수리 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성자동차 측(법무법인 세종)도 항소이유서에서 “ISP는 제조상의 하자에 국한된 품질보증 계약이다. 이번 사안은 ‘우발적 손상’으로 보증 대상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8-3부는 지난 9월26일,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박씨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시했다. 2심 판결은 “외부 요인, 제조 결함이 아니”라며 1심을 전면 뒤집은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외부 수분 유입으로 인한 손상은 차량 제조사 귀책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ISP는 ‘제조 결함’에 한정된 보증이다. 한성자동차의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밝혔다. 즉, 법원은 이 사건을 ‘차체·부품 결함’이 아닌 ‘사용 중 발생한 외부 요인’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주행 중 경고등 켜지고 진동 후 엔진 스톱 감정 결과 “누수 없음, 외부 수분 가능성” 결국 박씨는 3년에 걸친 법정 다툼 끝에 패소했다. 따라서, 한성자동차는 더 이상 수리 의무를 부담하지 않게 됐으며, H사의 항소도 기각됐다.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은 ‘수분 유입의 원인’이 제조 결함이냐, 외부 요인이냐였다. 법원은 “차체·부품의 결함으로 인한 냉각수 누수가 없었고, 외부 요인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 결국, 제조물 책임(PL법)에 따른 보증 범위가 아닌 사용·관리상의 문제로 결론이 난 셈이다. 이번 판결은 ‘결함’의 해석 범위를 좁혀 정의한 사례다. 즉, ‘사용자 과실이 아닌 상황’이라도 차체·부품 자체의 결함이 입증되지 않으면 보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소비자 입증 책임만 더 무거워졌다”며 “ISP나 제조사 보증이 소비자 보호장치로 설계됐지만, 현실적으로 ‘결함 입증’의 벽이 너무 높다. 이번 판결은 소비자가 과실이 없더라도 제조사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을 “제조물 책임법과 민법상 품질보증의 경계선을 명확히 한 판례”로 평가하고 있다. 박씨의 마이바흐는 결국 엔진을 교체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방치됐다. 이번 사건은 ‘명차’의 기술력보다 보증 체계의 경계선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케 한 사건이다. 소비자는 결함을 주장할 때 ‘입증의 문턱’을, 제조사는 ‘보증의 한계’를 확인했다. 독일 명차 대명사인 벤츠의 전기차는 해마다 폭발하는 배터리 화재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전기차뿐만 아닌 내연기관 모델 중에서도 최상위급인 마이바흐조차 원인 모를 엔진 고장으로 멈췄지만, 고객과 3년간 법정 다툼을 이어간 회사로 남겨졌다. 1심선 인정 “무상 수리” 벤츠는 고객과 진행한 재판에선 승소했지만, 우리나라 정부의 제재 착수 대상이 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전기차에 저가 배터리를 쓰고도 고가 배터리를 쓴 것처럼 허위 광고한 혐의를 받는 벤츠코리아에 대한 제재에 착수했다. 공정위의 최종 판단은 벤츠코리아와 벤츠 전기차 이용자 간 진행 중인 법적 분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해당 저가 배터리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 주차장 화재가 시작된 전기차에도 쓰였다.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 8월12일, 벤츠코리아를 표시광고법·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제재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은 심사보고서(검찰 공소장에 해당)를 회사 쪽에 발송했다. 벤츠코리아는 자사의 모든 전기차에 중국 1위 배터리 업체인 시에이티엘(CATL)의 배터리가 장착됐다며 허위 사실을 소비자에게 알린 혐의를 받는다. 제휴사 딜러를 상대로 소비자에게 이런 허위 사실을 설명하라고 교육하는 등 소비자를 부당하게 속여 유인한 혐의도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EQE 차주들은 벤츠 본사, 벤츠코리아, 공식 딜러사 한성자동차 등 판매사 7곳, 벤츠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리스사 2곳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8월1일 인천 청라국제도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화재 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충전 중이던 벤츠 전기차 한 대에서 불이 나 인근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그을러 38억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주민 23명은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화재로 아파트 14개 동 1581가구의 수돗물 공급이 끊기고, 5개동 480가구가 단전돼 승강기 운행이 중단되는 등 입주민 불편이 극심했다. 한때 주민 수백명이 피신하는 등 ‘도심 대형 전기차 화재’의 대표 사례로 기록됐다. 하지만 경찰은 장기간의 감식 끝에 “정확한 화재 원인을 확인할 수 없다”며 ‘원인 불명’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해당 벤츠 전기차의 배터리는 중국 CATL이 제조한 셀을 벤츠가 직접 조립해 만든 배터리팩으로 확인됐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 중인 벤츠 전기차 대부분(EQE, EQS 등)은 중국 CATL 또는 파라시스(Parasis)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다. 2심에선 “책임 없다” EQA 등 극히 일부 모델에만 LG에너지솔루션, SK온 배터리가 사용된다. 이에 공정위는 화재 발생 이후 벤츠코리아에 대한 직권조사를 시행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9월과 지난 1월에 각각 벤츠코리아 본사와 제휴 딜러사에 대한 현장 조사를 벌여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냈다. 공정위는 벤츠코리아 추가 의견서를 받고, 위원회 회의를 열어 최종 제재 여부와 수위를 확정할 예정이다. 표시광고법 위반 시 관련 매출액 최대 2%, 공정거래법 위반 시 최대 4% 내에서 과징금이 산정, 제재 강도가 낮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공정위 제재 착수에도 벤츠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벤츠코리아는 “심사보고서의 결론은 당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며 “추후 심사보고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한 후, 절차에 따라 의견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공정위 판단을 존중하지만, 회사의 법률적 판단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며 “제기된 혐의는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해 진통이 예상된다. 벤츠 전기차는 지난해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대형 화재를 낸 데 이어, 최근 수원시에서도 유사한 사고를 일으켜 배터리 안정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지난 10월5일 경찰과 소방에 따르면, 이날 오전 8시4분경 경기 수원시 권선구의 1800세대 규모 아파트 지하 1층 주차장에 서 있던 벤츠 전기차에 불이 났다. 이 불로 관리사무소 50대 직원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주민 수십여명이 명절 전날 오전 한때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벤츠 전기차를 포함해 인근 차량 3대가 불에 탔고, 주차장 내부가 그을려 한동안 입주민 출입이 통제됐다. 소방당국은 ‘지하주차장 차량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 펌프차 등 장비 10여대와 소방관 50여명을 투입해 진화 작업을 벌였다. 화재 발생 20여분 만에 연소 확대를 저지했고, 오전 8시43분경 초진에 성공했다. 이후 잔불 정리와 차량 냉각 작업을 거쳐 오전 10시16분에 완진시켰다. 소방 관계자는 “119 신고가 신속했고 출동 거리가 짧아 초기 대응이 빠르게 이뤄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법원 ‘결함 아님’ 판결 ‘제재 대상’ 벤츠 편든 재판부 소방대원들은 불이 난 차량을 지상으로 끌어올려 열기를 식히는 등 2차 발화를 막기 위한 안전조치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에 따르면, 화재 당시 차량은 충전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배터리 결함에 의한 발화인지, 전선 또는 충전기 접속부 문제 등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함께 합동감식을 실시해 배터리팩 손상 여부 및 충전 설비 결함을 중심으로 원인을 조사할 예정이다. 화재 차량은 2023년식 EQA-250 모델로 SK온 배터리가 장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내 전기차 등록 대수는 지난 9월 기준, 60만대를 돌파했지만 화재 사고 관련 안전 관리는 미흡한 상태다. 국토교통부는 청라 화재 이후 지하주차장 내 전기차 충전소 안전기준 강화안을 추진 중이지만, 구체적인 방재 설비 기준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별 안전관리 강화 조례도 제각각이다. 지속되는 품질 문제에 전기차 관련 허위광고 혐의까지 겹치면서 벤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벤츠코리아 설립 이후 최대 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여기에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 노조의 파업으로 서비스 품질 저하 문제가 불거지며 브랜드 이미지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연일 터진 사고 이전까지 벤츠는 국내 수입 전기차 시장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QA·EQB에 이어 전기 세단 EQE·EQS까지 라인업을 확대하며 시장을 선도했다. 2023년에는 전기차 판매량 9282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8월 벤츠 EQE 전기차 화재 사고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화재 전 월평균 400대 수준이던 판매량은 사고 이후 절반 이하로 급감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벤츠 전기차 판매량은 768대로, 전년 동기(2764대) 대비 72.2% 줄었다. 사고 이후 월 판매량은 100~200대에 그치며 반등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벤츠의 국내 최대 딜러사인 한성자동차의 노조 파업도 새로운 악재다. 수입차 업계는 딜러사와 벤츠코리아가 별개 법인임에도 불구하고 노조 파업으로 소비자 피해가 커지고 있어 결국 벤츠의 이미지 실추로 이어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추락하는 럭셔리카 한성자동차 노조는 지난 7월 31일부터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2023년 노조 설립 이후 진행된 3년 연속 파업으로, 사실상 매년 파업을 이어오고 있다. 노조는 구조조정과 차량 할인에 영업사원 인센티브를 활용하는 ‘선수당 할인’ 제도 등에 반발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부 정비 인력까지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서비스 지연도 발생하고 있다. 실제 차량 정비 예약이 당일 일방적으로 취소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소비자 불만은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벤츠의 사후 관리 부실은 결국 한성자동차 탓”이라는 비판까지 나온다. <smk1@ilyosisa.co.kr>